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호 스무 살의 인문학]

   
 

매몰 비용
혼자서 읽기 어려운 책을 더 깊이 공부하거나 원서를 한 줄씩 꼼꼼히 보고 싶을 때는 강독 수업을 찾아갑니다. 강독 수업은 대개 난이도가 높습니다. 한국어로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글을 영어도 아닌 외국어로 한 문장을 읽고 해석하고 토론하면 두세 시간을 공부해도 한 쪽을 겨우 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참여해 본 강독 중에서는 수업에서 다루는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나 학위를 마친 연구자들도 많았습니다. 덕분에 토론도 풍부해지고 자연스레 학계 동향이나 유행도 주워들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전공자들과 공부하다 보면 딱 하나 씁쓸한 것이 있었는데, 공부는 취미로 하라고 권하는 이들을 많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본인은 전문가 과정을 밟거나 전문가인데 왜 나한테는 하지 말라는 건지 조금 짜증이 납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더 답답합니다. ‘재능이 없으면 못한다’고 말하면 오기를 내서라도 대꾸할 텐데, 대개 공부를 권하지 않는 이유는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부는 아무리 어려워도 좋아하는 일이니 열심히 했는데 문제는 보상이 없다는 점이겠지요. 남들 졸업하고 취직해서 조금씩이라도 돈을 모을 때 책값으로, 대학원 학비로, 유학 생활로 있는 돈 없는 돈 털었는데 돈을 벌 방법은 하나도 없다니요.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연구자들에게 열린 취업 시장은 시간강사부터 택시 기사까지 한계가 없습니다.

상황이 그러니 이제는 경제적 상황이 열악한 인문학자의 삶을 들으면 짜증보다는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번쩍 듭니다. 이전까지는 철학을 계속 공부해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내 밥벌이를 해내겠다는, 그리고 철학은 애초에 나를 위한 공부이니 가난해도 즐겁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자신감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물론 이 생각들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만, 패기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겠지요. 앞으로 공부하는 데 들어갈 비용을 생각하고 그 투자 비용을 회수할 방법을 떠올려 보면 잠깐 멍해집니다. 공부는 재미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체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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