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호 커버스토리]

   
▲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아, 인간이 생물학적 몸을 초인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며 불멸의 존재가 되리라는 선망이 부풀려지고 있다. (이미지: www.pexels.com)

포스트휴먼 시대를 향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미래에 대한 관심이 이전과는 달리 무척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미래가 이전의 미래와는 전혀 다르리라는 예감 때문이다. 지금까지 선망의 대상이던 직종들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되고, 사람들은 이제 일자리에서 밀려나 주변적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불안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 아울러 충분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인구의 0.1% 정도에 해당할 사람들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생물학적 몸을 첨단 과학기술, 특별히 나노공학, 유전공학, 그리고 로보틱스 분야의 발전을 바탕으로 초인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며 불멸의 존재가 되리라는 선망이 부풀려지고 있다. 최근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그런 디스토피아적 미래에서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좇기보다, 가상현실 속으로 이주해 현실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슬라보예 지젝은 현재 사회는 불안한 미래 현실을 앞두고 다양한 ‘영지주의적’(gnostic) 대안과 해법들이 난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에 대한 성찰들을 도착적으로 적용하여, 바로 지금 여기의 현실을 벗어나 피안의 세계 혹은 내세로 탈주하는 신앙적 형태를 ‘영지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 무신론 철학자가 보기에 기독교의 본질은 성육신 즉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이 되셨다는 데 있다. 이는 곧 구원을 위해 영혼을 이 세상 바깥으로 들어 올린 것이 아니라, 바로 신 자신이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도래하셔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셨다는 뜻이다.

성서에서 사랑에 가장 근접한 의미의 단어는 ‘긍휼’(compassion)인데, 우리말 긍휼은 ‘compassion’이 지닌 본래 뜻을 조금 탈각하는 경향이 있다. 본래 라틴어로 ‘com-’이라는 접두어는 ‘함께’(with 혹은 together)를 의미한다. 그리고 라틴어 ‘passion’은 지금의 영어처럼 ‘열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suffer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compassionate하신’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한복판으로 내려오셨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고통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다. 부활을 가능케 한 것은 (그 사건이 물리적으로 일어났던 것으로부터 비롯되긴 했지만) 십자가에 달린 이가 죽은 뒤 부활했다는 그 불가능한 사건을 믿고, 그 불가능한 사건을 향해 운명의 주사위를 던졌던 믿는 이들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불의하고 부정의하고 불공평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도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들뢰즈적 의미에서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현실 속에서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하며 자신이 아닌 타자의 현실을 나의 현실로 받아들이며 함께 아파하며, 탈존(ex-istence)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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