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티시아-인간의 종말 / 이반 자블론카 지음 / 김윤진 옮김 / 알마 펴냄 / 17,500원

18살 소녀 레티시아 페레는 2011년 1월 19일 프랑스 낭트 인근 포르닉에서 실종, 며칠 뒤 토막 난 사체 일부가 발견된다. 언론은 경쟁하듯 이 사건을 자극적으로 다룬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대규모 시민들은 레티시아의 납치 경로를 따라 추모와 시위 행진을 하느라 온 나라가 들썩였다.

“잠깐 유명했다가 덧없이 사라진 그녀의 운명은 묘하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는 죽은 순간에야 태어났다.”(9쪽)

역사학자인 저자는 ‘죽은 순간에야 태어난’ 레티시아를 주인공으로 이 책을 썼다. 그래서 그녀를 사건 속 끔찍한 피해자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갓난아기 때부터의 성장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는다. 유아기 가정 폭력, 청소년기 위탁부의 성폭행 등 어둠의 동굴을 지날 때는 닿을 리 없는 손을 내밀기도 하면서. 

아울러 사건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짚어 낸다. 단순히 ‘사고’로서가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서 레티시아의 죽음을 분석하고 탐구한다. 이를 위해 아이와 여성들의 사회적 조건, 대중문화, 폭력의 형태, 미디어, 사법, 정치, 도시 공간 안에서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는 레티시아의 부모, 친구, 동료 그리고 재판관, 변호사, 기자 등과 대화하며 끝내 레티시아를 ‘살려’ 낸다. 다시는 이런 끔찍한 ‘여성 혐오 범죄’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연, 즉 유기되는 아기들, 고아원에서 강간당하는 소녀들, 학대받는 하녀들,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되는 여자 행인들의 사연 외에는 아무것도 물려받은 것이 없는, 발랄하면서도 우유부단한 미지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레티시아는 이 세상에 딱 18년을 머물렀지만, 때로 내게는 수 세기를 살았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480쪽)

수 세기, 아니 더 오래전부터 덧없이 사라진 수많은 레티시아가 있었다. 그들 모두 ‘한 사람’이고, 그들 모두 주인공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곧 인간의 종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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