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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변방에서 신의 나라를 꿈꾸다
[제국과 하나님 나라 : 바울 서신 읽기 01] 로마 제국 vs. 데살로니카의 메시아 공동체들 1
[338호] 2018년 12월 27일 (목) 16:37:05 한수현 goscon@goscon.co.kr
   
 

2017년 4월 7일 굳게 다문 입술로 거대한 황소 동상을 응시하는 소녀상이 미국의 월스트리트에 세워졌다. ‘겁 없는 소녀상’(fearless girl)으로 불린 이 소녀상은 뉴욕 증권가에서 일하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음을 비판하고자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다. 소녀상이 응시하는 월가의 명물 황소 동상은 1987년 무너진 미국 경제가 다시 살아나기를 희망하는 상징으로 1989년 크리스마스에 세워졌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세워진 소녀상은,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황소 동상 앞에 세워지면서 더욱 상징성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많은 기독교인은 구약에서 야훼에 대적하는 풍요의 신 바알을 상징하는 황소에 맞서는 소녀상을, 맘몬에 물들고 자본의 지배에 예속된 현실 세계에 굴복하지 않는 신앙적 상징으로 이해했다. 이 글을 쓰는 12월 10일, 소녀상은 뉴욕 증권거래소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풍요의 상징에 맞선 소녀가 이제는 트럼프가 지배하는 미국 경제를 상징하는 건물 앞에 우뚝 선 것이다.

시간의 가장 강력한 힘은 망각이다. 아무리 중요했던 사건이나 기억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취만 남는 경우가 있다. 성서의 이야기는 과거가 되었지만, 그 아득한 과거의 한 순간에는 ‘현실’이었다.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 하루의 한 숨과 기도를 모아 기록한 현실의 기록이었다. 미래의 어느 순간, 그 현실의 기록은 과거와 비슷한 현실들이 펼쳐질 때 망각의 껍질을 벗고 지식과 통찰로서 새롭게 드러난다. 그 순간을 성서의 저자들은 ‘아포칼립스’(Apocalypse), 묵시 또는 계시라고 불렀다.

앞으로 연재하는 글들은 성서를 인간의 제국에 맞서 신의 나라를 꿈꾸었던 자들의 기록으로 읽으려는 시도의 결과이다. 먼저 그 첫 이야기로 약 이천 년 전 데살로니카에 있었던 공동체들과 그 공동체를 세웠던 바울이란 사람의 기록을 살펴보려 한다. 만약 오늘의 현실을 조응하여 성서가 다시 깨어난다면 이 또한 오늘의 아포칼립스가 될 것이다.

예수 탄생 73년 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BC 73년, 훗날 유대인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의 민족들에게 메시아로 불릴 예수의 탄생 년으로 추측되는 해의 73년 전 어느 여름, 이탈리아 카푸아에 위치한 검투사 양성소의 검투사인 스파르타쿠스가 74명의 다른 검투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베수비오 화산 지대에 몸을 숨긴 그들은, 처음에는 백 명 남짓한 산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카푸아에서 출발한 로마의 진압대를 격파하자 로마 전역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자이자 떠오르는 전투 도시인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런 로마 시민군에 연전연승을 거두자 각지에서 이들의 영웅담을 들은 이들이 베수비오 화산지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3천여 명의 시민을 징집하여 구성된 로마의 토벌대와 4천여 명의 2차 토벌대를 격파한 스파르타쿠스는 더 이상 산적의 두목이 아니라 로마라는 이름에 대항하는 새로운 혁명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당시 문헌에 따르면, 로마의 질서에 포섭되지 못한 4만-10만 명에 달하는 이름 없는 노예들과 방랑자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이들은 곧 화산지대를 나와 로마의 도시들을 공격해 함락하며 당시 신흥 강대국 로마를 불안에 떨게 했다. BC 72년이 되자 로마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을 제외하고는 무패 전적을 자랑하는 로마 정규군 4개 군대와 갈리아에 주둔했던 2개의 군단을 급파하여 솟아오른 혁명의 불을 끄고자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군대는 6개 군단을 거짓말처럼 쓸어버리는 기적적인 전공을 세운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한 떼의 노예들과, 그들을 보고 모여든 난민과 같은 사람들에게 무릎 꿇은 전쟁의 시작과 끝에 관해 침묵한다. 다만, 패배했음을 간단히 기록할 뿐이다. 그러나 로마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어이없는 패배는 스파르타쿠스와 그 부하들의 이름이 로마사에 기록되는 이유가 되었다.

연전연승을 거두며 이탈리아 북쪽까지 행군하여 거대한 세력을 이룬 스파르타쿠스는 세계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결정을 내린다. 전설에 의하면 트라키아의 귀족이나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고향인 트라키아로 돌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지 않고 진군 방향을 다시 남쪽으로 돌려 로마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가 발길을 돌려 사자굴로 다시 들어간 이유를 후대 역사가들은 추측만 할 뿐이다. 새로운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로마를 지우려 했는지, 헛된 욕심에 눈이 멀었던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선택은 로마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한 인물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한편, 한꺼번에 두 명의 집정관이 패배의 쓴 잔을 마시자 로마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마의 대권을 잡기 위해 뛰어든 인물이 당시 법무관 직책을 맡았던 로마 최고 부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다. 그는 패배한 로마의 정규군과 사비를 들여 조직한 8개 군단을 이끌고 포부도 당당히 스파르타쿠스에 맞선다. 크라수스에겐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승리하면 모든 것을 얻지만 패배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절박한 크라수스는 먼저 스파르타쿠스와의 싸움에서 후퇴한 로마의 정규군에게 데키마티오(decimatio)를 명한다. 데키마티오는 모든 패잔병들을 열 명씩 나누고 그 안에서 제비를 뽑아 선택된 한 명을 나머지 9명이 때려죽이는 잔인한 형벌이다. 군기를 세우기 위해 거의 형식으로만 남아 있었던 이 형벌을 모든 후퇴한 로마 정규군에게 명한 것이다. 결국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 군대를 꺾고 승리를 쟁취한다. 명실공히 로마 정계의 일인자로 개선식을 꿈꾸던 크라수스는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당시 스페인 원정을 막 끝내고 귀환하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도망치던 스파르타쿠스의 패잔병들을 물리치고 크라수스보다 더 빨리 로마에 도착해서 혁명군을 물리친 영웅으로 개선식을 열었다는 소식이었다. 온갖 고생을 한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보다 한 발 늦은 이유로 개선장군으로 원로원 인정을 받지 못한다. 물론 여기엔 로마의 질서를 지키고자 한 원로원의 계산이 숨어 있었다.

로마 제국, 삼두정치에서 1인 통치체제로
이렇게 명장 폼페이우스와 부자 크라수스 간의 팽팽한 긴장 안에서 로마의 질서는 유지되는 듯했으나, 이 긴장을 이용해 로마 정치에 등장한 인물이 있었다. 크라수스 밑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전투 경험을 쌓아온 몰락한 가문의 후손, 그러나 불세출의 재능이 있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먼저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화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잇따라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가 로마를 이끄는 삼두정치(로마 제국 공화정 말기에 3명의 실력자가 동맹을 맺고 국가권력을 독점한 정치형태-편집자)의 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삼두정치는 결과적으로 원로원 중심의 귀족정치를 고집했던 로마가 스파르타쿠스의 혁명 이후로 효율적인 전쟁국가를 지향하는 고대 군주제로 변모하는 계기가 된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권력의 주도권을 쥐는 체제인 삼두정치는 원래 셋 중 누구에게도 주도권을 주고 싶지 않았던 로마 최고 통치 기구인 원로원이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었으나, 결국 자신들이 누리고 있었던 권력을 송두리째 한 사람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는다.

팽팽한 긴장 속에 공생하는 관계였던 세 사람. 크라수스는 막대한 부를, 폼페이우스는 전쟁 영웅으로서의 명성을,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와 정치 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천재적인 재능으로 이 균형을 깨뜨린다. 카이사르야 말로 상황만 받쳐준다면 폼페이우스 이상의 군대 지휘관이 될 수 있고, 크라수스 이상의 상업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의 가장 불안한 방위선이었던 갈리아에 총독으로 부임한 카이사르는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만큼 효과적인 작전으로 갈리아 지역을 평정하고 폼페이우스 이상의 전공을 올린다. 폼페이우스도 카이사르에게 질세라 동방 원정(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점령)에 성공하고, 카이사르의 힘에 위험을 감지한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카이사르와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을 벌인다.

내전의 승리자는 카이사르였고, 이후 그는 일약 로마의 일인자로 올라선다. 문제는 로마가 이미 유럽과 중동 지역까지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을 다스리는 제국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로마 제국을 이끌 수 있는 인물이 바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꺾고 올라선 불세출의 전쟁 영웅 카이사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결국 1인 독재를 반대한 사람들에게 카이사르는 암살당했지만 로마인들은 전쟁과 정치에 능한 한 영웅에 의해 발전하는 제국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고, 이 바람은 이후에 이어진 길고 긴 내전을 끝낸 카이사르의 후계자에게로 향했다. 로마가 황제정으로 들어선 것이다.

도시국가에서 발전하여 귀족통치(원로원제도)를 중심으로 한 공화국에 이른 로마의 법과 정치제도 위에 바야흐로 일인 중심의 황제정이 더해지면서, 황제가 법과 제도를 통해 군림하는 새로운 정치 형태가 탄생한다. 이때가 BC 27년, 바로 팔레스타인에서 예수가 태어나기 27년 전이다. 복음서에도 기록된 인구 조사를 실시한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란 곧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일인자가 되면서 얻은 ‘위대한’이란 뜻을 가진 칭호였다. 이후 로마 황제들은 카이사르 또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다.

카이사르에서 아우구스투스에 이르기까지 길었던 내전은 시민들이 서로를 죽이는 비극을 낳았지만,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대국의 지위를 로마에 가져다주었다. 계속된 내전 속에 휘말려 들어간 과거의 제국들, 이집트와 마케도니아 등의 제국은 사라졌다. 이제 서구의 최대 권력을 잡은 로마 제국의 시작인 아우구스투스 시대는 이전과는 다른 통치 이념과 사상이 필요했다. 이로부터 인문학계를 주도하던 철학과 문학에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전까지 그리스-로마의 정치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국가와 정치를 위한 현실적 사상들이었다.

자연과 우주의 질서와 원리를 탐구했던 자연철학을 인간 사회와 정치로 변모시킨 위대한 헬라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인 플라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국가의 민주정치 모델을 어떻게 변화시켜 현실에 걸맞은 정치 형태를 개발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소수 남성 시민들의 거수나 투표로 결정되는 도시 중심의 민주정치는 아주 소규모 도시에서는 실효성이 있을 수 있지만, 몇 십만 명 이상의 국가 형태에는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시민들이 그를 사형시키는 끔찍한 실수도 저지를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험들은 로마가 그리스 헬라 지역을 통일하고 점점 제국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광활한 지역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제국의 시민들에게 공포를 형성하는 동시에 풍요와 안정의 욕구를 채워줌으로써 체제에 계속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정치와 공동체를 꿈꾸었던 당시의 철학은 개인적인 윤리와 덕을 탐구하는 스토아철학이나 현실을 부정하고 영적인 세계를 욕망하는 신플라톤주의로 변모하게 된다.

‘팍스 로마나’ vs.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경고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살전 5:3, 이하 모두 새번역)

초기 메시아 공동체 시대, 즉 예수 사후에 로마의 황제에 오른 자들은 칼리굴라(37년), 클라우디우스(41년), 네로(54년)로 이어진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에 오를 때(69년)까지 로마는 끊임없는 폭군들의 폭정과 내분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에 오른 자들이 모두 그 무거운 제국의 왕관에 휘청대기 시작했을 때 지식인들은 로마의 황제정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후 50년경에 현존하는 최초의 메시아 공동체의 저작이 바울이란 인물에 의해 쓰여진다.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이다. 당시 역사와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면, 위에 인용한 바울의 말은 바울이나 메시아 공동체의 일원만이 가졌던 종말론적 믿음이 아니었다. 이는 로마 전체에 팽배했던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난이었다.

로마가 그 날개 아래 모인 모든 민족과 국가에 약속한 것은 평화(Pax), 안전(Securitas), 자유(Libertas), 일치(Condordia)였다. 그중 평화와 안전은 로마가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약속이었다. 제국이 그 날개 밑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는 약속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로마 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불과 20여 개 군단으로 유지해야 했다. 따라서 군단을 이민족의 침입과 정치적으로 불온한 곳에 집중 배치했으므로 제국 각지에서 소요와 폭동이 동시다발로 일어나면 이를 해결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로마는 식민지에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주는 전쟁 없는 평화를 보증하면서 그리스-헬라 문화로부터 배운 발달된 법체계와 문명을 식민지에 이식함으로 안정된 미래와 번영을 약속했다. 군사력과 법의 힘으로 평화와 안전을 약속하고, 대신에 세금과 충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전통적인 신정정치를 표방했던 동방(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에는 그리 효과적이지 않았기에, 황제는 신의 아들이며 신의 통치의 대리자로서 제국의 모든 민족과 나라의 안전과 번영을 약속한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 즉 황제 숭배를 더하게 되었다. 이런 로마의 방식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국가 정치적 방식보다는 종교에 더 가까워 보인지만, 현대 국가의 체제 역시,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정치 이념과 법체계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민족의식이나, 대통령을 마치 초인적인 왕이나 여왕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모든 문제를 그들이 해결해주리라고 여기는 믿음 또한 국가를 유지하는 중요한 이념적 수단이다.

당시 로마가 의존했던 평화와 안정의 약속은 초기 메시아 공동체의 발생 시기인 1세기 후반에는 매우 불안해 보였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메시아 공동체에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마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 몰려든 사람들처럼 말이다. 현대 교회와 비교해볼 때, 이천 년 전의 메시아 공동체는 내세 보장보다는 제국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대안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당시 팽배했던 말세적 불안감은 흡사 밀레니엄 시대를 맞았던 1990년대 말의 분위기에 비견할 만하다. IMF 사태와 불안한 경제, 심화되는 계층 간 갈등은 현실의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게 했고, 새로운 변화와 소망에 목마른 사람들이 여러 유사종교와 가르침에 시간과 정력을 투자했다. 이처럼 소위 당시 서구의 세계 자체였던 로마의 혼란은 역사 자체의 성장 동력이 사라지고 만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메시아 공동체가 제국의 평화·안정 대신 택한 것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여호수아) 그리스도(메시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살전 5:9)라는 바울의 말은 멈춰 서서 귀 기울일 만큼 듣는 이의 흥미를 자극하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기독교나 유대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신(god)을 지칭하는 ‘떼오스’(θεός)라는 일반 명사이다. 즉, 어떤 신이 메시아를 통해 구원을 얻도록 한다는 말인 것이다.

또한 ‘구원’(σωτηρία)이란 말은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매우 정치적인 언어였다. 법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용서’와 ‘해방’이 정치적 언어이듯, ‘소테리아’라는 당시의 표현은 먼저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하는 말이자 사회적 존재의 ‘웰빙’(well-being)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현대인에게 구원은 종교 영역에서만 쓰이는 단어이지만 당시의 로마인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언어였던 것이다. 존재의 잘됨, 잘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었다. 즉, 여호수아 메시아를 통해 나타난 신이야 말로 인간 존재의 잘됨의 지름길을 제시하는 분이란 것이다. 물론 여기에 당시 진정한 구원을 주는 자는 언제나 로마의 신의 아들이자 로마 종교의 대제사장인 황제란 사실을 꼭 기억해두어야 한다. 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단순히 로마 종교에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정치와 질서 자체를 어지럽히는 것이므로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된다. 아마도 초기 메시아 공동체에 가한 많은 박해의 원인은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 공동체의 최초 문서인 데살로니가전서는 실제적인 삶과 공동체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진정한 삶의 잘됨이 이집트 제국에서 탈출한 노예들을 신의 소명에 따라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의 이름을 이어받은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통해 나타난다는 바울의 짧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살전 5:11)

여기서 ‘덕’이란 무엇일까? ‘세워주다’란 뜻으로 번역할 수 있는 ‘오이코도메오’(οἰκοδομέω)는 메시아가 그를 따르는 공동체에 열어주는 가장 중요한 미래로, 바울이 공동체가 이루기 원했던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 내용은 이어서 나타난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살전 5:14-15)

필자의 은사 중에 남미의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겨울을 보내시는 분이 있다. 그가 어느 날 해변에서 한가로이 독서를 하고 있는데 한 남미 사람이 다가왔다. 간단하게 인사를 한 후에 그 남미 사람이 갑자기 물었다. “인생이 무엇이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매일 해변에서 책을 읽는 흰 수염의 노인이 그에게는 삶에 대해 뭔가 아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삶과 인생에 대해 마치 학교에서 다 배운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숨 가쁘게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정작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지나쳤음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그런 질문 자체가 호사인양 여겨진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한국에 비해 경제적으로 훨씬 뒤떨어진 나라의 사람들에게서 그런 여유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시의 로마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에 맞선 바울의 ‘메시아 신앙’ 전파
로마 기준에서는 변방이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제국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사상적 체계를 탄생시켰다. 로마인들은 그 생각의 방식을 흔히 ‘유대주의’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1세기에 이미 일상의 언어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셈어를 모체로 형성된 자기네 언어인 히브리어로 쓰인 문헌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발전시켜 왔다. 이 문헌들은 예수 시대 이후 예수를 메시아로 믿은 공동체에 의해 받아들여져 오늘날 기독교 경전 속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문헌들을 꿰뚫는 핵심 중의 하나는 그들의 신인 야훼와 그들을 둘러싼 다른 나라와 민족, 그리고 제국 사이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관한 것이었다. 이 질문이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정치란 무엇인가’이다.

유대민족은 원래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이 이름이 민족을 이룬 것은 당시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던 이집트 제국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이들이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아시리아 제국, 바빌로니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마케도니아 제국, 그리고 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시대에 제국에 맞서 신의 나라를 꿈꾸고 소망했던 이들은 과거의 망각 속에 사라진 기록들을 모아 지금의 히브리 성경(구약성경)을 편찬했다. 그리고 잊혀진 조상에게 한 신의 약속을 생각해내고 보존했다. 그것은 제국의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야훼의 정의와 그것을 완성할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 약속이 예수라는 인물에게서 이루어졌음을 믿은 바울이란 사람이 로마 제국 시대에 다시 메시아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수현
감리교신학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Th.M.), 시카고 게렛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M.Div)한 뒤, 시카고신학교에서 바울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바울 서신, 복음서, 유대 묵시문학이며, 박사 논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죽은 자의 부활’과 세월호 참사를 연결 짓는 연구 작업의 결과물이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로 바울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와 사회를 바울 서신과 바울 신학에 비추어 살펴보는 여러 연구들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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