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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과 환대의 윤리학
[335호 스무 살의 인문학]
[335호] 2018년 09월 20일 (목) 17:28:56 김희림 goscon@goscon.co.kr
   
▲ 나와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우리네 문 앞에 서 있던 '손님'이 정의해줄 것입니다. (Photo by Peter Hershey on Unsplash)

‘손님’과 마을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의 일생 전체가 밀려오기 때문이지요. 방문객은 언제나 그렇게 파도처럼 잔잔하지만 견고하게 다가옵니다. 바닷가에 서 있던 나는 흙의 바삭함이 줄 수 없는 바다의 물기를 머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합니다. 언제 밀물이 들어와 발목에 머물렀던 소금기가 가슴께를 거쳐 턱밑까지 오를지 모르거든요. 객(客)의 방문은 새로운 세계의 등장이자 동시에 내 세계로의 이물질의 틈입입니다. 나에게 다름을 보여줄 좁은 길인 동시에 나를 없애고 나를 앗아갈 수도 있는 존재이지요.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두 불청객을 엉성하게 받아들인 후의 비극적인 이념 갈등을 그린 황석영의 《손님》은 서구 사상을 씹지 못한 채 삼킨 이들이 그에 취해 함께 자라던 마을 사람들을 악마로, 억압자로 부르며 서로 살해하는 광경을 풀어냅니다. 황해도 신천군 사건이지요. 황석영은 죽임을 당한 이들의 혼을 끌어내어 죽인 이들, 그리고 죽음을 목격한 자들과 마주하게 합니다. 함께 물장구치며 놀던 이야기와 서로를 살해한 이야기를 연달아 나누는 귀신과 인간의 대화는 한(恨)을 삭여 마당으로 불러내어 신명의 차원에 이르는 굿의 형식과 일치합니다. 또한 두 이념을 손님으로 규정한 것은 중세 조선 민중들의 천연두를 쫓는 ‘손님굿’에서 착안한 것이고요.

손님의 윤리는 마을의 논리를 압도합니다. 손님을 해석하기 위해 마을이 들썩이고 갈라지며 나아가 손님을 정의하는 방식이 마을을 정의하는 방식이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손님이란 얼마나 두려운 것일까요. 천연두를 손님이라 부르며 그 지독한 역병을 존중해 피해를 덜겠다는 염원을 담았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손님은 천연두와 같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오리쿠치 시노부의 일본인에 대한 인류학적 논증처럼, 객인(客人)은 촌인(村人)을 정복하고 기존의 마을을 탈바꿈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온갖 추리물과 공포 영화가 마을에 잠입한 이방인을 첫째 용의자로 상정하며 수사를 시작하지요. 손님은 정말 마을의 주체인가 봅니다.

닫힌 문
손님을 소화하는 일은 체제 유지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업무입니다. 내부의 질서는 외부의 해석에 달려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벵베니스트는 라틴어로 손님을 뜻하는 ‘hostis’를 역사언어학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의미가 막연한 이방인이 아닌 증여와 교환의 쌍무적 보상 관계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을 밝혀 냅니다. 모스가 《증여론》에서 드러내듯이 선물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이상을 되갚는 전통이 고대 로마에도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현대 영어의 hostile(적대적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hostis는 손님을 뜻하는 단어에서 적(敵)으로 그 의미가 변화합니다. 도시(ciutas)가 성장함에 따라 국가가 교환을 독점하는 배타적 관계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손님은 적으로 상정됩니다.

손님은 계약을 거쳐 들어오는 존재입니다. 즉, 상호간 이익이 전제되어야만 손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주나 기사 따위가 나오는 영화를 떠올려 보세요. 멀리서 말을 탄 누군가가 달려오고, 망을 보던 병사는 상관에게 가 그의 생김새를 보고합니다. 잠시 후 한 명은 성문 앞에서, 한 명은 성문 위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멀리서 말을 끌고 온 사람은 자신의 방문이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를 고개를 치켜들고 증명해야 합니다. 이윽고 성문이 열리고 그는 말을 몰아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경계의 끈을 놓치지 않은 채로, 그러나 그가 성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모종의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그를 맞이합니다. 이것이 아직 개인이 거래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고대적 의미의 환대(hospitality)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환대를 지금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는 국가가 거래를 주관하는 -어쩌면 국가는 베버의 정의와는 달리, 폭력이 아니라 계약을 독점하는 기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에 성립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러한 형태의 환대는 윤리학의 자리를 앗기 때문입니다. 피 흘려 쓰러져 가는 사람을 안으로 들여도 하등의 이익이 없는데 왜 그를 환대해야 합니까? 그는 우리를 배신할지도 모릅니다. 그가 언제 등을 돌려 우리를 찌를지도 모릅니다. 마을을 해치지 않을 손님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이 정치의 대원칙 아니던가요. 벵베니스트의 또 다른 분석에 따르면 독일어의 frei(자유로운)와 Freund(친구) 또한 그 어원을 같이 합니다. 인간은 조직 밖으로 나갔을 때 자유로운 게 아니라 자기들-사이(entre-soi)에서만 자신을 발견하며 또한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열린 문
예수의 윤리학이 혁명적인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를 들어 변증하며, 자신을 시험하는 율법 교사에게서 강도를 만나 쓰러진 자의 이웃은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는 대답을 이끌어 냅니다. 이웃의 개념이 이미 이웃인 친구들 사이에서가 아닌 사랑의 베풂에서 발생한다는 충격적인 결론이지요. 계약과 무관하게 피 흘려 쓰러져 가는 사람을 돕는 것. 힘든 사람을 도우라는 이 초등적인 윤리는 사실 인간성의 근본적 측면을 뒤흔듭니다. 보상받을 수 없는 행위, 배신당할 수 있는 행위를 하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계약의 정치와 희생의 윤리는 결코 맞닿지 못할 지점입니다.

이 윤리학의 계보를 잇는 레비나스는 아예 존재론의 견고한 전통에 도전합니다. 존재의 정의를 아예 타자를 책임지는 것으로 바꿔버리거든요. 그는 개별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존재론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하이데거의 ‘함께하는 존재’(Mitsein)을 부정하면서 우리의 지향점은 ‘위하는 존재’(Fürsein)여야 마땅하다고 하는 지점은 제게는 대단히 흥미로웠지요. 함께하기만 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반문할 수 있겠지만, 레비나스는 최초의 살인인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들어 반박할 것입니다. 동생 아벨의 행방을 묻는 신에게 가인은 “나는 모릅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창 4:9)라고 대답합니다. 가인의 대답은 정확합니다. 우리는 모두 개별이니까요. 그러나 개별들의 함께 있음은 윤리를 낳을 수 없습니다. 위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데리다가 말한 무조건적인 환대의 의미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환대의 주도권은 환대받는 이에게 있습니다. 데리다는 환대를 관용에 기댄 주인에 의한 초대(invitation)와 외부인에 의한 방문(visitation)으로 구분하며 후자를 강조하지요. 손님에게 전권을 맡기니 최악의 상황을 전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손님의 정체성을 묻지 말라고 합니다. 그의 이름과 소속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방문이 초대로 변질될 우려가 있으니까요. 데리다와 레비나스 모두 타자의 정체성을 캐묻지 말 것, 곧 타자의 미지성을 강조합니다. 누군가 찾아오면 되묻지 않고 문을 열어주는 것, 이들에게는 그것이 환대입니다.

환대의 조건성과, 그 조건성을 탈각하는 윤리학의 정초도 훑어보았습니다. 이제 떠오르는 문제는 ‘무조건적 환대의 위험성’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입니다. 처음에 살펴보았듯이 손님이 마을을 장악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며 받은 손님이 적으로 변할 가능성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그 순간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마땅할까요? 그런데 이에 대한 데리다의 대답은 다소 황당합니다. 그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사유의 영역으로 한정짓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한마디로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게 생각으로는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환대의 무조건성을 고민하면서 인간의 무한한 윤리성을 엿볼 수 있으며, 조건적 환대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중적 책임
싱겁기 짝이 없는 결론인 듯하지만, 데리다가 환대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덧붙이기만 하고 어떤 해석을 붙이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입니다. 두 천사를 본 ‘롯’이라는 사람은 그들을 보자마자 초청해 집에 들입니다. 두 여행객을 ‘환대’하는 셈이지요. 그리고 그날 밤, 롯의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두 나그네를 강간하게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롯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자신의 두 딸을 ‘내어줄 터이니’ 두 손님은 건들지 말라는 대답.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창세기는 두 딸의 목소리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 이야기가 환대에 대해 어떤 통찰을 줄 수 있을까요?

환대의 공간에서도 권력의 문제는 철저하게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환대도 가장 역겨운 폭력을 전제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어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든 법이 그러하듯 환대의 법 또한 가부장, 곧 집주인의 법이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앞서 환대는 손님의 조건성을 탈각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 손님의 조건성 이상으로 중대한 논의를 빠뜨린 것 같네요. 그것은 바로 ‘누가 환대할 것인가?’ 입니다. 누가 스스로를 한없이 열어둔 채,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하며 환대할 것인가. 문을 열어주며 반갑게 맞으나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여성에게 내몰리는 가부장적 환대는 자기 위반입니다. 롯은 환대를 위반했습니다. 희생의 윤리가 요구될 때 그는 회피했습니다.

환대는 ‘위하는 존재’(Fürsein)로 살겠다고 마음먹은 인간의 운명이나 결코 낭만화해서는 안될 태도입니다. 계약이라는 가면을 벗고 손님의 얼굴을 마주하기로 했다면 그의 배신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며, 또한 그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는 ‘강도 만난 이에게 자비를 베푼 이가 이웃’이라고 말하는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라고 대답하지 “가서, 그 일을 해줄 사람을 찾아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타인을 향한 무한한 책임은 스스로에 대한 희생의 결단을 요구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앞서 이야기한 손님의 윤리가 마을의 논리를 압도한다는 것과 손님을 정의하는 방식이 마을을 정의한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틈입하는 손님이 무서워서 그를 중심으로 두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논증이 아니라 손님을 책임지는 방식이 내가 어떤 존재인지-함께하는 존재인지 위하는 존재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Door man
상처 없는 환대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지극정성으로 굿을 해도 손님은 턱밑까지 달려들어 내 생명을 위협하며, 나를 살려주어도 내 얼굴을 얽은 채로 마을을 나갈 테니까요. 자생적인 근대성을 성립하지 못한 한국이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책임지지 못한 채 받아들여 일어난 잔혹한 갈등이 아직까지 아물지 못한 상처로 남아있고, 앞으로도 오래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완벽한 방법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완벽한 환대도 없고요. 설령 그와 완전한 계약을 맺는다고 한들 그는 나를 배신할 수 있고, 배신의 가능성을 모조리 끌어안은 채 환대해도 나는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일쑤이며, 그 책임과 희생을 내가 떠안기에는 정말 너무나도 부담스럽습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정치를 넘는 윤리를 실천할 것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의 여부와 무관하게 손님은 찾아올 것입니다. 깊은 밤, 누군지 밝히지도 않은 채 문을 두드리는 그를 받을 것인가요?

손님은 마을만 정의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당신도 정의합니다. 그의 이름을 묻지 않고 문을 열 것인지, 문을 걸어 잠그고 돌아설지 선택은 물론 당신의 몫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당신의 집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 지나간 손님, 문을 열어준 손님과 그 손님이 남기고 간 흔적이 말해줄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요? 아, 이 질문을 우리끼리 주고받는다고 답이 나오지 않겠지요. 나와 우리가 누구인지는 손님이 정의해주는 일이니까요. 그럼 이제 우리네 집 대문 앞에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고개를 내밀어 봅시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됩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네 집 대문 앞에 있던 사람들이 나와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정의해줄 테니까요.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3학년으로, 현재 휴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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