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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시대 앞에 선 기독교세계관의 과제
[330호 커버스토리]
[330호] 2018년 04월 27일 (금) 11:38:04 손화철 goscon@goscon.co.krq
   
▲ 포스트휴머니즘 혹은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기술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며, 그런 세상의 도래가 함의하는 바를 파악하려는 이론적 노력을 말한다. (이미지: pexels.com)

인간 이후의 인간, 새로운 인간의 시대가 올 것인가?

2016년 알파고 열풍 이후 첨단 기술들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높아지면서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기술의 엄청난 발달이 마침내 인간의 인간됨을 바꿀 것이라는 예측은 보기에 따라 새삼스럽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다. 지구를 빙빙 도는 슈퍼맨이나 우주소년 아톰, 괴로워하며 거인으로 변하는 헐크를 생각하면 그리 신선한 예측도 아닌 듯싶지만 이들이 텔레비전 밖으로 나온다는 생각은 묘한 기대와 경계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 기대와 경계심에 기독교는 무엇을 더 얹을 수 있을까?

1. ‘포스트휴먼-이즘’과 ‘포스트-휴머니즘’
포스트휴먼 혹은 트랜스휴먼은 통상 인간인 듯 인간 아닌 새로운 존재들을 말하지만, 경계가 그리 명확하지는 않다. 의족이나 의수 같은 보철물을 몸에 부착한 신체 장애인들로부터 시작해 사이보그, 유전자 조작을 통해 강화된 신체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존재자들을 포스트휴먼 혹은 트랜스휴먼으로 볼 수 있다. 몇몇은 이미 존재하지만 몇몇은 미래에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존재자들이다. 이들은 일상적인 수준의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이나 장점을 가졌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과거에도 의수나 의족이 있었지만, 포스트휴먼 논의에서 언급되는 의수나 의족은 기술적 진보의 산물로 진짜 다리나 팔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하거나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진다. 이런 새로운 인간들이 많이 등장하거나 우리 자신이 새로운 인간형이 된다면 세상은 엄청나게 변할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 혹은 트랜스휴머니즘은 그 세상을 예측하고 대비하며, 그런 세상의 등장이 가지는 함의를 파악하려는 이론적 노력을 가리킨다.

이미 여러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지만, 관련 논의들을 칼루스와 헤어브레히터가 제시한 대로 ‘포스트휴먼-이즘’과 ‘포스트-휴머니즘’으로 구분해보면 그 내용을 명확하고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구분에 따르면 트랜스휴머니즘은 포스트휴먼-이즘, 즉 미래의 포스트휴먼에 방점을 두는 접근이다. 커즈와일은 소위 ‘특이점’이 곧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기계의 능력이 인간의 능력을 총체적으로 추월하는 시점이다. 특이점이 도래하면 기계가 인간의 창조성을 뛰어넘어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그 시점까지 인간 역시 유전자 공학과 다양한 기술을 통해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게 될 것이다. 특이점의 도래까지 주장하지 않더라도, 유전자 공학의 발달을 통해 질병을 퇴치하게 되거나 인공지능의 기능이 인간 의식의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진다는 주장이 이제 그리 낯설지 않다. 인간의 뇌 정보를 컴퓨터에 이동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존의 기술에 대한 기대나 환호의 연장선상에 있다. 기술 발달을 통해 인간 삶이 개선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새로운 가능성들이 계속 열려 긍정적인 미래를 맞게 되리라는 것이다.

2.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기술 발전과 새로운 인간의 출현이라는 동일한 현상에 부닥쳐 약간 다른 접근을 하는 경우도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분류되는 학자들은 새로운 기술들이 근대 서양 휴머니즘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극복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이를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전혀 다른 인간의 가능성이 열리면서 기존의 인간관, 특히 서양 근대의 휴머니즘에 대한 재검토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브라이도티는 유럽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에 기반한 근대 휴머니즘을 극복하는 새로운 주체성 개념에 초점을 맞춘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도전하는 현대의 과학기술이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 새로운 주체성 개념을 찾아낼 계기가 된다고 본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동물권리, 사이보그 이론 등 근대를 지탱해온 인간중심주의가 신화임을 폭로하는 여러 흐름들의 연장선에 놓인다. 이런 관점에서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주창자들은 기술적 발전이 내포하는 엄청난 함의를 이해 못한 채 여전히 휴머니즘 카테고리로 사유를 고수하면서 기술적 성공에만 열광하는 부류에 불과하다. 이런 접근에는 기실 중요한 함의가 있다. ‘인간을 닮은 로봇’을 만들겠다면 그 로봇은 백인의 모습을 하는가, 여인의 모습을 가지는가? ‘사람처럼 생각하는 인공지능’이라면 동양인처럼 생각하는가, 서양인처럼 생각하는가? ‘윤리적인 챗봇’이나 ‘윤리적 기준을 가진 자율주행자동차’는 누구의 윤리를 따르는가? 장애인의 움직임을 도와주는 보철물은 얼마만큼 ‘진짜’ 같아야 하는가?

이처럼 인간에 대한 이해는 바로 눈에는 잘 띄지 않지만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다. 포스트휴먼의 사회적 정치적 함의와 포스트휴먼 시대 주체성의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은, 기존 자본주의와 근대 합리성이 그 끝 지점에서 자기전복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현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트랜스휴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진 미래에 대한 기대에는 거침이 없다. 물론 기술 발전으로 생길 부작용을 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포스트휴머니즘의 위 두 가지 접근은 기술 발전의 불가피성을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다. 기술 발전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 흐름에 맞추어 우리의 삶을 조정해야 한다는 현실적 요구를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기술 발전에 따른 변화를 조종하려는 노력은 포스트휴머니즘에서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대체로 낙관적인 트랜스휴머니즘과 달리, 현실에서는 현대 첨단 기술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과거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의 발전에 열광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인공지능을 비롯한 포스트휴머니즘을 가능하게 하는 최신 기술에 대해서는 대중도 전문가도 갖가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단적인 사례로 세계 최대 전기차 업체인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가 인공지능 개발을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최근 구글의 개발자들은 구글이 미국 정부와 함께 군사기술에 사용할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것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같은 맥락의 문제제기와 물음들은 기독교세계관 이론가와 운동가, 그리고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도전이 된다. 기독교세계관운동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각 영역에서 그 주권을 드러내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선포해 왔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초라하다. 특히 ‘기독교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과학과 공학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기존의 과학적 흐름과 아예 배치되는 창조과학 패러다임이나, 소외된 자들을 위한 적정기술운동을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불의와 부조리 혹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배타적 이론이나 실천의 체계로 숨는 셈이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지 모르지만 “타락으로 인해 왜곡된 세계를 구속하는” 것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실현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인공지능과 유전자 가위 기술의 개발과 사용, 관련 규제에 대하여 그 분야에 종사하는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기독교세계관이 끝내 떨치지 못했던 이원론적 사고를 버리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고민을 수행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마침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특정한 기술이 왜 개발되어야 하는지, 그 기술을 어떻게 잘 사용할 수 있는지, 어떤 규제와 제한을 통해 기술의 남용을 막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야 한다. 한국 개신교인들이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에 큰 기여를 했지만, 과학기술 발달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는 다소 부족했다. 이러한 약점은 지난 2005년 황우석의 배아복제줄기세포 사기사건 당시 개신교회가 침묵으로 무능을 고했던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와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 더 치열하고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4. 문제제기에 무력한 기독교 세계관
창조-타락-구속을 축으로 하는 기독교세계관이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출하지 못한 이유를 역사적 정황이나 관련자들의 노력 부족에서만 찾을 일은 아니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 근대의 주체성 개념과 인간 이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것은 기독교세계관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논의되고 소비되었는가에 대한 물음과도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세계관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구조와 방향’ 논변을 보자. 이 논변은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설명하고 그 회복을 꾀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선한 구조가 여전히 유효하지만 타락으로 인한 왜곡이 잘못된 방향을 잡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의 약점은 개별 사례에서 구조와 방향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공학은 구조로 보고 무기 개발을 잘못된 방향의 사례로 볼 것인가, 아니면 무기 개발을 구조로 보고 대량살상무기를 잘못된 방향으로 볼 것인가.

이러한 모호성 때문에 기독교세계관은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는 기존 흐름의 성격과 방향에 특별한 이의제기를 못한 채 통상적인 문제제기만 제출하는 데 그쳤다. 예를 들어 구조와 방향의 개념은 개발과 사용으로 각각 대체되어 “총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로 표현되는 기술의 중립성 주장과 쉽게 연결된다. 이는 다시 ‘기독교적 기술’을 개발하되 악용 위험을 피하고 사심을 갖지 말라는 정도의 상식적인 선에 묶인다. 이러한 이해는 기술 후발국이었던 우리나라에서 특히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많은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에게 기독교세계관은, 자신들이 순전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연구하는 한은 그 연구 자체의 방향성과 정당성(구조)에 굳이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없게 만든 셈이었다. 그 결과로, 기독교 외부에서도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우려조차 기독교세계관운동에서는 핵심 사안이 되지 못했다. 한국교회 역시 기술입국(技術立國)의 정신을 충실하게 이어받아 얼리어답터(early adapter)가 되었지만, 예배당으로 밀려들어오는 기술들을 반성적으로 검토한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약점을 노출한 기독교세계관의 도식은 포스트휴머니즘에 이르러 더욱 무력해진다. ‘포스트-’ 혹은 ‘트랜스-’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포스트휴머니즘 논의들은 기존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자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넘어선 새로운 존재자를 추구하는 마당에 구조는 무엇이고 방향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의식을 가진 강한 인공지능이 나타나면 그 인공지능에게도 영혼/구원이 있는가?’라는 식의 물음들이 제기되면 더욱 당혹스럽다. 이는 기독교세계관운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주신 인간의 창조 능력에 집중하면서 “땅을 다스리라”하신 명령에 둔감했음을 방증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물음은 ‘자의식을 가진 강한 인공지능을 만들려는 노력과 그 연장선상의 시도들이 과연 바람직한가?’ ‘어떻게 하면 인간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인공지능을 개발해야 할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5.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물음
포스트휴먼의 등장 앞에 기독교가 물어야 할 물음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충실하게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그리고 그 형상이 가진 풍성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정작, 자신의 인간 이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투영해 이해한 경우가 많았다. 근대 철학자들이 이성을 강조하면서 이신론(理神論)에 경도된 것이나, 그보다 훨씬 조야하게 오늘의 한국교회가 부와 명예를 성공이라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뻐하는 것은 동일한 오류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의 도전은 기존 인간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이다. 이 물음을 단순히 파괴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서양 근대의 인간관을 기독교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이 초래한 성취와 해악에 눈 감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해체적인 접근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 시대의 기독교 인간론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하다. 과거에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가능성들이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하던 조건들을 바꾸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가능성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조차 충분히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여러 차별과 혐오와 편견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인간이 만들어 사용하는 기술이 인간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가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다. 기술의 제작과 사용이란 단순히 하나님 형상이 나를 통해 발현되는 과정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하나님 형상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기도 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기술에 의해 만들어져 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간의 본질이라 여겨온 영역으로 전진해 들어오는 기술 발전에 대한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첨단 기술의 발전에 따라 나타난 흐름이지만, 땅을 다스림, 곧 문화 명령에 대한 이해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찰을 새롭게 하라는 숙제를 기독교인들에게 부과한다. 그들의 도전적인 주장을 섣불리 수용할지 거부할지를 선택하려 하기보다는 우리가 가졌다고 생각했던 답을 재고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는 신학과 인문사회학뿐 아니라, 첨단 기술 시대를 이끌어가는 과학과 공학의 영역에 더욱 절실하다. 포스트기독교세계관이 필요하다.

 

손화철
한동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벨기에 루벤대학교에서 기술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최근의 관심사는 포스트휴먼와 인공지능의 철학이다. 저서로 《4차산업혁명이라는 거짓말》 《랭던 위너》 《현대 기술의 빛과 그림자: 토플러와 엘륄》가, 공저로 《과학기술학의 세계》 《한평생의 지식》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욕망하는 테크놀로지》가 있다. 《길을 묻는 테크놀로지》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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