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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전승과 4차 산업혁명
[333호 스무 살의 인문학]
[333호] 2018년 07월 30일 (월) 11:34:12 김희림 goscon@goscon.co.kr
   
▲ "기계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도구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앞으로도 기술과 공존하며 기계와 존쟂적으로 협업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사진: www.pixbay.com)

냉장고를 부탁해
10년 만에 냉장고를 바꿨습니다. 무언가 한 번 집에 들여놓으면 단단히 고장 나기 전까지는 버리지 않는 우리 집의 분위기가 짐작이 되시나요? 이번에 냉장고를 바꾼 것도, 몇 번이나 작동하다 말다 반복한 끝에 큰맘 먹고 구매를 결정한 것입니다. 덕분에 아래 칸에 있던 과일이 꽤나 상했지요. 새로 들어와 부엌을 차지한 큰 냉장고를 보면서 부모님께 물었습니다. 처음 냉장고를 집에 뒀던 게 언제냐고요. 기억을 더듬던 두 분은 중학생 때라고 회상했습니다. 대략 1980년 언저리일 것입니다. 그때부터 가정에 냉장고가 놓였나 봅니다. 부모님은 냉장고가 없었던 때도 기억했습니다. 조금씩 장을 봐서 항아리에 넣어 두거나 얼음을 사와서 보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춘기와 함께 냉장고를 맞이한 중년의 제 부모님은 냉장고 이전의 삶을 잘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냉장고가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냉장고가 없던 때를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하시는 분은 많겠지만 개중 누구도 냉장고가 없어지는 삶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음식의 부패를 막는, 이 단순한 목적의 가전제품이 40년 동안 사람들의 일상을 얼마나 크게 뒤바꿔 놓았나요. 냉장고가 충분히 보급된 이후에 태어난 제 삶에서 냉장고는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존재입니다. 냉장고가 없다면 제 일상의 적잖은 부분이 변하겠지요. 더운 여름에 얼음을 가득 탄 커피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진짜 세상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취한 어느 남자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감탄해 마지않습니다. 투명한 물에 비친 스스로에 반해 물가를 떠나지 못하고 연못을 거울삼아 하염없이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조금만 다가가도 연못은 물결 쳤고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이 사라졌기에 마주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슬픈 사랑이었지요. 결국 그는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다가 연못가에서 죽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이 사람의 이름은 나르시스(Narcissus)입니다. 전승이 다양하지만 나르시스가 그 아름다움에 교만해 다른 이들의 사랑을 지나치게 냉정하게 거절해서 자기애에 빠지도록 저주 받았다는 이야기가 대체로 많습니다.

나르시스가 죽고 그 연못가에 피어난 꽃을 그의 이름을 딴 수선화(narcissus)로, 자기애가 강한 사람을 나르시스트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야기에서 유래합니다. 어렸을 때 읽은 나르시스 이야기는 무척 비극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랑을 모르는 채로 죽은 불쌍한 사람. 그런데 저는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비극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나르시스는 정말 불행하게 죽었을까요?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고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은 모두가 꿈꿀 만한 환상입니다. 나르시스는 그러한 죽음을 맞이했고요. 나르시스는 행복하게 죽지 않았을까요? 아니, 나르시스의 죽음보다 행복한 죽음이 있을까요?

나르시스의 죽음을 처음으로 다르게 상상해본 것은 고등학생 때 어느 선생님이 핸드폰 사용의 단점을 설명할 때였습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아침에 등교하면 전자기기를 다 제출하고 종례 때 받아가는 교칙이 있었고, 전교생의 90%가 사는 기숙사에서는 아예 핸드폰 반입이 금지였습니다. 저는 통학했기 때문에 학교 밖에서는 자유롭게 핸드폰을 썼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가끔 외박 때나 사용했기 때문에 그 교칙에 반발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 반발에 답하며 한 선생님은 핸드폰으로 보는 세상이 진짜 세상이 아니며, 자꾸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사람들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잃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핸드폰을 사용할 권한을 주장하는데 ‘진짜 세상’과 ‘소통하는 즐거움’이 왜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질문했습니다. ‘핸드폰으로 접속한 세상도 분명한 세상이며, 기계를 통한 소통이 더 정확하고 편할 때가 많지 않은가?’ 당연히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너는 통학하니까 핸드폰을 쓸 수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훈계만 들었지요. 그 선생님과의 대화가 ‘진짜 세상’에서 벌어진 ‘즐거운 소통’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무튼 바로 그때 나르시스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핸드폰을 통해 보는 세상도 엄연한 세상이고 그 안에서 즐거운 소통이 가능하듯, 나르시스에게 연못은 소중한 세계였을 것입니다. 수면에 비친 자기와 나눈 연애도 그가 거절했던 어떤 구애자도 베풀지 못한 달콤한 연애였을 것이고요.

회색 지대
인간은 가치, 기계는 기능을 담당한다는 이분법은 우리의 무의식에 꽤나 깊숙이 내려앉아 있습니다. 이전까지 상상할 수 없던 기계가 등장해서 막강한 기능을 보여주면 인간의 가치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하지요.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을 기억하시나요? 장기 두기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초등학생 때 학교 앞에서 장기 두던 할아버지들과도 몇 판씩 놀았지만 바둑은 전혀 모르는 저도 그 바둑 경기만큼은 지켜봤습니다. 사실 바둑 경기를 보았다기보다 그 경기를 둘러싼 수많은 논의에 더 관심이 갔지요. 마치 인류의 종말을 놓고 떠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 복잡하다는 바둑까지 기계가 점령했으니 이제 인간은 뭘 해야 하느냐는 말이 많았지요.

선진적인 기계가 인간계를 전복한다는 영화 〈터미네이터〉식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순수함을 상상케 합니다. 기계가 점령하지 않은, 혹은 기계가 점령할 수 없는 순수한 인간성. 생긴 것은 사람과 똑같지만 기계인 터미네이터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감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터미네이터는 제아무리 인간과 다름없는 모습에 인간을 뛰어넘는 ‘기능’들을 가지고 있어도 인간의 고유한 ‘가치’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고철덩어리 살인기계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가치들을 조금씩 이해해 나갑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환상을 잘 보여주는 구성입니다. 차가운 금속으로 이루어진 기계는 지능을 갖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도리어 그런 기계 부품들로부터 해방되고 난 후에 비로소 등장하는 따뜻한 인간성.

그러나 인간과 기계가 가치와 기능으로 해설되는 이러한 이분법은 낡았습니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손 안에 들어오는 그 작은 기계 안에 추억과 기억이 가득하다는 것을요. 아마도 당신의 주머니 혹은 한 손에 들려있을 핸드폰을 다시 들여다보세요. 그저 단순한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에 불과한가요? 소위 비기계적인 것으로 낭만화되는 사랑과 우정 따위도 그것을 상기시킬 정보를 보관할 첨단 기계가 없다면 힘이 약해집니다. 기계 또한 가치의 총체이며, 가치 생산의 주체입니다. 기술에도 문화가 내재하며 또한 기술 자체가 곧 문화입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자동차를 타고 핵폭탄을 투하하는 일은 기능 이상으로 가치의 문제입니다.

4차 산업혁명과 인간성
인간이 무엇인지 생각할 때 기계와 공존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냉장고만 없어져도 일상이 뒤바뀔 것인데 우리는 기계를 인간의 실존에 포함하지 않지요.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나의 존재성은 수많은 도구와 기계적 요소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얼마 남지 않은 이 글을 안경을 벗고 읽어보세요. 안경을 벗고 당신은 얼마나 당신입니까? 휴대폰 없이 당신의 실재를 구성하는 무수한 사회적 요인들은 가능한가요? 공인인증서가 없다면 당신의 존재는 누가 증명해줄까요. 안경도 휴대폰도 공인인증서도 나 스스로를 정의할 때 포함되지 않는 항목들입니다만 이들 없이 나의 실존은 곤란해집니다.

유행어에 가깝게 퍼졌던 ‘4차 산업혁명’을 둘러싸고 참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계에서 4차 산업혁명을 거론하며 모든 것이 뒤바뀌는 새로운 시대를 예언했지요.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로 점철된 새 세상에서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세워질 것이라면서요. 인문학 한다는 사람들도 4차 산업혁명을 소재로 담론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새로운 세상에 약간은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말입니다. 어떤 산업혁명이 오더라도 인간의 고유한 가치는 유지될 것이고, 심오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은 명맥을 유지할 것이라고 근엄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건대 두 예언 모두 조금 이상합니다.

기술과 기계의 발전이 인간과 사회를 위협한다는 관점이나, 인간성에는 기술과 기계의 위협적인 발전에도 끄떡없는 고유함이 있다는 관점이나 양측 모두 인간성을 기술과 기계와는 유리된 독립된 존재로 전제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성은 기술 없이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혼합물로 성립하며 그 질감은 반죽(dough)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기술 및 기계와 늘 함께 살아왔고, 단 한순간도 그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한 적은 없습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고유한 인간성을 추구했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형편이 이러한데 새로운 산업혁명을 운운하면서 기계와 공존을 논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마치 ‘동성애자와 함께 살기’ 따위의 표어를 건 교회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기계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도구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기계와 인간은 똑같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본 세상은 인터넷 세상이 아니라 그냥 세상입니다. 반짝거릴 뿐 텅 빈 화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소통하며 살과 살이 맞닿는 유대 관계를 쌓는 인간적 관계가 생략된 차가운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적인 일이며 살아있는 일입니다.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 슬퍼하며 죽은 나르시스는 말 그대로 비인간적인 사랑을 했습니다. 그는 타인의 사랑을 거부했고, 타인을 사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도리어 그의 사랑을 가능케 한 것은 작은 연못이었지요. 그 연못이 나르시스로 하여금 사랑을 깨닫게 하고 사랑하며 죽을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인간만이 인간적인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르시스의 사랑을 막았던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답게 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인간은 앞으로도 기술과 공존하며 기계와 존재적으로 협업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3학년으로, 현재 휴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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