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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에 대한 답
[334호 스무 살의 인문학]
[334호] 2018년 08월 27일 (월) 15:55:46 김희림 goscon@goscon.co.kr
   
 

매몰 비용
혼자서 읽기 어려운 책을 더 깊이 공부하거나 원서를 한 줄씩 꼼꼼히 보고 싶을 때는 강독 수업을 찾아갑니다. 강독 수업은 대개 난이도가 높습니다. 한국어로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글을 영어도 아닌 외국어로 한 문장을 읽고 해석하고 토론하면 두세 시간을 공부해도 한 쪽을 겨우 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참여해 본 강독 중에서는 수업에서 다루는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나 학위를 마친 연구자들도 많았습니다. 덕분에 토론도 풍부해지고 자연스레 학계 동향이나 유행도 주워들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전공자들과 공부하다 보면 딱 하나 씁쓸한 것이 있었는데, 공부는 취미로 하라고 권하는 이들을 많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본인은 전문가 과정을 밟거나 전문가인데 왜 나한테는 하지 말라는 건지 조금 짜증이 납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더 답답합니다. ‘재능이 없으면 못한다’고 말하면 오기를 내서라도 대꾸할 텐데, 대개 공부를 권하지 않는 이유는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부는 아무리 어려워도 좋아하는 일이니 열심히 했는데 문제는 보상이 없다는 점이겠지요. 남들 졸업하고 취직해서 조금씩이라도 돈을 모을 때 책값으로, 대학원 학비로, 유학 생활로 있는 돈 없는 돈 털었는데 돈을 벌 방법은 하나도 없다니요.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연구자들에게 열린 취업 시장은 시간강사부터 택시 기사까지 한계가 없습니다.

상황이 그러니 이제는 경제적 상황이 열악한 인문학자의 삶을 들으면 짜증보다는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번쩍 듭니다. 이전까지는 철학을 계속 공부해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내 밥벌이를 해내겠다는, 그리고 철학은 애초에 나를 위한 공부이니 가난해도 즐겁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자신감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물론 이 생각들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만, 패기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겠지요. 앞으로 공부하는 데 들어갈 비용을 생각하고 그 투자 비용을 회수할 방법을 떠올려 보면 잠깐 멍해집니다. 공부는 재미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체감합니다.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
지난 겨울에는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하나 냈습니다. 철학에 대한 짧고 재미난 글들을 여럿 모아서 다듬었습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고, 무척 재밌고 유익했다는 기분 좋은 평도 많이 들었습니다. 참고할 것이 있어 얼마 전에 제 책을 훑어보는 중에 책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마치 현현(顯現)이라도 하듯 말입니다. 출간을 준비하며 지은 책의 제목은 짓고 나서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에는 무언가를 집중해서 판다(dig)는 의미와 값을 받고 무언가를 판다(sell)의 이중적인 의미를, ‘여하튼’이라는 말에는 철학 공부의 가망 없음에 대한 경쾌한 대답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에 드는 제목이 갑자기 전혀 새롭게 다가오면서 목구멍에 가시가 걸리듯 한 가지 걱정이 들었습니다. 나는 나중에도 이 책의 제목에 당당할 수 있을까? 시간이 많이 흘러도 철학을 파고(dig) 또 팔(sell) 수 있을 것이며, 그거 계속 공부하면 배고프다는 말에도 ‘여하튼’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그러다 제가 썼던 또 다른 글이 두 편 생각났습니다. 바로 여기, 복상 지면에 연재를 시작할 때 쓴 글입니다. 〈목적어가 없는 목적어〉. 벌써 3년 전에 쓴 글이네요. 철학이 지향하는 탐구의 대상에는 한계가 없기에 목적어의 자리를 비워도 되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욱 목적어라는 의미로 제가 철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는 계기와 열정을 한가득 담았습니다. 바로 그다음에 쓴 글도 비슷한 내용을 쓰고 〈인문학, 그 청춘을 홀리는 순수에 대하여〉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제목 지을 때 온갖 기교를 다 부리는 건 처음부터였구나, 생각하며 두 편의 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3년이 지나서 읽으니 남의 글 읽는 것처럼 재미있다가도 생각이 바뀐 부분이 적잖이 눈에 띕니다. 철학의 대상을 설정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관점이 조금 바뀌었을 뿐더러, 인문학이 청춘을 홀리는 순수인 것은 사실이나, 순수한 지성을 탐닉한다고 순수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이 바닥이 그렇게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조금은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전에 쓴 글을 뒤적이며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도 지금처럼 목적어가 없는 목적어를 쫓을 수 있고 그 순수함에 홀려 넘어갈 정도로 순수하게 남아있을 수 있을까.’

허무에 대한 답
그렇다고 종일 나중에 무얼 먹고 살지 고민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일은 아무도 모릅니다만, 저는 과할 정도로 낙천적인 편입니다. 이런 공부를 하고 저런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을 잘 써먹으면 뭔가 잘 안 풀리더라도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오히려 저보다 남들이 제 걱정을 더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앞일을 떠올리면 누구나 그렇듯 걱정거리를 찾아낼 수야 있겠지만 지금은 여하튼 철학을 파느라 바쁩니다. 파다 보니 재미있고 재밌다 보니 더 팝니다. 이것저것 관심을 갖고 기웃거리다 보니 철학이 어떤 학문인지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바뀌는 것을 느낍니다.

바로 앞에서 제가 썼던 글, 철학의 대상이 무한하다는 점이 제가 느낀 매력이라고 쓴 글을 언급하면서 철학에 대한 제 나름의 정의가 조금은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저는 철학이 ‘허무에 답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를 지배한 허무가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플라톤대로, 니체는 니체대로 그의 삶과 사회의 근거가 되었던 믿음이 무너지면서 마주하는 허무가 있었습니다. 그 허무함에 답하기 위해 철학자들은 전복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고 그렇게 매번 새로운 시대가 열렸을 것입니다. 존재의 경이와 인식의 비극 사이에서 자연스레 탄생한 자의식과 고통의 문제를 정초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주제에 매달리는 일이 철학자의 작업이자 정체성이며 또한 작업물이고요.

그러니 당연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게 철학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 멀찍이 뒤로 돌아가 옛날에 쓰인 문헌들을 꼼꼼히 참고하는 게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숙제일 것이고요. 조금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얘기를 했습니다만, 사실 제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철학과 ‘시대의 문제’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철학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비판이면서 동시에 21세기의 한국 사회를 사는 사람이 철학을 공부할 때 가장 잘 잊어버리는 점입니다.

강의실과 콘서트장 사이
대한민국 인구의 30분의 1이 구입한 (그러나 얼마나 읽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때 어마어마하게 팔리면서 한국에는 인문학 광풍이 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철학에 막 관심을 가지면서 그 책을 두 번이나 읽었습니다만 저는 거기서 무언가 사상적 영향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있었는데, 마이클 센델의 토론식 강의에 영감을 받아 이른바 ‘인문학 강의’가 급속도로 유행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난해한 윤리학적 주제를 토론으로 풀어나가는 강의는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힐링’, 혹은 결을 달리하여 ‘누가 뭐래도 너의 길을 가라’라는 ‘킬링’ 담론을 낳았습니다.

가족과의 관계로 힘든 사람에게 무조건 힘을 내라고 ‘권하는’ 강의와 집을 나가서 주체적으로 좀 살라고 ‘호통치는’ 강의가 인문학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알맞게 포장되었습니다. 그 두 가지 주제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남 앞에서 말하고 남들 보라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그러한 대중 인문학적인 접근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철학에 대한 솟아나는 관심은 그런 강사를 꿈꾸는 쪽으로 수렴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철학과에 가보니 ‘학문’은 그런 인문학 콘서트와는 거리가 조금 멀더군요. 교수님들의 어려운 논문을 빨간 줄을 벅벅 그어 가며 읽었는데 이게 아무리 봐도 콘서트에서 이야기할 내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그런 인문학은 인기가 없었고, 이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굴착기의 철학
대중 인문학의 열풍과 강단 인문학의 위기 사이의 간극은 앞서 이야기한 시대의 문제에 대한 결여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중 인문학에는 ‘문제’가 없고, 강단 인문학에는 ‘시대’가 없습니다. 문제에 대한 부족한 성찰과 시대의 흐름에 반응하지 못하는 성찰에 다리가 놓이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해 왔고 또한 그게 제 꿈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이 사회가 마주하는 허무를 이해할 수 있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있으리라고 감히 자신합니다. 플라톤과 니체가 마주한 허무와 그에 대한 그들의 답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문제의식으로 지금 여기를 고민하는 것까지 사색의 줄기가 이어진다면 철학은 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철학 공부를 열심히 해봐야 허무하다고들 합니다만 글쎄요, 허무에 답해야 하는 학문을 공부하고 마주하는 것이 허무함이라면 그것 참 허무한 과정과 결론입니다. 철학이 다루어 마땅한 지금 여기의 허무를 보지 않고(혹은 간과하고) 진행된 논의라면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간혹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의 위기감이 찾아들더라도 아직까지는 걱정을 가볍게 삼킬 수 있는 것도 이 이유입니다. ‘지금 여기’가 마주한 허무를 고민하고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면, 지금 여기 사는 사람들이 제 노력을 인정하고 보상할 것이라고 자신하거든요. 그렇다고 해도 공부하다 보면 무수한 허무를 마주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도리어 그 허무함을 철학적 주제로 삼고 고민하면서 이겨 나가야겠지요. 앞이 막혔을 때는 땅을 파는 일이 살 곳을 만드는 일일 테니까요.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3학년으로, 현재 휴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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