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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시대, 고난 앞에 선 신학
[330호 커버스토리]
[330호] 2018년 04월 27일 (금) 11:32:57 박일준 goscon@goscon.co.kr
   
▲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아, 인간이 생물학적 몸을 초인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며 불멸의 존재가 되리라는 선망이 부풀려지고 있다. (이미지: www.pexels.com)

포스트휴먼 시대를 향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미래에 대한 관심이 이전과는 달리 무척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미래가 이전의 미래와는 전혀 다르리라는 예감 때문이다. 지금까지 선망의 대상이던 직종들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되고, 사람들은 이제 일자리에서 밀려나 주변적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불안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 아울러 충분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인구의 0.1% 정도에 해당할 사람들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생물학적 몸을 첨단 과학기술, 특별히 나노공학, 유전공학, 그리고 로보틱스 분야의 발전을 바탕으로 초인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며 불멸의 존재가 되리라는 선망이 부풀려지고 있다. 최근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그런 디스토피아적 미래에서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좇기보다, 가상현실 속으로 이주해 현실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슬라보예 지젝은 현재 사회는 불안한 미래 현실을 앞두고 다양한 ‘영지주의적’(gnostic) 대안과 해법들이 난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에 대한 성찰들을 도착적으로 적용하여, 바로 지금 여기의 현실을 벗어나 피안의 세계 혹은 내세로 탈주하는 신앙적 형태를 ‘영지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 무신론 철학자가 보기에 기독교의 본질은 성육신 즉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이 되셨다는 데 있다. 이는 곧 구원을 위해 영혼을 이 세상 바깥으로 들어 올린 것이 아니라, 바로 신 자신이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도래하셔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셨다는 뜻이다.

성서에서 사랑에 가장 근접한 의미의 단어는 ‘긍휼’(compassion)인데, 우리말 긍휼은 ‘compassion’이 지닌 본래 뜻을 조금 탈각하는 경향이 있다. 본래 라틴어로 ‘com-’이라는 접두어는 ‘함께’(with 혹은 together)를 의미한다. 그리고 라틴어 ‘passion’은 지금의 영어처럼 ‘열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suffer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compassionate하신’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한복판으로 내려오셨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고통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다. 부활을 가능케 한 것은 (그 사건이 물리적으로 일어났던 것으로부터 비롯되긴 했지만) 십자가에 달린 이가 죽은 뒤 부활했다는 그 불가능한 사건을 믿고, 그 불가능한 사건을 향해 운명의 주사위를 던졌던 믿는 이들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불의하고 부정의하고 불공평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도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들뢰즈적 의미에서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현실 속에서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하며 자신이 아닌 타자의 현실을 나의 현실로 받아들이며 함께 아파하며, 탈존(ex-istence)한다.

1. 교회는 ‘탈-인간 공동체’
초대교회는 로마제국 시대의 위계적이고 신분제 질서에 뿌리를 둔 고대의 인간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저항적으로 전복하여 창조적인 대안을 마련해주었다. 이것이 근대 유럽을 통해 인류가 누리고 있는 인권의 개념이다. 바울 공동체가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에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무렵, 그들은 실질적인 박해에 직면해 있었다. 기독교 공동체가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선전하던 시절은 아니었던 탓에 대규모 박해는 많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이는 곧 당대의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누리던 특권이 박탈될 위험에 처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근원적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박해를 받은 것은 불온한 생각 즉 그들이 살과 피를 먹거나 죽은 자를 소환하는 사이비 종교적 의식을 행한다는 소문 때문이 아니다. 외면적으로는 황제 숭배를 거절하고, 유대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다른 민족과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아이디어를 전도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제국에 던지고 있었다. 로마제국을 포함한 당시의 민족과 나라들에는 ‘평등주의’라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은 당연한 생각이 아니었다. 당시 상식으로는 인간은 태어나면 신분이 주어진다. 귀족으로 태어난 이는 귀족으로, 평민으로 태어난 이는 평민으로, 노예로 태어난 이는 노예로, 여자로 태어난 이는 여자로 살아가야 한다. 이는 신의 뜻 혹은 운명이다. 그 누구도 숙명을 거스르며 살 수는 없다. 주어진 운명 혹은 숙명에 복종하는 일은 바로 이 사회가 질서 있고 안정적으로 서로 도우며 호혜하는 사회가 되는 데 가장 핵심적인 도덕이자 윤리이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로마제국에서 불온시 됐던 이유는 바로 이 당연한 상부상조의 신분제적 질서를 수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서로 예배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로 부르며 당대의 신분제 질서의 토대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국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드는 도발이었다. 주인과 노예가 서로 한 형제로 호칭하며 어울리기 시작하면, 사회 질서는 유지될 수 없다. 서로 구별된 시민권을 가진 남자와 법적 권리를 갖지 못한 여자가 서로 ‘한 형제 한 자매’가 되어 동등성이 주장된다면, 남성 시민권자들의 정치 질서로 구현되는 제국의 정치 질서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제국의 사회 윤리 도덕 질서의 근간인 신분제를 뒤흔드는 도발을 감행하는 공동체를 그대로 용인하는 것은 제국의 당국자들 입장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의 믿음은 강한 하나님 혹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에 대해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약하고 무기력한 하나님, 부정의한 로마제국의 판결에 저항조차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억울한 죽임을 당해야 했던 약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걸었다. 왜냐하면 그 약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폭력으로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생각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전복하고 생각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가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 초대교회 예배 공동체에서 나누었던 급진적인 인간 이해는 교회가 로마제국의 제도와 기관의 일부로서 정착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왜곡되고 희석되었지만, 종교개혁의 ‘오직 은혜로만’ 모토를 통해 신학적으로 다시 한번 그러한 면모를 드러냈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인권이라는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2. 인간이 기계로 취급받는 시대의 논리: ‘인간 대 기계’의 이분법
기계로 삶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은 요즘의 일이 아니다. 사실 기계는 인간이 만든 비인간(nonhuman) 동력 장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산업혁명 이후 우리가 사용하는 기계는 생물학적 인간과는 구별된 장치를 의미하지만, 고대 이집트 제국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은 것은 ‘기계’였다. 단지 그 기계는 인력(man-power)를 동력으로 썼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 기계의 부속으로 활용되던 시대의 체제를 떠받치는 것은 바로 신분제였다. 즉 모든 인간은 동등한 인간이 아니었다. 고대 사회는 노예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사회였다. 누군가 기계처럼 동력이 되어 제국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움직여야 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평등은 체제를 흔들리게 만드는 매우 불온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체제의 효율성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평등한 존재라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만일 모두가 평등하다면, 누가 기계 취급을 받으며 일하려 할 것인가? 실제로 민주주의(democracy)라는 생각이 현실로 자리 잡기 전, 노동을 감당하는 많은 사람들은 노예이거나 노예에 준하는 삶을 살아가는 하인 혹은 농노였다.

기계 취급을 받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존엄한 인권을 부여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근대에 인간의 노동력으로 움직이던 산업을 비인간 기계로 대치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면서부터였다. 인간의 노동력을 좀더 효율적인 기계로 대치하게 되면서 인간들이 쓸모없어지자, 늘어난 여가와 부를 분배받으며 더 인간다운 삶을 공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 공장의 기계보다 못한 삶을 강요받으며 도심 빈민가로 강제로 내몰리게 된다. 실제로 산업혁명기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기계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 자원을 효율적으로 소비하면서 성능이 훌쩍 향상되었지만, 그 산업혁명기는 당대의 표현을 따르자면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시절’이었다. 증기기관을 활용한 양모 가공 산업이 부를 창출하는 산업이 되면서, 지주들은 예전에 소작농에게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던 땅을 양을 키우는 목장으로 변용하는 것이 부가가치를 더 창출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농지로 쓰이던 땅에서 소작농들을 내쫓고, 양을 키우는 목장으로 바꾸면서 땅 주위에 양떼를 지키기 위한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바로 ‘울타리치기운동’(enclosure movement)의 풍경이다. 그러한 현실이 오늘날에도 이어져 남미에서는 ‘소가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가 되고 있다고 제러미 리프킨은 고발한다.

이론적으로 1초에 10만 번의 주식거래가 가능한 인공지능이 주식시장의 초단타 판매에 뛰어들면, 인간 주식거래자로선 도저히 이익을 낼 수 없는 거래에서도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인공지능 의사가 인간 의사보다 더 방대한 지식과 증상과 연구들을 검색하여, 더 정확한 진단을 내게 되면 인간 의사는 불필요해질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의사와 인간 간호사가 병원의 풍경이 될 것이다. 이런 미래 사회를 예감하면서, 우리는 인간 대 기계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가지고 불안한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하지만 대립하는 것은 실제로는 인간 대 기계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 대 인간의 탐욕이 대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모든 사람이 희망 없는 현실을 벗어나, 가상세계로 도피해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탐욕임을 들춘다. 탐욕스러운 인간이 사람들의 절망과 불안을 동력 삼아 가상세계를 독점하여 자신의 권력을 창출해 나아가고자 하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카를 마르크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판하면서 종교를 궤멸하고자 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종교가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라는 점과 “무정한 세상의 정서”이면서 “영혼 없는 조건들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기민하게 알고 있었다. 현실에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는 영혼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위로, 그것이 바로 종교의 위로였음을 마르크스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했다. 당시의 아편은 마약류로 취급되기보다는 진통제였다. 아편이 중독성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중독 자체가 위험하다고 여기진 않았던 것이다. 요즘 우리는 게임중독 문제를 겪고 있다. MMORPG(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라는 다중 온라인 접속 게임은 사람들에게 가상세계 속에서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가도록 한다. 이런 류의 게임에 거의 중독처럼 몰입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사는 것이 아니라 가상세계에 살면서 가끔 (식사를 한다거나 화장실을 가야 하는 불가피한 이유로) 현실세계로 외출을 한다고 일컬어진다. 현실 자체를 외면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류의 게임중독은 위험하고 유해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이런 류의 게임에 몰입하고 중독되는지를 설명하는 진단들은 문제의 근원을 엉뚱하게 짚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존재 이유가 필요하다. 게임중독자들이 실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편의점 알바와 취업 준비, 비정기적 단순 노무, 보장 없는 인턴 등이라면 그들은 현실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이런 극단적 상황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이 하는 선택은 두 가지다. 삶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현실을 도피하거나. 게임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그 가상세계에서는 세계를 지키고 지배하는 주역이다. 도착적 존엄성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기서 삶의 존엄성을 갖는다.

문제는 ‘아편’은 진통제이지 치료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극한의 고통을 잊고 잠시 제정신을 차리고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긴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치료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 종교의 약점이 있다. 우리는 포스트휴먼의 현실이 담지한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료해주는 데 무기력하다. 시대적인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교회로 나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가 아편의 역할을 하게 되는 이유이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동료-고난자’(fellow-sufferer)
포스트휴먼 시대를 향한 여러 가지 이름들이 종말론적으로 난무한다. ‘인공지능 시대’ ‘제4차 산업혁명’ ‘호모데우스의 시대’ 등. 이러한 각각의 이름들은 불안을 증폭시킨다. 인공지능 시대는 생물학적 두뇌의 능력을 넘어선 디지털 인공지능이 생물학적 유기체 인간을 대치하고, 인간이 버림받는 시대라는 환상을 심는다. 그런 환상은 경영합리화 명분으로 이미 강요당하는 노동시장 유연성과 탄력적 노동시간 개념들, 그리고 명예퇴직과 같은 이유로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을 목격하면서 증대된다.
제4차 산업혁명이란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도래한 산업혁명 이후, 생산수단의 혁명적 발전들이 지금 제4차 혁명을 일으키는 시대에 돌입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4차 산업혁명기에 맞는 직무 훈련이나 창조적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생산수단의 변화는 구조적인 문제라서 개인이 노력한다고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도생의 삶을 요구받으며,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를 강요당한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 노동자들이 재택근무를 하게 되어 여가 시간이 증가하고 노동 부담이 줄어드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고 매체들은 떠벌렸다. 인터넷이 거의 전 세계로 보급된 지금의 우리 삶에는 ‘퇴근’이 없다. 24시간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매순간 창조적인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업무를 해결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선거철에 ‘저녁이 있는 삶’을 이상으로 제시하면 할수록, 현실의 우리 삶은 더욱더 소외감을 느낀다.

호모데우스의 시대란 인간(Homo)이 신(deus)이 되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매우 능력 있고 재력을 갖춘 이들이 기존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죽지 않는 삶’을 도모하는 시대의 풍경을 가리킨다.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유전자 테스트를 통해 유방암 발병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고 사전에 암을 막기 위해 유방절제술을 선제적으로 시행했다. 그는 유방암으로 고통받을 많은 사람에게 대안이 있음을 알리고 용기를 주기 위해 수술 사실을 커밍아웃했다지만, 그 유전자 테스트 비용이란 인구 일반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무척 비쌀 뿐 아니라 유방 절제수술비용도 감당하기 어렵다.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이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도 닮아가지 않았지만, 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물리적인 능력을 그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시대의 모습을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의 시대라고 이름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의 핵심은 ‘성육신’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된 사실에 있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불안하고 위태롭고 모든 것이 절망적인 인간의 세상을 벗어나 저 하늘 위 천국을 지금의 고통에 대한 진통제로 제시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인간의 옆으로 내려와 우리들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것, 바로 거기에 기독교의 고유성이 있다는 말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사마리아 사람이 느낀 것은 아픈 사람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컴패션(compassion), 긍휼이었다. 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그의 아픔이 마치 나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은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사마리아 사람에 앞서 그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의 아픔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던 이유가 개인적 무관심과 탐욕이 아니라 ‘종교법’이라는 것이 역설이다. 사람을 구원하는 종교의 법이 도리어 사람을 죽게 만들고 있음을 이 비유는 고발하는 것이다.

슈퍼컴퓨터 ‘딥블루’가 인간 체스챔피언 게리 카스파라로프를 이긴 뒤, 프리 스타일 게임을 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컴퓨터와 사람이 팀을 이루든지 사람끼리 팀을 만들든지 아니면 컴퓨터끼리 팀을 만드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자유롭게 팀을 이루어 게임을 벌이는 이 방식의 모든 게임에서 오직 한 가지 유형의 팀만이 승자가 되었다. 즉, ‘인간-컴퓨터’의 혼성팀. 아주 흔한 노트북과 팀을 이룬 인간 체스게임 참여자도 슈퍼컴퓨터 팀을 이길 수 있었다. 이 결과는 곧 다가오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헤쳐 나갈 인간의 힘을 예감하게 한다. 함께 협력하여 공생의 삶을 일구어낼 수 있는 상상력. 유발 하라리는 본래 종교의 힘이란 서로 무관한 개인들이 함께 꿈꾸며 이야기를 공유해 나가며 가치와 이상을 나누는 능력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없는 자들을 선택하여 있는 자들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리신다’는 고린도전서 1:27의 하나님은 결코 우리 시대에 유능하고 엘리트적인 집단을 도모하지 않으신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건강하고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아프고 버림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버려지도록 하는 것은 결코 인공지능과 같은 기계가 아니라, 탐욕스럽게 그들을 이용하려는 인간들이리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힘이 있는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기준으로 ‘인간’을 규정하고, 그 규정에 맞지 않는 인간들을 비인간화하여 억압하고 권력의 도구로 삼아왔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임을 그렇게 비인간화된 존재들에게 선포하면서, 기존의 상식과 도덕과 윤리와 통념을 넘어서며 시대를 바꾸어 나갔다. 포스트휴먼과 인공지능과 호모데우스와 제4차 산업혁명의 미래 시대에도 기독교의 이 본래적 정신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시대는 사람들을 주변화하고 버렸다. 미래 시대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도덕과 윤리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기존의 상식적 도덕과 윤리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을 뛰어넘는 기준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동등한 존재로 대우받지 못하는 모든 존재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파하심과 함께하심이다.

교회와 신학이 포스트휴먼 시대에 존재해야 할 의미는 분명하다. 하나님이 함께 아파하고 있는 형제와 자매를 찾는 것, 하지만 기존의 규칙과 기준에 얽매이면 안 된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눈에 피 흘리는 사람은 동료-고난자가 아니라 부정한 것을 의미할 뿐이었던 것처럼.

 

박일준
감리교신학대학과 신대원을 졸업했다. 보스턴 대학(S.T.M.)과 드류 대학(Ph.D.)에서 학위를 마치는 동안 종교학과 철학과 신학의 접경 지역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집중했다. 특별히 인지과학과 진화생물학의 연구결과들을 신학적으로 그리고 종교철학적으로 성찰하면서 ‘인-간’ 즉 ‘삶-사이’를 ‘인간-이후’ 시대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지를 궁리해왔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소속으로 ‘트랜스휴머니즘 시대의 혼종적 인간론 연구’에 이어 ‘공생의 기호학’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의의 신학: 둘의 신학》 《인공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종교철학적 신학적 성찰》과 공저 《삐뚤빼뚤 생각해도 괜찮아》 《종교와 철학 사이》 등이 있다. 《자연주의적 성서 해석학과 기호학: 해석사들의 공동체》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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