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호 반디마을 한몸살이]

   
▲ "공동체는 우리가 일을 찾아가는 시간을 용납해야 한다. 길을 잃었을 때 함께 일을 나눠서 좋고, 길을 찾았을 때 함께 기쁨을 나눠서 좋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누구나 일은 고되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만 하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을 통한 만족감은 두꺼운 코코넛 껍질을 손톱으로 뜯어내 맛보는 단물과 같은 것이다. 하기 싫은 수많은 일들을 해내고 나서야 기뻐할 만한 일들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기쁨만 가득한 일들은 생계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수익을 보장하지 않는다. 속된 말로 하면 돈이 되는 일일수록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 두껍고 단단하다. 부양가족이 생기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처절함이 과중되지만 요즘 절박하긴 사회초년생도 마찬가지다.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으로 시작된 사회생활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찾는 낭만적인 사치를 무너뜨린다. 오죽하면 대학 입학과 동시에 공무원 고시 준비가 유행하겠는가? 이후에도 가정을 꾸리느라 주택 융자금, 자동차 할부금, 과도한 보험금 등 삶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기본 비용이 점점 늘어난다.

이것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서민들의 일상이라면 다른 이들의 인생은 어떨까? 재정적으로 좀 더 여유가 있는 이들은 일에 대한 만족감이 더 클까? 다소 그럴 것이다. 하지만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삶은 누구에게나 고된 것이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고된 하루 뒤에야 안식이 온다. 이것이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설계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에 명시된 삶의 현상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일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사람들을 더욱 사람 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창조성, 통찰력, 유희, 보살핌이 일 속에 숨겨져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누리고 즐기며 본성을 깨닫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쉽사리 일과 취미, 사명과 생업을 분리하지만 처음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일 속에 있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였다. 생각해보면 동역자인 우리가 특별히 획득한 것들도 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초월적 본성을 지니신 하나님은 쉬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기에 우리에게만 유용한 안식일이 부여되었다. 하나님은 6일을 일하시고 나서 자신에게는 불필요한 하루의 쉼을 의도적으로 가지셨다.

그러나 사람은 창조와 동시에 안식일을 맞았다. 그에게 끝날이 우리에겐 첫 날이 된 셈이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함께 누리는 교제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그의 창조와 통치 의도가 공유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 후 인간의 일은 동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고, 이후부터 아담은 굵은 땀방울을 흘려야만 곡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과 교제가 멀어지면 인간의 일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기도 하고 때론 사탄과 동역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일 중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고, 먹고 살기 위한 무의미해 보이는 일들도 있고, 애쓰지 않으면 잊혀지는 소중한 일들도 있다.

바라기는 우리가 하는 일에서 충분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일의 성과가 ‘하나님과의 동역’이며 그로 인한 수입도 충분하다면 좋겠다. 그러나 대체로 이것은 혼재되어 있어 쉽사리 분별하기가 어렵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의 상황이 하나님의 설계는 아니지만 아직도 소멸하지 않은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믿음으로 일을 대하고 혼탁함을 극복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때로 그런 여정은 지루하고 막막하기 그지없다. 이럴 때 나는 공동체의 힘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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