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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장례식’
[329호 스무 살의 인문학]
[329호] 2018년 03월 28일 (수) 10:58:05 김희림 goscon@goscon.co.kr
   
▲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자기 의지와 욕망의 '주체'였던 적이 있을까요? (사진: Alex lby on Unsplash)

‘증세 없는’ 복지
제 독일어 선생님은 스위스인입니다. 그와는 네 달 정도 함께 공부했는데 그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척 친해졌지요. 선생님과 이야기하면 늘 새로운 세상을 조금씩 엿볼 수 있었습니다. 독일어라는 언어로 세상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스위스인과 종교·사회·문화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더 놀라울 정도의 신선함을 선사합니다. 수백 년간 왕이 없었던 소규모의 직접민주주의 문화에서 신(God)을 인식하는 방식은 100년 전까지 철저한 왕조였던 국가의 신 인식과 같을 수 없고, 공용어가 4개인 국가와 ‘서울말’을 배우는 국가의 이방(異邦)을 들여다보는 관점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선생님과 이야기하면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제게 보여줄 재미있는 자료가 있다고 해서 보니, 스위스에서 온 웬 공문입니다. 내용을 조금씩 뜯어보니 세금에 대한 글이네요. 오랜 기간 세금을 동결했는데, 이번에 세금을 올릴 수 있도록 기존의 동결안을 파기할 투표를 진행할 것이고요. 저로서는 그 공문이 어지간히 신기했습니다. 여러 공용어로 기록된 점도, 그 공문을 전 세계에 있는 전 국민에게 발송한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놀라기는 이릅니다. 동결안 파기에 찬성할 것이냐고 선생님에게 묻자, 제 예상과 달리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세금은 덜 내고 싶은 게 아니냐고 묻자 세금을 낼 때야 조금 후회하겠지만, 공적인 일을 위한 것이니 올릴 때는 올려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스위스 여론도 모두 찬성하는 쪽이라고 하더군요.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증세에 찬성하는 사회라니요. 한국 정치에서 증세에 찬성하는 여론이 있었던 기억은 없습니다. 증세는 금기어지요. 정치 공세를 할 때도 ‘그 일은 세금을 잡아먹는다’가 주된 공격이고, 그런 공격에 ‘꼭 필요한 일이니 세금을 올려야 한다’고 방어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세금 안 올리고도 이 일을 할 수 있다’ 식의 이야기나 하지요. 세금 올리는 이야기만 나와도 부정적인 감정이 확 솟고요. 오죽하면 ‘증세 없는 복지’를 표어로 삼을 정도겠습니까.

‘우리 남편’과 증세
언젠가 선생님과 이야기했던 ‘우리 남편’이라는 한국말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스물일곱 살인 선생님은 20살에 음악을 하는 남편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어를 처음 공부하면서 가족을 소개하는 표현을 익히는데 남편을 지칭할 때 ‘우리’를 붙이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고 해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혼자 살아도 ‘우리 집’, 외동이어도 ‘우리 엄마’인 것이야 그럴 수 있지만, ‘우리 남편’은 분명 어색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누구인지는 수수께끼지요. 한국인은 분명 ‘나의 것’보다 ‘우리 것’이 익숙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그와 나를 엮어 공통성을 찾아내 그와 나를 ‘우리’로 묶어내야 대화가 편안해지지요. 모든 것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곳에서 학연이나 지연, 혈연 따위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능력’임은 썩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의 남편’보다 ‘우리 남편’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공동체 문화에서 증세는 무조건 거부감을 갖는 주제라니, 참 아이러니 입니다. 저는 공교육을 받으며 ‘내 나라’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모두 ‘우리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라면, 이 나라의 소유권이 정말 이 나라를 ‘우리나라’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분배된다면 우리는 왜 증세에 대한 거부 반응, 곧 공동체에 대한 강한 불신을 보일까요? 개인의 인권과 정치성에 대한 뚜렷한 보장을 시행하려는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모든 일들을 공동체를 중심에 두고 고민하는 것만 같은 나라에서 공동체에 대한 불신을 표출한다는 것의 간극.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 2항을 아시나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조금은 무엄한 질문을 하나 던져볼까요. 당신은 이 말에 진정 동의가 되시나요? 아마도 당신은 국민일 터인데, 대한민국의 주권과 모든 권력이 당신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 있나요? 몇 년 전 영화 〈변호인〉에서 노무현을 연기한 송강호는 위 헌법을 인용하며 “국가란 국민입니다”라는 말을 외쳤고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그 연설에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그 연설의 아름다움과 별개로 제게 그 내용은 너무나 낯섭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가 어떤 주권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어떤 주권과 권력이 저로부터 나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지는 더더욱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시나요?

‘쓰레기통 속의 장미’
서양사상사에서 다루는 중요한 개념이 많고 많지만, 그 뿌리에는 언제나 주체(Subject)가 있습니다. 서양의 철학은 그 관심사를 자연에서 인간을 주체로 두면서 시작되어 그 인간의 주체성을 주관으로 전회하면서 혁명을 겪었으며 이내 그 주체성 전반에 대한 도전과 그 응전으로 치달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체에 대한 사상사를 익히다보면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을 느낄 때가 왕왕 있습니다. 주체에 대한 정의와 그 정의가 전복되는 치열한 서사를, 읽기야 재미있게 읽습니다만 과연 그 논의들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유효한지 떠올리면 글을 덮고 조금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주체였던 적이 있을까?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자기 의지로 자기 욕망을 관리하는 주체로 살기는 참 어렵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다음 학교가 정해져 있고, 그 학교를 졸업하면 그 다음 학교가 있지요. 그렇게 오래 학교를 다니며 배우는 것은 주체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너의 생각을 끝까지 개진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단언컨대 없습니다. 국어 교과서에는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가르침이 쓰여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바라볼 때 모두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니, 자기만의 주장을 펼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우선 귀를 기울이며 들을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니 토론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말하는 법보다 듣는 법을 먼저 배웠으니 내 말을 해야 할 시간에 눈치를 보고, 질문을 해야 할 시간에 누가 먼저 질문하지 않을까 두리번거리기 십상입니다. 그러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나도 입을 닫습니다. 그렇다고 타인의 이야기를 정말 잘 듣는 문화인지도 의문입니다. 침묵을 깨고 입을 열 때 쏟아지는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기 위해서는 그 침묵을 깬 사람이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즉,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는 곳에서 말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권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권위가 있어야만 말할 수 있고, 그 말에 순종하는 한국인은 그렇게 태어납니다.

한국 사회에서 의지와 욕망을 관리하는 주체로 살기 어렵다고 방금 말씀드렸습니다만,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는 의지와 욕망을 ‘갖는 것’ 자체가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구체화할 기회가 없었는데 어떻게 가질 수가 있을까요. 의지와 욕망을 가진 존재가 곧 주체이고 그 의지와 욕망을 발현하는 것이 주체적 행위일진대, 한국에서 주체와 주체적 행위를 기대하기는 실로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주체, 곧 ‘개인’이 없는 곳에서 ‘공동체’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요? 아니, 애초에 성립이 가능하긴 할까요? 우문입니다. 개인이 없는 곳에서 개인들의 연합의 가능성은 없지요.

주체의 장례식
정말 제기해야 할 문제는 이것입니다. 개인이 없는 곳에서 공동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또한, 공동체 중심성과 개인의 부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개인주의 확산이 공동체를 훼손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이 문제를 고민합니다. 개인이 없는 곳에서 개인주의 확산은 무엇이며, 그것이 훼손하는 공동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땅에서 주체의 죽음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체의 죽음은 없었으니까요. 태어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죽을 수 있겠어요. 우리는 주체의 살해 가능성을 논할 게 아니라 그 탄생 가능성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주체나 작가의 죽음 따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장례식장의 주소를 잘못 찾았습니다. 주체의 장례식장으로 가려면 먼저 인천국제공항으로 가야 합니다.

주체가 태어난 적이 없는 이곳, 말하기보다 듣기를 먼저 배우는 이곳의 공동체는 나의 의지와 욕망이 아닌 타인의 의지와 욕망이 이끕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마지못해 따릅니다. 먼저 손을 들고 말한 권위 있는 이의 의견을 거스르지 못하고요. 곧 독재와 파시즘 국가입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에 나와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내가 없기에 가장 강한 자기장을 갖는 존재, 곧 권력의 욕망과 동화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공동체적 ‘정신’ ‘문화’ 따위는 그렇게 조직됩니다. 그리고 권력의 욕망을 욕망하기를 거부하면 이 땅에선 곧 ‘이기주의자’를 의미하는 ‘개인주의자’로 낙인찍힙니다. ‘나’는 없지만 ‘우리’는 있는 마술은 그렇게 관객을 속입니다.

내가 없으니 공동체가 나를 위할 수 있다는 것도 믿지 못합니다. 아니, 애초에 공동체가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국가가 내 자연권을 보장하기 위해 구성되었다는 서구의 근대적 사회계약론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에 허망함을 느끼니 로크(John Locke)를 읽어도 자연권과 계약의 문제를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의 권리가 얼마만큼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힘은 얼마만큼 있는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주장할 수 있는 내 권리가 무엇인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개인은 없고, 그러므로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낭만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증세하는 곳과 증세 없는 복지가 대통령 선거에 등장하는 곳의 개인과 공동체는 분명히 다릅니다. 서양의 사상사에서 주체가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것을 바라보며 신이 났던 저는 제가 나고 자란 이 곳에서 주체가 없었다는 것에 참 안타깝습니다. 주체가 태어난 적이 없는 곳에서 주체가 늙어죽는 것을 기다리기란 얼마나 고루한 일이겠어요. 주체의 장례식을 그만 꿈꿀 때입니다. 우리는 주체의 탄생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개인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그런 주체 말입니다.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3학년으로, 현재 휴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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