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호 표지]

“교회는 비회원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단체다.”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1881-1944)이 남긴 말입니다. 단체마다 자기 회원들의 이익을 도모함이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일진대, 교회는 다르다는 겁니다.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단 하나의 기관이 교회라는 얘기지요.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요? 비회원(일반 언론)의 눈에 비친 교회는 오로지 회원들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기 십상입니다. 자기 보존·번영을 수호하려는 열망 아래 ‘자기애’로 충만한 집단 말이지요. 사랑이신 하나님(요일 4:16)을 믿는다면서 정작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는(고전 13:5) 사랑의 속성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양 행동합니다. 자기 교회(와 회원들)의 유익만을 고려하여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적하는 결정을 내리고도, 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하하고 축복합니다. 그런 왜곡된 자기애적 행위가 정당하다며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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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대주교의 말은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에만 비로소 교회다”라고 한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에게로 연결되며, 이는 다시 기독교의 본질이자 기초인 ‘디아코니아’(Diakonia·섬김)를 돋을새김합니다.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는 귀에 익은 말이 아닙니다. 어쩌면 오래 전에 잃어버려 잊고 지내온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몸처럼 사랑할 ‘이웃’을 찾고 섬기기보다, 배제와 혐오의 대상으로 규정지을 ‘죄인’ 만들기에 재빠른 단결력을 보이는 게 이 땅의 주요 개신‘교단’이니 말이지요.

짐 월리스는 《회심》(IVP)에서 “개인적인 죄는 체제에 뿌리내린 죄보다 훨씬 더 잘 보인다”고 했는데요. 이러한 개인의 죄뿐 아니라 정사와 권세, 체제와 구조에 뿌리내린 사회적 죄로 고통당하는 비회원들(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신 예수의 이웃사랑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예수의 디아코니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병들고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주목하셨다는 것이고, 저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장승익·74쪽)

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소외된 이웃들의 필요를 먼저 채워주는 ‘디아코니아 교회’가 더욱 절실해집니다. 종교개혁 501주년의 첫 달에 “디아코니아 복음”을 표지 이야기로 꾸리는 뜻이 여기 있습니다.

끝으로, 새해 들어 새롭게 만나는 꼭지에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르거나 혹은 같거나”(김영준·124쪽), 복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펼치는 “믿는 ‘페미’들의 직설”(Dora희년·103쪽), 분단철책 곁에서 평화를 성찰하는 “민통선 평화 특강”(정지석·96쪽), 인문학 렌즈에 비친 ‘교회와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최종원·84쪽) 등입니다. 올 한 해도 이 땅과 독자님의 일상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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