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호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그리스도인과 역사의식

▲ '교회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세비누스는, 제국의 통치권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고 황제는 제국과 교회의 평화를 구현하는 주체라고 인식했다. (그림: 위키미디어코먼스)

1. 역사관이란 무엇인가
역사가 전개되는 흐름의 이면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역사관’이라는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세상의 역사가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관통하는 일관된 힘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역사의식은 역사를 인식하는 주체의 민족의식이나 집단의식이 구현된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역사의식이나 역사관이 학문적으로 유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역사학회에서 위스콘신 대학의 프레데릭 터너 교수는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메이플라워호에 의해 이식된 모방의 역사가 아니라, 아메리카의 새로운 프런티어에 접촉할 때마다 환경에 진화하고 적응하여 성취한 자생적인 역사라고 주장했습니다. ‘프런티어 사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는 출처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료를 토대로 상고사를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통일 신라의 영토를 만주까지 넓혔고, 우리 조상의 활동 터를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확장했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상고사 이해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제도권 역사학에서 프런티어 사관 혹은 극단적인 민족주의 사관을 진지하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때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설명되었으나 지금은 시효가 만료된 것이 기독교 사관입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관이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를 빌리자면 역사의 흐름이나 사건 전개에 신적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모든 사건 속에서 신의 의지를 헤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역사 인식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역사의식의 반영입니다. 헤브라이즘과 기독교 역사 인식의 공통점은 역사에서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역사 인식은 구약성서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들은 모든 역사의 사건에 대해 신의 일하심을 기본적으로 전제를 두고 인식했습니다. 구약의 역사서는 그런 바탕 위에 기술되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신명기 역사관’이라고 하며, 신명기를 기술한 관점을 헤브라이즘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신명기 역사관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속의 역사 속에 자신을 드러내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범죄, 하나님의 진노,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원,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으로 구성됩니다. 신명기 역사관은 구체적인 세속의 사건 하나 하나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는가를 일관된 관점으로 표현합니다. 이 동일한 관점이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서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기술된 히브리 역사의 특징 중 하나는 민족의 범죄, 심판 등을 역사 속에서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표현에서 보자면 자학사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학에 머물지 않았고, 돌이킬 때 회복된다는 언약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관점은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론일 뿐 아니라, 오랜 역사를 통해 체득한 이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인식은 민족주의적입니다. 비록 고난을 당하지만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을 끊임없이 되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인들이 자신들만의 번영과 영광을 추구했던 결과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역사 속에서 보면, 그들은 누구보다 메시아를 앙망했지만, 그들이 실제 원했던 것은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주는 현세적인 메시아였습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에도 그들이 끊임없이 물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땅 끝까지” 증인이 되는 삶(행 1:8)이나,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마 28:19)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히브리 민족의식을 넘어 세계를 향하는 역사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의식을 가지지 못했다면, 교회는 유대인의 경계 내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인식 지평이 이방으로 확장되지 않았다면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극적인 전환은, 신의 선택을 받았으며 신의 역사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유대 민족의 멸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중심이 되어 역사를 이끌어간다고 보는 기독교 사관은 히브리인들이 걸려 넘어졌던 민족주의적 역사 인식에 머무는 셈입니다. 초대교회에 대한 기록을 풍부하게 남겨 교회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이러한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틀을 놓는 데 기여한 인물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13번째 사도라고 칭하며 황제가 신으로부터 제국의 통치권을 받아 세상 제국을 다스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황제의 권력은 신에게 부여받은 신성불가침의 힘이었고, 황제는 제국과 교회 내의 평화를 구현하는 주체였습니다.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