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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교회 세습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325호 이슈 톺아보기]
[325호] 2017년 11월 28일 (화) 16:35:16 최종원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 goscon@goscon.co.kr
   
▲ 효율적인 관리와 통제가 이뤄지는 원형감옥 '파놉티콘'의 구조는 오늘날 교회당 내부 구조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사진: 위키미디어코먼스)

한국교회의 ‘예외적 정상’
여러 해 동안 명확치 않게 어중간하게 행동하던 목사 ‘하나’가 결국 일을 내었다. 기독교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크게 이슈가 되는 분위기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냉소도 불편하지만, 솔직히 지금 진행되는 대응들이 얼마나 전향적인 결과를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명성교회 세습이 예외적 사건인가? 아니면 한국교회 정서 속에서 늘 그래왔던 일반적 사건인가? 물론 등록 교인 10만을 넘는다는 그 교회의 규모를 생각할 때 충격의 강도가 큰 것은 이해하지만, 결코 예외적인 사건은 아니다. 불편하지만, 이 세습은 한국교회의 ‘예외적 정상’(exceptional normal)을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예외적 정상’은 에도아르도 그렌디(Edoardo Grendi)가 포스트모던 시각으로 역사학을 이해하는 개념으로 상정한 것이다. 매우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한 사건이, 실제로는 당대의 보편적 정서와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사건이라는 의미다. 예를 들자면,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평범한 택시기사 김사복이 목숨을 걸고 광주행을 택한 결정은 분명 예외적인, 따라서 비범한 행동으로 평가될 수 있다. 누구나 그런 행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김사복의 행동은 적어도 사회 정의에 대한 그 시대 보편적인 사람들의 갈망을 대표하는 정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위는 ‘예외적’이지만 지극히 ‘정상’인 것이다.

이번 명성교회 세습 역시 예외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실은 한국교회의 구조 속에서는 일반적으로 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사건이 예외적이라면 해결책 역시 명확하다. 진짜 문제는 김삼환 목사의 아들이 아닌 제3자가 담임으로 온다고 한들 교회가 안고 있는 구조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물타기 하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명성교회 세습은 그것대로 비판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겠지만, 그와 더불어 이제는 좀 더 근원적인 담론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야 한다.

자본주의 효율성에 최적화된 ‘근대 교회’
교회는 분명 세속을 초월하는 조직이지만, 결코 세속을 등지고 존재할 수는 없다. 제도로서의 초대 교회·중세 교회·종교개혁기 교회·근현대 교회는 고대 로마와 지중해 세계, 중세 유럽, 근세 유럽과 현대 세계라는 토대 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 시대의 산물로서 시대에 부합하는 역할을 했다. 결코 초대 교회와 오늘의 교회가 같을 수 없다. 같아서도 안 된다. 교회는 정신적 영적으로는 지향하는 이상이 있지만, 제도로 구현되는 것은 오롯이 그 시대의 콘텍스트(context) 내에서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조, 좀 더 세부적으로는 ‘근대 교회’ 자체에 대해 문제 제기 해야 한다. 교회 규모가 어떠하든 오늘의 교회는 근대 체제의 산물이다. 대형 교회는 근대 자본주의의 종교적 결정체이다. 근대의 자본주의 등장과 발달, 한계와 함께 근대 교회도 생성·발전하고 한계를 맞고 있다. 근대 사회를 자본과 진보에 대한 무한대의 욕망으로 규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근대의 모든 관심은 이성과 합리를 활용한 효율의 극대화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이 가장 효율적인 죄수 관리를 위해 원형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을 설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셀 푸코가 근대성의 상징으로 상정한 군대·학교·병원의 구조는 효율성을 위한 규율과 통제를 근간으로 한다. 근대 교회는 바로 이러한 군대·학교·병원의 기능을 모두 갖고 있는, 근대에 최적화된 조직이다. 따라서 교회는 가장 효율적인 동시에 자본 집약을 통해 확장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물론 이러한 효율성이 기독교 내부의 관점에서 위대한 선교의 시대를 열었다는 결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근대 교회의 구조가 효율성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갖는 함의를 간파할 필요가 있다. 담임 목회자를 정점으로 하는 뚜렷한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일련의 세부적인 소그룹이 구성되어 효율적으로 교회의 철학과 지향이 공유되는 것이다. 마치 모든 죄수를 간수 한 사람이 내려다볼 수 있는 파놉티콘의 구조처럼, 설교단에 서면 모든 청중이 한눈에 보이게 설계된 근대 교회의 내부 구조 역시 담임 목회자의 설교의 효율적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개신교회의 설교단은 청중들이 설교자에게만 집중하도록 만든 구조다. (파놉티콘과 오늘날 교회당 내부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이른바 대형 교회가 만들어질 때 담임 목회자의 설교와 (카리스마) 리더십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담임 목회자를 정점으로 하는 개교회 이데올로기가 형성되기에는 충분한 조건이 된다. 이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한 ‘우리 교회’를 반대하는 일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효율 중심의 수직적인 구조는 다원화되고 다양화된 수평적 구조를 지향하는 탈근대와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형 교회 목회자들에게 이 구조를 뛰어넘는 선의를 발휘해 주기를 기대하며 그 기대를 저버리면 초대 교회의 정신, 종교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렸다거나 물질과 탐욕에 굴복했다는 등 정서적으로 호소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근대 교회는 인간의 욕망을 무한대로 긍정하는 효율적인 자본주의체제 위에서 나고 자랐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책임’이 필수인 탈근대의 종교
조금은 더 냉정해져야 한다. 자본은 눈물이 없다. 결코 스스로 절제하거나 선의를 베풀지 않는다. 집요하게 그 체제를 파고들어 공격하고 제어해야 할,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다. 오늘의 세상은 자본주의를 길들이기 위해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종교로 삼고 있는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경영학에서는 기업 및 이해관계자의 이윤 추구를 기업의 최고 덕목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이제 그에 못지않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강조된다.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는 기업은 불매운동 등으로 한 순간에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선택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필수가 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사회적 책임보다는 소위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한다’는 당위로 교회의 반사회적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사실상 이 레토릭으로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슬그머니 덮어 버린다.

탈근대의 자본주의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면, 탈근대의 종교 역시 사회적 책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대형 교회 세습은 교회가 담당할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은 외면하고 교회 내부의 시선에서만 교회를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다. 그럴수록 교회와 교회가 속한 사회는 분리된다. 교회의 사명인 선교를 위해 가장 효율적일 것 같았던 방식이 어느 순간 가장 획일적이면서 다양성을 거부하는 퇴행으로 드러난다.

구조적으로 볼 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당면한 사명의 효율성을 위해 교회 안의 개인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object)로 전락하기 매우 쉽다. 최고의 기능성과 규칙성, 효율성을 추구하는 파놉티콘에서 주체가 사라지는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잊혀졌던 개인의 독창성과 다양성을 주체로 등장시킨 포스트모던이 등장했다. 프랑스의 퐁피두센터 같이 건물의 안과 밖을 뒤집어 놓은 포스트모던 건축은 더 이상 파놉티콘과 같은 효율과 구조를 추구하지 않는다. 각각의 서로 다른 개체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쯤에서 다시 정리해보자. 근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탈근대의 시각으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근대의 역사 읽기 방식은 사회과학적 접근이다. 사회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전체의 의사를 왜곡하지 않을 일정한 규모의 모집단이 존재해야 했고, 오차 범위를 설정해야 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역사 읽기의 대표적 시도라고 할 수 있는 미시사(microhistory)의 접근은 한 가지 사건을 다양한 층위에서 두텁게 읽고(thick description), 작은 데서부터 다른 시각으로 읽어나가는 방식이다. 이번 세습 사건이 한국교회의 예외적 정상이라고 한다면 분노와는 별개로 다양한 관점으로 읽어 촘촘하게 엮어나가는 섬세함이 필요하다.

제도 교회의 현실에 무기력한 신학
그렇다면 명성교회 세습 문제는 어떤 층위에서 짚어봐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앞서 언급한 효율과 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제도의 궁극적인 현상이라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 다른 층위로는, 제도 교회의 문제나 일탈을 다루는 과정에서 신학의 효용과 역할을 고민하고 신학과 교회의 관계를 좀 아프게 점검해야 한다. 명성교회의 문제가 개교회의 일탈을 넘어 근대 교회가 낳은 상징적인 문제의 하나라면 신학적·목회적으로 치밀하게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 정치 구조를 볼 때, 이 문제가 신학계에서 제대로 논의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이 문제는 신학이나 목회를 넘어서는 사회적 문제로 타 학문과의 학제적인 접근이 필요하지만, 신학과 세속 학문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는지 모호하다는 점에서 근본적이 회의가 있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때 여전히 신학적 분석이나 고찰이 도덕적·추상적·당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교회 세습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음에도, 이 문제가 담고 있을 사회적·정치적·경제적·역사적 층위의 고민이 축적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자아낸다.

역설적이지만, 오늘날처럼 신진 신학자들의 최신 신학 담론들이 신학교와 아카데미들에서 쏟아진 적도 없다. 하다못해 톰 라이트나 바울의 새 관점 한 자락 정도는 뽑아낼 수 있어야 대화에 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이것이 제도 교회의 일탈 현상에 어떠한 의미를 주는가? 신학과 세속 학문 간의 단절로 인해 아무리 높은 차원의 최신 신학 흐름을 소개한다 해도 세속의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 제도 교회를 다루는 데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시선을 잠시 종교개혁기로 돌려 보자. 만약 종교개혁이 신학적 사건이라면 왜 종교개혁이 당대 신학의 중심인 파리 대학이나 옥스퍼드 대학이 아닌 변방의 신생 대학 비텐베르크에서 일어났는지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앞의 주류 대학들이 종교개혁에서 가장 반대의 입장에 섰다는 사실은 또 무엇을 말해 주는가? 종교개혁을 신학적 사건이 아닌 사회적·정치적 사건으로 해석할 때 전모를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당대의 주류 신학계는 스콜라학의 전통에 집착하여 제도 교회에 대한 세상의 요구에 정확하게 반응할 수 없었다. 반대로, 거의 예외 없이 종교개혁가들은 스콜라적 전통이 아닌 인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종교개혁을 이끈 힘은 스콜라학이 아닌 인문주의에서 나왔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해가 교회와 구원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오늘의 교회 현실과 신학 사이의 거리는 종교개혁 당시만큼이나 커진 듯이 보인다. 신학이 추구하는 이상은 높은데, 제도 교회의 현실과는 접점을 찾지 못한다. 그러니 허공에 동동거리면서 메아리칠 뿐 무력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냉정히 보자면 이는 여전히 한국 개신교 신학이 스콜라학의 전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의 세계에서 토론되는 담론과 일반 성도들이 공유하는 고민의 간극이 오늘처럼 커진 적도 없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물결이 휩쓸고 간 후 구교와 신교는 자체적인 신학적 토대를 마련해야 하는 요구와 동시에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세속 지성의 도전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여러 형태의 신앙고백서들이 17세기에 등장했지만, 영국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이 17세기의 신학이 지성사의 흐름에는 어떠한 유의미한 기여도 하지 못했다고 평가절하했다. 이 시기의 개신교 신학을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라고 부른다. 종교개혁이 극복하고자 했던 사변적인 스콜라주의가 한 세기 후 개신교 신학에 뿌리 내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지성과 분리된 신학, 이것이 오늘의 현주소가 아닌가?

근대의 획일주의와 효율성, 자본의 욕망이 빚어낸 것이 대형 교회이고 세습이 그 속에서 파생된 문제라면, 근대의 획일성과 집단성이 야기한 교회 내의 다름에 대한 차별, 타자에 대한 혐오 등은 같은 맥락에서 교회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얼마 전 동성애자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이단성 시비를 겪은 임보라 목사에게 시비를 건 세력에게도 동일한 비판이 제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은 아쉽게도 태평양 너머 여기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탈근대 사회 속에서 교회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에 천착하기보다는, 현상의 발생 때마다 즉자적인 고민과 대응을 반복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 아쉽기 그지없다. 만약 김하나 목사가 지금이라도 그 자리에 앉기를 거부한다면 한국교회는 진일보하는 것인가? 비판과 분노는 조금 사그라들지 모르나, 그렇다 한들 여전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신학은 교회를 넘어 우리 사회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1987년대 민주화체제 이후에는, 그 이전 시대에 사회 속에서 작동하던 신학적 역동성이 사라지고 스콜라주의에 경도되었다. 다시 말해 급속도로 신학은 교회를 위한 교회 내 학문으로 좁아 들었다. 이러한 협소함이 세상과 소통하고 교회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을 막는 여러 방어기제들을 생산했다. 이제 신학의 지향은 교회를 넘어 세상을 향해야 한다. 양차대전 속에서 반동적인 흐름을 유지하며 세상에 지체되었던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갔을 때 ‘신스콜라주의’를 깨트렸다는 평가를 받았듯이, 이제 한국의 개신교도 신스콜라주의의 흐름을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신학은 교회 문제에 어떠한 유의미한 기여를 하지 못했다고 후대에 평가받을 것이다.

‘악의 평범성’과 ‘주체성의 상실’
명성교회 세습 사건에서 또 하나 생각할 층위는 앞선 논의의 결과로 발생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잠시 생각해 보자. 왜 대부분의 명성교회 교인들은 세습을 받아들였을까? 비판 의식이 있는 교인 비율이 교회 밖 일반 대중들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낮았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세습에 찬성표를 던진 많은 성도들도 한국 사회의 문제에서는 개혁적이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했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게 되는 불가피한 ‘준거의 이중성’ 때문일 수 있다. 즉, 사회 속에서 사회적인 이슈에 반응하는 기준과, 교회 내 이슈에 대해 반응하는 기준이 이중적이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근대 교회가 행해온 설교를 통한 교육과 훈육의 결과일 수 있다. 매우 조심스러운 비유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부역했던 많은 독일 관료들은 더 사악한 마음을 가진 악인들이 아니었다. 그저 독일인으로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충실한 관료였다. 독일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에 대해 인식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악을 행한 것을 보았다. 결국 의식이 깨어 있어 저항하지 못하면 악은 너무나도 평범한 모습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영화 <더 리더>로 잘 알려진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유대인 학살에 부역했던 독일 여성 한나 역시 그러한 인물의 전형을 보여준다.

교회는 그런 점에서 사람들을 제도 속에 길들여지게 할 수 있는 위험을 원천적으로 안고 있다. 특히, 목회자의 설교에 모든 것이 집중되는 ‘근대’ 교회의 제도는 이를 가중시킨다. 본래 종교개혁기의 개신교는 ‘책의 종교’라고 불렸다. 라틴어 성서에서 모국어 성서로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신앙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오늘의 개신교는 스스로 주체적으로 읽는 종교가 아니라 ‘듣는 종교’에 머물고 있다. 아쉽게도 대형 교회의 성도들은 이러한 습관적인 듣기에 더 없이 최적화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은 교회 내 다수의 대중이 동일한 가치를 공유한다면 그것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확대·강화해 나가기에 내부의 집단성은 외부의 비판적인 시선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다시 《책 읽어주는 남자》로 돌아가 보자. 실은 한나는 문맹이었다. 거두절미 하고 그녀의 인생은 누군가가 읽어주는 책을 듣다가, 스스로 읽는 법을 깨치는 순간 극적으로 바뀌었다. 스스로 비판적으로 성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결국 주체의 상실을 의미한다. 한국 대형 교회 교인들의 성찰 수준이 일반 대중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성경’과 ‘사회’를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명성교회 사건은 효율과 자본에 기반한 근대 교회 목회자의 욕망의 발편과, 그러한 현상에 대해 신학적 대답을 하지 못하는 (혹은 하지 않는) 신학적 무력함과, 스스로 신앙적 주체성을 가지고 이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게 길들여져 있는 성도들이 빚어낸, ‘예외적 정상’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적어도 사람들의 뇌리 속에 종교개혁 500주년 하면 두고두고 남아 있을 상징적 사건이다. 여러 해 전 칼뱅 탄생 500주년에 강남 어딘가에 ‘칼빈로’를 만들자던 제안만이 또렷하게 기억되듯이 말이다.

현실의 교회, 인간의 죄와 탐욕, 그럼에도 지향하는 초월이나 구원에 대한 논의는 어쩌면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인문학적인 고찰일 수 있다. 어떤 신학책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을 때 죄와 구원의 문제가 밀도 있게 와 닿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인문학자의 오만일까. 이제라도 긴 호흡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차근차근 다시 읽고 공부를 시작해야 할 때다. 뜬금없게 들리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문제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 ‘새 관점’을 가져다줄지도 모를 일이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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