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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질병은 얼마입니까?
[330호 스무 살의 인문학]
[330호] 2018년 04월 27일 (금) 16:59:54 김희림 goscon@goscon.co.kr

광기는 규정적입니다.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 미쳤다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광기는 판단 그 자체에 간섭하기에 미(美)처럼 재귀적일 수가 없지요. 내가 얼마나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정의해줍니다. 광기는, 광기에 대한 규정에 의해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 광기의 성격 또한 광기에 대한 규정을 내리는 존재들에 의해 서술되고요. 광기에 대한 분석이 다른 개념어의 분석과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것은, 오직 광기의 주체만이 광기의 규명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는 자신의 철학을,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서술하지만, 광기에 대한 논쟁에서는 오직 단 한 사람, 광인은 참여할 수 없습니다.

‘값어치’가 없어진 미친 여종
사도행전에서 사도(apostle)들은 한 광인, 곧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납니다. 성서에는 다양한 종류의 귀신 들린 이들이 등장하지만 이 사람은 조금 특이합니다.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는 여자입니다. 그는 사도들을 쫓아다니며 조롱하고, 참다못한 사도 바울은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러자 그 여자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사도들을 붙잡아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고발하지요. 아주 짧은 내용이지만 ‘귀신 들린 이의 입장’에서 곱씹어보면 대단히 비극적인 본문입니다. 주인들에게 고발당한 사도들이 감옥에 간 뒤 그 여종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로지 미래를 볼 수 있는 귀신의 광기로 인해 주인들에게 점쟁이의 정체성을 부여받은 그에게 축귀(逐鬼) 이후에 남은 것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 여종의 실존은 주인들이 그를 점쟁이로 부리기 전에도, 점을 치는 능력을 잃은 후에도 ‘값어치’가 없습니다. 그저 미친 여자였을 그를, 주인들은 그의 광기를 미래에 대한 예측으로 해석해 좋은 ‘상품’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그 광기가 사라졌다니. 그야말로 막대한 손실이지요. 이를 여종의 입장에서 상상해봅시다. 주의할 점은, 이 여종을 할리우드식 퇴마 영화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소녀와 분리해 사고하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딸로 자라던 소녀, 그러나 어느 날 정체 모를 악마가 들어 괴물이 된 그를 멀리서 찾아온 신부님이 퇴치하는 것과는 전혀 결이 다릅니다. 소녀는 퇴마 이후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정신을 회복하겠지만 주인‘들’에 의해, 곧 조직적으로 관리되던 고대의 노예는 갈 길을 잃습니다. 자유를 얻은 노예는 자유인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방송 화면 갈무리

안녕들하십니까?
길거리와 시장 어귀를 나도는 광인들을 근대 국가는 억압 기제의 표현물인 감옥과 정신병원에 몰아넣습니다. 국가는 정상성(normality)을 철저히 규명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것들을 격리했던 것이지요. 비정상적인 것이 격리되는지 격리된 것이 비정상적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누구도 비정상이라는 딱지를 바라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상성은 애매한 기표를 곤고히 합니다. 정상이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잘 알려진 역사적인 분석이지요. 그런데 이 고전적인 접근 방식의 지형이 조금은 바뀌고 있습니다.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라는 방송을 본 적 있으신가요? 일반인들이 나와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패널로 앉아 있는 연예인들이 대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흥미롭게도 이 방송에서 일반인 출연자의 고민은 ‘자랑’으로 소비됩니다. 아예 이 방송의 별명은 ‘전국 고민 자랑’이지요. 그런데 방송에 등장한 사람들이 풀어 놓는 이 고민들은 자랑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법이 방치하는 가정폭력과 성폭력이 웃음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무수하고, 수치스러움으로 통용되던 개인의 건강과 외모 문제, 은밀하게 다뤄지던 취향들이 연예인들의 입담에 놀아납니다. 그리고 여러 고민들의 ‘자랑’이 끝나면 사람들은 그 고민을 ‘평가’합니다. 1등 고민을 뽑거든요. 내 고민이 ‘1등 고민’이 되길 바라며 사람들은 스튜디오로 모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문제를 이야기하고 그 문제를 교정하고 평가받는 것은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진행하던 작업 아닌가요? 비정상성은 비밀스럽게 격리되었던 것이 분명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어떻게 스스로의 비정상성을 ‘대국민 토크쇼’에 나와 자랑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 그 이전에, 왜 그 고민을 들고 찾은 곳이 정신병원이 아닌 공중파 방송일까요? 정신과 상담실과 토크쇼 스튜디오, 그 둘 모두가 같은 문제를 다루는 기묘함에 당황하기 전에, 사람들이 왜 고민을 들고 치료 시설이 아닌 방송국을 찾는지 생각해봅시다.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낙인이 찍히기 싫으니까요. 아직도 정신과라면 팔다리가 침대에 묶인 채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인데, 고민을 들고 그런 곳을 찾을 수 있을 리가요.

카메라와 키메라
최근 종영한 〈무한도전〉은 무려 13년을 방영하며 한국의 대표 예능으로 인기를 끈 방송입니다. 무한도전에 등장한 남성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평균 이하라고 명명했습니다. ‘찌질한’ ‘루저’들의 가학에 가까운 자조를 뱉으며 서로의 약점을 꼬집기 바쁘며, 시청자는 그러한 그들의 소꿉장난을 보며 즐거워합니다. 그 바보놀음 속에서 전통적인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위반될 것만 같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지만, 사실 상황은 조금 다릅니다. 엉성함을 흉내 내는 광대들의 자조는 전통적 남성성이 전복된 이미지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폭력적 자학을 통한 남성성의 재확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기자들의 서로에 대한 끊임없는 외모와 능력과 지식에 대한 멸시는, 외모와 능력과 지식을 갖춘 전형적인 남성성의 숭배에 불과합니다.

정상성의 마초적인 과시는 낡고 재미없는 방법입니다. 반면 비정상을 연기하는 이들을 따라 서로를 비웃고 깔보는 것은 얼마나 재미있나요? 그러나 비정상은 텔레비전 속에서만 재미있습니다. 비정상을 연기할 권력이 있는 무한도전의 연기자들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는 많지 않습니다. 무한도전은 비정상을 연기하면서 정상성이 무엇인지를 시청자들에게 명료하게 일깨워줍니다. 사람들이 〈안녕하세요〉의 고민 소비 방식을 좇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고통을 관용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으면서 자기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방식은 내 고통의 깔끔한 타자화입니다. 고민을 각색하고 자랑하면서 이야기하여 나는 내 고민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내 고민이 자랑‘될’ 만하지 못하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이제 광인들은 병원에 격리되면서 동시에 스튜디오를 찾습니다. 내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에게 고백하면 그들은 나를 비정상으로 판단해 격리하지만 방송에서는 다함께 타자화된 나의 광기를 비웃으며 낙인찍기에 동참할 수 있거든요. 광기에 대한 논쟁에서 광인은 참여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카메라 앞에 선다면 나는 반은 귀신 들린 사람이고 반은 퇴마사인 존재가 될 수 있거든요. 카메라 앞에서 우리는 모두 키메라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앞을 벗어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내 고통과 광기를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는 카타르시스마저 없으면 나는 정말 아픈 사람이 되거든요. 그 낙인을 견디기는, 너무나 무섭습니다.

당신의 질병은 얼마입니까?
자본은 질병과 광기를 구매합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한 귀신 들린 여종의 광기는 그의 주인들에게 수입원이었습니다. 여종의 존재는, 역설적이고 비극적이지만 주인들이 있을 때 가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방송과 자본에서 소비되는 개인의 광기와 질병도 이와 비슷합니다. 광장에서 쫓겨난 광대들이 다시 광장으로 불려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카메라 앞에서는 얼마든지 아프고 미칠 수 있다고, 오직 카메라 앞에서만 당신은 아프고 미칠 수 있다고요. 비정상의 낙인이 두려운 우리는 꽁꽁 감추어두었던 고통을 카메라가 해석하도록 내맡깁니다. 주인들에게 광기를 내맡긴 여종처럼 말이지요. 카메라―혹은 주인들―가 없으면 애석하게도 나는 이 질병을 해석할 방법을 잃지요.

태초부터 정상적인 것은 없습니다. 정상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배치와 구조에 의해서 서서히 구성되지요. 그러나 질병을 구매하는 방송이 장악한 우리 시대에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교묘하게 섞였습니다. 〈안녕하세요〉에 나온 사람들이 고민을 자랑한다는 미명 아래 비정상성을 정상성 안에서 고백함으로 정상성을 획득하고 그로부터 격리되지 않는 안도를 얻듯이, 〈무한도전〉의 연기자들이 13년간 비정상성을 묘사하며 정상성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드러냈듯이 말입니다. 그간 정상성의 주체들은 비정상성을 스스로와 분리하면서 계급을 유지했으나, 예능의 세계관은 이를 뒤집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겪은 고통과 질병과 광기의 값은 얼마인가요? 모든 것에 값과 가치를 매기는 사회에서 그것들이라고 판매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지요. 노동력만 파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 당신의 고통과 광기도 파세요. 당신이 아프고 미칠수록, 그리고 당신 스스로 당신을 비웃을 준비가 되어있을수록, 자본과 카메라는 그것을 높은 값을 치르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그것을 팔고 나면 그들의 노예가 되는 꼴이니까요. 광기에 시달리지만 주인들에게 돈을 잘 벌어다주는 여종처럼, 우리는 카메라 앞에 앉아 힘든 일이 있어도 넉넉한 입담으로 내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출연자가 되어 시청률에 보탬이 되어야겠지요.

언뜻 잔혹해 보이는 이 구조에 마땅한 출구 전략은 없습니다. 귀신이 나간 이후 여종의 갈 곳 잃은 삶을 상상해보세요. 어쩌면 귀신 들린 여종에게는 귀신을 쫓아버린 사도 바울이 가장 귀신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귀신도 주인들도 아닌, 귀신을 쫓은 사도 바울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귀신이 쓰였나요? 그 귀신을 비웃으면서 편입되고 싶은 정상성은 무엇인가요? 어쩌면 우리는 그 귀신을 쫓아내기보다 줄곧 같이 살기를 원하고, 또 그럴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와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살 테니까요. 비싸게 팔리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제 자본의 질문에 대답만 하면 됩니다. 당신의 질병은 얼마입니까?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3학년으로, 현재 휴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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