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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독재, 일상적 파시즘, 그리고 대형 교회
[332호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332호] 2018년 06월 26일 (화) 15:32:40 최종원 goscon@goscon.co.kr
   
 

1987년 한국이 군사 독재로부터 민주화를 성취한 이후 한 세대가 지났습니다. 그 30년의 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지난 시기가 도도하게 진보를 향해 일관되게 전진한 시기였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기적 혹은 고속 성장이라는 단어들이 어색하지 않은 빠른 변화만큼이나 급격한 파동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지역 갈등이 조금 희미해지자, 이제는 세대 간의 갈등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갈등이 뚜렷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1. 대중과 한국교회
전직 대통령 두 명이 부패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독재와 산업화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민주 사회에서 투표를 통해 선출된 권력이었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그들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이유는 그들의 아버지가 혹은 아버지 세대가 이룩했던 경제적 발전을 다시 이루기를 바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대중의 기대를 배반했고, 법적 단죄를 기다리고 있지만 말입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새 정권에 대다수 국민들이 압도적 지지를 보내는 이유 역시 그간의 비정상 사회를 정상으로 되돌리고 한반도에 번영과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민주사회에서 대중은 주인입니다. 선출된 권력은 그 뜻을 따라 정책을 만들고 실행해 갑니다. 대중은 어떤 존재일까요? 2018년 오늘의 대중들은 과거 10년과는 달리 조금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듯 보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미투운동’으로 대표되듯 그간 차별받던 여성들이나 여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그룹도 존재합니다.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정파적인 이익을 위해 악용해 오던 집단에서는 남북한의 대화나 북미 대화 등을 통한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려는 노력에 연일 딴소리를 늘어놓습니다. 2018년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 그들의 목소리를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지요. 더디지만, 힘겨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굳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모습이 희망을 품게 합니다. 사실 그 희망의 근거는 새로 들어선 정권이 기대에 부응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각성한 대중들의 인식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제 앞으로는 어떠한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이 대중들의 인식을 좇아가지 않고는 존립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글의 화두를 ‘대중’으로 삼고자 합니다. 사회에서 대중이나 민중, 교회에서 성도로 표현되는 이들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즉, 우리의 비판적 성찰의 대상을 지도자들에게만 둘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찾는 것입니다. 이 논의를 이끌어가기 위해 ‘대중독재’ 테제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사학자 중 한 분인 임지현 서강대 교수가 2000년대 초반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를 분석하며 구성한 테제입니다. 그리고 그가 대중독재 테제를 생성한 화두로 제시한 ‘일상의 파시즘’을 돌아보면서 오늘의 교회를 고민하고자 합니다.

2. ‘대중독재’ 그 씁쓸한 형용모순
대중독재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몇 가지를 짚고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대중독재에 대한 논의가 한국 사회에 던져진 것은 2000년 전후의 일입니다. 이미 20년 가까이 지난 흐름이지요. 당시엔 한양대에 재직 중이던 임지현 교수와 지금은 서울시 교육감인 당시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 사이의 대중독재 담론에서 대중에 대한 논쟁은 큰 화제를 낳았습니다. 제가 이 철 지난 논의를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은 임지현 교수의 주장이 나온 이후 사실상 한국 사회는 그가 제기한 대중독재라는 흐름이 전망한 대로 흘러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흐름을 인지하고 극복하는 단계에 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교회는 아직도 갇힌 상태에서 못 벗어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렇다면 대중독재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용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대중이 주체인 체제는 민주주의입니다. 독재는 1인 지배체제를 의미합니다. 대중독재라는 말 자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나 ‘찬란한 슬픔’과 같은 형용모순입니다. 대중독재 테제가 제기한 새로운 관점은 독재가 ‘강압’이 아닌 대중의 ‘동의’로 지탱되었다는 점입니다. 어찌 보면 독재의 책임을 대중들에게 떠넘기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이 테제가 제시되었을 때 과연 이 담론이 보수 담론인가, 진보 담론인가 하는 평가가 엇갈렸습니다. 21세기가 막 접어든 희망찬 새 시대를 희구하던 때에 대중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고 대중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이 주장은 논쟁을 불러올 여지가 충분했습니다.

한 걸음 떨어져 생각해보면, 이 논쟁은 박정희 정권에서 이루어졌던 급격한 산업화와 유신체제 등을 극단적 억압과 전투적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에 성찰을 제공합니다. 독재 정권이 반대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억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들의 침묵이나 묵시적인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항하는 소수에 비해 다수의 대중은 산업화, 근대화라는 과실을 가져다준 정권에 우호적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논쟁이 불편했던 지점은 그렇다면 대중이 독재의 ‘공범’이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대중들이 비저항적이라고 해서 독재에 우호적이라고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임지현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악한 그들’과 ‘죄 없는 우리’라는 이분법이 적용될 수 없으며, 근대의 독재는 ‘강압의 내면화’를 통해 자발적으로 대중이 독재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독재는 ‘위로부터’ 부과되는 것일 뿐 아니라 대중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만들어지는 양방향의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강압의 내면화라는 과정이 전제되지요. 권력과 권위에 의한 공포와 강압이 대중들의 내면에 스며듭니다. 권력에 의한 강압은 그에 순응할 때 주어지는 가시적인 보상이 있기에 단순히 공포로 인식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중들이 권력에 의해 학습되고 내면화된 공포를 인식하기 전까지는 독재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하는 공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 결과적으로 대중들이 권력에 의해 학습되고 내면화된 공포를 인식하기 전까지는 독재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하는 공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평범하고 순박한 장삼이사가 가장 전투적으로 독재를 옹호할 수 있습니다. 그저 이념적으로만 내면화된 것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보상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지지하게 되는 거지요. 이 현상은 산업화의 상징인 사업가라는 이유로, 근대화를 이룩한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로 각각 대통령의 자리에 뽑아 준 대중들에게서 정점에 이릅니다. 아직까지도 이 대중독재의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우리는 광장의 한 켠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에서 광장의 촛불은 대중독재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의식화된 대중들의 몸짓이었습니다. 아직도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페미니즘 서울 시장을 꿈꾸는 한 서울시장 후보의 포스터가 끊임없이 훼손되는 상황이 현재 진행형입니다. 혐오라는 것이 여전히 정치적 종교적 주장 아래 정당화되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긴 안목에서 이제는 대중들 스스로가 권력의 속성을 알고 그 흐름을 단순히 추종하는 것의 문제를 점차 인식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한국 사회 속에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마음은 사실 복잡합니다. 조직되지 않은 다수의 기독교인이 자발적으로 이 사회적 변화의 위대한 행렬에 동참했다는 점은 긍정적입니다. 기성 기독교인들의 엄격한 교리 중심의 관념과는 달리 포용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들어 한국교회에는 예년에는 드러나지 않던 모습들이 도드라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국 사회에 드러난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은 목회자의 성적인 타락이나 교회 세습 등과 같은 개별적인 일탈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그 흐름이 좀 더 구조적으로 고착화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제기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되었다는 한동대에서는 여전히 페미니즘과 동성애 관련 일로 학생들에 대한 징계가 진행 중입니다. 장신대에서는 무지개 색상의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한 학생들을 징계하고, 동성애를 찬성하는 학생들의 입학을 금지하는 것을 제도화했습니다. 예장통합 총회재판부는 명성교회 세습 관련 판결을 반년이 지나도록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 재판에 참석하는 어떤 이는 성도 70~80%가 찬성하는데 어떻게 하겠냐고 했답니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의 목사 자격에 대한 법원의 판단에 대해서도 교회 목회자들과 직분자들이 오정현 목사 지지 성명을 냈습니다.

굳이 반복적인 현상을 열거한 이유는 조금 다른 데 있습니다. 이 현상 앞에서 우리는 조금 색다른 질문을 던져 보자는 것입니다. 사회 변화에는 아랑곳없이 주류 교단 신학교나 대형 교회들이 이렇게 사회의 흐름과 대척점에 서는 목소리를 거리낌 없이 내는 근거에 대해서 말입니다. 요점을 말하자면, 사회의 발전적인 변화 속에서 왜 교회는 제자리걸음도 아닌 퇴보를 거듭하는 걸까요. 이 흐름은 그저 우연히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대중독재 패러다임이 교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입니다.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스캔들, 심지어 사회법과 사회 인식을 거스르는 행위들, 이 모든 것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성도들의 자발적 동의를 공통 기반으로 한 대중독재의 사례입니다.

3. 교회, 여전한 일상적 파시즘
대중독재의 패러다임은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을 타자화합니다. 거시적인 대형 교회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 구조가 생성하는 논리가 인식을 지배합니다. 이 인식의 흐름을 일상화된 파시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일상적 파시즘이란 눈에 보이는 폭력과 강제로 사람들을 규율하기보다는 일상생활의 미세한 부분을 보이지 않지만, 권력화된 장치를 통해 규정하고 통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상적 파시즘은 가시적인 악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최근에도, 한국 창조과학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온누리교회의 한 목회자가 태양계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밝혀졌다면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진화론은 신앙과는 양립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올바른 신앙과 진리라는 가치를 교회 강단에서 규정하고, 다수의 성도가 아멘으로 화답하는 상황에서 다름의 목소리는 들릴 수 없습니다. 대중독재의 규정을 살짝 비튼다면, 목회자가 강단에서 강제하는 신앙의 진리 외의 다른 목소리를 인정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성도들에게 그 목소리가 신적인 강제성을 띠게 되고 점차 내면화됩니다. 어느 순간 내면화된 강압은 신앙의 이름으로 자발적인 동의를 낳습니다. 이 흐름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겉돌 수밖에 없고 그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다양성이 흐려지고 하나의 지고한 담론만이 반복 재생산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히 타자에 대한 이해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상적 파시즘을 가장 크게 경험할 수 있는 공동체 중 하나가 대형 교회라는 사실은 냉정한 현실입니다. 교회는 사회와 구별되는 특이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 그 정체성이 사회의 흐름과 대척점에 서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성도들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따라 목회자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주장, 즉 대중들이 원하기에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무모함은 그 내부에 대중독재의 패러다임이 작동한 것입니다. 대형 교회에서 더 이상 대중이 신앙의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그 메커니즘 속에서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우중(愚衆)이 되기 쉽습니다. 교회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위기의식의 표출이겠으나 이는 다름 아닌 교회가 타자에게 일상적으로 획일성을 강조하는 문제입니다. 그 타자화가 일상화된 파시즘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그 정당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이것이 교회 안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에서도 구현하려는 시도가 이어집니다. 그 결과로 지방선거 같은 데서 보수 기독교계 표를 의식하고 반동성애를 구호로 외치는 후보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공포와 강압의 모습이 아닌 일상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파시즘, 신앙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파시즘, 이 보통의 얼굴을 한 파시즘이 우리 속에 있는 다름을 크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21세기 한국교회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줄어드는 성도가 아니라, 대중독재의 주술에 사로잡힌 교회 속에서 드러나는 일상화된 파시즘의 목소리입니다. 지금도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퍼지는 모든 종류의 혐오는 일상화된 파시즘에 다름 아닙니다.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여과 없이 제기되는 반이슬람, 반동성애, 창조과학, 맹목적인 이스라엘 칭송, 이 모든 것을 오늘 다수의 한국 대형 교회들이 주도하는 현실을 불편하더라도 직시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대형 교회를 새로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018년 한국의 대형 교회는 그저 많은 숫자가 모이는 교회가 아닌, 자신만만한 다수의 목소리로 차이를 억압하는 기제가 생성되는 곳입니다. 다수가 동의한다면서 정당성을 주장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여타 작은 교회에서 제기되는 목소리에 비할 바 아닙니다. 더 나아가 그저 통칭하여 대형 교회, 몇몇 대형 교회 목회자들이라는 식으로 책임을 묻는 데 그치기보다는, 불편하더라도 이제 그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책임 있는 성찰을 요구해야 합니다. 신적인 강제와 자발적 동의가 혼재된 채 내부의 논리로 전체를 확대해 바라보는 오류를 그 구성원들이 같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타자에 대한 배제를 다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구현하고 있는 일상적 파시즘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교회와 신학에서 언어유희 외에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4. 한국교회가 지향할 제3의 길
맹목을 가능케 하는 것은 대형 교회 구성원들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라는 선민 의식과 주류 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숫자의 우상에 사로잡혀 주류인 양, 하나님의 역사를 담보해내는 주체인 양 하는 허위 의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불법적인 방식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도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고 주장하는 그 무모함은 교회 구성원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역사는 자신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의식이 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는 모든 것이 용납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난 한 세대 동안 우리를 둘러싼 집단성의 주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제 주술에서 깨어난 대중들이 사회 변화를 지속하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여전히 교회는 신적인 강제하에 타자에 대한 혐오를 두려움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일상적 파시즘이나 대중독재적 성향이 도전 없이 남아 있는 곳이 주류 교회, 그중에서도 대형 교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형 교회에 대해 비판하면 그들은 시기와 질투 때문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하지만 대형 교회를 비판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대중, 즉 성도들이 동의한다는 명목하에 집단적으로 반사회적이고 부정적인 형태로 영향력을 구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대중독재, 일상적 파시즘의 속성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목소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주류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인종, 헬라인과 유대인과 다른 제3의 인종(tertium genu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헬라인과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배타성과 전체주의 속성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성장하고 확산될 수 있었던 핵심은 인종과 민족, 문화와 언어를 둘러싼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제3의 길을 추구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없이 회자되는 교회 위기의 근본 원인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정서나 신학적 혼란이기보다는, 교회가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리고 기독교의 외피를 입은 일상적 파시즘을 구현하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이제 교회는 주류의식을 벗고 세상의 가치와 모든 벽을 넘어서는 다른 제3의 가치,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가 여전히 존재 의미를 지니고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구도 속에서 그 길을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심히 의문스러운 현실입니다. 그 길이 회복의 길이라면 오늘 우리는 그 열매를 얻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울며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 출발은 대중독재의 패러다임과 일상화된 파시즘에 갇혀 있는 현실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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