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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현실, 그리고 모두를 위한 디아코니아
[326호 커버스토리]
[326호] 2018년 01월 04일 (목) 11:04:10 백소영 이화여대 기독교사회윤리학 교수 goscon@goscon.co.kr

‘증빙서류’를 달라니!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시아버님 칠순 행사를 혼자 떠맡았다. 다른 형제들이 모두 미국에 있는 탓이기도 했고, 남편은 경쟁이 치열한 분야의 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손을 빌릴 형편이 못됐다. 목사 사모이신 친정어머니께 어려서부터 늘 듣던 말이 ‘봉사와 섬김’이라, 자연스레 특별한 생신을 마음 다해 준비하려고 애썼다. 아버님의 사진을 미리 받아서 집안 한 면에는 돌 사진부터 최근 사진까지를 정성껏 디스플레이 하고, 아버님 일생에 있던 소소한 일들이나 가족 행사 장면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과 일일이 코멘트를 작성해서 붙이며 행복해 했다. 당일 날은 시아버님과 시어머님 양가 형제 내외 열 분을 집으로 모셨다. 준비한 음식은 전채부터 디저트까지 정성껏 만든 것들이었다. 나 역시 일하는 사람이었지만 전업은 아니었기에 가능했고, 그때는 모든 것이 기꺼웠다.

‘좋은 며느리’라고 칭찬 받기 위해 늘어놓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생신 당일의 행복한 모습을 사진에 가득 담아 그날 참여하지 못한 미국의 형제자매, 그리고 남편에게 보냈더니, 하하…! 어쩜 모두 의논이라도 한 것처럼 동일한 말이 돌아왔다. 영수증을 첨부해서 총지출을 보고하란다. N분의 1로 나누자는 거다. ‘그게 왜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고 생각하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것은 임금과 비용의 수치로 환산되어야 하며 정확한 증빙자료가 제출되어야 한다’고 믿는, 뼛속까지 ‘관료제적 인간’(Bureaucratic person)이다.

그런데 난, 너무 화가 났다. 여긴 회사가 아니지 않는가. 가족끼리 뭐하는 거냔 말이다. 그렇게 치면 내 노동 비용은 어찌 책정할 건가? 음식 재료비와 선물 값만 지출 비용이란 말인가? 관료제적 인간들을 갑자기 접하니 내 진심도 돈으로 환산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어찌 결말이 났느냐? “아버님 칠순은 그냥 제가 다 할게요. 나중에 팔순 때는 저 빼고 나머지 형제자매들이 다 준비하세요.” 이렇게 내지르는 걸로 정리했다.

내가 화를 낸 이유는 뻔했다. 가정은 지극히 사적인 친밀성의 공간인데, 여기에 관료제적 잣대를 들이대면 어쩌느냐는 생각에 분기탱천했던 거다. “아휴, 너무 고생했어. 정말 고마워요.” 이 한마디로 족했다. “얼마 되지 않지만 나도 조금이나마 보탤게요.” 이렇게 본인이 가능한 만큼의 기꺼운 금일봉을 건네도 좋았다. 하물며 뭐라고? 영수증을 첨부하라고? 그런데, 최근에 종교인 과세를 놓고 열을 펄펄 내는 몇몇 목사님들 기사를 읽다보니, 내가 어느 지점에서 그동안 날카롭게 선을 긋고 살았는지를 깨달았다.

“가족끼리는 돈 빌려주고 받고 하는 거 아니다. 그냥 줄 수 있는 만큼 도와라.” 친정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다. 그래서 늘 그렇게 살았던 나였다. 더구나 목사님이셨던 아버지의 직업상, 교회 봉사를 하면서 내 돈 들이는 일을 당연시하고 지냈다. 성탄 행사를 준비하면서 주일학교 학생들 간식 사주고 무슨 증빙서류를 꼬박꼬박 내겠나. 회사 출장도 아니고 여름수련회 장소를 미리 방문하는 날 드는 비용도 그냥 개인적으로 쓰던, 그런 삶이 일상이었다. 그게 다 봉사고 섬김이라고 생각되었으니, 그저 기쁘고 기꺼웠다. 더구나 예수께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그럼 “아버지께서 은밀히 갚으신다고” 하시지 않았던가(마 6: 34 참조). 내가 이만큼 내놓았다고 알리는 것도, 내가 이만큼 봉사했다고 생색내는 것도, 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디아코니아’는 돈으로 응시될 수도 환산될 수도 없다고 믿었다.

본디 디아코니아의 공간이었던 교회
실은, 이런 디아코니아가 가득한 공간이 ‘교회’다. 교회로 사는 원칙은 ‘권위 나눔’과 ‘소유 나눔’이다. 서로 기꺼이 나누면서 오히려 더 줄 수 있어서 기뻐하는 것, 내가 손해 보아서 은혜인 것이 교회의 삶이다. 삶… 이어야 한다. 아니, 삶… 이어야 했다. 종교인 과세 이야기에 발끈한 목회자들 모두가 ‘검은 돈’을 숨긴 사람들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 종교인 과세를 반대하는 신자들 역시 교회 봉사와 헌신을 위해 자신들이 기꺼이 바친 헌금을 나라에서 조사·관리하겠다는 데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중 다수는 봉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생신 상을 준비했던 십여 년 전의 나처럼, 기꺼운 봉사와 헌신이 돈으로 환산되고 관료제적으로 통제되는 것에 분노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일종의 ‘거룩한 법칙’처럼 통용되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섬기자”는 디아코니아의 원리가, 오늘날 어찌 악용되고 있는지 다 아는 시점 아닌가. 하여 차라리 헌금도, 어쩌면 우리의 봉사와 섬김까지도 투명하고 정정당당하게 조사받는 것이 낫다는 신자들이 늘었다. 최근 기독교언론포럼이 조사한 〈2017년 10대 이슈 및 사회의식 조사〉 발표 자료에 따르면, 개신교 목회자 중 62%가 종교인 과세를 찬성한다. 신자들도 70.1%가 찬성했다.(“종교인 과세, 명성교회 세습, 개신교계 올해의 주요 이슈” 〈연합뉴스〉 2017. 12. 7)

종교 과세가 아니라 종교인 과세라는 말에 잠잠해진 대형 교회들은 소위 ‘이중장부’를 확답 받았다는 말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다. SBS 기자가 소강석 목사에게 직접 들었다는 기획재정부 답변은 이러하다. “기재부에 제출하신 (개신교)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여 종교인 소득 과세 보완 방안을 마련하고, 종교 활동에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급된 비용에 대하여 과세하지 않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내용을 포함한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안을 곧 입법 예고할 예정이다.”(“종교인 과세 시행 코앞, 개신교는 왜 잠잠해졌나?” SBS <취재파일> 2017. 12. 7) 종교인에 대한 과세지 교회가 하는 디아코니아 활동에 대한 과세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 좀 다녀본 사람들은 다 안다. 목사님 사례비가 어디 ‘월급’으로만 책정되던가? ‘목회활동비’ ‘연구비’ ‘선교비’ ‘사택관리비’ ‘자녀교육비’ 등등 소위 교회의 ‘종교 활동비’라는 것이 얼마나 모호하며 그 예산들 중 목회자, 특히 담임목사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막대한가 말이다.

사실 종교(인) 과세 문제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종교인에 대한 과세냐 종교 활동에 대한 과세냐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 활동에 대해서도 세무조사를 받는 편이 차라리 옳다. 반대자들은 정교분리를 외치는데, 그야 중세 말기 신정(神政)일치 사회를 만들고 종교인들이 세상 일에 관여하며 발생한 부패 현상을 그치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말이 정교분리지 개신교가 그동안 정치 문제에 어디 독립적인 입장을 취해 왔었나? 친(親)개신교 정부와 반(反)개신교 정부에 대한 행동이 달랐을 뿐이지, 정치적 포지션에 적극 참여하든 영적 기독교만 외치든 양쪽 행위 모두 결국은 상황에 따라 살 길을 찾는 ‘정치적’ 행동이 아니었나. 생명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종교인데, 정권 안정이라는 명목 하에 수많은 생명들을 무고하게 탄압하고 죽여도 그 위정자들을 위해 아침마다 부지런히 조찬기도회에 달려 나갔던 사람들이 무슨 “정교분리는 헌법에 보장” 운운 하는가. 차라리 교회 헌금의 사용 내역을 아주 투명하게 교인들과 세상에 다 밝히고 ‘증빙서류’도 모두 첨부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방점을 ‘과세’에 찍을 게 아니라 ‘세무조사’에 찍을 일이다. 요즘처럼 ‘생존’ 자체가 간당간당한 젊은이나 노년, 실업자 수가 나날이 증가하는 시절에, 지역사회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하는 ‘디아코니아’ 항목들이 예산으로 책정되어 적절히 사용되고 명료하게 보고된다면, 세금을 낼 게 아니라 오히려 보조금을 받게 될 일이다. 그동안은 낯설어서, 은밀히 행하는 것이 신앙적 행동이라는 말에, 이런 명료함이 불편했고 나아가 화도 났지만, 지금의 한국교회와 목회자들 행동을 보건대, 이 방법이 유일해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아니, 더 나아가 나라에서 세금 지원받는 교회를 꿈꿀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개인도 환급금을 받고 사회 기여도가 높은 단체는 세금 혜택도 받는 마당에, 교회와 지역정부가 콜라보로 할 수 있는 행사가 얼마나 많겠나. 품위 있는 표현은 아니지만, 까짓것 다 까고 제대로 해보자는 거다. 그동안 은밀히 내 돈 보태면서 기쁨으로 디아코니아를 실천해온 성도들과 목회자들이야 무엇이 무서울까. 두려워하는 자들이 누군지는 너무나 뻔하다.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교회를 세습한다?
개(個)교회는 사실, ‘그쳐도’ 된다. 하는데까지 하다가 그쳐도, 다음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있다. 진정 거듭난 신자는 결코 나태하거나 방종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꼭 이루어야 할 어떤 완성태의 목표로부터도 자유롭다. 우리 교회가 99주년까지 지속되었다고 해서 안 되는 형편에 억지로 1년을 더 보태 100주년을 채우겠다는 건, 인간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99주년이면 어떻고 100주년이면 다를까. 크고 작은 교회들이 기꺼이 세워지고 애써서 지속되었지만, 이를 이루는 모든 디아코니아는 구성원들에게 ‘거룩한 동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모두가 성령 안에서 각자의 은사와 재능으로 자발적으로 나누는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 신비롭게 그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교회다. 그러니 그 신비가 그친다면, 안타깝지만 그냥 거기서 멈추면 된다. 하나님의 영은 또 다시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새로이 교회로 살아가고 어디서든 디아코니아의 삶을 살도록 북돋우실 터이니.

그런데 왜 꼭 ‘내 교회’ ‘내 아들’이어야 하나? 나는 사실 명성교회의 아버지 목사보다도 아들 목사에게 안타까움이 더 크다. 나는 김하나 목사를 딱 한 번 만났다. CBS <크리스천 NOW>에서 “목회자 자녀 열전”을 주제로 목회자 자녀 넷을 패널로 초청했다. 그때 처음 보고 매우 바르고 절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서 목회자 자녀로 고생한 이야기, 유난히 기준이 높은 아버지들의 기대에 힘겨웠던 이야기를 나누며 금세 친해졌다. 녹화를 마치고 바로 페이스북 친구 신청이 와서 기쁘게 받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의 페이스북 게시물 몇 개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걱정했다. ‘아, 이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너무나 크구나.’

어느 목사 아버지 자녀에게 그 아버지가 만만할까마는,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큰 ‘아버지’를 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아니던가. 내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사신다면야 양쪽에 효도할 일이지만, 두 ‘아버지’의 뜻이 충돌한다면 신자의 선택은 괴롭지만 하나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 안 나지만, 새노래명성교회를 사임하면서 그런 설교를 했다고 들었다. 이번 청빙을 거절하면 자신은 존경받는 목회자의 길을 갈 수 있지만, 그걸 접었노라고. 마치 십자가라도 지는 어린 양인 양, 그렇게 제단에서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모가지를 드리운’ 모습에 정말 눈물이 났다.

“이 표지 든 흰 손아! … 세운 날 없는 내 교회 무너질 날은 있을소냐? … 성하고 쇠하는 교회 그것은 내 교회 아니요 너희 인간의 교회니라. 내 교회 너희 안에 있음 선언한 것이 벌써 언제냐? … 보아라. 이 나라에서는 개개가 전체다. ‘우리 교회’의 단체교섭은 소용이 없다. … 이놈들, 믿음을 놀음으로 바꿔놓은 이 안일교도 놈들!”

함석헌이 1952년에 발표한 시 〈흰 손〉의 일부다.(《전집》 6: 340-353쪽). 그러게 말이다. 세운 날이 있고 무너지는 날이 있는, 성하고 쇠하는 교회는 인간이 만든 건물일 뿐이다. 어떤 내부 사정이 있는지 세세히 알지 못하나, 그래서 다른 후임 목회자가 오면 교회가 무너지거나 반쪽 날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야말로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혹여 아버지가 불법을 행하여 아들만이 막을 수 있는 일이라면, 더더욱 삼갈 선택이다. 가족끼리는 덮어주는 것이 인정일지 몰라도 그것이 성직이라면 어림없다. 살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해야 할 영역에서는 인간의 의지와 모략을 발휘하고, 정말 인간이 최선을 다해 지혜를 모으고 행동해야 하는 일에는 “하나님께 맡깁시다” 하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명성교회 사태도 그런 경우지 싶다.

   
하나님의 영은 보편의 영이라서, 나만 기쁜 일, 소수의 특권층만 기쁜 일을 편드실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 보편의 영이 가득하면 어찌 나 좋은 일만 하고 살겠나. 그래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며 봉사와 섬김, 희생과 헌신의 길을 걸어갔다. 

진정한 디아코니아는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나는 기쁜데 너는 슬프면, 그게 어찌 복음이랴. 너는 은혜 충만한데 나는 시험에 들면, 그게 어찌 복음이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다. 그 기쁨을 알았기에 삭개오는 자기 재산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뚝 떼어준다는 말도, 그렇게 신이 나서 할 수 있었다. 행여 불의하여 억지로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겠다는 회개가 가능했던 것도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한 데나리온 받기로 약속하고 하루 종일 일하여 정당한 임금을 받았음에도, 포도원 주인이 다른 이웃들에게 선하고 넉넉한 것이 못마땅했던 사람들은 이 복음을 모르는 자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될 자다.

명성교회 세습을 지지하는 내부자들은 말한다. “우리가 괜찮다는데, 우리가 문제가 없다는데 왜 밖에서 난리냐?” 교회가 아니고 사기업이면 이렇게까지 처참하진 않다. 상속세도 안 내고 아들이 CEO가 되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불법적 요소만 지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다. 사건 하나하나가 벌어질 때마다 하나님 나라 통치 질서를 채워가야 할, 선교적 사명이 있는 교회다. 그런데 어찌 교회 내부자들만(그마저도 다는 아니지만) 기쁘고, 밖에서는 모두 슬피 우는 사건을 만드는가. 고민하고 기도하며 애태우다가 결국 선택한 ‘나의 섬김과 헌신’이 겨우 개(個)교회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 알고 보면 그건 공동체가 아니라 내 아버지와 건물(교회 건물을 비롯한 수많은 부동산과 계열 기관들)을 지키는 일이라니. 개인으로서 제 아무리 섬김과 봉사의 자세로 십자가를 지듯 간다 해도, 그것이 설사 진심이라 한들, 이건 소수만 기쁜 선택이다. 그래서 복음이, 아니다.

수백억짜리 교회는커녕 자녀교육비 혜택조차 받지 못했던 목사 딸로서, 배 아파서 하는 말이 아니다. “대학부터는 네가 벌어서 다녀라. 목사 월급으로 고등교육 지원은 어렵구나.” 아버지 말씀에 대학시절 내내 아르바이트 서너 개는 일상이었다.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보조받고 간 미국 유학이었지만, 그 생활비라는 것은 열두 달로 나눠보니 한 달에 500불을 쓸 수 있었다. 기숙사 방값만 425불, 그야말로 75불로 한 달을 물가 비싸다는 보스턴에서 버텼다. 방법은 간단하다. 요즘 핫한 김생민이 말하듯이 “안 쓰면” 된다. 배고프면 물 마시고 학생식당에서 공짜인 크래커나 커피에 넣어 먹는 우유 조금으로 허기를 달래면서, 서러워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래도 난 불행하거나 비참하지는 않았다. “고아와 과부의 헌금은 쓰일 데가 따로 있다”는 아버지 말씀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시무하시는 교회에 ‘교회여성 미래지도자 육성비’ 항목이 있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여선교회에서 모아둔 기금이라고 했다. 설마 내가 굶고 있는 줄이야 꿈에도 몰랐겠지만, 어찌 버틸지 뻔한 사정이 안타까운 마음에 어머니께서 슬쩍 운을 떼셨나 보다. “여보, 소영이 정도면 교회여성 미래지도자로 육성될 만한 자격이 있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결국 아버지 말씀에 수긍이 되셨다 한다. 행여 부모 마음으로는 “내 딸이야 그 자격이 충분하지” 싶으셨다 해도, 아니 소위 ‘객관적’으로 자격이 충족된다 해도, 다른 사람들 보기에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고. 이웃을 실족하게 한다면 그게 어찌 목회자의 삶이겠나. 맞다, 어쩌면 역차별이다. 덕분에 ‘개’고생했지만, 그래서 얻은 “제사장 가문의 자부심”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제사장 가문이라고? 명성교회 세습을 놓고 “제사장은 세습되는 거”라는 지지발언을 했다는 목사님 이야기에 발끈해서 덩달아 나도 한 번 써 봤다. 전근대(pre-modern) 시절에나 가능했던 세습이니, 시시비비하는 것은 지면 낭비에 시간 낭비다. 그러나 만약 여전히 “제사장 가문”을 운운한다면, 분명히 레위 지파에게 돌아온 분깃은 오직 ‘여호와’뿐이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11지파가 골고루 땅을 분배받던 시절에, 생산 수단인 땅 대신 ‘여호와’만 분깃으로 받는 지파가 레위 지파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부탁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이스라엘’이라면, 우리도 모두 제사장이다. 그래서 우리의 분깃은 하나뿐이다. 여호와, 그분을 ‘물려’ 받은 마당에, 움켜잡아야 할 또 다른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살아내는 모습을 통해서 비로소 형상으로 드러나시는 분이 영이신 하나님이다. 고대 제국에서 지방관을 파견할 때는 황제의 형상을 앞세우고 갔다고 한다. 그럴 일이다. 텔레비전도 신문도 없는 시절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그 통치권을 행사하려 한다면, 지방 주민들이 보고서 승복할 만한 위엄을 갖춰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멋지게 조각된 으리으리한 황제의 흉상을 모시고 내려왔다는 거다. 그 조각상을 보고서야, “아, 저 사람이 황제가 보낸 통치자구나!” 인정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셨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걸 아는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 제사장된 우리가 삶 가운데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신자라면 하루하루 사는 게 참 살 떨릴 일이다. 우리가 사는 대로 하나님이 드러나신다니! 이걸 율법주의적으로 수행하려면 매 순간이 죽을 노릇일 거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내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고 본을 보이셨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동행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다. 인간적인 이기심으로 교만함으로 나를 확장하고 내 소유를 늘리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방향을 돌이켰다. 하나님의 영은 보편의 영이라서, 나만 기쁜 일, 소수의 특권층만 기쁜 일을 편드실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 보편의 영이 가득하면 어찌 나 좋은 일만 하고 살겠나. 그래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며 봉사와 섬김, 희생과 헌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내 속 사람을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는 일이리라. 그러면 디아코니아는 자동으로 따라오는 능력이다. 정의와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함으로 살아내면서(미 6:8)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증거할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과 삶의 선택을 보며 “여호와 하나님이 저런 분이시구나!” 하고 그분을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러니 먼저 묻자. 우리의 디아코니아가 모두에게 기쁜 소식인가? 아니라면 돌이키자. 늦지 않았다. 지금 당신이, 내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여호와’가 아니라면 빨리!

 

백소영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공부했다. 이화인문과학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기독교와 세계’ ‘현대문화와 기독교’ ‘종교와 문화’ 등을 주제로 대학에서 강의하고, 관련 주제를 중심으로 교회 및 시민단체에서도 강연하며 기독교 세계관과 윤리의식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 《엄마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교회를 교회되게》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드라마 속 윤, 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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