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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청지기’로 성육신한 예수
[325호 올곧게 읽는 성경]
[325호] 2017년 11월 28일 (화) 16:51:20 정재훈 용인 덕성교회 전도사 goscon@goscon.co.kr

불의한 청지기와 포도원지기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눅 16:1-5)

탕자를 성육신한 예수로 보아야 한다는 글을 쓴 지 1년이 흘렀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불의한 청지기’를 쓰려던 계획을 이제 실행에 옮긴다. 하나님이 필자를 천국으로 부르시기 전에 생의 단 한 편의 설교를 하라고 허락하신다면 그 제목은 이렇다. “탕자와 불의한 청지기로 성육신한 예수, 삭개오를 만나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σκάπτειν οὐκ ἰσχύω, 눅 16:3)

이 문장의 번역을 힘이 없어서 땅을 파지 못한다고 번역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누가복음 13장의 비유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임을 알게 된다. 공생애가 끝나고 예수가 십자가에 오르는 일만 남은 것을 뜻한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 13:6-9)

무화과나무 열매를 얻고자 땅을 파는 것(눅 13:8)과 불의한 청지기의 땅을 파는 것은 누가복음에서 상호 울림이다. 13장의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포도원지기는 자기가 열심히 땅을 파겠다고 약속한다. 16장에서 청지기의 상황은 13장의 연속 선상이다. 둘은 동일인이다.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ἐπαιτεῖν-구걸하다, αἰσχύνομαι, 눅 16:3)

13장의 포도원 청지기는 만일 자기가 성실히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을 때는 “찍어버리라(주 뜻대로)”고 말했다. 이 말은 사실 나무가 베일 것을 조건부로 그만큼 최선을 다해 열매를 내도록 땅을 파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채무자가 ‘다음엔 돈을 꼭 갚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부끄럽지만 구걸이라도 해야 했다. 그게 포도원 청지기가 분노한 주인으로부터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미 13장에서 받은 유예기간이 끝나 시간을 허락받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예수가 꼭 그렇게 했다. 십자가를 지기 전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가르치고 치료했으나 하나님을 영접하는 백성이 없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눅 16:1-2)

13장에서 한 번의 기회를 청했던 포도원 청지기는 후에 어찌 되었는지, 비유가 결론 없이 끊어져서 알 수 없다. 비유가 끝났다. 아니 중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16장에 또 어떤 청지기가 등장하는데 필자는 이 청지기와 13장 청지기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본다. 13장 청지기 비유는 결말이 없고 16장 비유는 서론이 없다. 두 비유는 하나다. 둘 다 주인의 기회비용(열매, 소유)을 낭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한다는 결정문이 나온 것으로 봐서 포도원 청지기의 마지막 ‘땅파기’는 실패로 돌아간 듯하다. 볼멘소리 한번 없는 청지기의 태도가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다는 듯 보인다.

이제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한 죄로 찍혀질 일만 남았다. 그런데 주인이 이상하다. 13장에 의하면 책망의 대상은 청지기가 아닌데 16장의 청지기는 자기 처신을 고민하고 있다. 도끼에 찍힐 운명인 무화과나무는 왜 등장하지 않는 것인가? 무슨 일이기에 무화과나무의 운명이 아니라 청지기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것으로 보이는가? 청지기의 운명과 무화과나무의 운명이 하나로 연결된 느낌이다.

영접, 간격이 소멸되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눅 16:4)

영접이라는 주제는 이미 필자가 “‘탕자’로 성육신한 예수”라는 글에서 살폈다(본지 311호). 그때 필자는 이렇게 썼다.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그리고 예수는 죄인을 서로 기다리며 영접하는 것을 통한 “하나 됨”이 이루어진 증거는 바로 예수의 입에서 죄인들의 입에서나 나옴 직한 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에 담겨있다. 예수가 저들을 영접하되 저들의 죄를 여전히 저들의 영역 속에 남겨둔다면 그래서 의인의 죄인에 대한 일정 거리가 상존하면서 수용하는 자세에만 머무른다면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도 언제나 “곧 그러나 아직은 아닌”의 긴장 상태가 여상할 것이다. 예수가 영접을 했다는 말의 의미는 그들을 떠안되 그 죄마저 자기 것 화하는 수준에 이르는 영접이어야 했다. 그래서 탕자는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죄인입니다. 여기서 화자인 ”나” 속에는 영접한 예수와 영접받은 죄인들이 한 몸이 되어 있다.

16장 주인의 선택은 나무를 찍어달라는 13장 포도원 청지기의 조건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곧 청지기의 직무해제로 대체된다. 우리는 청지기들 사이에서 무화과나무인 죄인들과 공들여 땅을 일군 청지기 사이의 간격이 소멸되는 것을 지켜본다. 예수교는 무화과나무와 청지기가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다.

‘청지기 일을 셈하라’(ἀπόδος τὸν λόγον τῆς οἰκονομίας σου, 눅 16:2)

이 말은 청지기 업무에서 발생한 손해를 갚으라는 뜻이다. ‘셈하라’로 쓰인 단어(ἀπόδος)는 누가복음 문맥에서 빚을 갚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청지기로서 주인을 손해 보게 만든 것을 보상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복음이 신약성서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유익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로워지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셈하라’는 말은 “예수야 너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는데 왜 그것을 미루는가? 이제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지 않았니?”로 읽힌다.) 13장 주인이 화가 난 것은 나무의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13장 청지기는 오히려 나무의 문제가 아니라 땅이 잘 기경되지 못하였음을 주인에게 고했다.

16장 청지기는 땅을 기경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시간이 이미 와버린 것이다. 대신 16장 청지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었다. 16장 청지기의 해법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탕감’이 바로 열매를 맺는 농법이었다.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청지기도 칭찬받고 빚진 자들도 빚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빚진 자들은 ‘빚의 탕감’이라는 은혜를 받고 청지기를 영접할 수 있었다. 청지기를 영접하는 빚진 자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열매를 맺었고 주인은 화가 풀렸다.

16장 '빚진 자'들이 바로 13장 '열매 맺지 못하던 무화과나무'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짝을 이루듯 13장과 16장의 청지기 비유가 짝을 이루었다. 누가복음은 늘 이런 식이다.

무화과나무와 삭개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눅 19:1-7)

‘뽕나무’라는 것이 오역인 것은 독자들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돌무화과나무가 맞다. 13장 무화과나무는 ‘수케’(συκῆ)이고, 19장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는 ‘수코모레아’(συκομορέα, 돌무화과나무)이다.

돌무화과나무의 모양은 무화과나무 열매와 같으나 맛이 써서 땔감으로 쓴다. 이 나무가 원래는 여리고가 자생지가 아닌데 오르기 쉽고 키가 커서 강 건너 군대가 오는 것을 지켜보는 망대 역할을 위해서 여리고로 이식된 나무다. 다 자란 나무는 16미터 정도 자란다. 우리가 예전에 배웠던 2미터 남짓한 뽕나무와는 전혀 다른 나무다. (예전 한국 목사님들은 이 누가복음 19장으로 전국적으로 뻥을 쳤다.) 이 나무를 경작하는 방법은 돌칼로 열매에 상처를 내는 것이다. 상처가 나면 나무는 치유를 위해 평소보다 많은 양분을 열매로 송출하고 상처 치유와 당분 함유량을 높이는 반응이 동시에 일어난다. 나무의 상처로 인해 에탄올 가스 성분이 빠져나가 그 쓴맛도 없어진다. 삭개오와 이 수코모레아 나무는 발음만 닮은 것이 아니다. 삭개오가 수쿠모레아 나무에 올라간 것은 흡사 쓴 열매가 나무에 달린 형국이다. 이제 열매를 달게 만들어 줄 농부가 등장할 일만 남았다. 그 농부는 어떻게 땅을 팔지 두고 보자.

탕자는 아버지 집으로, 청지기는 빚진 자들의 집으로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 19:5)

유대인이면서 세리로 사는 삭개오를 만인 앞에 강제 커밍아웃시키는 예수의 이 말씀은 역시 열매를 찢는 돌칼 같다. 농부의 일은 성공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눅 19:6)

탕자(눅 15장), 불의한 청지기(눅 16장), 그리고 삭개오(눅 19장) 이야기는 ‘영접’이라는 하나의 코드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영접하기 위해 “내가 죄인”이라고 선언한 탕자를 받아서 불의한 청지기는 죄인들에게 영접된다. 이 두 비유가 하나의 사건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삭개오 사건이다. 누가복음의 화룡점정이다.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감으로써 예수는 삭개오를 영접하고 삭개오는 자기 이름을 부르며 자기 집에서 유하겠다는 예수를 영접했다. 죄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유한 예수의 행동이 바로 탕자의 비유가 말하려던 것이고 불의한 청지기가 빚진 자들에게 영접받는 것이 삭개오의 예수 영접에서 드러난다. 불의한 청지기가 탕감해준 것만큼 삭개오 측의 회개의 보상이 천명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결론적으로 누가복음은 영접을 이렇게 설명한다. 영접은 일방적일 수 없고 쌍방이 함께하여야 한다. 불의한 청지기의 탕감은 빚진 자를 향했으나 빚진 자의의 입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한 ‘은혜 베풂’이 선언되고 있다. 예수가 탕자가 되어 죄인을 영접하고(이 부분은 본지 311호를 보지 않으면 이해가 어렵다) 예수가 탕감해준 은혜를 빚진 자들이 알고 불의한 청지기를 영접하듯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매개로 죄인과의 영접을 통해 구원을 완성시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예수가 선언한 ‘오늘’은 예수가 삭개오를 영접하고 삭개오가 예수를 영접한 바로 그 오늘이다. 삭개오를 영접하려는 예수는 탕자처럼 헤프게 죄인의 집에 들어갔으며 삭개오는 자기를 영접한(자기 집에 유하려는) 예수를 기꺼이 영접했다. 하나님의 아들과 죄인이 완벽한 상호 영접을 통해서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드디어 찾았다.(눅 19:10)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vs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흔히들 논쟁하는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갈등은 누가복음 삭개오 이야기에서 의미가 없어진다. 온전한 상호 영접으로 누가는 온전한 구원을 이야기했다. 예수에게 영접은 선포였고, 삭개오에게는 고백이었다. 다른 듯 보이나 이 둘은 나누고자 해도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이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예수가 한 일은 죄인을 영접하는 일이었으므로 자기들도 따라서 부지런히 죄인(세리나 창녀나 소외된 자들)을 영접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이들은 양심에 따라 죄의 모든 길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신칭의를 외치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을 구분한다. 말로야 무엇을 못 하겠는가. 루터가 두려워했어야 했던 것은 천둥 번개나 계단에서의 좌절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위해 토마스 뮌처를 비롯해 민중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자신의 도살 행위였고 이신칭의를 성서 한 구절로 깨달아 정립한 그 만용이었다. 어거스틴도 아이들의 중얼거림 속에서 구원의 교리를 발견했다고 자기 체험을 말하고, 루터도 탑 속에서의 번뜩이는 착상으로 인류 지상 교리를 설정해버린 덕분에 논쟁에서의 승리를 구원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구원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영접하는 것이다. 잃은 자와 잃어버려진 자가 만나지 않고서야 어찌 구원이 선언되는가? 예수는 구원의 의미를 개념 설명이 아닌 삭개오와 함께함으로 말했다. 삭개오는 변명하지 않고 실천적 회개를 단행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경제적 소외와 정치적 탄압에 아파할 때 함께하지 않던 이들이 미국에서 손님을 모셔와 탁상공론을 하고 있다. 과거 민중신학자들을 민중은 외면했다. 박정희가 빵을 줬다고 믿었고 전두환이 과외를 없애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리적 보수 교단들은 교회를 배부르게 만들어줄 부동산값 상승과 십일조가 하나님 축복의 근원과 결과라고 가르쳤다.

길과 야산에서 힘없이 죽어간 불의에 항거하던 이들이 피 흘릴 때, 예배당 안에서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던 그 주인공들이 이신칭의를 논하고 있다. 구원받은 자들이 납세의 대상에서 제외되면 구원도 받지 못한 가련한 이웃들은 더 쥐어짜서 세금을 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이 원하는 세상인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명령의 가장 빠른 실천은 이웃의 세금을 줄여주는 것이고 교회가 도와주면 민중은 천군만마를 얻는다. 민중신학을 외면하던 민중이 환호하던 축복의 예언자들은 미안하지만 그들의 편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적은 사실 민중들 자신이었다. 민중을 곡학아세하던 축복 예언자들을 승냥이라고 알려주던 착한 양치기를 다 죽이고 이제는 스스로를 가나안 교인이라며 길을 잃었다.

처음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축복 예언자들이 입만 열면 축복 축복할 때 민중이 자각하지 않으면 축복은 없다던 선생님들을 기억해야 한다.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라 성도가 교회라고 일러주던 가난했던 목자들을 상기해야 한다. 성도들을 착취했던 목사들을 능력의 종으로 추앙했던 지난날들을 원망해야 한다. 최소한 하루에 세 시간은 기도해야 한다며 최소한 수백억 원을 횡령한 목사를 이제 마음에서 떠나보내야 한다. 그에게 교회는 비즈니스 모델에 불과했다. 기도를 오래 한 만큼 횡령액이 큰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횡령할 수 있게 기도했나? 아니다. 기도하는 자는 신령한 줄로만 알았다. 그땐 모두가 그렇게 속았다. 신령한 것은 의와 인애가 삶을 가득 채울 때를 말한다. 허공에다 대고 병자가 나았다고 외치는 것이 신령한 것이 아니다.

지난주 경기도 용인의 어느 교회에 있었던 일이다. 은퇴를 1년여 앞둔 목사가 미리 은퇴를 하면서 앞으로 1년치 월급을 일시불로 달라고 요청했단다. 이유인즉슨 이랬다. “예전엔 목사가 은퇴하면 얼마 못 살고 죽었는데 요새는 30년은 더 삽니다. 은퇴는 미리 해도 연금은 은퇴 시까지 넣어야 하고 생활도 해야 하니 챙겨주세요.”

그분은 인성이 자비로웠고 품위가 있었으며 용서하는 마음이 있었던 훌륭한 분이셨다. 욕되게 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 교회에 최근 아이 셋을 홀로 키우는 젊은 싱글맘이 직장을 잃고 난감해하고 있다. 다만 그 싱글맘을 돌아볼 뿐이다. 성도들이 오랫동안 교회를 돌본 목사를 염려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허나 목사들의 사명은 자기가 아닌 성도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아닌가? 목사가 자기 안위를 스스로 돌보고 성도를 시켜 또 자기 안위를 돌보게 시킨다면, 힘없는 성도는 누가 돌본단 말인가?

필자의 어머니도 싱글맘이었고 필자는 그녀의 일곱째 막내였다. 은퇴하는 목사보다도 그 교회 싱글맘과 세 아이가 걱정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어린아이가 셋 있는 싱글맘을 해고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누가 좀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 그동안 연재해주신 필자와 성원해주신 독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와 튀빙겐 대학교를 거쳐 부퍼탈 신학교를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M.Div)하고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한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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