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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유토피아, 그리고 배제와 혐오
[327호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한동대 김대옥 교수 재임용 거부를 보면서
[327호] 2018년 02월 01일 (목) 11:32:21 최종원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 goscon@goscon.co.kr

1. 환대, 그리고 배제와 혐오
최근 한국 사회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배제와 혐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럴 정도로 공공연히 타자에 대한 배타적 감정들이 여과 없이 표출되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몇몇 흐름들은 21세기 기독교의 이름으로 마녀사냥이 자행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우려됩니다.

성소수자 이야기를 다룬 EBS의 한 프로그램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입장을 보였던 방송인 박미선 씨에 대해 ‘일부’ 기독교인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권사직을 박탈하라고 그분이 다니는 교회에 압력을 넣는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한동대학교 ‘들꽃’이라는 모임에서 주최했던 페미니즘 특강의 후폭풍도 무시무시합니다. 관련 교원과 학생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그 모임의 배후로 김대옥 교수를 찍어 재임용을 거부했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를 드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학교나 당사자 모두 동성애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보이지 않은 것이 문제의 핵심임을 알고 있습니다.

요즘 신학에서 ‘환대’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타자에 대한 영접과 수용, 배려’라니 기독교와 매우 밀접한 용어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환대하는 대상에 결코 끼지 못하는 부류가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 페미니즘, 이슬람 등이겠지요. 환대의 기독교를 내세우는 기독교의 또 다른 얼굴은 실상 혐오와 배제입니다. 슬프게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기독교인과,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몰아붙이는 집단이 찰떡 같이 공조하여 그들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후에 덜해지기는 했으나 한동안 한국에서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의 인기가 매우 좋았습니다. 젊고 수려한 외모뿐 아니라 내각의 과반수를 여성으로 채우고,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과거 고통 받았던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한 진솔한 사과와 보상을 하는 등의 정책은 태평양을 건너 한국인들을 열광시켰습니다. 그랬던 그도 한국인들에게 공통적으로 경멸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두어 달 전쯤 그는 캐나다의 모든 성소수자들에게 정부가 했던 잘못과 과오에 대해 눈물을 보이며 사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제가 읽은 몇몇 기사의 댓글 내용은 응원보다는 비난이 훨씬 많았습니다. 짐작이지만 그리스도인 역시도 별로 차이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불편한 지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토록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타자에 포함되지 않는 부류가 왜 그렇게 많을까요? 성소수자에 대한 인정은 차치하고, 그들에 대한 긍휼과 연민조차 허용될 수 없는 것일까요? 누군가를 쏙 빼놓고 나머지 타자를 사랑하겠다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모순을 캐나다에 살면서도 보게 됩니다. 흔히 캐나다의 한인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 정책만 빼고 캐나다의 인권 정책 대부분이 마음에 든다고들 합니다. 이 얼마나 비논리적인 진술이란 말입니까!

2. 여성, 이브(Eve)에서 아베(Ave)로
서유럽의 중세가 끝날 무렵 종말론적 신앙 형태들이 여러 지역에서 분출하였습니다. 이른바 유토피아를 꿈꾸는 흐름이 사방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대표적입니다. 1516년 출간된 모어의 책 제목 “유토피아”(utopia, no-where)는 ‘이 세상에 없는 상상 속의 이상향’이란 의미입니다. 극복할 수 없는 지독한 현실 세계 속에서 더 나은 대안을 찾아가는 가능성의 세계가 유토피아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의 삶은 결코 무릉도원에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바둑 두는 태평한 삶은 아닙니다. 직업의 귀천이 없는 곳에서 일정 시간 노동과 수면이 보장되고 지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삶이 보장되는, 누구 말마따나 ‘저녁이 있는 삶’이 유토피아입니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바로 도덕적 규범을 갖춘 권력이 지배하는 근대 시민사회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관용과 자유의 정신이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의 정신적 토대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관용이란 종교, 직업, 계급과 인종, 나이 및 정치 성향 등 모든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세 말에서 근세 초,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유토피아는 이와는 반대로 나아갔습니다. 16세기 토마스 뮌처와 농민 반란 시기 뮌스터의 재세례파가 추구한 것은 계급 없고 재산을 공유하는 평등사회였지만 그 사회는 무정부 그 자체였습니다. 17세기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청교도 혁명이 성서의 예언서에서 꿈꾸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사건이라고 평가했지만 실제로 크롬웰의 독재와 탄압만이 크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중세의 질서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면서 서유럽과 동유럽, 신대륙을 가릴 것 없이 생겨난 집단 히스테리가 ‘마녀사냥’입니다. 마녀라는 개념은 중세에도 존재했지만 집단 히스테리로서 마녀사냥이 등장한 것은 1430년대 이후라고 알려집니다. 1450-1750년 사이 유럽과 신대륙에서 최소 4만에서 최대 11만 명이 마녀로 재판을 받고 그중 절반 가까이 희생당했다고 합니다. 근대 초에 발생한 이 일련의 사법 행위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마법사’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것 같은 친숙한 이미지인데, ‘마녀’는 늘 어둡고 부정적으로 그려졌을까요?

근대 초 마녀사냥 연구의 권위자인 제프리 러셀은 마녀사냥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산물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녀는 새로운 근대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희생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배경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마녀로 규정되게 되었을까요? 초대 교부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여성에 대한 관점은 특히나 부정적이었습니다. 하와는 모든 인류를 악마에게로 이끈 통로였습니다. 심지어 어느 교부는 아담의 범죄는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니라 여자의 말을 들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철저하게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마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수녀원이었습니다. 수녀원이란 합법적으로 여성의 독신이 인정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중세 말 가톨릭의 위계가 위기에 처하면서 종교개혁이 성취되기까지 가톨릭 내부 개혁운동인 공의회 운동뿐 아니라, 이단, 신비주의,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 토마스 아 켐피스 등이 참여한 중세 유럽의 신앙쇄신운동-편집자) 등 다양한 종교 흐름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여성 환시가들’(female visionaries)이라고 불리는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역할입니다. 중세 말 흑사병, 교회대분열, 백년전쟁 등 경제적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기는 결국 성직주의, 스콜라주의, 남성중심 세계관의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대안적 흐름으로 이제 여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대두됩니다.

이브에서 아베 마리아로의 획기적인 시각 전환이 그것입니다. 여성이 죄의 통로에서 이젠 대속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12세기 이후 중세 말로 가면서 마리아 숭배에 대한 기록이 활발하게 보이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모국어 문학이 발전하면서 시에나의 카테리나(1347-1380), 마저리 켐프(1373-1439)와 노리치의 줄리언(1342-1416) 등과 같이 독자적인 사회 집단으로 등장한 여성 환시가들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어떠한 종류의 진노도 찾을 수 없는”(노리치의 줄리언)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을 강조하였습니다. 삶에 대한 태도와 영성에서 피상적인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성성에 뿌리 내린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역할이 강조될수록 남성 중심의 위계 사회에서 긴장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개혁이 제시한 새로운 여성상은 중세 여성의 역할을 단절시켰습니다. 적어도 수녀원의 독신 생활을 통해 제한적인 자기 실현을 할 수 있던 여성들이 종교개혁 이후에는 가정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모습으로 이상화되어 버린 새로운 구도에 종속되었습니다. 독신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여성의 사회적 목소리에 대한 혐오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마녀사냥이라는 집단 광기가 등장했습니다.

   
▲ 마녀로 고소당한 여성을 고문하는 장면(1577). (이미지: 위키미디어코먼스)

3. 유토피아라는 환각의 제물이 된 마녀
민중들과 같은 주변부의 삶과 태도가 역사의 주제로 대두되면서 역시 주변부로 여겨졌던 마녀사냥이라는 주제가 20세기 말부터 역사학계에서 주목 받는 테마가 되었습니다. 마녀란 남성이 아닌 여성, 엘리트가 아닌 하층민, 과학이 아닌 미신에 빠진 사람으로 극단적 소외 집단을 상징합니다.

도미니크회 수사인 하인리히 크래머와 야콥 스프랭거가 쓴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Malleus Maleficarum, 1486년, 우물이있는집 역간)는 마녀 사냥에 대한 지침서입니다. 여기에는 “여성들이 결코 만족을 모르는 성적 탐욕”을 가졌기에 그 특성상 마술에 쉽게 감염된다는 스콜라 신학자들의 왜곡된 견해가 가감 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 지침서에는 마녀가 되는 방법과 마녀를 확인하는 방법, 마녀에 대한 재판 방법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표준적인 모습으로는 마녀들이 악마와 계약을 맺어 그 힘으로 마법을 행하고, 마녀 연회(Sabbath)에서 악마 숭배를 행하는 것입니다. 필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밤에 한곳에 모이기 위해서 그들은 빗자루를 타고 야간 비행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유럽 대륙에서는 1560-1630년까지가 마녀사냥의 최고 절정기였습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17세기의 유럽을 생산성이 감소하고, 인구가 하락하고, 전염병과 전쟁 등과 같은 사회 불안 요소들이 팽배한 위기의 시기였다고 보았습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내재된 불안 요인을 완화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내부적으로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문화적 사회적 갈등 속에서 종교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국가 안정에 필수적이었습니다. 이 차원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지배계층이 문맹인 대중의 신앙을 자신들의 신앙과 세계관으로 통합시키고자 시도했습니다. 신교, 구교 모두 교리 문답이나 신앙고백서 등을 교육하고,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처벌하는 종교재판 등이 시행되었습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유럽의 ‘그리스도교화’라고 부를 수 있는 독특한 정체성 확립이 시도된 시기입니다. 이러한 사회 전반의 ‘규율화’는 외적으로는 종교전쟁과 내부적으로는 마녀사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기 마녀와 악마 숭배를 동일시하는 사고의 전환은 실제로는 민중들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기보다 성직자, 신학자, 법률가, 정치가 등 지배층의 고안물이었습니다. 마녀의 체포·고문·재판·처형을 통해 만들어진 마녀의 이미지는 대중들이 마녀의 색출과 처벌을 통해 스스로를 사회질서와 도덕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하는 정체성을 강화했습니다. 마녀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반(反)종교, 무질서, 타락의 기제는 종교의 영역인 것 같으나 실상은 획일화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지배 권력의 ‘규정하기’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성, 그중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는 독신 여성이나 노인, 산파 등은 이러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제물이 되기 쉬웠습니다.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일어난 “세일럼(Salem)의 마녀사냥”은 약 140명이 마술에 사로잡혔다는 혐의로 재판에 기소되고 그중 19명이 교수형 판결을 받은 사건입니다. 마술에 대한 믿음, 여성에 대한 편견과 사회 집단 사이의 갈등 등에서 비롯된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대중들은 평화(salem)의 유토피아라는 환상 속에서 이 광기를 거들었으나 결과는 혐오와 불관용과 폭력이었습니다. 마녀사냥은 유토피아적인 사회질서를 원하는 지배계급이 이를 완성할 목적으로 여성과 약자를 희생양 삼은 집단 병리 현상의 전형입니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유토피아주의는 이 땅에서의 진보와 이상의 구현이라는 목적을 공유합니다. 하지만 국가의 지배 이념이나, 특정한 종교적 가치가 유토피아 구현의 중심이 될 수 있을까요? 유토피아를 꿈꾼 근대의 대다수 시도들은 슬프게도 디스토피아로 막을 내렸습니다. 근대 마녀사냥과 종교적 광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근대 사회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의 혼란이지만, 종교의 관용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오늘 21세기 혼란의 한국 사회에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된 가치만을 추구하는 허상을 봅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그 자체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척결하고자 하는 ‘마녀사냥’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기생해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다름에 대한 배제와 혐오는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계 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약자와 타자에 대한 혐오의 목소리는 위험수위를 넘나듭니다. 하지만 그것이 복음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을 내세울 때 사람들은 일단 멈칫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키자’거나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자’는 목소리 모두 전투적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표현하는 점에서 맥락상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동성애를 죄라고 명시한다. 그런데도 동성애를 죄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동성애나 페미니즘을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각도 존재하고 존중받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과,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혹은 동성애(자)를 옹호한다고 해서 명시적으로 차별을 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지금 이 사회에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혹은 그들의 편을 들어준다는 이들이 집단적인 정신적 폭력에 내던져집니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학문의 전당이라고 일컬어지는 대학에서 하루아침에 멀쩡한 직장을 잃습니다. 이것이 2018년 오늘의 현실입니다.

더욱 암담한 현실은 페미니즘이나 동성애에 대해서는 차별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심각하게 지적한 종교의 위선과 탐욕의 죄 앞에서는 바른 소리 한마디를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정신을 걸고 혐오와 배제를 행하는 이들에게서 디스토피아가 된 유토피아의 현실을 봅니다. 엘리트의 고안물로서 등장하는 악마화된 이미지의 타자, 여성혐오, 그리고 페미니즘이 동성애로 가는 길이라는 혐의를 둔 담론들은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효용이 다해감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부끄러운 말기적 현상입니다.

4. 유토피아, 다름을 관용하다
주변에 제가 알거나 교류하는 한동대 출신 대부분은 목회자와 선교사의 자녀들로서 어려서부터 ‘기독교의 가치’를 내밀하게 간직하고자 하는 ‘순수한’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주로 모여 있는 공동체에서 유감스럽게도 ‘타자’나 ‘다름’에 대한 이해와 고민을 하는 데 제약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공동체 내에서는 타자와 다름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배제하는 것이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라 ‘순수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한동대의 젊은 학부생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페미니즘이나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존엄과 가치입니다. 그 어떤 종교적 도그마도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가치보다 우위에 설 수 없습니다.

한 집단의 종교의 가치가 개인의 사상과 자유를 제한하는 순간, 그 집단은 더 이상 지성의 공간이 될 수 없습니다. 왜 한동대가 기독교 반지성주의의 요람이라는 비판을 받는지, 불편하더라도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다양한 사고와 토론이 허용되는 곳, 그곳이 바로 대학이고, 지성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곳에서 교육 받는 이들은 민주주의 사회에 걸맞은 지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번 한동대 내 페미니즘 특강으로 빚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최대 피해자가 누굴까요? 김대옥 교수일까요?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지성인으로서 비판적 사고와 타자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스스로 거세한 학생들 자신입니다. 지금은 그것이 내부 논리의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지켜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겠지만, 졸업하고 더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때를 한 번 그려보십시오.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모습을 무척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거든 영화 <1987>을 관람해보길 권합니다. 젊은이들을 빨갱이, 용공분자라고 낙인 찍어 내리 눌렀던 그 시대의 ‘지성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느껴보십시오. 그러면 지금 한동대의 젊은이들이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페미니즘 모임을 주도한 학생들과 그와 관련되었다는 교직원의 징계를 요구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스스로 기독교 진리의 수호자인 양 ‘승리하신 주’께 감사할지 모릅니다. 그들에게서 30년 전 ‘체제전복을 기도하는 용공분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 자들의 논리를 본다는 건 과한 주장일까요? ‘순결한 한동’이 추구하는 유토피아는 그 선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다름’에 대한 ‘마녀사냥’이 될 수 있습니다. 시대만 바뀌고 대상만 바뀌었지 본질은 여전합니다.

요즘 한국 개신교 출판계에는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냈던 로완 윌리암스의 책들이 여럿 소개됩니다. 낯익은 이름이니 반갑기도 하지만 실은 아주 많이 뜬금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정서에서 그의 사상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까 의심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국의 무슬림 공동체를 영국 사회 내로 온전히 통합하기 위해 이슬람의 ‘샤리아법’을 일정 부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성애 커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모델일 수 있으며, 동성애자 신부도 주교가 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예수의 제자 됨을, 듣기 좋은 얘기, 수용할 수 있는 담론만 수용하기정도로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슬람, 페미니즘, 동성애를 혐오의 대상으로 마주하는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히려 그의 사상을 편리하게 순화한 버전만 유통되어 본래의 가치를 훼손할까 두렵습니다.

토마스 모어가 추구한 유토피아의 핵심은 다름이 관용되는 세상이었습니다. 허나, 이 땅에서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이 지금도 교회 강단에서, 학교 강의실에서 다름에 대한 혐오를 확대재생산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페미니즘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동성애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어떠한 이유로든 신앙의 이름으로 혐오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치열한 학술적인 논쟁의 장이 되어야 할 대학에서 종교적인 도그마로 교수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는 것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다름의 문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고민하면서 해답을 찾아가야 할 것이지, 혐오와 배제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슬픈 역사의 반복을 끊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한동의 공동체는 진정한 기독교 지성의 전당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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