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호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한동대 김대옥 교수 재임용 거부를 보면서

1. 환대, 그리고 배제와 혐오
최근 한국 사회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배제와 혐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럴 정도로 공공연히 타자에 대한 배타적 감정들이 여과 없이 표출되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몇몇 흐름들은 21세기 기독교의 이름으로 마녀사냥이 자행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우려됩니다.

성소수자 이야기를 다룬 EBS의 한 프로그램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입장을 보였던 방송인 박미선 씨에 대해 ‘일부’ 기독교인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권사직을 박탈하라고 그분이 다니는 교회에 압력을 넣는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한동대학교 ‘들꽃’이라는 모임에서 주최했던 페미니즘 특강의 후폭풍도 무시무시합니다. 관련 교원과 학생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그 모임의 배후로 김대옥 교수를 찍어 재임용을 거부했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를 드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학교나 당사자 모두 동성애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보이지 않은 것이 문제의 핵심임을 알고 있습니다.

요즘 신학에서 ‘환대’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타자에 대한 영접과 수용, 배려’라니 기독교와 매우 밀접한 용어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환대하는 대상에 결코 끼지 못하는 부류가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 페미니즘, 이슬람 등이겠지요. 환대의 기독교를 내세우는 기독교의 또 다른 얼굴은 실상 혐오와 배제입니다. 슬프게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기독교인과,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몰아붙이는 집단이 찰떡 같이 공조하여 그들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후에 덜해지기는 했으나 한동안 한국에서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의 인기가 매우 좋았습니다. 젊고 수려한 외모뿐 아니라 내각의 과반수를 여성으로 채우고,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과거 고통 받았던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한 진솔한 사과와 보상을 하는 등의 정책은 태평양을 건너 한국인들을 열광시켰습니다. 그랬던 그도 한국인들에게 공통적으로 경멸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두어 달 전쯤 그는 캐나다의 모든 성소수자들에게 정부가 했던 잘못과 과오에 대해 눈물을 보이며 사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제가 읽은 몇몇 기사의 댓글 내용은 응원보다는 비난이 훨씬 많았습니다. 짐작이지만 그리스도인 역시도 별로 차이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불편한 지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토록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타자에 포함되지 않는 부류가 왜 그렇게 많을까요? 성소수자에 대한 인정은 차치하고, 그들에 대한 긍휼과 연민조차 허용될 수 없는 것일까요? 누군가를 쏙 빼놓고 나머지 타자를 사랑하겠다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모순을 캐나다에 살면서도 보게 됩니다. 흔히 캐나다의 한인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 정책만 빼고 캐나다의 인권 정책 대부분이 마음에 든다고들 합니다. 이 얼마나 비논리적인 진술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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