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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카이 토모아키, 신학의 ‘현실성’을 증명하다
[330호 신학자의 말] 사회사적 관점으로 신학을 성찰하는 후카이 토모아키 교수 인터뷰
[330호] 2018년 04월 27일 (금) 14:09:13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 후카이 토모아키도쿄신학대학 대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 독일 아우구스부르크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 교토대학교 대학원에서 20세기 신학사에서의 신인식 문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에서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로부터 박사 논문 지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초월과 인식》《하르낙과 그의 시대》《사상으로서의 편집자》 등이 있으며, 슐라이마허, 하르낙, 트뢸치, 판넨베르크 등의 저서를 일본어로 옮겼다. 40여권의 저서와 역서를 출간했다.

교회 안팎, 개신교 안팎에서 고리타분하고 소통 불가능한 학문으로 여겨지는 신학. 성도의 성화, 교회 정화에 기여하기보다는 면죄부를 주는 데 동원되는 신학자들. 자정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학교. 신학, 신학자, 신학교의 무능과 타락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신학이 과연 학문인가?’라는 질문은 오래된 비아냥거림이다. 그럼에도 “신학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그리스도인 인구가 0.4%밖에 되지 않는 일본에서 신학의 공공성과 현실성을 증명해온 후카이 토모아키 교수(토요에이와조가쿠인대학교)이다. 그는 사회사적 관점, 신학사적 관점으로 신학을 연구해왔고, 20년 넘게 비그리스도교 사회의 언어로 비그리스도인에게 신학의 기능과 의미를 설명해왔다.

지난 3월 21일 오전, 저서 《신학을 다시 묻다》(비아)의 번역 출간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한 토모아키 교수를 만났다. 교회 안에서조차 신학에 기대하는 바가 없어지고, 신학의 무력감만을 재차 확인하는 시대에 신학을 성찰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터뷰를 비롯해 같은 날 진행된 이화여대 특강과 북콘서트에서 오간 내용을 일문일답 형태로 정리했다.


― 《신학의 기원》이라는 교수님의 책이 한국에서는 ‘신학을 다시 묻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제목이 마음에 드시는지?
물론이다. 사실 처음 생각한 제목이 ‘신학재고’(神學再考, 신학을 다시 생각하다)였다. 그러나 출판사 편집회의에서 아무도 그 제목을 택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어판 제목은 내가 처음 생각했던 제목에 가깝다. 일본판보다 제목이 더 좋다.(웃음)

― 신학을 ‘다시’ 묻거나,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결심한 동기는 무엇인가?
일본인들은 ‘신학 논쟁’이라는 표현을 관용어로 쓴다. 답이 안 나오는 논쟁이나 성과 없는 추상적 논의를 할 때 비아냥거리듯 사용한다. 신학은 이 세계에는 관심이 없고 저 너머 비현실적 세계만을 논의하는 분야라고 여기는 것이다. 나는 신학은 그런 게 아니라고, 신학에 대하여 다시 설명하고 싶었다. 신학이 교회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학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 비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2013년에 썼는데 4쇄까지 발행했다. 신학과 관련한 책이 일반교양도서로서 꾸준히 읽힌다는 게 신선하다.
신학의 역사와 함께 정치, 경제 등 일반 역사를 함께 관계 맺어 설명했기 때문에 ‘교회 밖 사람들’에게도 잘 읽혔던 것 같다. 의외로 교인들 반응도 뜨거웠다.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는 피드백이 많아 놀랐다.

   
   
 

― 책에 어떤 내용을 담았나?
고대부터 현대까지 (프로테스탄트 중심이지만) 신학이 각 시대마다 어떤 사회적 역할을 했는지 담았다. 기독교는 특정 사회·문화·역사 속에 들어가는 순간, ‘복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신학은 변하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는 각 시대 상황과 신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지점과 맥락을 설명했다. 신학계에서는 이런 방법을 ‘신학사적 관점’이라 부르는데, 독일어 ‘테올로기게쉬히테’(Theologiegeschichte)를 번역한 말이다. 사회사(社會史)적 방법으로 이해하면 된다. 한국어판의 부제도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인 것으로 알고 있다. 

― 보통은 신학의 내용 자체를 설명하고 교회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찬양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책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설명한다.
독자에게서 들은 피드백 중 가장 좋았던 말은 “기독교인이세요?”였다. 책 자체로만 보면 신앙인인지 아닌지 전혀 모르겠다고 하더라. 이 책으로 학교에서 기독교개론 수업을 하는 데 어떤 학생이 와서 ‘교수님은 기독교와 신학에 대해 잘 아시니까 나중에 목사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권하더라. 난 20년 전부터 목사였는데….(웃음) 내가 바라던 바였다. 신학의 백미는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오히려 스스로를 절대화하려는 수단으로 썼기에 사람들에게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나 역시 신학자로서, 나를 상대화하려 성찰하며 이 책을 썼다. 

― 그리스도인 인구가 0.4%라는 일본에서 ‘신학의 쓸모’를 깊이 고민해왔다. 신학이 처음 ‘이 세상’에 필요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신학은 종말이 지연되면서 생겨났다. 예수가 가르친 대로 종말이 도래했더라면 신학은 생겨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을 거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까지 아직 시간이 더 남아 있기에, 사람들은 그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신앙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신학의 시작이었다.

― 신학 형성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큰 흐름을 간단히 표현한다면?
신학은 처음 그리스 전통과 만났고, 중세 때는 철학의 전통과 맞물리고 엇물리며 체계를 구축해갔다. 일본에는 ‘상대방 씨름판에서 스모를 한다’는 속담이 있다. 초기의 신학은 ‘철학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 언어와 틀을 활용해 자리를 잡아갔다. 중세 때는 유럽이 ‘그리스도교 공동체’(Corpus Chrisitianum)로 불릴 만큼, 신학은 사회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보편 원리가 되었다. 당시 신학은 ‘영원한 진리’였으며 세상 모든 현상을 설명할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종파 분열이 되고, 그 종파의 수만큼 신학도 다양해졌다. 때로 신학은 정치적 통일을 돕거나 전쟁의 근거가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종교를 선택한다. 현대에는 신학도 시장(市場)의 평가를 받고, 인기가 높은 신학이 힘을 갖는다.

―  ‘신앙 공동체’의 필요로 시작된 신학이지만, 교회 밖 세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음이 쉽게 짐작된다.
신학은 단 한 번도 ‘이 세계’ 현실과 무관한 ‘저 세계’의 이야기이기만 한 적이 없었다. 신학은 분명 신앙 공동체로부터 시작된 ‘교회의 학문’이지만, 교회라는 담을 넘어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수정되고 새로이 형성돼왔다. 그래서 신학사를 살피면 사회심층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그 구조 속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지 살필 수 있게 된다. 

― 그러나 그 신학의 역할이 인류에게 치명적이었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 전쟁의 근거나 명분이 되기도 한다. 과거 한국에서도 신학이 전쟁을 부추기는 데 이용됐다.
1871년 통일한 독일의 ‘통일 국가’에 대한 거대한 설계안을 독일 루터파 신학자들이 맡았다. 이때 그들은 국가의 정치적 당위와 도덕성을 입증하기 위해 ‘정치신학’ ‘국가신학’을 구축했다. 루터파 신학자였던 마르틴 캘러는 그의 책 《우리 힘의 강력한 원천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Wo sind die starken Wurzeln unserer Kraft?)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독일 황제에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고 쓰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이념을 ‘반그리스도교’적이라 규정하고 “그리스도교적인 이웃 국가인 독일이 이와 싸워야 한다”고 했다. 이런 신학 해석은 일반 저널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고, 프랑스와의 전쟁(1870)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거라고 말하는 ‘전쟁 설교’가 유행했다. (당시 주일 설교는 라디오가 보급되기 전까지 가장 활발한 미디어였다.) 프랑스의 패배는 곧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 오늘 이화여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독일의 개신교 신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 전쟁과 신학의 관계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날 것 같다. (후카이 교수는 19세기 독일 개신교 사상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올해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기다. 1914년 전쟁 시작부터 1918-1919년 패전까지의 독일 역사에서는 정치적으로 상반된 두 진영의 신학이 발견된다. 한쪽 진영은 앞서 설명한 ‘국가신학’ ‘정치신학’으로 기능하던 신학자들이고, 다른 쪽은 그러한 신학이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불과했음을 느끼고 비판한 신학자들 진영으로 나뉘었다. ‘세대론’으로 이들의 모든 대립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전자를 ‘빌헬름 세대’ 신학자로, 후자를 ‘(바이마르의 성스러운) 프런트 세대’로 부른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재위 1888~1918) 제정기 ‘국가신학’으로 존재한 신학을 이끈 학자들은 아돌프 본 하르낙, 에른스트 트뢸치, 프리드리히 나우만 등이다. 프런트 세대는 이들 빌헬름 세대로부터 신학을 배웠으나 ‘독일제국의 하나님’을 비판하고 부정하면서 등장한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칼 바르트 등이다. 이번 강연은 두 세대의 신학를 비교하면서 위기 시대의 ‘신’, 전환기 시대의 ‘신’에 관해 살피려 한다.    

― 빌헬름 세대 신학자는 결국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1871년 염원하던 통일을 이루었을 때 신학자들은 국가의 정신적 통일을 위한 아이덴티티 설계와 정치적 당위를 찾기 위한 정치신학을 구축했다. 그때 ‘독일적인 것’의 뿌리를 찾은 것이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이었다. 하르낙은 “독일은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함께 근대화를 이룩했다”며 영국의 청교도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보다도 빨리 근대적 자유를 거머쥐었다고 주장했다. ‘뒤처진 대국’ 독일에겐 근대적 유럽의 기원이자 근대적 자유사상의 ‘독일적’ 원류가 필요했다. 그게 마르틴 루터였다. 이 시대 루터 연구의 부흥은 신학적 관심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고, 국가정책과 그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여론의 결과였다. ‘국가신학’은 개신교 진영의 독단적인 주장이라기보다는, 국가로부터의 요청이었고 대중들에게도 널리 받아들여졌다.

   
▲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 그리스도교 역사를 연구하는 홍이표 박사(왼쪽)가 통역을 맡았다. 홍 박사는 후카이 토모아키 교수의 책 두 권을 번역했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 전쟁의 패배 뒤 ‘전쟁설교’ ‘국가신학’ ‘정치신학’을 웅변하던 신학자들은 어떻게 되었나?
놀랍게도 그들은 ‘신학적 공화주의자’로 모습을 바꾼다. ‘내셔널 리버럴리스트’로 불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프런트 세대는 이들의 정치적 변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 반대 진영인 프런트 세대도 빌헬름 세대로부터 신학을 배웠다고 했는데?
그들 대다수는 직접 전쟁터를 겪은 세대였기에, 빌헬름 세대의 신학을 전적으로 반박해왔다. 패전과 사회 붕괴 속 ‘빌헬름 신학’이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기에 대학 밖에서 삶의 현실을 조망하는 새로운 신학의 길을 걷는다. 1913년경부터는 박사 논문이나 교수자격 논문도 안 쓴 채 스스로 입장을 확립해 ‘신학부 밖의 신학’을 구축하려 시도한다. 

― 프런트 세대가 말한 ‘새 신학’ ‘신학부 밖의 신학’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준다면?
예를 들어, 에밀 브루너는 《위기의 신학》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웅변하기보다는 조용히 삶의 현실을 보고 듣자고 강조한다. 위기 속 삶의 현실이 다 무너지고, 알몸과 같이 된 뒤에야 인간은 그 삶을 근본부터 다시 살피게 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것은 ‘절대 타자로서의 신’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물음, 인간의 종교적인 능력, 국가의 정신 기반으로부터 시작된 신학의 구습을 버리고 ‘절대 타자로서의 신’이 인간에게 내려주는 계시로부터 다시 신학을 시작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런 붕괴의 시대에 신에 관한 언어 재구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책이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이다. 바르트는 자비로 출판한 이 책에서, ‘미지의 숨겨진 신’ ‘절대 타자’ ‘완전한 타자’ ‘비가시적인 성스러운 존재’ 등의 말을 통해 “신을 다시 신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도했다. 또한 고가르텐은 《종교의 행방》이라는 책에서 “신의 초월성이란, 인간이나 국가가 요청하는 그 무엇으로서의 신을 부정하여, 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무언가를 설명하는 말로서, 피안으로부터 도래해 올 신, 즉 신의 계시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 그 신학의 내용과 당대 상황이 어떤 관련이 있는 건가?
위기의 시대에는 신의 의지, 신의 숨겨진 의도가 유행한다. 위기 앞의 인간은 귀를 기울이고 신의 계획에 대한 납득 가능한 설명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런데 그 설명이 붕괴를 낳은 사상이나 신학의 재탕(반복)이라면 인간은 다시 무력할 수밖에 없다. 프런트 세대 신학자들은 그것을 꿰뚫고 있었기에, 섣불리 신의 뜻을 웅변하기보다는 겸손히 초월의 목소리를 듣자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초월’은 흔히 말하는 아래에서 위로의 초월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세계로 초월하는 위에서 아래로의 초월이다. 이런 화법과 문법은 당시 상처받고 표류하는 신학자와 교회를 위로할 수 있었다.

― 결국 그들도 나치의 등장과 득세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초월의 차원을 강조하다 보니 현실의 정치 문제에 대한 판단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빌헬름 세대에 의해 구축된 신 개념을 파괴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새로운 무엇을 형성하진 못했다. 또한 빌헬름 제정기가 붕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에 일어난 독일혁명으로 1919년에 성립하여 1933년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 수립으로 소멸된 독일 공화국의 통칭) 때 프런트 세대들은 ‘주변의 비판자’에서 ‘주류’로 추대되었다. 대학의 신학부와 기존 교회에 대한 비판자로서의 사명을 저버리고 대학 신학부에 자리를 잡는 등 ‘공화국의 신학자’가 되고야 말았다. 그들이 말하는 신학은 새로운 형태의 ‘독일제국의 신학’일 뿐이었다. 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누구든 앉을 수 있었고, 나치가 나타났다.

―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는 패턴 같은데….
날카로운 비판 활동은 당대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으나, 그 뒤에 무엇이 ‘형성’되기 전에 그 유행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 교회에서는 이른바 ‘교회파’와 ‘사회파’의 과격한 대립과 논쟁이 있었다. 그 갈등 중 내가 깨달은 것은 그 어느 쪽도 현실 세계를 움직일 것 같은 힘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양쪽의 신학 논의나 해설을 꼼꼼히 읽었으나, 그 힘을 발견할 수 없었다.

― ‘사회파’ 신학의 한계는 무엇이었나?
분명 흥미로운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최근 유행 사상의 그리스도교 버전이라고 할까? 일반 사회사상을 응용한 수준이었다. 일본 교회는 소수파로서 여러 의미 있는 성명서도 내고 있다. 충분히 의미 있는 행동이지만, 어디선가 하고 있는 말에 그리스도교적 언어를 추가하는 것에 만족하는 신학이라면 조금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파 신학은 비판하는 동안에는 웅변으로서 존재하지만, 막상 상대가 쓰러진 뒤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우왕좌왕하느라 사람들을 제대로 견인하지 못한다. 신학에 기대하는 것이 없어지면서 사회뿐 아니라 교회에서조차도 신학을 상대해주지 않는 것 아닐까. 교회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신학의 필요성을 고민하게 된 이유다.

   
▲ 후카이 토모아키 교수는 이날 오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독일의 개신교 신학'을 주제로 특강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교회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신학?
보수파의 신학이라 할 수 있는 교회적인 신학은 ‘교회 형성’을 열심히 말하지만, 교회 안에서조차 읽히지 않는 신학 서적을 낸다. 그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불명확한 신학 언어로 전통을 유지하는 것이 엄청난 사명인 것처럼 말한다. 결국 교인이 감소하고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도 줄어들고 있다. 신학의 가장 기본적 책무도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신학은 원래부터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교회를 위한 신학이기에 더더욱 세상을 위한 학문이어야 한다. 정말 ‘교회적’인 신학은 이 세상을 위한 진정한 비판과 형성적 지성을 수행하는 것이다. 

― 한국의 정규직 신학 교수 대다수는 미국에서 신학을 배워왔다. 당연히 미국 신학의 유통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장단점이 있다. 일본은 교회는 미국으로부터, 신학은 독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교회 현장과 신학이 부조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미국 교회와 미국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기에 교회에서 미국 신학을 받아들이기가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다만 미국과 한국의 상황이 매우 다를 텐데 그 맥락(콘텍스트)을 무시하고 그대로 미국의 신학을 복사할 확률이 높다. 그런 식의 도입이라면 과연 신학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책에서 미국에서 일어난 ‘신학의 시장화’와 관련해 “시장화된 신학계에서 그 신학의 좋음과 나쁨, 진리성을 결정하는 것은 교회, 교파의 지도자, 대학교의 신학자들, 국가기관이 아니라 소비자들, ‘대중’이다”라고 썼다.
현대 신학이 처한 현실이다. 시대정신에 호응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대 자체에 대한 비판을 멈추게 되는 것은 위험하다. ‘익명의 대중’에 호소하기 위해 유효기간이 지극히 짧은 신학만을 양산하는 추세다. 신학이 하나의 상품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면, 신학의 진리성과 정통성은 무의미해진다. 

― 한국어로 번역된 두 권의 책은 공통적으로 ‘시대정신’ ‘시장성’ 등에 휘둘리는 것을 매우 민감하게 경계한다.
어떤 이상한 논리의 주장일지라도 그 나라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 채용된다. 나치 시대가 그랬다. 나치와 투쟁한 고백교회,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 기독교인들 양쪽 모두 소수였다. 그 둘이 싸운 게 결코 아니다. 그 사이 중간에 엄청난 다수가 있다. 이 사회가 어디로 흘러갈까, 이해득실 따지며 지켜보다가 대세가 기우는 쪽으로 우르르 따라갔던 거다. 지금처럼 민주화된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사상이나 종교에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해도 결국 다수에 의해 선택받고 인정받는 말이 ‘절대선’으로 여겨진다. 그 하나의 사례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다. 개인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기에 누가 보아도 위험한 대통령을 뽑고도 그대로 두고 있다.

― 민주화된 개인들(대중)이 만들어내는 전체주의를 신학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신학은, 그리고 우리는 기류자(寄留者, 나그네)로의 자세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 이 세상의 관성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 시민으로서 세상을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울타리 안에 매몰되지 않고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나 이웃들과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한 자세이고, 신학의 기능이다.

― 특별히 신학만이 기여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이 있다는 말로 들린다.
신학이 학문세계에 갖는 특성은 하나님이라는 절대 타자를 상정하고, 거기에 의지해 과감하고 용기 있게 나 자신을 상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에 서 있는 지성의 핵심이다. 신학만의 탁월한 기능성이다. 신학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다면, 위험하리만큼 ‘상대화’를 추구하는 학문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신학은 현대 사회의 독단적인 절대주의와 무절제한 상대주의, 그리고 양쪽에 잠복한 자기절대화를 모두 거부하고 그리스도교 본래의 모습과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신학적 상대화’로 인해 회색지대에 빠질 우려는 없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회색이다. 절대악도 절대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완벽한 선택이란 없다. 다만 최선을 다해 숙고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오히려 이 길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자기절대화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세계 역사에서 드러난 자기절대화의 비극은 잘못된 신학이 잉태한 것일지도 모른다. 신학은 이에 맞서 이 사회가 양자택일의 극단적 상황에 빠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 교회와 신학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다. 신학은 실패했고 교회는 신학으로부터 멀어졌다. 
신학이 있었기에 교회가 만들어진 게 아니고, 교회 예배가 존재했기에 신학이 만들어졌다. 어떻게 기도할까, 어떻게 고백할까 고민하다가 나온 것이 신학이다. 신학이란 본래 교회의 언어다. 그런데 요즘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학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신학을 창출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 말(언어)이 사람들에게 닿지 않아서다. 교인들에게조차 감명을 주지 못한다. 그렇게 신학이 생명력을 잃었다. 교회의 신학 부재는 곧 신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다수 대중을 양산했다. 몇몇 사람들은 교회에서 신학을 접할 수 없어, 자기에게 좋은 신학을 개인적으로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인다. 편식이 반복된다. 자기 정화가 약화되어 자기 안에 매몰되면 자기절대화, 신학절대화에 빠질 위험이 있다. 신학은, 신학자는 교회에 대한 사명을 다시 자각하고,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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