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호 믿는 '페미'들의 직설]

   
▲ "누군가의 딸·아내·엄마로만 여겨질 뿐 자신을 오롯이 설명하는 '이름'을 가져보지 못한 여성들에게 복음은 '이름'을 선물했다." (사진: Public Domain Picture)

나를 둘러싼 호명에 적절히 반응하며 살아온 지 어언 28년이다. 여기 얽힌 몇 사건이 기억에 있다. 우리 집은 딸만 넷인 딸 부잣집이다. 남들은 ‘집안 분위기가 화사해서 좋겠다’ ‘나중에 딸들이 부모님께 크게 효도한다던데, 희년 부모님은 호강하시겠네’ 등등 듣기 좋은 말들을 쏟아내지만, 거기엔 은폐된 슬픈 속사정이 있다. 우리 엄마가 줄줄이 네 명의 딸을 낳은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아들’을 낳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지금보다 남아선호가 더 심해 여아 낙태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마침 ‘아들 배’ 모양이고, 태중에서 내가 워낙 활발하게 놀아서 집안 어른들은 ‘아들’이라고 확신했단다.

이런 집안 어른들의 강한 추측은 곧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나, (어른들 입장에선 안타깝지만) 나는 명확히 ‘여성’이었다. 그래도 ‘상징적 아들’을 포기 못하셨는지 남성들만 쓴다는 돌림자를 내 이름에 친히 새겨주셨다. 나는 아빠 직계 가족에서 돌림자를 사용한 최초의 여성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희년은 장군감이야!” “우리 집안에서 아들 역할을 해야 한다” “희년은 고추만 달고 나왔으면 완벽했을 텐데!”라는 말들을 듣고 자라며 이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했다. 어릴 적 화장실에서 돌출되지도 않은 성기를 부여잡고 서서 소변을 보다가 입고 있던 바지를 버리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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