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호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1. ‘텍스트’에 갇힌 교회
제도(권) 교회를 공부하는 제 고민의 출발점은 수많이 제기되는 새 관점이나 새로운 신학적 사유들과, 오늘 21세기 한국교회라는 제도 교회의 상황 사이 연결성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재 제도 교회의 관심은 경전 텍스트의 정합성을 찾고 오늘 따를 신조를 확인하는 내부적인 것으로 제한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로 종교개혁가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그들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제도 교회라는 치열한 현장, 즉 콘텍스트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립되는 이들은 상아탑 속에 갇혀 있던 스콜라 신학자들이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나 교회 타락이 성경을 떠나서 생겨난 것이기에 다시 성경의 가르침을 붙들자고 했다는 식의 단순한 도식이 아닙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 속에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생성되었다는 것은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가톨릭 구조에 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콘텍스트의 변화에 따라 텍스트를 해석하는 최종 권한을 더 이상 가톨릭 교회만이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성서 시대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수용하고 지키자는 의미를 넘어 중세의 질서와 결별하고 새로운 종교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새 종교, 새 구조를 만들자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한 첫 순서는 오늘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이 사회와 문화, 공동체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명제는 실은 당시 면죄부로 대표되는 (종교적 구원조차도 물질로 획득할 수 있다는) 타락한 욕망을 간파하여 자신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절대적인 신의 은총을 갈구한 것이며, 성경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회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 우리가 붙들고 있는 믿음, 은총, 성경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조차도 왜곡될 소지가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의 교회 현실은 ‘오직 성경, 오직 은총’이 이 땅의 이웃과 주변의 고통과 아픔을 효과적으로, 또는 정당하게 비껴가기 위한 도구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성경을 붙들어야 한다든가, 우리 인간의 노력은 무의미하니 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 끓어야 한다든가 하는 식의 표현들은, 우리 내면에 자리한 타자를 외면하는 불편함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화는 기제로 종종 활용됩니다. 즉 성경이 우리 주변의 타자를 배제하고 혐오할 근거로 오용되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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