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최종편집 : 2018.11.8 목 20:42
기사검색
   
> 뉴스 > 교회와세상 |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개인화·일상화된 엄숙주의를 넘어
[334호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334호] 2018년 08월 27일 (월) 15:27:45 최종원 goscon@goscon.co.kr
   
▲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와 '예배하는 인간' 호모 아도란스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습니다. 종교는 축제였고, 예배는 놀이였습니다." (그림: 피테르 브뤼헐의 <놀이하는 아이들> 부분)

1. ‘일상의 거룩’을 재고한다
본래 사람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잘하는 사람에 대한 경외감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범인을 넘어선 성인을 만들고 그들을 기리는 이유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세속 사회에서도 영웅을 만들고 그들의 삶을 기념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범인의 삶을 초월하는 사람들을 본받고 싶고, 그들의 말에서 삶의 해답을 찾고자 귀 기울입니다. 그래서 삼천 배를 하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사람들은 기를 쓰고 성철 스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의 높은 경지란 일반 대중들은 도달할 수 없는 고귀한 종교 엘리트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분리가 가속화할수록 종교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게 되며, 신앙은 일상의 영역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불온하게 표현하자면 삶이 종교에 삼키어졌고, 사람들은 종교에 강박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부에서는 ‘경건’이라고 부르나 외부에서는 ‘엄숙주의’라고 부릅니다. 일상이 거룩해야 할까요?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세상에 나가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것, 이것이 거룩일까요? 혹자는 주일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위선이라 비판하고, 나머지 엿새도 주일처럼 살아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나머지 엿새도 주일처럼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은 더 큰 위선입니다. 물론 그 의도는 이해하지만, 엿새의 삶에 통념적인 거룩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거룩이 무엇일까요? 매일 새벽 기도를 하거나 QT를 하거나 성경공부로 일주일을 보내어 주변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낸다는 식으로 암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은 주일의 위선을 주중으로 연장할 뿐입니다. 오히려 일상의 거룩이나 영성은 일상에서 타인과 부딪침 속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베푸는 일입니다. 주일은 그러한 삶에서 오는 수고와 피로를 안식하고 서로 격려하고 재충전하는 축제여야 합니다.

《중세의 가을》과 《에라스무스 전기》 등으로 잘 알려진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1, 2차 세계대전의 격동기를 몸으로 살아낸 네덜란드 역사가입니다. 중세 역사를 다루던 그는, 양차대전의 격랑 속에서 과학과 진보에 대한 맹신이 우상화되어 비판적 성찰 능력을 상실한 당대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에서 산업혁명을 거치며 생산성 향상을 위한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고발합니다. 하위징아는 모든 문명은 놀이 정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인간성을 상실하며 쌓아 올린 근대 문명의 결과를 비극적으로 전망했습니다. 그는 중세의 민중문화가 담보하던 놀이의 가치를 재해석했고, 고대의 놀이 문화를 재발견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본래 그랬습니다. 고대의 모든 종교 제의는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놀이 한마당이었습니다. 실제로 중세에서 문화로 자리 잡은 종교는 각종 축일 등을 제정하며 민중의 놀이 문화와 함께 발전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희하는 인간인 호모 루덴스와 예배하는 인간인 호모 아도란스(homo adorans)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습니다. 종교는 축제였고, 예배는 놀이였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성직 중심의 엘리트 문화가 지배했지만, 자연스레 엘리트 문화와 다른 대중문화가 보편 교회의 전통 안에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중세는 일관된 종교성이 강제되기보다는 서로 다른 종교 문화들이 지역별, 신분별로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2. 근대, 일상의 가치가 도전받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이 느슨한 종교적 실천은 도전받았습니다. 개별 국민 국가가 종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함에 따라 종교는 국가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각 나라에서 독자적인 예배 의식과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종교개혁기를 연구하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16세기를 재기독교화(re-Christianization)라는 시각에서 접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종교개혁은 전형적으로 국가주의와 근대성을 지향하는 운동입니다.

과학의 발전과 진보를 지향하는 근대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최고의 효율을 추구합니다. 규율과 제도를 강조합니다. 학교, 병원, 감옥, 군대뿐 아니라 교회 역시 규율을 통한 확장의 대열에 서게 됩니다. 그 결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대형화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교역자가 관리와 통제의 중심에 서고 그 허리는 믿음 좋은 제직들이 떠받치고, 셀 모임이나 구역 모임으로 표현되는 촘촘한 직제로 위계 구조가 완성됩니다. 하지만 효율과 통제에 기반한 조직은 종교이건, 군대이건, 학교이건 억압과 폭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됩니다.

한국교회 성장에 여러 긍정적·부정적 유산을 남긴 제자훈련은 어떨까요? 훈련의 목적은 습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새벽에 기도를 하고, QT를 하는 습관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긍정적 영향도 있겠지만, 신앙이 같은 색깔을 가진 사람들만을 양산하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즉,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자기만의 신앙 색깔을 만드는 개인성이 계발되기보다 집단성이 강화됩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신앙 훈련의 목적이 습관을 만드는 것일까요? 사명과 소명과 제자됨 속에 인간성이 사라질 위험은 없을까요? 자기가 없어지는 훈련에 인간애마저 상실할 수 있고, 제자가 되는 것마저 도그마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도와 훈련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교회는 엄숙주의가 지배하게 됩니다. 자신을 전적으로 신의 뜻에 복종시키고 이 땅의 것을 포기하고 하늘에만 가치를 두는 삶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통은 정적주의(quietism)라고 알려진 신앙의 엄숙주의는 17세기 말 등장한 인간의 의지를 부정하고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에 무관심하며 신과 신성한 것에 수동적인 태도를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가톨릭 백과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엄숙주의는 ‘인간의 가장 높은 완성도는 정신적인 자기 소멸과 결과적으로 현재의 삶이 영혼의 신성한 본질에 흡수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따르거나 의지하지 않습니다. 신이 개인 안에서 행동하는 동안 개인은 수동적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엄숙주의는 거짓되거나 과장된 신비주의를 의미하며, 가장 비현실적인 영성을 떠올리게 되고, 도덕성에 치명적인 오류가 생깁니다.’

이 엄숙주의의 가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인간의 유한성을 기억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만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현재의 삶에 가치를 두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 양 되어버립니다. 엄숙주의가 지배할수록 교회는 천상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교회 내 비판의 소리를 내는 것도 덕이 되지 않으므로 경계하게 됩니다. 교역자들과 제직들은 제자도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가치를 주입합니다. 왜 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할까요? 이런 구조에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가 내포하는 폭력에 저항하면 은혜와 덕이 되지 않는다고 정죄합니다. 제자훈련이란 교회가 근대의 효율을 위해 기계적인 규율을 강제하는 것을 그럴싸한 용어로 포장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실제 한국교회는 개교회의 성장을 위한 사명과 선교, 제자도에 몰두하느라 현재(지금 여기)의 가치, 놀이의 가치, 휴식의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끊임없이 이 땅의 욕망을 벗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이러한 메시지에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연약한 자신을 자책하며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믿음의 삶의 표징은 이 세상과 단절하고 좀 더 주님을 바라보는 내부 지향으로 좁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믿음이고, 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영성훈련, 제자훈련이라면 근본적으로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엄숙주의를 강요하고 훈련을 강조하는 것은 목표 달성의 효율을 위해 개인성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개교회가 땅의 욕망을 벗고 하늘을 추구한다는 명분하에 강조하는 엄숙주의는 효율적인 성장을 위한 수동적 일체화를 낳았습니다.

3. 엄숙주의가 가져온 역설 
이러한 엄숙주의가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진실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그러한 마음이 더하겠지요. 그래서 늘 자신을 성찰하며, 채찍질하며 회개하는 삶의 가치를 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자신보다 하나님과 가까워 보이는 존재의 말에 주목합니다. 개신교 콘텍스트에서는 그가 설교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리하는 존재이고, 조금은 더 하나님과 가까이 가고자 애쓰는 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전하는 하늘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개인화되어 수용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이 지나치게 개인화된 모습으로 전달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민 중 많은 부분이 술, 담배, 음란물, 연애 등에 머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쳐 말하자면 신앙이 개인 삶의 변화에 한정되었다는 뜻입니다. 개인 문제가 덜 중요한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민이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곤란합니다. 도덕적 윤리적 자기 완성을 추구하는 것은 자칫 자기 만족일 뿐입니다. 그런 자기 만족은 그렇지 않은 타자에 대한 정죄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은 사람 냄새 나는 세상이 아니라, 이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살아가는 천사들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결과, 개인의 ‘죄’에서 벗어난 거룩한 삶, 여기에만 너무 집착해서 공동체의 죄악, 사회의 죄악, 시대의 죄악에 눈감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영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허위일 뿐입니다.

이런 허위의식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경건한 삶으로 규정되는 것에 대해 고민 없이 받아들이면 교회는 ‘죄인’을 받아들이는 참된 성육신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성찰 없이 이루어지는 대형교회의 세습, 그 흐름을 의식 없이 동조하는 교회 구성원들의 모습은 하늘만을 바라보자고 하는 엄숙주의가 낳은 부작용의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에도 하나님과 가깝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명을 수행한다는 이들은 ‘세상일’에 무관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그 뜻을 전하는 메신저로서 정작 땅에는 무관심한 천사의 자세일 뿐입니다. 나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고뇌하고 꽤 많은 시간을 예수를 바라보고 나서 선포하는 것이겠지만, 그들이 뽑아내는 지고한 영성의 언어에서 이 세상의 삶과는 괴리를 느낍니다. 안타까움을 담아 선포되는 진심은 하늘의 언어, 하늘의 논리이지만, 연약한 사람들이 서로 다독이며 힘을 모아가며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 가는 땅의 논리는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이들은 이 땅에 살아가는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여 격려하도록 고무하기보다는, 골방에 들어가 더 깊이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를 회개하도록 다그칩니다. 이 땅의 외로움을 뛰어난 하늘의 영성으로 극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의 언어를 구사하고 호응하는 사람들이 이 땅의 고통의 문제, 나그네의 문제 등을 풀어가는 방식은 놀라우리만치 도식적입니다. 그들이 즐겨 추구하는 “이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사실은 그리 좋은 고민은 아닙니다. 이 질문이 무의미하지는 않으나 대부분 사적인 일기 속에서 고민하며, 질문 자체에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고민이 의미 있으려면 반드시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일기장에 적은 나의 고민이 사회의 고민으로, 공동체의 문제의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저 사적인 낙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천사의 영성으로 내려지는 인간에 대한 쉬운 평가와 사회에 대한 저열한 이해는 위선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한낱 교리적 잣대로 쉽게 재단하는 무모함 속에는 인간애가 자리할 틈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성이 아니라 신앙을 병들게 하는 환각제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진짜 천사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왔습니다(창 18장). 모순으로 점철되어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추상적인 신의 신비를 얘기하기보다, 사람이 희망이고 사랑이 희망이며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내는 하나님의 신비라고 감히 외칠 수 있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절망을 이겨내는 힘은 이 땅을 넘어 천상의 신비를 찾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의 곁을 서로 내어주는 것입니다. 나그네 대접하기를 아까워하지 않고, 남겨진 이들을 공동체가 나서서 돌보는 것입니다.

4. 개인화된 엄숙주의를 넘어 형제애의 영성으로
‘하루 24시간 예수님만 바라본다’고요? 물론 수사적인 표현이지만, 이런 식의 사고는 그리스도인들을 오도할 수 있습니다. 죄의식과 마음의 부담을 효과적으로 덜면서 주변의 사회 현실을 외면할 구실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하늘의 것만을 사모하게 되면, 변화산의 초막에 머무르며 사는 것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게 됩니다. 이 땅의 문제를 강 건너 불 보듯 구경만 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예수님을 하루 내내 생각한다면, 바리새인, 서기관, 외식하는 자들을 비판하던 예수, 가나안 혼인 잔치에 가서 먹고 즐기던 예수,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눈물 흘리던 예수, 장사치의 소굴이 된 성전 좌판을 둘러 엎으신 예수,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살았던 예수, 자기를 욕하는 자에게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라며 용서했던 예수 등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당대 사회의 불의와 아픔에 공명하는 예수를 보면 약자에 대한 편애도 보여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24시간 생각하고 바라본다는 이들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심판자가 되어 판단하거나, 엄정하게 중립적인 언어만을 구사하는 천사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분들이 사회적인 이슈 앞에 짐짓 중재 재판의 판결자가 된 양 선포합니다. 사회가 정의 실천을 외칠 때 그들은 공의의 하나님께 맡기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차별에 대해 지적하는 문제를 그들은 영적 분별이라 합니다. 대중들이 혐오라 표현하면 그들은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라고 합니다.

이것이 온통 예수님‘만’ 생각할 때 생길 수 있는 삶의 부작용입니다. 신앙과 일상이 괴리되어 생기는 분열증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러한 주입을 신성하게 여기고 그것이 지향하는 도달할 수 없는 약속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가장 숭고한 종교처럼 보이나 가장 위선일 수 있는 것, 가장 타계적이어서 가장 현실에 무관심할 수 있는 것, 이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한 우상숭배일 수 있습니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영성가들은 수도원 전통에서 낯설지 않습니다. 그들은 혼탁한 세상 속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영적 지향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 전통에서 영성은 이렇게 고고하게 세속과 멀어져 천상의 언어를 전달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흔히 ‘마리아의 영성’과 ‘마르다의 영성’으로 대별되는 관상적 삶과 활동적 삶의 두 축이 서방 수도원의 큰 흐름을 차지합니다. 전통의 수도사들은 독거하며 살아가는 ‘몽크’(monk)라고 불립니다. 그 어원이 혼자라는 의미의 ‘mono’라는 점에서 그들 삶의 지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1-12세기 유럽 기독교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위기가 도래합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형태의 수도원이 마르다의 영성을 대표하는 프란체스코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몽크가 아닌 형제(friar)라고 스스로 정체성을 다졌습니다. 그들은 무소유를 실천한 사도들을 본받아 탁발로 생활하며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와 연대했습니다.
표준적인 서방 수도회는 베네딕트 수도회입니다. 성 베네딕트는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명명할 정도로 서유럽 형성에 수도원의 역할은 지대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딴 교황은 직전 교황인 베네딕트 16세까지 무려 16명에 이릅니다. 하지만 프란체스코라 이름한 교황은 800년 만에 처음 나왔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빈민 사역을 하던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불러낸 시대정신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가난한 자들의 친구 프란체스코를 따라 파격적으로 프란체스코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의 등장은 종교가 가야 할 앞으로의 방향을 예고하는지도 모릅니다.

 자존심 상하고 불편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소환한 시대정신, 그가 추구하는 철학에서 답을 고민해야 합니다. 몇 해 전, 교황이 방한했을 때 주류 개신교가 보였던 반응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한창 세월호로 민감했던 때 많은 개신교 목회자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파란 눈의 교황을 찾아갔습니다. 그를 언제 보았다고, 얼마나 그를 안다고 그에게 갔을까요? 그럼에도 그에게 탄원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 보이는 신분이어서가 아니라, 적어도 교황은 짐짓 천상의 언어를 구사하며 사람들의 눈물을 회피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영성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고 통찰하는 것이기보다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니고 함께 형제애를 나누는 것일지 모릅니다. 세속의 논리를 넘어선 지고의 신비를 얘기하기보다, 그저 같이 마음 아파하고 같이 손잡아주는 일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이 땅의 사람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고귀하고 거룩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낮아져 이웃을 향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으로 낮아지는 것이지, 천상의 모습으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구체적인 예수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추상적인 하늘의 언어로 가두어버리는 것은 영성일 수 없습니다.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로 옮기건 ‘오늘 최선을 다하라’라고 옮기건 자신과 하늘만 바라보는 데서, 오늘 우리 주변의 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개인화되고 일상화된 엄숙주의를 넘어 형제애의 영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야 합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관련기사
· 개인의 욕망으로부터 소명을 해방하라· 명성교회 세습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 이제는 루터를 보내야 할 때· 그들만의 유토피아, 그리고 배제와 혐오
· ‘가나안 성도’를 재고한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생각한다
· 한국 복음주의는 ‘복음주의’인가?· 17세기 유럽교회와 21세기 한국교회, 지독한 평행이론
· 대중독재, 일상적 파시즘, 그리고 대형 교회· 교회여,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를 고민하라
최종원의 다른기사 보기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복음과상황 기사제보 광고문의 제휴안내 오시는길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506-10 산성빌딩 104호 우)120-836 | 전화 : 02-744-3010 | 팩스 : 02-744-3013
발행인 : 김병년 | 이사장 : 박종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병년
Copyright 2008 복음과상황.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con@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