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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본 하느님의 형상을 우리들은 아직 모른다
[330호 커버스토리] 영화와 만화를 통해 본 포스트휴먼 시대
[330호] 2018년 04월 27일 (금) 11:46:37 변영권 goscon@goscon.co.kr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국 이후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바둑에 문외한인 저도 그 대결을 보면서 과연 인간의 발명품이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큰 호기심을 갖고 지켜봤습니다. 결과는 모두 알고 있는 대로였고, 이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상상을 펼쳐나갔습니다.

인간보다 더 빨리 많은 정보에 접속하고, 습득하고, 그것을 통해 정확한 결론을 내놓는 인공지능이 언젠가 인간을 뛰어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일본 만화 〈FSS(Five Star Stories)〉의 아마테라스처럼, 수천억 인류의 경험에 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간의 감정을 습득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그런 인공지능이 인간과 비슷한 윤리와 책임감 같은 것을 배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직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SF 소설의 주제로나 적당한 문제라고는 하지만, 이런 질문들의 끝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매우 본질적인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헬라철학의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한 기독교인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즉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들으면 가장 먼저 ‘영혼’을 생각합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하느님이 최초의 인간을 흙으로 만든 뒤, 숨결을 불어넣음으로써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생명들은 그냥 창조했지만 오직 인간에게는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영혼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 그리고 영혼에서 비롯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고 생각합니다.

   
 

1. 영육 이원론에 대한 도전, 〈공각기동대〉
그러나 정말 인간의 본질은 영혼에만 있는 걸까요? 육체는 아무것도 아닌 걸까요? 이런 생각에 도전한 영화나 애니메이션, 만화는 정말 많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입니다. 최근에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여러 가지 시리즈들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마 1995년 극장판으로 나온 작품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가까운 미래인 2029년, 주인공인 쿠사나기 소령은 수상 직속의 공안 9과에 소속된 특수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사이버 테러 같은 범죄를 해결합니다. 그녀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신체의 일부를 사이보그화합니다. 팔과 다리를 기계로 바꾸어 초인적인 힘을 갖게 되고, 심지어는 뇌 일부(전뇌)도 컴퓨터 장치 같은 것으로 바꿉니다. 뇌의 일부를 제외한 몸 전체를 사이보그화한 쿠사나기는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자신이 정말로 인간이 맞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쿠사나기가 쫓는 범죄자는 ‘인형사’라고 불리는 일종의 인공지능입니다.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에서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 해킹 프로그램이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각하고 자의식이 생깁니다. 인간과 똑같은 정신과 의식을 가진, 그러나 육체가 없이 네트워크상에 존재하는 순수한 정신적인 존재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재미있는, 그러나 생각해보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기술의 발달로 쿠사나기처럼 신체 일부를 기계로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어디까지가 인간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범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팔이나 다리 정도는 누구나 용인할 것입니다. 어쩌면 신체 장기의 일부 — 심장이나 눈, 귀 정도 — 까지도 허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뇌를 제외한 육체 전부를 사이보그화한다면,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인간의 본질은 오직 뇌와 뇌의 활동인 의식에 달려 있는 것이고, 조금 비약해서 말한다면 기독교인들이 믿는 영혼은 뇌에 깃들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공각기동대〉의 인형사처럼 육체 없이 존재하는 인공지능, 순수한 의식만 가진 존재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는 그 인형사가 인간의 전뇌를 해킹해서 육체를 소유한다면 우리는 그런 존재를 여전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공각기동대〉가 던진 이런 질문은 그 뒤로 수많은 영화, 만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중 유명한 작품은 아니지만 2017년에 방영했던 〈ID-0(제로)〉라는 애니메이션이 기억납니다. 우주에서 생활하게 된 인류는 우주에서의 위험한 작업이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I-머신이라는 로봇을 개발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안전하게 보관한 뒤, 인간의 의식만 로봇에 전송해서 작업을 하다가 위험한 상황이 되면 백업해둔 인간의 의식을 다시 육체에 전송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I-머신에 의식을 전송한 뒤, 보관해놓은 인간의 육체를 잃어버린 ‘에버 트랜서’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주인공 이도(IDO)를 비롯한 몇 명의 동료들은 그렇게 ‘로봇이 된 인간’들로 살아갑니다. 이런 에버 트랜서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화 속 설정들이고, 실제로 저런 일들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상상들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또는 정신이나 의식) 중 어느 것이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만듭니다. 육체 없는 인간, 반대로 영혼 없는 인간이 가능할까요? 아니, 육체와 영혼(정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영육이원론이 정말로 인간의 본질을 잘 설명해줄까요?

2. 인간의 진화
사실 저는 이런 영육이원론적 사고를 거의 버렸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도 없고,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사유 대상을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사망하면 육신은 땅에서 썩고 영혼만이 우주 어딘가의 영적 세계로 모여들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설령 그런 식의 내세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 제가 이 땅에서 살면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를 읽어봐도, 적어도 구약성서에는 그런 식의 내세나 영혼에 관한 개념이 없습니다. 야곱이나 선지자들이 간혹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가는 것을 보지만 그곳이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의미의 내세는 아닙니다. 구약에는 그저 사람이 죽으면 “조상들 곁으로 돌아갔다”라거나 “잠들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신약에서는 종종 영혼과 육체를 구별해서 말합니다. 아마 헬라화된 도시에서 자랐던 바울의 영향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가르침들도 대부분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느님의 통치 — 정의와 사랑의 세상 — 에 대해서 말하지, 사람이 죽음 뒤에 가게 될 ‘영혼의 고향’ 같은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서의 주된 사고방식은 ‘몸’ — 인간의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함께 부르는 표현 — 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히브리인들의 일원론적 사고가 저는 인간 본질에 대한 접근에서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대의 과학적 사고와도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을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몸으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믿는 분들의 생각과는 달리 세상은 성서가 말하는 방식으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났고, 수십억 년의 시간이 걸려 생명이 지구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다가 약 40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시작으로 다양한 인류의 조상들을 지나 약 20-15만 년 전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했습니다. 수많은 고대 인류들 중 네안데르탈인은 현 인류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현했다가 사라진 종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 그들은 현생 인류의 유전자에 흔적을 남겼고, 유럽인들의 4% 정도는 그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인간의 언어능력과 관련된 FOXP2 유전자는 우리와 동일하다고 합니다.(이상희, 윤신영, 《인류의 기원》 17장 '너는 네안데르탈인이야') 왜 현생 인류는 살아남고 네안데르탈인은 사라졌는지 저는 정확히 모르지만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네안데르탈인들과 호모 사피엔스들은 서로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개념, 또는 ‘인종’이라는 개념은 근대적 사고의 산물이니까요.


조금 더 가까운 시대의 예를 들겠습니다. 강력한 신분질서가 존재하던 고대 사회에서 인간은 계급과 관계없이 모두가 동일한 인간이었을까요? 고대 바벨론의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쉬’(Rnuma Elis, 기원전 1900-1700년)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영향을 준 신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르둑(남신)은 티아맛(여신)과 전쟁을 하는데 티아맛 측의 총사령관인 킹구를 제압한 후, 그의 피와 흙을 섞어 인간을 창조하고 그에게 고된 노동의 의무를 부과합니다.(김경호, 《야훼 신앙의 맥》, 57-58쪽) 이런 고대의 신화들은 인간의 신분질서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신의 아들, 또는 신의 현현인 왕과 왕족들은 지배하고 섬김을 받는 존재로, 하층민들은 그들을 섬기는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신화를 배경으로 한 신분제 사회에서 인간은 모두가 동등하지 않았습니다. 생물학적 차이를 근거로 여러 가지 법과 제도적 차별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아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차별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백인이 아닌 인간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노예, 어린아이, 성소수자 등을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아서 권리를 제한하고 제도적으로 차별한 것은 그 예를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류 역사에서 무엇이 ‘인간’이며 누가 그 범주에 포함되는가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범주를 개방하고 확대해 나갈 때마다 많은 저항이 있었습니다. 노예들을 해방할 때,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을 때,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때마다 ‘기존의 인간’들은 두려움과 증오심으로 저항을 해왔습니다. 

   
 

3. ‘인간’의 확장에 대한 두려움
그러한 저항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존의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에 대한 차별입니다. 1997년에 나온 〈가타카〉라는 SF 영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에단 호크, 우마 서먼, 주드 로 등 믿어지지 않는 캐스팅의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인류의 기술은 인간의 모든 유전자를 분석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 대다수는 태아 수정 단계에서 질병이나 기타 열성 유전자를 제거하고 완벽한 신체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주인공인 빈센트는 자연 임신으로 태어나 심장이 약하고, 시력이 나쁘며 수명은 30세 정도로 예측된 사람입니다. 그 사회에서는 이런 열성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우주탐사 여행을 떠날 수 없고, 허드렛일만 하게 됩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사회에서 자연적인 인간들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으며,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인간들에 의해 차별 받게 된 것입니다(물론 이 영화는 그런 생물학적 결정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예는 인류 역사에서 너무나 많고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스스로를 우월한 인종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열등한 인종을 지배하고 다스려야 한다고 믿어왔습니다. 특히 서구 기독교는 오랫동안 노아의 세 아들 이야기(창 9장)를 근거로 셈족이 함족을 다스리는 것이 하느님이 정한 질서라고 믿어왔습니다. 여성과 장애인들을 보편적인 인간에 비해 약하고 부족한 존재로 여겨, 차별하고 배제한 것도 역사 전반에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두 번째는 기존의 인간보다 우월한 인간들에 대한 공포입니다. 비범한 사람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질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건담〉에 나오는 ‘신인류’나 〈엑스맨〉에 나오는 돌연변이들은 인간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인 〈FSS〉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FSS〉의 세계에서 전쟁은 모터헤드라는 거대 로봇을 중심으로 치러지고, 그 모터헤드를 조종할 수 있는 것은 고대 초제국 시절 기사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나 기사만으로는 모터헤드를 조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데이터 분석 및 각종 연산과 모터헤드 제어 등을 위해 엄청난 정보처리 능력을 갖춘 인공생명체 파티마를 만들었습니다. 이 파티마 역시 기사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기에,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 운동신경, 긴 수명, 게다가 빼어난 외모까지 갖게 됩니다. 일반인들은 이 파티마를 경외하면서도 질투합니다. 그래서 파티마에게는 온갖 규제가 적용됩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게 눈에 반짝이는 렌즈를 끼우고, 피부를 노출해서는 안 되며, 생식능력이 제한되어 있고, 일반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파티마들의 우월함이 그들을 같은 인간의 범주에 넣는 것을 거부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이 작품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는 이 파티마들의 미래에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처럼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은, 인간이 생명의 정점,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4. 미지의 인간
이런 반복되는 차별과 두려움은 또다시 맨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인간은 무엇이며, 무엇을 인간 범주에 넣고, 무엇을 제외할 것인가? 그러나 몇 가지 사례를 들어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으로도, 법적으로도 계속해서 변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무엇을 인간으로 부르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지금도 거대한 생명의 진화라는 거센 흐름 가운데 있는 하나의 종(種)일뿐이며, 문명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개념은 계속해서 확장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보다는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월터 윙크는 《참사람》에서 러시아의 철학자 니콜라스 베르자예프의 글을 인용합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참 인간성(Humanity)으로 계시한다. 참인간성은 참으로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전능도 아니요, 전지도 그리고 그 밖의 무엇도 아니며, 오직 인간성, 자유, 사랑, 희생 … 등이 그 특성이다. 하느님은 인격적이고 인간성을 요구한다. 참인간성은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다. (114쪽, 한국기독교연구소)

저에게 예수는 인간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인간됨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준 사람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나눠줄 수 없는 생명을 나눠 줌으로써 누구도 내디딘 적 없는 새로운 인간의 차원을 열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아닙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를 인간됨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인간됨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예수의 삶 속에서 분명해진다. … 참사람은 완비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완전한 모델이 아니다. 어떤 모델도 완전할 수는 없으니 인간의 특성은 아직도 발현 중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요일 3:2, 위의 책 340-341쪽).

우리는 예수가 그랬듯 새로운 인간의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 끝은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날 본 하느님의 형상을 우리들은 아직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합니다. 다만 예수처럼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미지의 참사람이 되기 위해 나아갈 뿐입니다.

 

변영권
헤비메탈, 프라모델, 일본 애니메이션, 오토바이를 좋아한다. 감리교신학대와 신대원 기독교윤리를 전공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 합리적 이성적 신앙을 추구하며 현재는 제천 예사랑감리교회 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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