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최종편집 : 2018.6.22 금 16:48
기사검색
   
> 뉴스 > 청년 | 스무 살의 인문학
       
부서진 언어
[328호 스무 살의 인문학]
[328호] 2018년 02월 26일 (월) 17:39:23 김희림 철학을 좋아하는 20대 인문학도 goscon@goscon.co.kr
   
▲ 한국 사회는 영어를 욕망한다. 영어는 한국 사회에서 언어가 아닌 권력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www.pixabay.com)

이카루스의 날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도 듣기는 좋습니다. 길을 걷다가 노래가 들리면 기분 좋게 흥얼대기도 했지요. 그런데 가사를 찾아보면 늘 당혹스럽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음악을 깊이 좋아하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막이 따로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정말 아무리 고민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가사를 틈틈이, 꼬박꼬박 메우고 있는 ‘영어’였습니다. 특정한 영어 단어를 모르겠다기보다 영어가 그렇게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자체가 흥미로웠습니다. 두 문장 이상 영어로 말하는 경우는 결코 없었으나, 두 문장을 말하면 한 단어는 꼭 혀를 굴리는 영어를 구사하더군요.

물론 힙합은 영어를 좋아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될 일입니다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힙합을 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영어 표현을 가사에 삽입하는 수준이 아니라 미국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만 같다는 점이 신기합니다.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복장과 문화를 갈망하고 심지어 그들의 성장 배경까지 탐합니다. 그들처럼 거칠고 험하게 자랐음을 드러내며 이 사회의 평가 방식에 편입되지 않을 것을 외칩니다. 떡볶이 사먹고 집에 가서 구몬 학습지 풀면서 컸다는 것과, 공교육에 복속되지 않을 것을 외치면서 그보다 더 편협한 공중파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힙합은 자유니까요.

공작의 꽁지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일어날 법한 상황을 묘사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올림픽 진행을 돕는 두 자원봉사자가 등장합니다. 개중 남성이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매력을 뽐내려고 하지만, 정작 ‘외국인’―혹은 서양인―이 말을 걸자 남성은 횡설수설하지요. 눈치 채셨겠지만 이 영상은 영어 강의를 판매하는 광고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영어 강의 광고는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없어서 곤욕을 치르거나 기회를 놓치는 모습, ‘외국인’이 말을 걸어서 급히 당황하거나 심지어 도망치는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잘 묘사하지요. 영어를 잘해서 좋은 점보다, 영어를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표현하고 과장하기 바쁩니다.

앞선 광고에서 제 눈에 가장 띄었던 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영어 회화에 대한 능력을 과시하며 매력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사회적 자원을 가진 남성이 그 자원으로 성적 매력을 구입하는 흔한 구성이지요. 여성이 영어 회화 능력을 과시하고 남성이 그에 매력을 느끼는 광고는 보기 힘들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여기서 ‘영어가 사회적 자원’이라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재력이나 학력과 같이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자 지표이지요. 그런데 궁금합니다. 영어 회화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요? 능력을 묻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영어로 말하고 듣는 것은 충분히 대단하지요. 제가 알고픈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두가 영어를 욕망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을 왜 욕망하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영어 교육계의 다른 광고들을 살펴보면 궁금증이 더 커집니다. 최근 가장 인기를 끄는 업체의 ‘영어 공부를 몇 년씩 해도 5분을 영어로 말하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광고 문구를 두고 왜 대한민국의 수많은 영어 선생님들은 여기에 대대적으로 반박하지 않는지 한참이나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5분 말하기도 못 가르치고 10년을 헛되이 가르쳤다는 것에 다들 동의하시는 걸까요? 영어 선생님들의 반응이 어떠했든 간에 공교육 과정에서 10년 이상 영어를 공부하던 이유가 5분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위함이라면 10년의 공부는 얼마나 무의미한 것입니까. 한 달만 영어권 국가에서 살아도 5분은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요.

영어교육과에 다니거나 영문학과에서 교직 과정을 밟는 친구들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왜 영어를 가르쳐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는 ‘영어는 다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너는 영어 공부 안 했느냐’는 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간혹 영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하나의 언어니까 필수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런데 12년을 배우고 왜 5분도 의사소통을 못 하느냐고 묻자 답을 아꼈습니다. 글쎄요, 영어가 정말 그저 하나의 언어인가요? 스와힐리어나 헝가리어처럼요?

소설적 진실
한국 사회는 영어를 욕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어’가 무엇인지는 따져볼 일입니다. 역사언어학이나 외국어 교육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한국 사회에서 욕망되는 영어는 그러한 영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니까요. 그보다도 한국 사회에서 상정되는 영어의 존재 값은 미학적 복제품(Simulacrum)에 가깝습니다. 미국을 좇지만 미국에 다다르기에 태평양은 너무 넓기에 영어를 잘라 수입합니다. 떡볶이 먹으면서 학습지를 풀던 래퍼들이 뉴욕 뒷골목의 삶을 흉내 내듯 말입니다. 미국인들이 입었던 옷을 빌려 입고 그들의 말투를 따라하지만, 그 모습은 흡사 아버지의 양복을 입고 면도하는 흉내를 내는 아이와 비슷합니다.

플라톤과 보드리야르가 다루었던 원본의 상실에 관한 문제가 다시 제기됩니다.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가 지워지며 복사본이 원본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 감정과 언어, 문화도 충분히 복제가 가능합니다. 그렇게 복사된 복제품에는 원본의 흔적이 새겨져 있으나 원본은 아닙니다. 영어는 분명한 언어이지만, 그 복제품을 수입한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언어로 소비되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가 영어를 언어로 소비하면서 이렇게 천문학적인 자본을 영어 교육에 쏟았다면 저는 아마 지금 이 글을 영어로 쓰고 여러분과 영어로 토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현실은 조금 다르지요. 영어는 언어지만, 우리는 영어를 언어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언어가 아닌 권력입니다. 언어로서의 영어를 모방하는 것만으로도 권력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영어를 10년을 배워도 5분을 말하지 못해 마음을 앓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영어로 5분만 말할 수 있어도 대단한 명예를 획득할 수 있는 현실을 의미하지요. 앞서 말했듯 이것은 그렇게 대단한 효용을 갖지는 않습니다. 길을 물어보는 외국인을 매일 마주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권력으로서의 영어는 구별짓기의 기준이 되기에 사람들의 모방 욕망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사람들은 무수하게 많지만 영어를 왜 잘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의외로 번듯한 답이 나오지 않지요. 이 질문은 마치 왜 돈이 많았으면 좋겠냐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문(愚問)이지요. 딱히 사고 싶은 게 없더라도 돈이 많을수록 좋은 것처럼 영어로 생산 및 소비하고픈 정보가 없더라도 영어는 잘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이 필요를 앞설수록 그 욕망은 모방된 것입니다. 그 욕망이 타인의 것을 복제한 게 아니라 나의 독자적인 것이라고 믿는 낭만적 거짓은 공허하지요. 의사소통을 잘하기 위해 영어를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잘하기 위해 의사소통을 연습합니다. 영어는, 일단 잘해야 하거든요.

부서진 언어
그렇게 우리는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을 찢어 스스로를 치장합니다. 몇 년 전 문학계를 뒤흔든 어느 유명 작가의 표절 사건을 기억합니다. 일본 문학계의 전후 리얼리즘의 표현들을 가위로 자르듯 잘라내어 자신의 소설에 끼워 맞춘 그의 글을 읽으며 저는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 문학계의 썩은 현실 따위에 놀란 것은 아닙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제가 경악했던 것은 문학에서도 저렇게 대놓고 표현들을 표절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문학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타 분야와 문학에서 소비되는 언어적 표현은 분명 그 무게를 달리한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학은 언어를 숭배하는 예배가 아니던가요. 인간이 갖는 그 뿌리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모방 본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0년대에 서양 언어를 수입하지 말고 우리 언어로 세계를 구축하자는 분위기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탈식민주의 담론은 아니고, 민족주의적인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에요. 요즘 시대에 영어를 배우지 말자는 허상을 부르짖는 것도 아니며, 한국식의 수동적인 영어 교육에 개탄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어를 쓰지 않고 음악을 하고 일본 소설을 참고하지 않고 소설을 쓰자는 이야기도 결단코 아닙니다. 다만 한국 사회가 영어라는 것을 소비하는 방식을 지켜보면서 시뮬라크르적인 추(醜)의 미학을 말하고 싶었고 그것을 가능케 만든, 힙합과 소설이라는 가장 창조적이고 표현적이라는 순간까지도 표절적 모방이라는 소설적 거짓으로 점철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권력과 언어의 관계를 비추어보았습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권력의 언어를 탐하면서도 그것을 비루하기 짝이 없게 표절하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에토스를 언급하고 싶고요. 한 가지를 더 말할 수 있다면,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라는 격언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또한 서술하고 싶습니다. 모든 창조된 것들의 어머니는 모방이지만, 모방이 반드시 창조를 낳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가 아니라, 창조가 모방의 어머니일 뿐입니다. 적잖은 모방은 태어나며 어머니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를 살해하고요. 모방에서 시작해 모방을 축하하고 경외하며 모방으로 늙는 인간의 한 단면을,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권력인 영어를 빌어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언어의 부서진 조각들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구축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제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삶을 복사해서 노래한 음악이 팔리지만 정작 미국인들의 힙합이나, 한국어로만 쓰인 힙합은 그만큼씩 소비되지 않습니다. 부서진 언어의 조각들을 기우는 가난한 모방자들에게 두 언어는 모두 추임새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힙합 가사의 구성처럼 우리네 사회는 굴러갑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실존의 문제에 부딪쳤을 때 이것과 저것 모두를 모방하고 창조성을 살해하면서요. 모두가 영어를 욕망하지만 아무도 영어를 쓰지 않는, 그리고 아무도 영어를 쓰지 않지만 모두가 영어를 욕망하는 이 사회에서 말입니다.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3학년으로, 현재 휴학중이다.

     관련기사
· 주체의 ‘장례식’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복음과상황 기사제보 광고문의 제휴안내 오시는길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506-10 산성빌딩 104호 우)120-836 | 전화 : 02-744-3010 | 팩스 : 02-744-3013
발행인 : 김병년 | 이사장 : 박종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병년
Copyright 2008 복음과상황.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con@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