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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제 인권활동가의 눈으로 본 제주4·3
[229호 커버스토리] 국제 인권활동가 백가윤 제주다크투어 공동대표
[329호] 2018년 03월 26일 (월) 15:10:09 이범진 poemgene@goscon.co.kr
   
▲ ⓒ복음과상황 오지은

비행기가 제주공항에 착륙하면 4·3의 70주년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나온다. 제주4·3이 벌어진 지 70년이 된 올해, ‘다크투어’(dark tour)를 위해 제주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다크투어는 참혹한 참상이 벌어진 장소나 재난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이다. 제주 북촌마을, 가시마을, 의귀마을, 동광마을, 금악마을에는 ‘함께 걷는 4·3 길’이 조성되어 있다. 주로 두려움의 기억, 비극의 흔적이 서린 곳이다. 그러나 안내판의 짧은 소개만으로는 부족하다. 앞뒤 맥락을 모르면 슬픔은 모호해지고 분노는 증발한다. 이에 제주의 시민단체와 관련 기관들은 여행객들의 다크투어를 돕고자 자료집 발간, 해설사 양성 등 다방면으로 애를 쏟는다.

특별히 비영리단체 ‘제주다크투어’는 4·3 평화기행, 유적지 기록 등에 주력하고 있다. 얼마전 ‘진아영 할머니 삶터’를 비롯해 아는 사람만 찾아올 수 있었던 유적지들을 포털 지도 서비스에 등록한 이도 그들이다. 방문자들이 안내자 없이도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단체를 만든 백가윤 공동대표의 이력은 독특하다. 영국 런던정경대학교에서 인권학(석사)을, 워릭대학교에서 인권법(석사)을 공부하고 국제기구에서 인권문제를 다루다가 귀국하여 참여연대에서 국제연대위원회와 평화군축센터 간사를 맡았다. 지금은 4·3을 알리기 위해 제주에 살면서 활동가의 길을 걷는다.

국제 인권문제, 특별히 아시아의 인권 개선을 위해 활동했던 그의 시선으로 4·3을 돌아보고자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70년 전 제주4·3의 학살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라며 “제주4·3의 해결은 곧 오늘날의 국제 인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또한 “제주4·3은 들여다볼수록 무고하고 불쌍한 희생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항쟁의 역사로 읽힌다”고 말한다.

3월 5일, 제주도에서 백가윤 대표를 만났다.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를 골라 동행해 달라고 요청했고, 중간중간 주고받은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 국제 인권활동을 해왔다고 들었습니다. 
인권에 대한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청소년 시절부터, 남을 돕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신앙처럼 자리 잡은 것 같아요. ‘하느님이 왜 나한테는 이렇게 좋은 환경을 주셨나’ 싶었어요. 꼭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나에게 준 것 같은 느낌에 늘 빚진 마음이었어요. 인권에 관심이 많았고, 영어를 좋아하니까 자연스레 국제 인권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유엔인권정책센터(KOCUN)라는 단체에서 인턴을 거쳐 영국 대학교에서 인권법 공부도 하고요. 이후에는 ‘포럼아시아’(FORUM-ASIA, Asian Forum for Human Rights and Development)라는 단체에서 동아시아 담당관으로 일했어요.

― ‘포럼아시아’에 대해 짧게 소개해주신다면요.
아시안의 얼굴로 아시안의 목소리를 내는 단체예요. 아시아의 60여 개 회원단체가 네트워크를 구성해 아시아의 인권 증진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참여연대와 국제민주연대가 회원으로 참여해요. 1991년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설립되었는데, 현재 사무국은 태국 방콕에 있어요.

― ‘인권 증진’ ‘인권 옹호’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쉽게 말해 인권 침해가 벌어지는 곳에 인권이 지켜지도록 하는 활동입니다. 이를 위해 국제사회에 탄압 사실을 알리고, 인권 증진을 위해 여러 주체들과 연대하지요. 대표적으로 의사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이 탄압받는 지역이나 사람들의 목소리를 국제사회에 전달하는 일입니다. 이 외에도 주거권, 교육권 등 다양한 권리들을 대변하는 활동을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의 경우 백남기, 한상균, 박래군 등의 운동가들이 공권력에 의해 심하게 다치고 체포되었는데요. 이런 인권 침해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려 ‘인권 옹호자’들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한 활동이에요. 현장조사, 서명운동, 보고서 발표, 국회 로비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응하고, 국제단체를 활용하는 것이죠.

― 인권을 위해 국제사회와 연대하는 중요한 활동들인데, 굳이 국내로 돌아온 이유가 있나요?
정체성에 혼란이 왔어요. 포럼아시아에서 활동하던 당시,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을 초청해 국제 워크숍을 진행했어요.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문득 ‘집회 한 번 안 나가본 내가 아시아의 집회 결사 자유를 논할 자격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뭐랄까, 어느 순간 제가 의전을 담당하는 ‘여행사 직원’ 같더라고요. 그때 고민을 더 깊이 하게 된 것 같아요.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피해자를 만나지 않으면 나는 ‘공무원’이 되겠구나 싶었어요. 물론 여행사 직원이나 공무원이 나쁜 일이라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어요. 인권활동가는 피해자들을 대변해야 하는데, 정작 피해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대변하기가 어렵잖아요. 한국에 가서 현장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마침 참여연대에서 국제연대 담당자를 뽑고 있어서 지원했죠. 참여연대에서 6년 반 넘게 일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해보고 싶은 일도 다 한 것 같아요.

― 현장은 어땠나요?
첫 현장은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운동이었어요. 한 달에 한두 번 서울과 강정마을을 왔다 갔다 했어요. 현장 활동가들과 소통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강정마을은 잊지 못할 현장이자, 활동가로서 ‘첫사랑’ 같은 곳이에요. 국제연대 활동가는 현장 분위기와 이슈의 사실관계를 잘 알지 못하면, 현장 활동가들의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그분들 노력을 가까이서 보았기에, 국제사회에 알릴 때는 더 신중하게 되지요. 그 애씀의 무게감을 느꼈다고 할까요? 현장에서 본 활동가들 정말 대단해요. ‘나는 절대 저렇게 못해’ 하는 존경심을 자주 느꼈어요.(웃음)

― 그럼에도 제주 해군기지가 들어섰잖아요.
보통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끝난 싸움이 아니에요. 기지건설로 인해 연산호 군락지가 다 파괴되는 환경문제가 발생했고, 동북아시아 평화 안보 문제 등 아직 법정으로나 현장으로나 계속 싸우고 있어요.

   
▲ 섯알오름 희생자 학살터 ⓒ복음과상황 이범진

― 4·16연대 국제팀에 파견되기도 활동하셨는데요.
세월호 참사는 사실 너무 충격적이라 처음에는 계속 외면했어요. 안산 분향소에 다녀와서는 더는 외면할 수 없어서 맡았습니다. 관련해서 국제 연대나 국회 지원 업무를 맡았어요. 사실 처음에는 유족들이 시민단체와 함께하는 일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으셨어요. ‘운동가’나 ‘활동가’가 아니라 평범한 엄마 아빠로서 목소리를 내시는 거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분들이 점점 투사로 바뀌어야만 하는 상황과 과정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아팠어요. 세월호 참사는 그분들의 평범한 삶을 강탈한 거예요. 절규하지 않아도 되는 분들이, 활동가도 아닌 분들이 투사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슬프더라고요. 세월호 관련 일을 할 때는 퇴근해서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엄마 무릎 베고 누워 30분 넘게 가만히 있었죠. 유족들은 어땠겠어요.

― 지금은 ‘제주다크투어’ 공동대표로 있습니다. 어떤 곳인가요?
이름 때문에 여행사냐고 묻는 분들도 있는데, 비영리단체예요. 제주4·3 유적지 탐방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4·3을 국내외에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재단 인큐베이팅 사업의 지원을 받아 준비하기 시작했고, 올해 1월부터 본격 활동을 시작했어요. 요즘엔 110여 개 제주 시민단체들이 모여 만든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 평화기행 사업을 맡아 다른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진행하고 있어요. 여러 국제단체들이나 외신 기자들이 오면 대응하고요.

― 4·3과 관련한 일을 시작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고민을 심각하게 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더 겁 없이 달려들었나 싶기도 해요.(웃음) 사실은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개인적으로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세월호 엄마 아빠들이 계속 자식들 이야기하는 것도, 잊혀지는 게 두려운 것이겠구나 싶었어요. 나에겐 너무 소중한 자식이 한 순간에 사라졌는데, 세상은 너무 ‘멀쩡하게’ 돌아가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요. 저도 소중한 가족을 잃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제주다크투어를 시작한 이유는 인권활동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정성스레 염을 해주는 모습을 보고 큰 위로를 받았어요. 장례식장에 백남기 어르신의 따님과 세월호 유가족이 오셨을 때, 말로 표현하지 못할 큰 위로를 받았고요. 4·3의 억울한 죽음도 제대로 애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주는 시작일 뿐이에요. 알려지지 않은 다른 지역의 희생도 많아요. 일본 오키나와, 태국 타마삿, 스리랑카에서 벌어진 킬링필드도 재조명하는 기행으로까지 확대하고 싶어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운명처럼 이 일을 시작한 것 같아요.

백 대표가 본지 취재팀을 처음으로 이끈 곳은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섯알오름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국이 344명을 ‘불순분자’라며 구속했고, 계엄군에 의해 211명이 이곳에서 집단학살되어 암매장되었다. 211위는 유가족이 수습하였으나, 41위는 행방불명되었다. 1945년 미군정이 폐지한 예비검속법(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법률)을 악용한 것으로, 법적 절차 없이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비극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고사포 진지(위)와 일본군이 기지로 사용하던 동굴 ⓒ복음과상황 이범진
   
 

― 한국전쟁 시의 학살인데, 이곳이 ‘4·3 유적지’인 이유가 있나요?
4·3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사람은 다 잡아 들였다고 해요. 당시에 산에 잠깐이라도 있던 사람들은 다 가두었다가 죽인 거죠. 창고에 갇혀 있을 때만 해도 풀려날 거라는 기대를 했겠지만, 방금 지나온 이 길을 지나올 때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싶었던 것 같아요. 길에다 고무신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거든요. 고무신을 따라서 시체라도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제주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시민단체 선배들은 말해요. 4·3의 유적지를 점(點)으로 보지 말고, 선(線)으로 봐야 한다고요. 저도 아직 그 경지는 아니라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제주 역사의 맥락을 보는 게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해요. 학살터는 정말 너무너무 많아요. 그러나 전체 흐름을 알지 못하면 유적지를 아무리 많이 둘러보아도 4·3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거죠.

― 어떤 맥락을 봐야 할까요?
이곳 대정읍의 경우 일제강점기부터 군사기지 요충지였어요. 여기서 조금만 걸으면, 일본군이 만든 고사포 진지가 있어요. 지하벙커, 진지동굴도 있고요. 알뜨르비행장은 비교적 유명하지요. 일본군이 제주도민을 동원해 건설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초기지로 사용했어요. 그래서 대정읍에는 일본군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4·3 때는 물론 한국전쟁 때도 군인과 경찰에게 또 학살을 당했고요. 1951년에는 이곳에 육군 훈련소가 들어옵니다. 지속적으로 전략적 요충지로 이용되는 거죠. 이곳에 주둔하던 많은 군인들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고 들었어요.
 
고사포 진지, 지하벙커, 동굴진지 등을 둘러보고 차로 8분 거리에 있는 ‘백조일손묘역’(百祖一孫墓域)을 찾았다. 백여 구의 묘지가 하나의 위령비 앞에 모여 있다. 예비검속 당한 사람 중 모슬포 절간 고구마창고에 구금되었다가 학살된 이들이 안장되어 있다.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학살이 벌어진 6년 뒤, 1956년이었다. 뼈들이 뒤엉켜 있었고 신원을 구별할 수 없었다. 백조일손의 묘. 즉 ‘서로 다른 132인의 조상들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서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다.

― 4·3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다루는 일이네요.
일을 시작하면서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어요. 그때 저희에게 하신 말씀이 “3만 영혼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어요. 4·3을 알아갈수록, 그 말씀을 더 곱씹게 됩니다. 겁이 없어서 시작한 것 같아요. 죽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복상〉이 기독교잡지라고 하니까 솔직히 터놓자면, 하느님밖에 위로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해요. 학살터에 갈 때도 성호를 긋고 주모경(‘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읽고 가게 돼요. 물론 그렇다고 제가 ‘독실한’ 신자는 아니에요.(웃음) 
 
― 기존 제주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제주다크투어를 어떻게 보나요?
제주 시민단체 ‘선배’들이 보기에 저희는 ‘육지에서 내려온 천둥벌거숭이’겠지요. 4·3에 대해서 모르니까 저렇게 뛰어들었구나 싶을 거예요. 그래도 제주 사람이라서 더 말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하고 있으니까, 잘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더 도와주려고 하세요. 사실 그분들로부터 배우는 게 많아요. 아직도 더 배워야 하고요.

   
▲ 남원읍 충원묘지 ⓒ복음과상황 이범진

― 제주 출신 활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다 보면, 교과서나 역사책에서는 배울 수 없던 내용들도 많이 알게 되겠어요.
이 일을 오랫동안 했던 선배 중 한 사람은 ‘4·3 희생자를 불쌍한 사람으로만 보면 안 된다’고 강조해요. 국가보고서에는 4·3을 제주 남로당이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해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3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보잖아요.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제주 시민단체 활동가 선배들 관점은 좀 달라요. ‘무지렁이’ 양민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죽은 게 아니에요. 해방 이후 일본에서 머물던 조선인 중 6만 명 정도가 제주도로 귀국해요. 당시 도민들은 서울보다도 교육 수준이 높았다고 하지요. 어렵게 얻은 해방인데, 다시 남북으로 갈리는 것을 안타까워한 도민들의 항쟁 역사로 읽어야 한다는 거지요.

― ‘사건의 희생자’에서 ‘항쟁의 주체’로 봐야 한다? 
제주에는 예부터 ‘장두’(狀頭)의 역사가 있대요. ‘장두’는 여러 사람이 소장이나 청원을 낼 때, 맨 위에 이름을 적는 사람을 일컬어요. 제주에서는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앞장서는 인물을 뜻하지요. 핍박의 역사를 갈아엎으려고 나오는 사람이죠. 삼별초 항쟁이나 ‘이재수의 난’ 같은 거요. ‘난’(亂)이라고 하지만, 사실 부패한 가톨릭 신자들의 민중 수탈에 맞선 항쟁이었잖아요. 그때가 1901년이에요. 그때부터 1948년 4·3이 벌어지기까지 살아 있던 사람들은,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나 하나 목 바치고 죽으면 더 좋은 세상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겠지요. 무장대는 자그마치 6년여의 시간을 싸웠어요. 주민들의 지지와 지원이 없었다면 그토록 오랜 시간 버티며 싸울 수는 없었겠죠. 500명 무장대가 그 긴 기간 산에서 어떻게 버텼을까요. 누군가는 밤에 군경의 눈을 피해서 음식을 갖다 준 거죠. 그래서 ‘500명의 항쟁’이 아니고 ‘제주도민 전체의 항쟁’이라고 생각해요. 이덕구는 1949년 6월에 죽습니다. 토벌대는 그의 시신을 관덕정에 십자형으로 걸어 전시했어요. 지금은 동백꽃이 4·3의 상징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불길한 꽃이었어요. 시들지도 않은 생생한 꽃이 똑 떨어지는 게 마치 사람 머리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동백꽃을 ‘장두의 꽃’이라고도 합니다. 강요배 화가가 <동백꽃 지다>라는 그림을 그리고, 꽃이 떨어지는 게 마치 희생당한 사람들 같아서 4·3의 상징이 되었죠.

― 4·3이 ‘화해와 상생’의 상징으로 회자되고 있는데요.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지만, 현재는 동의할 수 없어요. 정말로 모든 것을 용서했나요? 아니요. 어쩔 수 없으니까 같이 사는 것뿐이에요. 피해자와 가해자가 친척 간에도 뒤섞여 있으니 서로 얼굴은 봐야 하잖아요. 참고 사는 거죠. ‘화해와 상생’은 좋은 말이지만, 제주도의 현실을 모른 채 미화된 잘못된 상징이라고 생각해요. 적당히 화해하고 넘어가면 안 되죠. 드러나야 할 진실은 아직도 많고, 가해자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어요. 보수적인 단체에서는 가해자 흉상을 세운다고 해 유가족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어요. 반면 유가족을 비롯한 제주도민 대다수는 빨갱이가 아닌 것을 늘 증명해야 하는 강박에 시달리고요. 그래서 베트남전쟁에도 많은 도민들이 참전을 했고, 아직도 빨갱이가 아닌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려요. 공무원을 자식으로 두고 있으면 여전히 희생자 가족이라고 쉽게 밝히지 못하는 게 현실이에요. 묘원을 돌아보면 현실이 더 생생히 보여요. 가해자 측인 군인 및 경찰의 묘원(충혼묘지)은 매우 웅장하고 화려해요. 민간인 희생자들의 묘원은 화려하진 않지만,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고요. 그러나 무장대의 묘원은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어려워요. 관리도 안 되고 있고요. 지금 이 상태를 ‘화해와 상생’이라고 말한다면, 역사는 안 좋은 방향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어요. 해방 후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해서 여전히 우리가 그 굴레에 있는 것처럼요.

   
▲ 송령이골. 무장대 시신이 세 구덩이에 집단 매장된 곳 ⓒ복음과상황 오지은
   
▲ 현의합장묘. 80여 명의 시신이 안장되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여전히 4·3은 현재진행형이라는 말로 들리네요. 묵혀둔 상처 같은….
다크투어를 하는 분들도 ‘슬픈 역사다’ 하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요. 4·3은 면밀히 살펴보면 현재진행형입니다. 당시 도민들이 외친 구호가 “통일독립 전취하자” “친일모리배 척결하자” “단독정부 수립반대” 등인데 아직도 그 구호는 유효하지요. 패전국인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나뉘고, 오히려 친일파가 득세했잖아요. 남북 갈등은 여전하고, 우리는 휴전 상황에 너무 익숙해져서 국방비 펑펑 쓰는 데 무감각하고, 미국이 우리나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비정상의 상황을 매우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고요.

다음 목적지는 한림읍 월령리에 있는 ‘진아영 할머니 삶터’이다. 고(故) 진아영 할머니(1914-2004)는 4·3 때 토벌대의 총격으로 턱을 심하게 다쳐 무명천을 두르고 평생을 살아 ‘무명천 할머니’로 불렸다. 말도 정확히 하지 못했고, 음식 섭취도 어려웠다. 평생 아무에게도 음식 먹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의 삶터는 2008년부터 추모관이 되었다. 벽에 걸린 ‘월령교회 달력’은 할머니가 요양병원으로 가던 해인 2001년에 멈춰 있다. 생전에 드시던 음료와 약, 각종 양념장들, 입던 옷, 매만지던 물건 등이 그대로다.

― 이곳처럼 기억되고 기록되는 곳보다, 잊혀지고 사라지는 곳이 훨씬 많겠지요?
그럴 거예요. 4·3평화공원에 가면 위패가 1만5천 개 정도 있어요. 희생자가 3만 명이니까, 나머지 반은 위패도 없는 거지요. 일가족이 다 죽었으면 파악을 못 하니까요. 솔직히 4·3 때 살아계셨던 분들의 그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 증언을 듣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고민하다가도, 이미 사라진 것처럼 앞으로 사라질 역사를 생각하면 너무 아쉽잖아요. 얼마 전에는 유적지를 찾아갔다가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4·3 때 사람들 숨어있던 굴이 어디냐고 여쭤보니 바로 알려주세요. 그곳 앞에는 유적지 표시판도 없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거죠. 이런 걸 알고 계신 분들이 말씀 안 하시고 돌아가시면 아무도 모르는 굴이 되는 거거든요. 또 하귀리에는 토벌대가 임산부의 배를 찔러 죽인 ‘비학동산’ 사건이 있어요. 워낙 잔인한 사건이라 잘 알려져 있는데요. 그때 죽은 아기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의 할머니들은 다 알고 계셨더라고요.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인데, 후대 사람들이 알고 기억해야 하잖아요.

   
▲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복음과상황 이범진
   
▲ 진아영 할머니의 물건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참혹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4·3의 끔찍한 이야기들은 지금 세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에요. 지금도 어느 지역에서는 군인들이 네 살 아이를 바위에 내던져 죽이는 일이 벌어져요. 4·3 학살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지요. 4·3에는 인권의 모든 문제가 다 담겨 있어요. 4·3 문제를 해결에서 좋은 ‘선례’를 만드는 게 다른 나라 인권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연결되고요. 곧 아시아 친구 60명이 제주를 방문할 예정이에요. 제주도민의 항쟁 역사와 그 용기를 이야기해줄 생각입니다.

― 국제사회와 연대하는 일도 있나요?
4·3이 미군정 시기의 일이니까 유족회 차원에서 미국 책임을 묻자는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서명운동을 같이하고 있는데요. 서명을 받고 미국의 책임을 묻는 일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은 있겠지만, 국제사회와 연대하며 진행해가야죠. 개인적으로는 제주와 유사한 역사를 지닌 일본 오키나와와의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실제 오키나와 주민들은 제주도민과 소통하기 위해 모여서 꾸준히 한국어를 공부해요. 우리도 그 정도의 노력과 시민의식이 있어야 연대 시너지를 제대로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이런 것 필요하니까 얼른 구해줘’ 하는 소극적인 방식의 연대는 이제 탈피해야죠.

   
▲ 제주다크투어 강은주(우) 공동대표 ⓒ복음과상황 오지은

― 시민단체가 전체적으로 어렵다고 하는데, 제주다크투어는 어떤가요?
저희도 수익구조 창출이 가장 시급한 과제예요.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죠. 현재 두 사람이 최저임금으로 일하고 있어요.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더 필요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여행 와서 하루에 20-30만 원 쓰는 것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기획료 지불하는 건 매우 아까워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든 깎으시려고 하고.(웃음) 그래도 정착을 잘 하고 있어요. ‘그분’이 함께하신다는 느낌이 있어요.

― 활동가로 살아가는 일이 힘들지 않나요?
아시아 시민단체들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에요. 자기를 혹사하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사명감으로만 운동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각기 다른 계기로 활동가의 길을 선택하잖아요. 자기를 돌볼 시간이 없어지면 오히려 오래 못 가는 것 같아요. 아시아활동가대회 때 ‘시민단체도 노조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어떤 분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면서 파르르 떠시더라고요. 참여연대도 노조 만들었잖아요. 기업에는 노조 만들라고 운동하면서 왜 우리 안에는 그 운동을 적용 못하나요?

― 교회 단위로 참가를 신청할 수 있나요?
그럼요. 참가 인원이나 상황에 맞게 다크투어를 기획해드려요. 인원이 채워지면, 유족과 만남도 가능하고요. 특히 교회는 4·3 때 토벌대로 자원한 서북청년단과도 매우 관계가 깊잖아요. 교회 관련 유적지도 다니며 ‘원죄’를 돌아본다면 자연스럽게 성찰과 속죄, 위로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꼭 70주년이라서가 아니더라도, 내년에나 그 이후에라도 신앙인들이 꼭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 기억하고 싶은 길 - 제주다크투어
문의 : jejudarktours@gmail.com
블로그 : blog.naver.com/jejudarktours
후원 : 농협 351-0972-5365-33 (예금주: 제주다크투어)

 

정리 이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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