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호 스무 살의 인문학]

   
▲ 나와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우리네 문 앞에 서 있던 '손님'이 정의해줄 것입니다. (Photo by Peter Hershey on Unsplash)

‘손님’과 마을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의 일생 전체가 밀려오기 때문이지요. 방문객은 언제나 그렇게 파도처럼 잔잔하지만 견고하게 다가옵니다. 바닷가에 서 있던 나는 흙의 바삭함이 줄 수 없는 바다의 물기를 머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합니다. 언제 밀물이 들어와 발목에 머물렀던 소금기가 가슴께를 거쳐 턱밑까지 오를지 모르거든요. 객(客)의 방문은 새로운 세계의 등장이자 동시에 내 세계로의 이물질의 틈입입니다. 나에게 다름을 보여줄 좁은 길인 동시에 나를 없애고 나를 앗아갈 수도 있는 존재이지요.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두 불청객을 엉성하게 받아들인 후의 비극적인 이념 갈등을 그린 황석영의 《손님》은 서구 사상을 씹지 못한 채 삼킨 이들이 그에 취해 함께 자라던 마을 사람들을 악마로, 억압자로 부르며 서로 살해하는 광경을 풀어냅니다. 황해도 신천군 사건이지요. 황석영은 죽임을 당한 이들의 혼을 끌어내어 죽인 이들, 그리고 죽음을 목격한 자들과 마주하게 합니다. 함께 물장구치며 놀던 이야기와 서로를 살해한 이야기를 연달아 나누는 귀신과 인간의 대화는 한(恨)을 삭여 마당으로 불러내어 신명의 차원에 이르는 굿의 형식과 일치합니다. 또한 두 이념을 손님으로 규정한 것은 중세 조선 민중들의 천연두를 쫓는 ‘손님굿’에서 착안한 것이고요.

손님의 윤리는 마을의 논리를 압도합니다. 손님을 해석하기 위해 마을이 들썩이고 갈라지며 나아가 손님을 정의하는 방식이 마을을 정의하는 방식이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손님이란 얼마나 두려운 것일까요. 천연두를 손님이라 부르며 그 지독한 역병을 존중해 피해를 덜겠다는 염원을 담았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손님은 천연두와 같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오리쿠치 시노부의 일본인에 대한 인류학적 논증처럼, 객인(客人)은 촌인(村人)을 정복하고 기존의 마을을 탈바꿈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온갖 추리물과 공포 영화가 마을에 잠입한 이방인을 첫째 용의자로 상정하며 수사를 시작하지요. 손님은 정말 마을의 주체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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