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자전 고전: 아버지의 편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사랑하는 아들 희림아, 글로 고전에 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기니 꿈만 같다. 이젠 기성세대에 편입된 내가 이 글의 대화가 네게 더 배우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수년 전 너와 함께 쓴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SFC)의 독자들도 우리의 대화를 환영할 듯하다. 그때는 목사 아빠와 고딩 아들의 대화였는데, 6년이 지난 지금은 한층 심화된 대화와 대결을 나누는 편지가 되지 싶다. 신학자 아버지와 철학도 아들이 인문고전을 소재 삼아 대화를 이어가는 콘셉트인데다 아빠가 먼저 패를 보이는 부담이 있지만, 그로써 나름 동등한 대면이 되면 좋겠다.

첫 대화는 ‘내가 된다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야말로 가장 심원한 물음일 뿐 아니라, 오랜만에 하게 될 아들과의 필답(筆答)을 생각하다 생뚱맞게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의 단어가 생각났거든. 누가복음은 돼지 먹이인 쥐엄 열매 먹던 그의 둘째 아들에 대해 “제 정신이 들어서”(새번역), “스스로 돌이켜”(개정)라고 말하지. 헬라어를 직역하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다’는 뜻이란다. 내가 된다는 것, 잃어버렸던 나를 되찾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로 돌아감이기도 하면서, 역으로 하나님에게로의 회심은 자기 발견이기도 하지.

너도 잘 알겠지만, 이는 철학의 근본 질문이기도 하구나. 철학을 전공하는 너는 사상가들의 사고를 따라가기 바빴겠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누구인가’를 계속 고민했을 거야. 델포이 신전의 문구였던,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기실 나는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철학과 인문학의 본령이겠지.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렇고, 근대 철학을 열어젖힌 데카르트도 이 오래된 물음에 새로운 대답 혹은 방식으로 다가갔어. 그렇다면, 이 질문으로 우리의 대화를 시작하자꾸나.

문제는 나 자신
고2 때 넌 《이기적 유전자》를 비롯한 도킨스의 여러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현대 생물학의 성취를 기반으로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다른지 여러 차례 토론하고 글을 썼지. 그때 아빠는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인간이란 동물이면서도 동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의 존재성을 지닌, 신 앞에 선 존재라고 말했어. 기억나니? 그런데 신 앞에 선다는 건 뭘까?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의 관점으로 자신의 전 생애를 해석한다는 거야. 이를 좀 더 파고들기 위해 불멸의 고전 《고백록》(대한기독교서회)을 들춰보자꾸나. 이 책에서 신 앞에 선 자의 구체적인 실재를 보게 될 것이고, 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거야.

《고백록》의 핵심 주제를 거칠게 등식화하면 ‘하나님=진리=행복=나’라는 항등식이 성립한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된 기쁨과 행복이 진리 안에 있다고 단언한 다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참 행복이란 진리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진리이신 당신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됩니다.”(10권 23장 33절)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듯이, 그에게 하나님과 진리와 행복은 하나인 게지.

행복을 줄 수 없는 냉담한 진리에도, 진리가 아닌 거짓된 쾌락과 행복에 대해서도 그는 진저리를 치곤했지. 진리와 행복도 하나님 안에 있어. 하나님 밖에는 진리와 행복이 없다는 말인 동시에 설사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 안에서만 진리와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결의인 셈이지.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를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1권 1장 1절)기 때문이야.

그런데 하나님, 진리, 행복도 기실 내가 있지 않으면 성립조차 안 되겠지.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자신이었거든. “나는 내 자신에게 문제가 되었”(10권 17장 26절)다는 말을 읽을 때마다, 왜인지 눈물이 나.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면, 결국 ‘나’라는 잘 변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면서도 가장 싫어하는 견고한 자아가 똬리를 틀고 있지. 내가 힘겨워하는 타인도 기실 ‘또 하나의 나’여서 그래. 그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진리=행복의 소유격은 너도, 그도 아닌 ‘나’(my)여야 하고말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야.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떠나 있었으므로 나 자신을 찾을 수 없었으니 하물며 당신을 어떻게 찾을 수가 있었겠습니까?”(5권 2장 3절) 그가 거듭거듭 자기 자신이 되라고 외치는 것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 바로 내 안이기 때문이야.

‘나’는 어디에?
그러면 나는 누구일까? 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아우구스티누스의 독특성은 저 두 질문을 하나로 본다는 사실과 함께,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를 묻는다는 데 있어. 그래서 일본 신학자 가토 신로는 서구인과 달리 동아시아인에게는 신의 존재 여부 못지않게 신의 자리가 중요하다고 하지.(《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강의》, 교유서가, 268-270쪽) 존재론에서 시작한 서구철학이 존재 여부를 따져 묻는다면, 관계론에서 시작한 동양철학이 존재의 자리를 중요시하는 것은 당연해.

아우구스티누스의 또 다른 독특성은 ‘기억’에 있어. 이건 《고백록》의 구조와 구성을 살펴보면 뚜렷해진단다. 1-9권은 자전적 스토리, 10권은 기억론, 11-13권은 창세기 주석을 통해 시간론을 전개하지. 나란 존재는 내가 살아낸 삶을 내러티브로 말할 때 알 수 있고, 나의 지난 이야기 자체가 나이기보다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느냐, 즉 해석하느냐가 바로 ‘나’인 거지. 그리고 인생은 시간인데,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관건이지. 피조물로서 시간의 유한성을 인식해야 의미 있는 삶인 게지.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의 관점으로, 인간은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통과할 때 인간답게 살 수 있어.

▲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는 말년에 자신의 모든 저작을 다시 읽고 각 책에 대한 코멘트를 달았지. 그에 따르면 고백록의 1-10권을 나 자신에 대한 책(de me, about myself), 11-13권은 성경에 관한 책이라고 했어. 우리의 통상적 이해와 달리 그는 10권을 앞의 책과 따로 분리하지 않고 통합해서 본다는 거야. 우리가 읽기로는 9권까지가 자전적 이야기인데 말이야. 그래서 간혹 청소년용이나 대중적인 번역서는 9권까지만 책으로 묶기도 해.

그런데 자신에 대한 과거 이야기와 기억론이 어떻게 연결될까? 자전적 스토리만으로 끝내지 않고 기억의 신비를 추적한 이유는 뭘까? 아빠가 보기에 기억론이 없으면 그의 과거는 과거가 아닌 거야. 그 모든 것은 기억된 과거이지. 단순한 사실 나열만으로는 과거 이야기도 역사가 될 수 없지. 어떤 형태로든 편집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거든. 지나온 내 과거 이야기는 현재적 시점에서 기억해 낸 것이지. 그러니 기억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거지. 기억이 곧 나야!

그는 자연적 사물이나 인간적 감각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음을 논증한 다음, 기억을 대안이자 대답으로 제시해. 기억, “바로 그것이 내 마음이요, 나 자신”(10권 17장 26절)이야. 기억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기억 속에서 그는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돼.

“이 모든 일들을 나는 나 자신 안에서, 즉 내 기억이라고 하는 넓은 방에서 하는 것입니다. (중략) 거기에서 나는 나 자신을 만나고 나 자신을 기억합니다. (중략) 나는 같은 기억의 창고에서 내가 과거에 경험했거나 그 경험을 토대로 하여 믿게 된 것의 영상들을 꺼내어 새로운 영상들을 구성해 보고, 그것들이 과거의 맥락에 맞는가 견주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나는 미래의 행동과 사건과 희망을 추측해 봅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현재적인 사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10권 8장 14절)

과거의 나는 그저 지나가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나에 의해 제자리를 잡고 지금의 나를 의미 있게 구성해주지. 그리고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나는 내일을 기약할 수도 있게 되는 거고, 현재를 최고의 시간이 되게 해주지. 그러므로 나는 곧 ‘기억하는 나’야. ‘기억하는 나’가 없다면, 과거의 내 삶도 그저 사라질 물질에 불과해. 기억에 의해 과거의 파편과 퍼즐들이 제 자리를 잡는 것이지.

그 기억을 재구성하는 큰 프레임은 결국 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 기억 속에 계시거든(10권 24장 35절).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기억이란, 하나님 없이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기억인 거지. 그렇지 않다면 그의 과거 삶은 욕정에 사로잡힌 한 사내의 무용담으로 끝나고 말 거야. 수사학자로서 명예와 야망을 좇아 살았던 한 지식인의 초상에 불과하지. 그러나 그가 회고한 자신의 과거 이야기는 그토록 외면했고 뿌리쳤던 하나님 손에 이끌린 것이었어. 그랬기에 그는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깨달았고, 행복을 누리고, 자기를 발견하게 된 것이지.

아빠도 하나님이 없었다면 완전히 달라졌을 거야. 내게도 최악의 선택이 있었고, 그 일은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랬을까 싶어. 그때로 되돌아가면 정반대의 선택을 할 것 같아. 그럼에도 그것이 어둡게 채색되지만은 않아. 그 과거를 전혀 다르게 기억하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셨고, 나는 그분의 돌보심 아래서 죽었다 깨어나도 예상치 못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

‘나’의 절대성이 지닌 위험
그런데 아들아,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나’는 내면주의 혹은 개인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기도 하다. 기억한다고 할 때의 그 기억 현상은 한 인간의 고독한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이거든. ‘내면/개인/나’라는 단어는 항상 ‘외부/공동체/너’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어. 그는 너/외부/공동체를 결코 부정하지 않지만, 결국 나/내면/개인으로 소급하려고 들지. 그러기에 그에게 ‘나’는 ‘너’가 없거나 약해질 공산이 무척 크단다.

이런 혐의가 근거 없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분도출판사)이 중요한 근거야. 그 책에서 그는 자신을 대화 파트너로 설정하고 묻고 답하는데, “무엇을 알고 싶은가?”라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은 하나님과 영혼을 알고 싶다는 거였다. 또 다른 그가 더 알고 싶은 것이 없느냐고 되묻자 단호하게 대답하지. “전혀, 아무것도 없다.”(1권 2.7) 아무것도 없다니? 아빠는 아들인 너와 우리 식구들, 교회, 세계, 자연에 대해서 무진장 알고 싶은데 말이다. 

또 하나의 근거가 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인간 내면에 진리께서 거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종교》, 분도출판사, 39, 72쪽) 하나님과 진리, 행복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으니 바깥을 쏘다니지 말라는 거지. 어쩌면 오로지 자기 자신(idion)이 되고자 하는 나는 백치(idiotic)가 아닐까?(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90쪽)

그의 개인주의/내면화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만 할 수는 없어. 한편으로 타인의 기준이나 잣대에 의해 측정되거나 비교될 수 없는 고유성이 바로 나의 나됨이라는 점에서 근대의 선취라는 점을 높이 평가해. 나는 나이지 너와 그가 아니거든. 무엇보다도 그가 말한 나가 너 없는 나이기보다는 너로 환원되거나 축소될 수 없는 나만의 절대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많아.

앞서 말한 대로 ‘나’가 빠진 사회와 자연이 무슨 의미가 있겠니. 키에르케고르가 헤겔을 비판했던 말은 정확하게 아우구스티누스적 사유 방식의 산물이지.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이 웅장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궁궐을 짓고는 정작 그 자신은 허름한 초가집에서 산다고 조롱했지. 집단에 휘둘리지 않은 개인/내면을 발견한 것이 근대인이 아닌 고대인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구나.

다른 한편으로 나의 주체성을 저리도 강력하게 옹호하는 것이 독이 되기도 하지. 너로 치환되지 않는 나만의 독특성 강변은 너와의 관계 단절 또는 타인의 지배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너 없이 어찌 내가 있겠니. 그걸 한나 아렌트만큼 더 잘 말할 수 없을 거야. “모든 인간의 삶, 심지어 광야에서의 은자의 삶도 타인의 현존을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증거해 주는 세계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인간의 조건》, 73쪽) 암, 가능하지 않고말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후손인 대다수 개신교회는 사회 정치적 위기 국면에 맞닥뜨리면, 문제를 문제로 풀지 않고 내면으로 침잠하곤 한다. 그 결과, 외부 세계의 사회 정치적 문제를 그저 한 개인과 내면의 문제로 축소하고, 그 빈 공간을 세속 권력에게 내어주고, 교회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말지. 나라가 망하는 현실에서 전개된 대민족부흥운동에서의 열광적인 회개에 사회 정치적인 회개가 거의 없었어. 청년들 집회에 가면 취업, 결혼, 치유가 주된 이슈이지.

기억하는 존재, 기록하는 삶
사랑하는 아들아, 아우구스티누스의 기억이 개인주의/내면화의 위험을 안고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인간의 인간됨, 나의 나됨은 ‘기억’이라는 사실에 추호의 여지도 없이 동의한단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복제인간과 인간을 구분하는 잣대가 ‘기억’이었지. 이야기가 있는 기억 말이야.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은 기억임에 틀림없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이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어떤 의미일까? 나는 기억할 만한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기억하는 존재가 되는 것, 그럴 때 나는 내가 된다. 하여, 내가 네게 기억되고, 내가 너를 사랑으로 기억하는 이 순간, 나는 나이고 나다워지는 거지.

기억의 전승과 현재화는 기록에 달려 있다. 시간 속에 창조되어 사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의 기억은 그와 함께 사라지고 말지. 그러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11-13권에서 우리의 현재 시간을 영원에 잇댄 것이어야 한다고 말을 하지. 그분의 영원 속에서 나와 너를 영원히 기억함으로 우리는 언제까지나 나일 수 있는 거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소멸의 존재에서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거야.

그런데 아들아, 위의 것은 신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나의 나됨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기록일거야. 내 기억이 망각의 늪 속에서 소멸하지 않고 누군가가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글쓰기이지.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풀면서 영원을 꿈꾸는 자가 자기 사상을 기록하려 드는 순간, 그는 영원을 버리게 된다고 말하지.(《인간의 조건》, 70쪽)

그렇지만 무시간적 영원에 대한 소크라테스와 달리 역사적 영원,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록은 영원과 맞닿아 있지. 그러기에 나의 현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유효한 수단이지만, 나 다음의 사람들에게도 기억되는 존재로 만드는 방편이지.

아들아, 아빠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억되고 싶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을 살고 싶다. 동시에 아들인 너를 기억하고 너에게 기억되는 나이고 싶다. 그게 아빠야. 내가 된다는 것, 그것은 기억하고 기억되는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 나를 나답게 해주는 희림아, 너는 너를 누구라 하니? 네 이야기를 듣고 싶다, 사랑하는 아들.

 

김기현
로고스교회 담임목사이자 로고스서원 대표로, 코스타 강사, <매일성경> 집필자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기독교 세계관, 평화주의, 변증, 성경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 이선숙과 아들 희림, 딸 서은이 있다. 지은 책으로 《성경 독서법》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가룟 유다 딜레마》 《예배, 인생 최고의 가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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