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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는 심정으로
[330호 믿는 '페미'들의 직설]
[330호] 2018년 04월 27일 (금) 15:50:28 달밤 goscon@goscon.co.kr
   
▲ 지난 3-4월 교회와 성폭력을 주제로 열린 공개워크숍(사진: 달밤 제공)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5, 29)

강력한 절망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을 때 경험하는 가장 비참한 일이 무엇일까? 나는 단연코 상상력을 잃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상 너머를 그리지 못하는, 우리가 희구하는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생생하게 다가올지 차마 꿈꾸지 못하는 상태. 요한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도마의 마음이 꼭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교회 전통이 기억하는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너무나 익숙하고, 성금요일을 지나면서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부활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곧, 지성소 휘장이 갈라지며 죽으신 예수가 원수를 다 이기고 살아나실 거라고, 우리는 계란을 삶고 포장하며 부활의 기쁨을 전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지. 죽음과 살아남 사이, 그 사흘 사이에 일어난 강력하고 지독한 절망을 묵상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는지. 부활을 상상할 수 없었던, 그 못 자국과 옆구리에 손을 넣지 않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던 깊은 절망과 부활에의 간극을 생각한다. 마치 이승과 저승 사이 같다.

성폭력 사건에 관해 “목사끼리 얘기하자”던 목사
교회 내 성폭력 사건이 있었던 교회 담임자를 만날 일이 있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을 때 피해자에게 합의금을 주는 방식으로 중재했다던 이야기를 들은 차였다. 합의금이라…, 언뜻 피해 보상을 한 것 같지만 실은 성폭력 가해자가 법적인 징계를 받지 않고 목회를 이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접한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하자 담임자는 피해자에게 자신의 지도를 따르지 않았다며 당장 취하하라고 강요했다. 어떤 사람일까, 내심 궁금했다. 세상에서 가장 험악한 표정과 무식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얼마나 졸렬한 태도를 보여줄까. 하지만 웬걸, 내로라하는 대형교회의 담임인 그는 그를 존경하는 교인들과 함께 앉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설교하듯 말했다. 나는 우리 교회의 매뉴얼대로 했노라고, 우리가 한 모든 조치는 피해자를 위한 것이고 이제 우리는 조용히 그 사건을 잊어가고 있노라고. 그러면 다 잘 된 것이 아니냐고. 공간을 압도하는 권위와 당당함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본인의 오류 가능성을 1%도 염두에 두지 않아야만 나올 수 있는 태도였다. “목사끼리 얘기를 해봅시다.” 그가 했던 말이다. 목사가 아닌 사람과 대화하지 못할 내용이 뭘까.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침묵한다.’ 그가 따르고 있다고 말한 매뉴얼의 첫 번째 단계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는 데 있었다. 사건이 알려져 피해 여성에게 좋을 것이 없다며, 다 피해자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피해자가 법적 절차를 시작하자 고소를 취하하라고 압박했고, 교회 안에서 피해자가 겪는 냉대와 편견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교회를 가해자로 상정하는 듯한 성폭력 상담기관의 입장이 편협하다고 생각되어 더 이상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게 “목사끼리 얘기하자”던 그가 취한 행동이었다.

목회자가 되는 과정에서 개인은 성폭력 상담 교육을 받거나 관련 매뉴얼을 숙지하지 않는다. 신학 교육과 목사 안수 과정에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떤 관점을 갖고 무엇을 원칙으로 해야 하는지, 목회자는 알지 못한다. 철저한 비전문가다. 응당 전문 기관의 도움을 받으며 사안을 다뤄야 하지만 자기 편견에 갇혀 교회 조직에 이로운 방향으로 원칙을 만들고 임의로 매뉴얼을 구축한다. 여기에 피해자 중심주의, 가해자 징계 및 피해자와 교회 공동체 치유와 회복은 들어갈 틈이 없다. 성폭력이 일어나는 토양인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은 요원하다. 거대한 벽 앞에 선 듯, 해당 사안에 적용되어야 하는 기초적 관점조차 무시하는 교회 현실을 마주하고는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원칙과 현실의 간극이 마치 이승과 저승 같다.

“하나님 가라사대 #Metoo”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믿는페미, 개인기획단이 공동 주최한 공개워크숍 〈교회와 성폭력 “하나님 가라사대 #Metoo”〉 두 번째 시간에 ‘만약 내 친구가 교회 내 성폭력을 당했다고 상담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의를 했다. 회비를 내고 워크숍에 참여할 정도로 이 사안에 관심과 의지가 있는 참가자들이기에 좋은 의견이 많이 나왔다.

나 또한 얘기했다. 솔직히 너무 당황하고 괴로울 것 같다고. 친구와 내가 속한 우리의 신앙 공동체, 나와도 연관이 있는 목회자가 아닌가. 친구와 나 둘이서만 대응할 수는 없고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야 하는데 내 리더가 과연 믿을 수 있는 사람일지, 목회자는 어떨지, 피해자의 말을 믿어줄까, 또 다른 가해를 낳지는 않을까, 이 친구는 이후의 과정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등등. 토론 직전까지 교회에서 성폭력이 생기는 원인에 대해 배우고 어떤 원칙으로 대응해야 하는지 강의를 들은 우리였다. 하지만 피해자에게 가혹한 편견과 역풍이 예상되는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나 또한 싸워야 한다고 자신감 있게 의견을 낼 수 없었다. 공론화해야 한다고 친구를 설득하는 일조차 그게 잘하는 일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고민을 나누며 토의를 거듭하던 중 아이디어를 모았다. 피해를 당한 친구 혼자, 혹은 나 혼자 이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다섯 명 정도 함께 싸워줄 지지그룹을 만들어야 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요청해서 이 사건의 대책위원회를 꾸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폭력 피해를 알리고 사과받고 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등 모든 과정의 끝까지 피해자 곁에서 그를 지켜주어야 한다. 소문이 빠른 교회에서 피해자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소문이 횡행할 수 있으니 당사자가 전면에 나서지 않을 수 있도록, 대책위원회의 대표자가 권한을 위임받아 일을 진행한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토대가 되어주는 것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할 수 있다면 교회 안에서 믿을 만한 어른들의 도움도 구해가면서. 이런 사건이 생겼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이 ‘내 말을 믿어줄까, 내 편이 되어줄까’일 텐데, 끝까지 함께할 지지그룹이 있다면 그래도 한 걸음 나서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의인 열 명을 찾는 것처럼 이런 일에 함께할 동지를 찾는 것은 어렵다. 교회 차원의 성폭력 예방 교육까지는 어렵더라도, 공동체 지체들과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올바른 원칙과 관점을 공유하는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평소에 생각을 나누고 신뢰를 쌓아 두어야, 위기 상황에서 서로를 의지할 수 있다. 하아… 페미니즘의 ‘페’자도 꺼내기 힘든 교회에서 암암리에(!) 페미니즘 공부하기라…, 할 수 있을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이승과 저승 같다.

도마의 심정으로
믿는페미 동료 ‘오스칼네 고양이’가 최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여성 목사 안수 비율이 턱없이 낮은 개신교 안에서 페미니스트 목사의 탄생이라니, 기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 난생처음 가보는 초대형 교회, 입구부터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안수식에서는 고령의 남자 목사님들 사이사이에 여성들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남성 사회에서 살아남느라 고생하신 듯한 여성 전도사님이 ‘부흥사 스타일’로 기도를 인도할 때는 참 묘한 기분이었다.

눈에 띈 건 사모합창단. 밝은 자줏빛 재킷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성가대석에 정렬해 앉아 감사 찬송을 불렀다. 사모합창단이라니. 평소 남자 목회자의 여성 배우자를 ‘사모’라는 이름으로 묶어 온갖 올무를 씌우고 교회 전체가 시어머니 노릇을 하는 행태를 비판해왔다. 너무 앞서지도 말고 뒤서지도 말며 그림자처럼 목회자를 내조하되 온화한 인품과 자애로움으로 교인들을 품고, 목회자가 힘들어하거나 지쳤을 때는 위로하고 지지하며 혹여 목회자가 성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성생활을 확실히 책임질 것. 젊어서는 아름다움으로 목회자의 명예가 되고 나이 들어서는 현명함으로 복이 되는, 이른바 ‘사모’들에게 요구되는 암묵적인 룰이 있지 않은가. 여기엔 그 여성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디에 재능이 있고 어떤 분야에서 성취감을 느끼는지가 빠져 있다. 전혀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사모 역할’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니까. 익숙하게도, 남자 목회자의 여성 배우자들은 목회자가 안수를 받을 때 한복 또는 양장을 입고 단에 올라가 한쪽 편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목회자의 머리에 선배 목사의 손이 얹히고 축복을 내리는 기도를 할 때, 그를 내조하는 여성으로서 뒤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여성 배우자가 없을 경우, 어머니가 기도하기도 한다.

그리 놀랍지도 않은 관례들을 지켜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사실 목회자를 배우자로 둔 여성의 경우 그 특수한 경험을 친구들과 공유하기도 쉽지 않고,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을 동지를 찾기조차 어려울 텐데.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여성주의 시각을 나누는 관계를 꿈꿀 수는 없을까. 그래서 ‘사모’로 묶이는 게 아니라 교회 여성들의 연대로 묶여 새로운 질서를 꿈꿔볼 수는 없을까.

내 친구 오스칼은 당당히 단상에 올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의 남성 배우자는 한복을 차려입고 나와 ‘목회자를 내조하는 배우자’ 위치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우리는 목소리를 높여 그를 축복하고 손을 뻗어 파송의 찬양을 불렀다. 꽤 많은 수의 여성 목회자가 안수를 받았다. 신학교에도 여성들의 입학이 늘어나고 있다. 현실이 너무 단단하게 굳어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 같아도- 그 이승과 저승 같은 간극을 뚫고 어느 한 곳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나는 내가 희구하는 성평등한 하나님 나라가 ‘정말로’ 이루어질지 알 수 없고 그 이미지를 생생하게 그려볼 수는 없다. 하지만 목회자로서 삶을 시작하는 내 페미니스트 동료를 보며, 곳곳에서 어떻게든 아픔을 이기고 함께 싸워 내려 애쓰는 여성들을 만나며, 그리스도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는 심정으로 한 발씩 나아가려고 한다. 그날 아침, 오스칼이 안수를 받은 그 장소에서 감리교 양성평등위원회 공동위원장인 홍보연 목사(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원장)의 설교가 있었고 뒤이어 준회원(감리교의 목회자 후보 과정)을 대상으로 한 양성평등 교육과 성폭력 예방교육 건의안이 통과되었다.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달밤(필명)
크리스천페미니즘운동 ‘믿는페미’ 활동가.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일했다. 활동가 동료들과 결성한 여성주의 연구살롱 ‘나비’를 통해 페미니즘을 가깝게 접하고 운동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 감리교 여성지도력개발원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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