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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둘러싼 ‘출산’과 ‘모성’ 신화
[333호 믿는 '페미'들의 직설]
[333호] 2018년 07월 30일 (월) 11:14:23 달밤 goscon@goscon.co.kr

결혼하고 얼마간 지났을 때 일이다. 신학교 때 학생회 활동을 했던 동료들과 한 집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졸업하고 시간이 좀 흘렀으니 누군가는 목사가 되고, 누군가는 운동판에서 잔뼈가 굵고, 누군가는 결혼해 가정을 이루거나 더러 아이를 낳기도 했다. 단체 카톡방에서 모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아이를 둘 낳아 키우는 동기가 나에게 불쑥 말했다. “그날 모이면 우리 애들은 달밤이가 봐. 미리 연습 좀 해.”

나는 무척 당황했다. 왜 하필 나에게? 그 친구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써가며 두 아이를 ‘독박 육아’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저녁 모임에 온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럴 때라도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밥 한 술 편하게 먹는 게 얼마나 요원한지 알기에 나는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자기 남편도 아닌 나를 굳이 지목하여 아이 돌보기를 ‘연습’하라고 말한 그 의미를 왜 모르겠는가. ‘이제 너도 곧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된다’, 즉 내가 ‘어머니’가 되어 아이를 돌보게 되리라는 전제가 깔린 말이었다. 아이 돌보기가, 가까운 남편보다 오랜만에 만나는 여자 동기에게 더 편하게 전가되는 이유는 여성은 곧 어머니가 되고, 모성을 발휘할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아이는 우리 부부가 볼게, 편하게 저녁 먹어”라고 말했지만 두 가지 진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이를 가질지 말지, 그리고 아이를 낳는다면 누가 육아를 담당할지 정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까 나는 ‘전형적인’ 어머니가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과업인 결혼, 결혼 이후의 과업인 출산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사회가 나에게 원하는 과업은 결혼이었다. 가족 단위로 나가 성찬을 받던 교회 문화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이들로 구성된 가정은 아주 아름다운 본보기였지만 나처럼 배우자 없는 청년은 어서 좋은 짝을 주십사 기도해야 하는, 목회자의 근심 대상이었다. 안 그래도 만만치 않은 성격인데 더 나이 들면 남자 만나기 쉽지 않다며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와 실랑이 하던 도중, 함께 살면 참 좋겠다 싶은 사람을 만나 고속으로 결혼했다. 비혼까지 생각하던 내가 결혼 소식을 알리자 축하와 놀림과 비난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결혼식은 학교 채플에서 예배로 드렸다. 성경책에 손을 얹고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혼이 선포되었다. 축하를 받으며 행진하고 사진도 찍고 나서, 폐백이 이어졌다. 익히 알려진대로, 폐백 때는 남자의 부모님이 대추와 밤을 던져주는 순서가 있다. 우리도 옷깃을 길게 마주 잡고 그 대추와 밤을 받았다. 자식을 낳아 잘 기르라는 뜻이다. 결혼식 당일, 바로 다음 과업이 나에게 주어졌다. 자식을 낳을 것.

자녀 계획은 결혼 5년차인 우리 부부에게 최우선적 과제는 아니지만 중요하게 고민하고 의논하는 주제다. 낳을지 낳지 않을지, 낳는다면 이후 역할 분담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출산과 육아가 우리 일상을 어떻게 재배치할지, 또는 낳지 않는다면 우리 둘이서 전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어떻게 생애를 계획할 것인지 여러 가지를 두고 의논한다. 가임기 여성의 ‘본능’일지 몰라도, 어린아이가 작은 발로 아장아장 걸어가거나 양육자 품에 안겨 천진한 눈빛을 굴리는 걸 볼 때면 가던 길도 잊어버리고 한참을 바라본다. 그뿐이랴. 출산한 친구 선물을 사러 갔다가 아기의 머리싸개를 보고는 왠지 울컥하여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저 작은 싸개로, 그 부서질 듯 고운 생명을 보호하는구나 싶어서.

로맨틱한 연애를 즐길 시절에는 결혼은 아니더라도 아이는 낳고 싶다고 종종 생각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땐 서로 남남인 사람들이 사랑해서 새로운 생명을 품게 된다는 게 너무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접하는 매체와 대중문화와 교회의 영향까지 통틀어,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기르는 데서 완성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결혼도 했겠다 대추랑 밤도 받았겠다 아이가 예뻐 보이고 해가 지날수록 노산의 위협을 직간접적으로 받는 지금, 내게 임신과 출산, 육아는 전혀 자연스럽지가 않다.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 결정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출산에 대한 생각, 자식에 대한 인식, 자신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조건이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복합적 산물이다. 여성이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도, 낳지 않겠다는 결정도, 아이 수를 조절하겠다는 결정도 모두 이처럼 복잡한 맥락 속에 위치한다. 또한 이것은 여성 자신의 정체성이나 생애 설계를 비롯해 결혼과 출산 모성 등이 여성의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관련된다.”
- 서정애 외 8인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휴머니스트) 150쪽에서

결혼과 이어지는 임신, 혹은 임신과 이어지는 출산이 왜 이리 납작한지, 여성의 몸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임신과 출산이 왜 이리 시간차 없이 직선적인지 나는 너무 의아하다. 우에노 치즈코가 말한 것처럼 출산은 여성성의 완성이라 여겨지기 때문일까. 임신했을 때 여성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 출산 이후의 삶은 어떤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드라마에서처럼 주인공이 헛구역질을 하고 가족들이 기뻐하면 다음 순간 아이가 태어나는 줄 아는 것이다.

최근 믿는페미 팟캐스트 〈교회를 부탁해〉에서, 임신의 일상을 생생하게 올려 많은 공감을 받고 있는 트위터리안 ‘임신일기’님을 초청해 방송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신체적 고통과 괴로움, 임산부를 대하는 사회의 적대적인 시선과 냉대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고 무척 놀랐다. 자주 올라오는 주제 중 하나가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인데, 임산부 배지를 달고 배려석 앞에 서 있어도 절대 저절로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다.

“세상은 어머니가 된 여자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건네고 어머니가 되지 않은 여자에게는 ‘성숙한 여성’취급을 해주지 않으며, 그럼에도 어머니가 된 여자가 떠안게 되는 부담에 관해서는 조금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자는 어머니가 되어 기쁨을 얻게 될지 모르나 그것과 맞바꾸어 치러야 할 대가의 크기를 깨닫게 되는 것은 출산 이후의 일이다.”
- 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은행나무) 161쪽에서

우에노 치즈코가 틀렸다. 한국 여성들은 임신 기간부터 이미 그 대가를 치르기 시작한다. 직장에서는 단축 근무를 할 수 있으나 시간이 줄어들 뿐 업무가 적어지지 않고, 출산휴가 기간 대체 인력을 뽑지 않으니 임산부의 일을 나눠 맡을 동료들이 이를 곱게 볼 리가 없다. 심지어 임신일기님의 배우자는,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음에도, 아내가 임산부라 돌봄이 필요해서 장거리 장기 출장이 어렵다고 말했다가 승진에서 누락되었다.

어머니를 존중하지 않는 출산 ‘장려’ 문화
그런데 온 사회가 출산을 ‘장려’하면서도 정작 어머니를 존중하지 않는 문화가 팽배한 데에는 교회도 큰 책임이 있다. 우리의 경험을 복기해보자. 설교 때 혹은 익숙한 교회 문화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과 서로 연합해 믿음의 가정을 꾸릴 것을 강조하면서도, 임산부를 배려하거나 양육 책임을 나눠 맡으려는 노력이 왜 없는지, 사회 제도 안에서 ‘모성’을 보호하려는 운동은 왜 펼쳐지 않는지 이상하지 않은가.

기 베슈텔은 《신의 네 여자》(여성신문사)에서, “어머니는 교회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본 적도 없었으며 그다지 소중하게 취급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성모 마리아가 있지 않으냐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모르는 소리, 성모 숭배는 사실 ‘처녀를 경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마리아의 이야기로 찬미된 것은 처녀성이지 모성이 아니고, 결혼한 어떤 여자도 다시 겪을 수 없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본보기가 인간에 불과한 여자들에게 제시되었다”는 것이다.(위의 책, 31쪽) 그렇다면 믿음의 가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칭송되는 어머니의 지위는 어디에 있을까? 인내와 자애로움과 희생의 이미지로 고정된 어머니 이미지는 이런 모성의 낭만화를 통해 실제 여성의 삶을 소외시킨다.

“아이를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사랑스러워. 하지만 그게 내가 지금 힘든 걸 상쇄해주지는 않더라. 어마어마하게 행복한 만큼, 어마어마하게 힘들어.” 출산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이들에게서 거의 공통적으로 듣는 말이다. 본능적으로 모성이 흘러나와서 헌신하고 희생하며 행복을 느끼는 어머니 이미지는, 실제 아이를 기르며 행복하지만 괴롭고, 도망치고 싶거나 화가 나고, 그래도 아이가 사랑스럽고, 때로는 우울한 여성의 경험을 납작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이상적인 어머니 상과 괴리되는 여성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모성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면서 모성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모성을 찬미하는 사람이 오히려 여성과 자녀에게 해를 끼치는 가정, 직장, 법, 제도 등의 구조를 촉진시킬 때가 많은 것이다”
- 래티 M 러셀, J 샤논 클락슨, 《여성신학사전》(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34쪽에서

사실 이상적인 모성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 없는 모델이다. 가정의 화목을 이끌며 남편과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헌신하는 어머니 모델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사회·정치·경제적 목적에 따라 조형되었고, 신학자들을 거쳐 신적 권위를 갖게 되었을 뿐이다. 마르틴 루터는 아이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낳아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로 길러내는 것이 기독교 여성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최선의 사명이라고 역설했다고 한다(백소영, 《엄마되기, 힐링과 킬링사이》, 대한기독교서회). 그러니 교회는 여성이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며 양육하는 어머니 역할에 충실하도록, 사랑과 희생이 여성의 본성인 양 낭만화하고 추켜세우지만 실은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르는 이상적인 모성과 자꾸 어긋나는 자기 모습에는 죄책감을 느끼게 하면서.

   
▲ 특별히 교회는, 진정한 ‘모성’ 보호를 위해서는, 여성과 아이들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생명 돌봄과 살림의 역할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나눠질 수 있도록 연구하고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게 아마 예수가 말하던 새로운 가족, 새로운 공동체가 아닐까.


나는 이러한 흐름에 동의할 수 없다. 여성의 완성이, 여성의 사명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 있다는 견해에도, 여성에게는 원래부터 모성이 있기에 사랑과 헌신으로 아이에게 희생할 수 있다는 낭만화도. 모든 여성이 잠재적인 어머니로 기대되는 대신, 나는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신체적 사회적 자원을 갖춘 여성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그 여성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일은 가족 구성원과 사회 모두가 함께 나눠지는 공동체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만 떠넘기는 노동이어서는 안 된다. 특별히 교회는, 진정한 ‘모성’ 보호를 위해서는, 여성과 아이들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생명 돌봄과 살림의 역할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나눠질 수 있도록 연구하고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게 아마 예수가 말하던 새로운 가족, 새로운 공동체가 아닐까.
 


달밤(필명)
크리스천페미니즘운동 ‘믿는페미’ 활동가.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일했다. 활동가 동료들과 결성한 여성주의 연구살롱 ‘나비’를 통해 페미니즘을 가깝게 접하고 운동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 감리교 여성지도력개발원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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