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호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와 '예배하는 인간' 호모 아도란스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습니다. 종교는 축제였고, 예배는 놀이였습니다." (그림: 피테르 브뤼헐의 <놀이하는 아이들> 부분)

1. ‘일상의 거룩’을 재고한다
본래 사람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잘하는 사람에 대한 경외감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범인을 넘어선 성인을 만들고 그들을 기리는 이유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세속 사회에서도 영웅을 만들고 그들의 삶을 기념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범인의 삶을 초월하는 사람들을 본받고 싶고, 그들의 말에서 삶의 해답을 찾고자 귀 기울입니다. 그래서 삼천 배를 하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사람들은 기를 쓰고 성철 스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의 높은 경지란 일반 대중들은 도달할 수 없는 고귀한 종교 엘리트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분리가 가속화할수록 종교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게 되며, 신앙은 일상의 영역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불온하게 표현하자면 삶이 종교에 삼키어졌고, 사람들은 종교에 강박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부에서는 ‘경건’이라고 부르나 외부에서는 ‘엄숙주의’라고 부릅니다. 일상이 거룩해야 할까요?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세상에 나가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것, 이것이 거룩일까요? 혹자는 주일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위선이라 비판하고, 나머지 엿새도 주일처럼 살아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나머지 엿새도 주일처럼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은 더 큰 위선입니다. 물론 그 의도는 이해하지만, 엿새의 삶에 통념적인 거룩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거룩이 무엇일까요? 매일 새벽 기도를 하거나 QT를 하거나 성경공부로 일주일을 보내어 주변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낸다는 식으로 암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은 주일의 위선을 주중으로 연장할 뿐입니다. 오히려 일상의 거룩이나 영성은 일상에서 타인과 부딪침 속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베푸는 일입니다. 주일은 그러한 삶에서 오는 수고와 피로를 안식하고 서로 격려하고 재충전하는 축제여야 합니다.

《중세의 가을》과 《에라스무스 전기》 등으로 잘 알려진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1, 2차 세계대전의 격동기를 몸으로 살아낸 네덜란드 역사가입니다. 중세 역사를 다루던 그는, 양차대전의 격랑 속에서 과학과 진보에 대한 맹신이 우상화되어 비판적 성찰 능력을 상실한 당대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에서 산업혁명을 거치며 생산성 향상을 위한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고발합니다. 하위징아는 모든 문명은 놀이 정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인간성을 상실하며 쌓아 올린 근대 문명의 결과를 비극적으로 전망했습니다. 그는 중세의 민중문화가 담보하던 놀이의 가치를 재해석했고, 고대의 놀이 문화를 재발견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본래 그랬습니다. 고대의 모든 종교 제의는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놀이 한마당이었습니다. 실제로 중세에서 문화로 자리 잡은 종교는 각종 축일 등을 제정하며 민중의 놀이 문화와 함께 발전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희하는 인간인 호모 루덴스와 예배하는 인간인 호모 아도란스(homo adorans)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습니다. 종교는 축제였고, 예배는 놀이였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성직 중심의 엘리트 문화가 지배했지만, 자연스레 엘리트 문화와 다른 대중문화가 보편 교회의 전통 안에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중세는 일관된 종교성이 강제되기보다는 서로 다른 종교 문화들이 지역별, 신분별로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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