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최종편집 : 2018.5.8 화 11:22
기사검색
   
> 뉴스 > 교회와세상 |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한국 복음주의는 ‘복음주의’인가?
[330호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베빙턴 테제’와 복음주의에 대한 성찰
[330호] 2018년 04월 27일 (금) 14:18:17 최종원 goscon@goscon.co.kr

1. ‘복음주의’라는 불편한(?) 용어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 한국 사회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이 ‘보수 기독교’라는 말과 큰 차별성을 갖지 못한 표현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때 한국 기독교의 성장을 주도하던 ‘복음주의 교회’라 불리던 대형 교회들이 보이는 반사회적이고 보수 일변도의 모습이 그런 인식을 강화합니다. 이른바 ‘복음주의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안타깝게도 종교인 과세 반대, 반동성애, 반이슬람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 일변도의 목소리들입니다.

복음주의에 대한 우려가 더해진 데에는 아마 소위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한 것도 영향이 있을 듯합니다. 지난 미국 대선 때 교묘하게 트럼프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던 존 맥아더 목사나, 요사이 반여성주의 발언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존 파이퍼 목사 등은 미국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목사들로 불립니다. 물론 이러한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리던 분 중 한 분인 홍정길 목사나, 미국의 팀 켈러 목사는 복음주의권에 대한 반성과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 1859년 10월 29일자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에 실린 윌리엄 월버포스 초상. 월버포스를 중심으로 '클래팜 섹트'는 복음주의 신앙에 따라 노예무역 금지와 사회 개혁을 위해 정치적 활동을 전개했다. (이미지: 웰컴 이미지/위키미디어코먼스)

제 고백을 보태자면, 한국에서는 줄곧 장로교회를 다녔지만 신학을 공부하지는 않았기에 ‘어떤 신학을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와 같은 비신학자·비목회자가 신학자·목회자나 일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글을 쓸 때는 알게 모르게 조심스러워집니다. 이럴 때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말이 ‘복음주의자’라는 표현입니다. 저를 복음주의자라고 전제하고 글을 풀어나갈 때 저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기본적인 안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용어의 의미를 깊이 고민해서라기보다는 복음의 가치를 여전히 믿고 살아내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 때문에 스스로를 기꺼이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출판사에 보낼 원고를 교정하다가 서문에 쓴 “복음주의자라는 자의식으로”라는 표현을 고민 끝에 지웠습니다. 초고를 쓰고 시간이 꽤 지나는 동안 저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자라는 용어가 한국의 맥락 속에서 사용되는 방식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전히 여성 안수의 성경적 근거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을 너무 진지하게 연구하고 고민하는 학자들, 창조과학자들, 그뿐 아니라 창조에 대해 자신들이 수용할 수 있는 신학적 가이드라인을 정해 놓고 과학적 가설을 받아들이는 신학자들과 함께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것을 받아들이기 부끄럽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폴 스티븐스의 ‘일터신학’이 이랜드와 만나고, 진보적 사상가 짐 월리스가 명성교회와 만나고, 팀 켈러를 온누리교회 양재 센터에서 만나고, 창조과학이 한동대에서 꽃피는 현실에서 복음주의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아마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간 제가 복음주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한국에서 복음주의라는 것이 오해되었거나이겠지요.

모든 이데올로기의 특성이겠습니다만,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분석하는 대부분의 글은 해당 이데올로기는 규정하기가 어렵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복음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편리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아마 한국에서 복음주의를 정의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이 ‘베빙턴 테제’라고도 불리는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의 복음주의 4대 강령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근대 영국의 복음주의: 1730년대에서 1880년대까지의 역사》에서 복음주의의 핵심을 성서주의, 회심주의, 십자가중심주의, 행동주의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이 정의를 중심으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지점은 무엇인지, 지향할 바는 무엇인지 고민하고자 합니다.

   
▲ 데이비드 베빙턴. (유튜브 영상 갈무리)

2. 베빙턴 테제
베빙턴의 이 책이 한국에서도 번역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베빙턴 테제를 그의 책을 통해서 듣기보다는 그의 테제를 인용한 다른 책을 통해서 접합니다. 그러니 베빙턴 테제가 출현한 맥락(context)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특정한 정의를 수용하는 것을 복음주의자의 특성이라는 오해를 낳습니다. 저는 이러한 오해를 낳게 한 데에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복음주의 관련 책들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베빙턴은 같은 문화적 콘텍스트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굳이 부연 설명하지 않아도 맥그래스 자신이나 영미권 독자들은 베빙턴 테제가 태동한 문화적 맥락을 이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맥락은 사라지고 텍스트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베빙턴 테제의 맥락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빙턴은 자신의 책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은 보다 최근에 생겨난 운동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1730년대 이후 영국에서 생겨난 대중적인 프로테스탄트 운동”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전통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운동이라고 주장합니다. 1730년대라면 유럽에서 어떤 시기일까요? 간편하게 떠올려 보겠습니다. 영국에서 존 웨슬리가 탄생한 것이 1703년입니다. 한창 그의 메소디스트 운동(Methodist Movement, 감리교 운동)이 일어날 때이겠지요. 영국의 남동쪽 도버해협 건너 프랑스는 어떠한 시기일까요? 계몽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된 시기이지요. 그로부터 반세기 후 유럽은 프랑스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시대를 맞습니다. 이 때문에 베빙턴은 ‘복음주의는 계몽주의의 프로테스탄트 버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영국의 메소디스트 운동이나 프랑스 계몽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은 대중운동으로 귀결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프랑스혁명에서 그 대중의 범주를 어디까지를 볼 것인지도 논쟁거리이긴 합니다만, 영국과 프랑스 귀족과 성직 중심의 절대군주 시대에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대중들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지점이 이미 맥그라스나 한국 기독교계에서 놓친 부분입니다. 맥그래스는 복음주의운동을 ‘지성운동’이라고 규정했고, 한국 사회에서도 복음주의운동은 지성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됐습니다.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베빙턴 테제에 등장하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사회 엘리트 계층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복음주의운동을 지성운동이라고 부른다면 큰 오해입니다.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가진 자의 위치에서 가부장적이거나 온정적인 자세로 대중들에게 접근했다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그들의 운동이 지성운동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웨슬리의 메소디스트 운동이 지나치게 열광적이며 세련되지 못하다고 비판받는 것도 이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맥락을 오해한 것이지요. 흔히 규범적으로 제시되는 4대 강령에 대해 베빙턴이 어떠한 식으로 언급했는가를 보아도 맥락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세기는 기독교가 이미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신념을 복음주의라는 틀로 만들었던 시기이다. 그 이전에 존재했던 특징은 회심주의, 성서중심주의와 십자가중심주의이다. 다른 특징, 즉 행동주의는 1730년대의 각성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저 복음주의 4대 강령을 나열하는 것과 베빙턴이 ‘행동주의’의 등장을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흐름과 다른 흐름이라고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의 복음주의 이해에서 행동주의는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요? 간편하게 맥그래스의 논의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미래》에서 행동주의를 ‘복음전도와 다른 형태의 기독교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 전도와 제자도 프로그램에 열심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계몽주의의 프로테스탄트 버전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빈약한 설명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이 규정은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행동주의라는 것도 복음전도나 제자도 프로그램으로 읽힐 여지가 많습니다. 필연적으로 복음주의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잘 구축되어 있는 한국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소개되고 소비되어온 것이지요.

저는 이 지점이 한국 복음주의가 길을 잃은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주의라는 것이 곧 기독교 교리체계를 열심히 연구 학습하고, 그것을 열심히 전도하는 것으로 제한되어 버린 것입니다. 또한 한국의 복음주의가 과도하게 회심주의와 성서중심주의에 초점을 두다 보니, 복음주의를 칼뱅주의나 알미니안주의 등 다른 신학체계 중 하나로 인식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한국 복음주의가 무의식중에 연결시켰던 지성운동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콘텍스트에 대한 부족한 이해가 초래한 공백을 지적 정합성을 추구하는 텍스트로 끊임없이 채워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복음주의운동 내에서 과학마저 자신들의 이념 체계로 종속시키고자 하는 너무나 진지하지만 서글픈 시도인 창조과학이 여전히 활개 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베빙턴은 영국 복음주의에서 행동주의 이외의 세 가지 규범 역시 이전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통일된 흐름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영국 복음주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슬리의 사상 역시 청교도 전통과는 무관한 고교회 전통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적어도 베빙턴의 맥락 속에서 복음주의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규범은 행동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영국의 복음주의는 복음을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 가지는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베빙턴이 주장하는 의미에서 복음주의를 가늠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행동주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제 이 복음주의가 영국에서 어떠한 식으로 발전했는가를 보겠습니다.

3. 클래팜, 섹트(분파) 혹은 성자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로 잘 알려진 영국 노예무역 폐지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 중에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가 있습니다. 그가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던 1780-1825년의 시기는 이른바 영국의 복음주의운동이 만개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중에 역사가 기억하는 단연 큰 열매는 1807년의 ‘노예무역 폐지법’일 것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혁명을 했던 프랑스에서 노예무역이 금지된 것이 1817년이고, 실제로 발효된 것이 1826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결과입니다.

영국에서 이른바 복음주의자라는 자의식을 가진 25명 남짓한 운동가들이 체계적으로 사회개혁을 주창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국 런던 남부에 있는 클래팜(Clapham)이라는 곳에서 주로 모임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을 일컬어 ‘클래팜 섹트’라고 부릅니다. 윌버포스를 지원했던 클래팜 섹트의 구성원은 사업가, 법률가, 성직자와 학자들이었습니다. 윌버포스와 클래팜 섹트의 활동 시기와 프랑스혁명의 시기가 정확하게 겹칩니다. 프랑스에서 사회 불평등으로 전대미문의 혁명이 발생할 정도였다면, 영국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국 역시 아동들이 하루 18시간씩 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하던 시기입니다. 노동자들은 고된 하루의 피로를 선술집에서 술에 의지해서 풀어야 했습니다. 그 시기를 ‘술의 시대’(Gin Age)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맥락이 있습니다. 작은 범죄에도 가혹한 형벌이 따르는 시기였습니다. 소매치기범에게 사형이 선고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반인간적 사회의 정점 유럽 열강들이 시행하고 있던 노예제도였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를 중심으로 한 클래팜 섹트에서 내건 기치는 정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예무역 금지와 사회 도덕 개혁을 ‘두 가지 위대한 목표’라고 명확하게 설정하였습니다. 물론, 영국에서 노예무역에 반대의 목소리를 낸 것은 클래팜 섹트가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18세기 초반 퀘이커들이 노예무역에 반대하여 반노예제운동을 펼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20대에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윌버포스는 자신이 가진 복음주의 신념에 따라 당시 보수당(토리)과 자유당(휘그)의 경계를 넘어 노예무역 폐지를 지원하는 곳에 투표했습니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다른 인간이 노예로 삼는 차별이 사회적인 죄악이며, 그 속에 사는 개인도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이러한 도덕적 악에 대하여 책임을 느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는 1789년의 한 연설에서 ‘노예제도 폐지와 같은 사회개혁은 정파적인 질문이 아닌 사람들 모두가 들어야 할 이성과 진실의 소리’라고 갈파했습니다. 또 그는 1797년에 쓴 《실제 기독교의 가르침과 비교해 본 영국의 중상류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연한 관행적인 종교 체계》에서 하층민의 삶에 여전히 무관심한 엘리트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했습니다. 윌버포스와 클래팜 섹트는 바로 이 중상층의 사람들을 일깨워 노예제를 폐지하고 사회의 도덕 개혁을 이루어가는 데 필요한 지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시기적으로 프랑스 상류층이 혁명으로 무너져 내린 터라 다행히 영국에서 그의 목소리는 힘을 얻었습니다. 6개월 만에 그의 책이 7,500부가 팔리고 급속도로 상류층에 퍼져 나갔습니다.

윌버포스와 클래팜 섹트는 신문과 대중매체 선전을 통해 대중들의 지지를 끌어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노예무역 폐지를 포함한 사회 개혁 이슈들에 대해 의회의 찬성을 끌어내는 데 대중들이 의회를 압박하도록 했습니다. 예컨대, 클래팜 섹트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에 선교사 파송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에 무려 50만 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영국 인구가 900만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 개혁은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며, 복음주의와는 무관하다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클래팜 섹트는 대다수 부유한 배경을 지닌 엘리트 출신의 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공유했던 한 가지 정치적 이념은 노예 해방, 노예무역 폐지와 형법 개혁 등의 사회 개혁이었습니다. 그들의 개혁운동은 단순한 정치적 목적에서가 아닌 복음이 제시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들의 운동은 종교적 인도적 이상 속에 평등 사회를 추구한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들을 ‘클래팜 섹트’라는 별명으로 불렀지만, 재미있게도 당대의 반대파들은 그들을 경멸적인 의미로 ‘클래팜 성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들은 가진 자들이었고, 그들의 개혁은 가부장적인 시각의 개혁이라고 비판받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영국제국을 이끌어 가는 주요한 동력의 하나였던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은 국가의 경제적 이익과 배치되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인군자 같은 소리를 한다고 비판을 받았습니다. 현실 사회인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기보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현실 사회 속에 구현하는 개혁이 목표였기 때문에 ‘성자’라는 비아냥은 그들에게 훈장이었습니다.

4.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를 재고한다
이쯤 되면 우리가 적어도 베빙턴 테제에서 언급된 복음주의에 대해서 재고할 지점이 명확해지지 않을까요? 여전히 앞의 세 가지 복음주의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이제 복음주의가 그 이전과는 다른 정체성으로 등장하게 된 행동주의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제는 복음주의자가 인간에 대한 차별을 행하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에 대해 문제제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하는 인간관에 반하는 배제, 차별, 혐오에 맞서야 합니다. 사회 개혁에 힘을 보태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마땅히 복음주의자라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을 지지해야 합니다. 여성과 외국인, 다른 종교, 소수자 등에게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차별을 복음의 이름으로 거부해야 합니다. 복음주의자라면 토지 소유 유무를 통해 확대되는 불공정한 부의 편중에 반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세상 물정을 모르는 성인군자 같은 소리만 한다’는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정부 들어서 이루어지는 한국 사회의 정상화 속에 교회는 그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아노미와 문화지체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 개혁을 위해 제시되는 어젠다마다 혼란스러워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에 맞서는 것이 복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커집니다.

적어도 인간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종교적 이념을 들어 반대하는 이들은, 이제는 복음주의자라는 명칭을 떼어내야 합니다. 그들이 칼뱅주의자, 알미니안주의자 등으로 불릴 수 있을지는 모르나 역사적 복음주의자의 범주에는 들지 않습니다. 맥락 없이 사용하는 ‘복음주의’ ‘복음주의자’라는 말을 이제는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합니다.

복음주의를 신학적 경계로 범주화하는 것은 역사적 복음주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적어도 18세기 영국이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출발한 ‘베빙턴 테제’에 대한 해석을 신학자들이 독점한다면 시대착오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주의에 대한 베빙턴의 정의를 21세기 한국의 콘텍스트 속에 재해석해야 합니다.

먼저 성서주의를 보겠습니다. 성서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느냐의 여부로 판단하는 것이어야 할까요? 성서의 문자적 완결성을 믿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복음주의라고 보기보다는 성서의 가르침, 성서에서 바라보는 인간관, 세계관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실천적인 고백이 복음주의에서 말하는 성서주의여야 합니다.

십자가중심주의는 어떨까요? 우리가 십자가 대속을 받아들이는지 여부, 혹은 그 이후 부활의 역사성을 믿느냐는 중요한 신학적 논제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복음주의 맥락에서는, 이 논쟁에 머무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놓고,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결단하는 것이 복음주의여야 합니다.

회심주의에 대한 해석 역시 복음을 수용하는 개인적 회심을 넘어선 사회적 회심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회심이란 복음이 가지는 공공재의 가치를 발견하고 우리의 삶의 지향이 그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화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부자 되었다’는 것이 회심의 극적인 고백이 아니라, 예수를 고백하고 사회를 바라보니 개인의 변화에 머물지 않고 복음으로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바꾸어가야겠다는 실천적인 고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행동주의 역시 재고가 필요합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교회 내의 제자도와 복음전도라는 어휘로 표현한 20세기 영미의 행동주의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18세기 상황에서 윌버포스와 클래팜 섹트가 주장한 사회참여가 우리에게 더 절실한 상황입니다. 2009년 경북대에서 “영국의 종교와 교회–역사적 조망”이라는 주제로 영국사학회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저 역시 그 당시 발표자로 참여하였기에 기억이 뚜렷한데, 당시 워릭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윤영휘 박사가 “대서양복음주의 네트워크의 노예무역 폐지주의”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발표에 언급된 베빙턴의 ‘행동주의’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윤 박사는 본인이 직접 베빙턴으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웨슬리와 영국 복음주의자들의 노예무역 폐지와 같은 사회참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복음주의마저 교리적 체계, 혹은 지성의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복음주의를 사회 바깥으로 더욱 고립시킬 뿐입니다. 복음주의가 고민해야 할 것은 교리이기보다는 공적 영역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로 규정되어야 합니다. 복음주의의 존재감은 복음의 공공성을 이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것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의인 10인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프랑스가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을 영국 사회는 스무 명 남짓한 클래팜 성자들의 공로로 성취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복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활력이 사라지면 이데올로기만 남습니다. 그 결과가 미국 복음주의에서 보이는 것처럼 보수 기독교와 자연스레 등치되는 구조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맥락은 사라지고 글자만 남는 화석화입니다. 이제 복음주의자의 고민은 “어떤 이념을 지킬까”가 아니라 “복음의 가치를 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대한 관점, 회심에 대한 관점,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논쟁하기보다는 이 사회 속 공공재로서 복음의 성격, 복음이 지향하는 인간애를 실현하는 것을 방해하는 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실현될 때 우리는 언젠가는 다시 자랑스럽게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관련기사
· 개인의 욕망으로부터 소명을 해방하라· 명성교회 세습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 이제는 루터를 보내야 할 때· 그들만의 유토피아, 그리고 배제와 혐오
· ‘가나안 성도’를 재고한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생각한다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복음과상황 기사제보 광고문의 제휴안내 오시는길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506-10 산성빌딩 104호 우)120-836 | 전화 : 02-744-3010 | 팩스 : 02-744-3013
발행인 : 김병년 | 이사장 : 박종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병년
Copyright 2008 복음과상황.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con@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