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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하나님’이라는 허구에 눈 뜨다
[326호 믿는 '페미'들의 직설]
[326호] 2018년 01월 04일 (목) 11:38:31 Dora희년 아동부 전도사, ‘믿는페미’ 활동가 goscon@goscon.co.kr

“너는 소중해~ 너는 특별해~ 너는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어린이 찬양 가사 중 일부이다. 아동부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이 찬양을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불러주며 축복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은 사랑받고 특별해질 가치가 충분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가르쳐 온 하나님의 형상은 ‘남성’의 이미지가 강했다. 전지전능하신, 위대하신, 전쟁에서 승리하신, 강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 그래서였을까? 나는 여자아이들에게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한 하나님의 형상을 빗대어 축복하는 것이 유독 어색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안했다. 내가 겪은 이러한 내적 갈등은 사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간 창조 기사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의 ‘쓰나미’
설교 준비가 가장 힘든 본문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야기이다. 아동의 눈높이에 맞게 설교를 이끌어가기 위해 그림 자료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의 이미지는 흙으로 빚어진 남자 아담, 그리고 그러한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진 여자 하와의 이미지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잘 보존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우리의 모양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내용을 담은 창세기 1장이 마치, 흙으로 만든 아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의 갈비뼈에서 하와를 창조했다는 창세기 2장을 보조하는 내용처럼 비춰졌다. 내가 어릴 적부터 배워 온, 여전히 보편적으로 가르치는 인간 창조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흙에 생령을 부어 아담을 만드셨어요. 그런데 에덴 동산에 아담이 혼자 있는 게 너무 쓸쓸해 보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잠든 틈에 그의 갈비뼈를 가지고 하와를 만드셨어요. 하나님은 맨 처음에 아담을 먼저 만드셨고, 애초에 아담의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와를 만든 목적은 ‘돕는’ 역할이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을 잘 내조하고 보필하는 게 주된 역할이랍니다.”

이러한 성차별적인 교회 내 가르침은 신의 이름을 빌려 작동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반문할 것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여성 상위시대 아닌가? 성 평등이 이루어졌는데 새삼스럽게 성차별을 운운해? 게다가 인간 창조는 성에 따른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드러낸 거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은 신의 창조 질서인 것이야!”

그러나 차이의 극대화는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할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위계적으로 아래에 있는 존재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차별 당할 수 있음을 그 누군가는 모르는 것 같다. 젠더 의식과 감수성을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니 공기처럼 존재하는 불평등한 현상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왜 목회자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을까?’ ‘왜 주방 봉사는 여성들의 비중이 더 클까?’ ‘왜 장로님들 중에 여성의 비율을 극히 적을까?’ ‘왜 여전히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 않는 교단이 있을까?’ ‘왜 나는 남성과 똑같이 신학교를 들어왔는데 사모가 되라는 이야기를 들을까?’ ‘왜 교회는 여성에게 지혜로운 현모양처, 어머니가 되라고 말할까?’ ‘왜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가정을 회복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일까?’ 왜? 왜? 왜? 너무나도 많은, 이 불편하고도 비정상적인 지점들을 정상으로 둔갑하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중에, 나는 창세기에 기록된 인간 창조의 이야기가 남성 중심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어 온 오래된 역사의 반복과 인용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 영화 <오두막> 속 하나님은 '흑인 여성'의 이미지다.

가수 조권과 영화 <오두막>이 안겨준 충격
역사적으로 성서를 읽고 해석할 권리가 있었던 남성 대부분은 창세기 2장의 내용을 근거 삼아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고 불완전하며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타락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이런 ‘여성혐오’적인 젠더 시각은 성서 해석에서 그대로 주된 ‘진실’로 받아들여져, 수천 년에 걸쳐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요즘은 좀 더 세련된 표현으로 ‘상호보완적이지만 위계질서가 있는 남성과 여성’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여성을 여전히 남성의 보조자로 해석하는 것이 마치 창조질서인양 받아들이는 성별 비대칭적 현실에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가수 조권이 여성 가수의 모습을 모방한 일이었다. 정말 패러디적인 젠더 모방이었다. 생물학적 남성인 조권은 일반 남성보다는 높은 톤의, 그러나 풍성한 성량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근육이 있지만 마르고 유연한 몸을 소유하고 있다. 게다가 남성다움과 거리가 먼 흰 피부와 그다지 크지 않은 키를 가졌다. 일반적으로 미디어가 생산해내는 여장남성의 모습은 놀림거리가 되고, 희화화를 통해서 대중들에게 가벼운 웃음으로 소비됐다. 그러나 조권은 (웃기려는 의도 없이) 진지하게 무대에 임했다. 그는 몸매가 드러나 보이는 의상을 입고 높은 하이힐을 신었지만, 팔 근육과 종아리 근육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또한 노래를 하면서 일부러 가느다란 여성스러운 목소리를 내지 않고 꾸미지 않은 본인의 목소리로 노래했다. 그는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는 어떤 도구도 사용하지 않았다.

대중들은 그러한 그의 모습에 낯설고 의아한 반응을 보였고, 이러한 조권의 파격적인 행보를 두고 SNS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여기에 조권은 “아무도 나를 단정 지을 순 없어요. 그게 저인 걸요”라고 답했다. 사회가 규정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넘나들며 경계선 상에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그의 행동은 남성됨과 여성됨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의 경계를 넘어버리면 비정상으로 간주되는 사회 속에서 ‘나’를 규정하는, 관습과 전통의 폭력성과 허구성을 폭로한 그의 행동은 나로 하여금 남성과 남성다움, 여성과 여성다움에 대한 기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내가 생물학적 여성이기에 강요당한 여성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던 화장과 헤어스타일, 옷차림, S라인 몸매와, 오히려 조권이 모방 혹은 일부러 모방하지 않았던 여성성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사건은 영화 〈오두막〉 관람이었다. 영화가 묘사하는 하나님 이미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백발 혹은 금발의, 알맞은 수염을 가진, 백인의, 파란 눈을 가진, 엄청난 근육이 있는, 잘생긴 남성이 아니었다. 검은 곱슬머리를 가진, 수염 없는, 흑인의, 검은 눈을 가진, 작은 키와 통통한 체격의 여성이었다. 게다가 예수님은 서구인의 모습이 아니라 갈색 피부를 가진 아랍인의 모습으로 묘사됐고, 성령은 동양인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됐다.

이러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묘사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제야 명확해졌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내면화한 삼위일체 이미지는 철저히 서구 중심, 남성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다양한 상상력을 억압하고 제한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회의감을 느꼈다. 〈오두막〉을 통해서 본 익숙하지 않은 삼위일체 이미지가 나의 영화 몰입을 방해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교회에서 가르친 남성 중심적으로 성별화된 하나님 이미지의 편향성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어떠한 표준을 설정해놓고 그 기준에서 멀어지는 존재들의 삶을 배제하고 목소리를 지워버린 성서 해석의 역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소중해, 특별해.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어쩌면 우리가 표현해야 할 것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적으로,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적으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존재 고유성과 가치일 것이다. 그렇기에 성별에 구애받지 않은 하나님 형상에 대해 다양하고도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지향하는 것은 곧 한 인간의 정체성과 삶의 표현과도 연결되기에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된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다른 역사적 배경 속에서 다른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산물이다. 여기서 나는 그동안 창세기 2장에 가려져 왜곡 해석된 창세기 1장을 좀 더 깊이 살펴보려 한다. 2장과는 달리 1장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우리의 ‘모양’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동등’하게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단순히 물질적이고 사물화된 것이 아니라 잠재된 창조성과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불변적인 고정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순간순간마다 주어지는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수행들의 경험이 쌓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하나님의 형상은 ‘형상’이지, 하나님 그 자체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창세기 1장 26절에서 ‘우리’의 ‘모양’대로 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 쓰인 것을 감안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고 복수적인 형태로 구성됐다는 사실도 파악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성 개념으로만 이끌어냈지만, 실제로 이분법적인 성 구도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에 이러한 제한적인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과정 중에 있으며 열린 가능성을 통해 끊임없이 수행되고 재해석되는 창조성이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은 남성이다”라는 명제는 허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별 고정적인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끝없고 알 수 없는 다양한 수행들과 모습들의 복사본들만이 떠돌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해석은 성별에 따른 위계를 생산하고 이에 파생된 차별을 정당화하는 교리와 관념에 균열을 내는 시작점이 된다. 그 시작점을 내 삶에 적용하고 일어난 변화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우선 교회 아이들에게 “너는 소중해, 너는 특별해, 너는 하나님의 형상이니까”라는 찬양 가사를 죄책감 없이 진실한 마음을 담아 축복해줄 수 있었다. 또한 여성인 나는 더 이상 남성을 돕는 보조자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내 가치와 잠재성을 더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여성다움을 위해 집착해야 했던 외적 꾸밈에 큰 에너지를 쏟지도 않았다. 성별에 따라 여성은 분홍, 남성은 파랑으로 구별한 색이 입혀진 선물 구매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됐다.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그 자체의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이며, 그러한 나를 존중하고 포용하는 하나님을 더욱더 깊이 신뢰하게 됐다. 이제는 그 찬양을 나에게 불러주고 싶다.

“나는 소중해, 나는 특별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그렇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소중한 존재, 도라희년이다.

 

Dora희년(필명)
‘신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필자의 영어 이름 Dora와 희년을 합친 필명으로, “여성들의 삶에 찾아오는 희년은 신의 선물이자 은총”이라는 뜻이다. 페미니즘에 입문하고 모든 것이 흔들려버렸지만 이제는 그 흔들림을 즐기며,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목회자 곧 ‘페미니스터’(Feminism+Minister=Feminister)가 되려고 노력 중이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졸업 예정이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성폭력, 가정폭력 전문상담원교육을 이수한 후 전화상담을 하고 있으며, 기독교 페미니즘 단체인 ‘믿는페미’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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