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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위에 세워진 교회
[330호 반디마을 한몸살이]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전통
[330호] 2018년 04월 27일 (금) 16:57:03 정동철 goscon@goscon.co.kr

‘한 몸’이 되는 과정
조명이 차분하게 내려앉은 카페 한 켠, 다섯 명의 목회위원회에 둘러싸인 그녀는 연신 마른 입술을 가다듬으며 본인의 신앙과 이전에 다니던 교회를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상견례장의 신부인 듯, 검찰조사를 받는 피의자인 듯 묘한 긴장감마저 맴돌았다. 그녀만이 긴장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녀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에는 목회위원회의 교회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목회위원회의 심의를 무사통과한다면 교인들의 단체 카톡방에 공식적으로 초청되어 성도들의 환영 메시지들을 받게 된다. 참으로 엄정하고 깐깐한 신고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린 그럴 만한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신앙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여기시지 않은 탓에 한 몸 되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인터뷰 과정을 거친다.

   
▲ 사진: 정동철 제공

몸된 교회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교인이 될 수는 없다. 들어오는 쪽이나 맞아들이는 쪽이나 피차의 의지와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마음의 준비가 되면 인터뷰를 신청해야 한다. 그 전엔 누구도 그에게 성도가 되라거나 등록을 하라는 둥 압박을 하지 않는다. 몇 년을 다니더라도 인터뷰 과정을 신청하지 않으면 그저 그를 방문자로 인정하고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다할 따름이다. 그러다 인터뷰 이후 교인이 되면 곧바로 단체 카톡방에 초청됨과 동시에 ‘설거지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고 가족이 될 만한 ‘둥지’(소그룹)에 편성이 된다.

사실 인터뷰 내용은 그다지 긴장할 것이 없다. 본인의 신앙고백, 신앙생활의 여정과 이전 교회를 떠난 사유, 새로운 교회에 대한 기대, 목회위원회의 교회 소개 등이 고작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한다는 사실과, 경험자들의 다소 과장된 장난기 어린 풍문이 신청자의 입술을 마르게 한다. 심의를 통한 부적격 판정 역시 단순하다. 지금 자신이 다니는 교회보다 이 교회의 분위기가 좀 더 좋아 보인다는 단순 수평이동은 문제가 된다. 수평이동의 경우는 우선 이전 교회를 떠난 상태여야 하며 교회를 나온 정당한 사유가 인정되어야 한다. 그 정당한 사유란 신학적·정서적 충돌을 의미하는데, 본인의 신앙양심상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상태에 놓였거나 아니면 신앙상의 비본질적 행위들을 계속 강요받은 경우이다. 또한 교회의 가르침과 달리 사랑을 경험하기 힘들고 육체적 혹은 정서적 고립이 심각했다면 이 또한 정당한 사유로 인정될 수 있다. 다만 당사자의 이전 교회 내 직분이 상당히 고려된다. 교회의 전통과 문화를 주도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그 책임을 진중하게 거론한다.

사실 그동안 인터뷰 이후 부적격 판정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지역 이주에 의한 교회 이동과 교회를 처음 찾은 이는 이유불문하고 받아들여지는데 우리 교회는 특이하게도 90%가 타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더러는 수평이동을 원하기도 했으나 인터뷰 과정을 전해 들으면 심의 결과를 짐작할 수 있기에 쉽게 인터뷰를 신청하지 못한다. 인터뷰 이후 첫 주일엔 그를 교회의 일원으로 환영하는 허입식이 열린다. 허입식은 한 몸이 되는 과정이므로 교회에 들어오는 이에게만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라 모두에게 중요한 날이다. 먼저 들어오는 이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데 굳이 훌륭한 신앙을 간증할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면 된다. 신앙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기대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성도가 함께 그를 한 몸으로 받아들이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몸된 교회의 한 지체인 우리는 당신을 새로운 지체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당신과 함께 한 몸을 이루니, 우리도 다시금 새롭게 변화될 것을 다짐합니다. 이제 당신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며, 당신의 기쁨은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이루어 갈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주님의 몸 된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결혼식의 성혼서약식 장면을 연상케 하는 허입식이 끝나면 우리는 서로를 안아준다. 

친숙한, 그러나 너무나 어색한 호칭
서로 형제 되기를 허락한 허입식이 끝나면 교제하는 시간에 서로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소개를 한다. 몸된 교회는 교회 밖에서 쓰는 교수님, 선생님, 사장님 등 사회적 호칭을 배제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형제 자매의 수평적 관계의 질서가 생기는 가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라는 조직의 구조에서 생겨난 호칭 즉 목사님, 전도사님, 사모님, 장로님, 집사님 등의 호칭도 즐겨 쓰지 않는다. 그것은 예배나 회의 시간에 사용될 뿐 대부분 시공간에선 가족 간에 쓸 법한 호칭을 쓴다. 그러다 보니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호칭 역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형이거나 오빠이거나 누나이거나 언니이며 또한 삼촌이거나 이모이므로 진짜 가족이 쓰는 호칭과 이름을 부른다. 이모와 삼촌으로 불리는 경우는 대체로 12살(띠동갑) 차이를 넘을 경우인데, 이모들이 한사코 “누나”라고 우기는(?) 바람에 여성은 예외로 두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면 그냥 이름을 부르면 된다. 가족이라면 너무나 친숙하고 당연한 호칭인데 교회는 이런 방식이 참으로 어렵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며 모두 가족이라는데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도 처음에는 이 부분을 매우 어색해했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부르다 보면 한참 후에야 정말 가족 된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 사진: 정동철 제공

나는 그리스도로 인한 이 새로운 가족의 질서가 외부의 직함과 칭호들로 위협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교회 조직의 직함으로 인해 계급화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이라는 호칭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인격적인 관계에서 멀어져 왔는가? 또한 그 호칭을 거둬낸 이후 인간으로서의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며,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호칭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이런 질문 앞에 서게 해준다. 익숙지 않아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불경하다 여기거나 하대하는 것처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가?

그는 본래 이름이 없으셨는데 모세가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을때 하나님은 매우 당황하셨던 것 같다. 이름이란 그를 존재하게 하는 이가 명명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존재하는 만물의 창조주가 이름이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조된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였다. 이후부터 우리는 다양한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왔으며 하나님은 그렇게 부르는 것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제외하곤 허락하셨다. 비로소 우리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와 관계를 맺는다. 나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관계의 중요성을 소중히 여겨서 그 직함이 의미하는 일꾼의 임무를 다함과 동시에 형제들 앞에 섰을 때 삼촌이며 형이며 이모이며 언니로서 관계 맺음을 통해 위로와 사랑을 충만히 나누기를 기대한다.

강단에서 내려와 목회자가 아닌 삼촌이자 형으로서 나는 어떤 얘기를 듣는지 잠시 생각했다. “형, 오늘 아내랑 싸워서 늦게왔어요. 미안해요.” “동철아, 너 설교 넘 긴 거 아니냐? 좀 줄여라.” “오빠, 지난번 떡볶이 넘 맛있었어요!” “저 삼촌이 우리 교회에서 제일 무서운 삼촌이야.” “형님, 저한테 한 말 때문에 제가 기분이 좀 나빴습니다.” “동철, 나는 네가 좀 쉬는 게 좋다고 생각해” “형, 다음에 맥주 한잔 해요.” 그들의 목소리 안에 내가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은 다시 내가 목회자로서 가식 없이 솔직하게 설 수 있도록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사랑한다면 몸으로
몸된 교회의 사랑은 관념 너머에 있다. 교회 이름이 몸된 교회라서 구체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나누기를 더욱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중요한 날은 어떤 방식으로든 구체적으로 챙기려고 한다. 가장 큰 축복의 시간이 출산 때가 아닐까 싶다. 출산을 앞둔 부부가 있으면 모두가 순산을 기원하며 함께 기도하고 각자 5천 원 상당의 출산 준비물을 선물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병원에 있을 3일 동안만 방문을 허용하고 석 달간 충분한 산후조리를 하게 하며 반찬 전달을 제외한 왕래 및 교회 출석을 자제시킨다. 이 기간엔 아빠도 아내를 위해 가정예배를 주도하며 석 달간 교회 출석보다 ‘가정’ 교회를 섬기도록 권면한다.

석 달이 지나 교회에 처음 출석하는 날엔 헌아예배로 성대한 환영을 한다. 우리 교회는 침례교회 전통을 따르므로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기 전에는 침례를 주거나 대리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다. 대신 부모는 이 아이가 하나님께 스스로 신앙을 고백할 때까지 청지기의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아이를 하나님께 헌아(獻兒) 하는 예식을 한다. 특이한 것은 부모뿐 아니라 목회자들과 모든 성도들도 아이의 이모 삼촌으로서 바른 신앙의 본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저마다 고백문을 읽는다. 그 고백은 또한 각자 출산 축하 선물과 함께 아이에게 드려진다.

생일에도 재미난 전통이 만들어졌다. 카톡으로 다음주 생일자가 공개되면 모두가 천 원 상당의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 교회에서 준비하는 것은 초를 꽂은 초코파이 하나에 큰 비닐봉지 하나가 전부이다. 축하노래가 끝나면 성도들이 전해준 한 아름의 선물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바로 그때 교회에서 주는 큰 비닐봉지가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 봉지에 담긴 선물을 하나씩 꺼내보며 함께 몸 된 이들의 사랑을 오래오래 되뇌일 것이며 가족이 무엇인지 떠올릴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주일 오후, 한 형제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 아까 보니까 저 아이가 너한테 아주 버릇없게 행동하던데 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어?” 그 친구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게…, 가끔 보는데 야단치기가 좀 그래요.” 그의 말이 맞다. 부모가 야단쳐야지 가끔 보는 삼촌이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가족이고 서로를 걱정한다면 가끔 보더라도 태도는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좀 힘들지…. 그런데 말야, 네 조카라면 어땠을까? 나는 무조건 받아주는 것보다는 꾸짖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사랑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부탁할게. 우리 아이가 버릇없이 굴면 꼭 꾸짖어줘.” 그 일이 있은 후에 나는 그 형제가 담대히 아이들을 꾸짖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아이들은 교회에서 돌아와 저녁 식탁 위에다가 삼촌의 차를 타고 노래를 크게 부르며 달린 얘기, 이모들이 해온 맛있었던 반찬 얘기, 친구와 놀다가 싸운 얘기, 동생들의 머리를 땋아주고 공주놀이를 한 얘기들을 한 보따리 쏟아낸다. 주일은 정말 가족이 모두 모이는 명절과 같고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인격 대 인격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기대한다.

함께 나누는 음식, 함께 누리는 사랑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매주 우리는 사랑의 나눔을 경험한다. 성도 간에 음식을 나누는 것은 매우 성스럽고 중요한 일이다. 우리 주님이 죄인과 더불어 먹었을 뿐 아니라 먹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 복음을 설명하시고 이를 기념하라 하셨기에 그러하다. 주의 성만찬은 백 마디 말보다 중요한 퍼포먼스였다. 그의 몸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구원이 사상적 동의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한 몸 되는 일이며 성도들과 한 몸 되는 일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몸된 교회의 예배 중심에는 매주 성찬이 있다. 성찬에 사용되는 빵은 자르지 않은 한 덩어리 빵이다. 이를 뜯는 과정을 통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찢기셨음을 상기하고 우리가 한 몸임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성찬이 끝난 후 모든 성도와 손을 잡고 안아주는 시간을 가져야 비로소 예배가 끝이 난다. 이것은 매우 성가신 일임에 틀림없다. 성도가 서너 가정일 때는 가벼운 일이었지만 서른 가정 넘는 지금 상황에선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성가신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추상적이거나 관념이면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다. 교회에 올 때 우리 모두는 이런 구체성을 위해 선물 보따리와 도시락을 싸들고 와야 한다. 예배가 끝나면 각자가 싸온 도시락을 꺼내 나눠먹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배의 완성이며 어른 아이 모두 만족도가 가장 높은 시간이다. 보통은 긴 테이블 위에 모두가 싸온 도시락을 올려놓고 빈 접시에 각자가 원하는 만큼 밥과 찬을 담아서 먹는데 굉장히 수준 높은 뷔페가 완성된다. 당연히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것을 예상하여 조금 더 많은 양을 준비해 오는데 그래서인지 항상 풍요롭다. 도시락은 짧은 주일의 교제를 더 풍요롭게 한다.

교회는 먹는 문제와 봉사의 문제 때문에 다툼이 많이 일어난다. 많은 목회자 선배들의 푸념 속에는 교회 주방에서 벌어지는 다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도시락은 원천적으로 갈등의 원흉을 제거한 일등공신이다. 교회는 수저와 접시만 준비하면 되는데 그마저도 인원이 많아져서 설거지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식기도 각자 가져와서 사용 후엔 귀가하여 씻기로 하여 방문자들의 식기만 제공하니 더 간편해졌다.

몸된 교회에서의 사랑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비닐봉지 속의 생일 선물, 함께 뜯는 빵, 꼭 껴안아주는 인사, 아낌없이 담아 온 도시락의 무게가 그것이다. 이렇게 사랑하는 전 교인을 위해 이 날 하루만큼은 교회가 커피를 무상으로 무한리필을 해준다.


정동철
1971년생으로 울산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뒤 IVF(한국기독학생회) 캠퍼스간사로 14년 동안 섬겼다. 지금은 ‘디자인 잇다’ 대표로 일하면서, 몸된교회 전도사로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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