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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정세 변화와 한국교회의 역할
[341호 커버스토리]
[341호] 2019년 03월 29일 (금) 14:11:59 윤은주 goscon@goscon.co.kr
   
▲ 남북 정상이 '판문점 선언'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았다.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청와대)

2018년 4월 27일,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2000년과 2007년 평양에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지만 북측 정상이 판문점 군사분계선 이남 지역으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었다. 일산 킨텍스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는 장면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함께 나란히 낮은 콘크리트 턱을 넘나드는 모습을 연출하자 남북 정상 간의 관계는 다른 정상과의 관계와 사뭇 달라 보였다. 특히 도보다리에서 있었던 정상 간의 단독 대화는 국제 사회 속에서 남북의 특수 관계를 잘 드러내주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두 정상 간의 대화,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진행됐던 제3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하 ‘판문점 선언’)이 발표됐다.

1년 전: 4.27 판문점 선언의 배경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냉전의 산물인 분단과 대결을 종식하고 민족적 화해와 평화 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겠다고 천명한 남과 북은 오늘 과연 어떤 길 위에 서 있는 것일까? 판문점 선언 이후 이어진 6.12 제1차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과 9.19 평양 정상회담, 그리고 2.28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시사하는 바 국제 사회 속에서 남북 관계는 어떻게 자리매김될 것인가? 한반도 평화 정착에 책임 있는 행위자로서 한국교회는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4.27 판문점 선언의 배경을 되짚어 본 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까지 과거의 남북간 합의를 개괄해보려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니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한다. 역사 속에 해법이 있다.

4.27 판문점 정상회담이 특별했던 이유는, 불과 몇 달 전인 2017년 11월 29일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기까지 핵과 미사일 실험을 강행했고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과 국제 사회의 제재가 맞물려 어느 때보다 한반도에 전쟁 위협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2018년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평창 동계올림픽 참여 의사를 밝히면서 급격한 유화 국면이 전개됐지만, 그 직전까지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으르렁거렸다. 실제로 2017년 11월 12일 한반도에 미국의 전략 자산인 핵추진 항공모함 3척을 비롯 공군 B-1B 폭격기, F-35B 전투기 등이 전개되는 등 일촉즉발의 순간이 연속됐다. 휴전 상태인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 위기는 상존해왔지만 핵과 미사일 실험에 따른 북미 간의 긴장은 2017년 최고조에 달했다.

때마침 2018년 2월 9일부터 25일까지 열렸던 평창올림픽은 남북 대화의 모멘텀을 찾게 해줬다.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이 방한하여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특히 김 제1부부장이 문 대통령과 회담 시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며 특사임을 밝혔고 이후 남북 정상회담이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했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과 트럼프의 딸 이방카도 방한했지만 북미 접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한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와 구두로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받은 문 대통령은 북측에 미국과도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설 것을 권면했다.

판문점 선언은 이렇듯 북미 간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남과 북이 어떤 형태의 무력도 서로 사용하지 않을 거라는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하고 엄격히 준수해’나가기로 한 합의이다. 3조 2항에서는 군사적 긴장 해소를 위한 단계적 군축 실현을 천명하기도 했다. 남북의 불가침 선언은 이미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에서 천명한 바 있지만 판문점 선언과 평양 선언 이후에서야 GP(감시초소) 폐쇄와 비무장 지대의 비무장화를 시도하며 불가침의 물적 토대를 갖추기 시작했다. 더불어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개성공단 내에 설치됐다.

4.27 회담에서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 회담 개최를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기도 했다.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남과 북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한 점은 북이 우리 정부를 대하는 태도 변화를 보여준다. 1990년대 제1차 핵 위기 당시만 해도 북한은 통미봉남(通美封南, 미국과는 통상외교를 지향하면서 이 과정에 남한의 참여는 봉쇄-편집자) 전술을 펼치며 우리 정부와의 협력을 고려하지 않았다. 10.4 정상선언에서도 평화 협정 당사자를 특정하지 않고 3자 또는 4자로 언급했었는데 판문점 선언에서는 ‘남’을 다자회담의 당사자로서 확정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1970년대~1990년대 초: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남북기본합의서까지
남북 회담의 역사는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1969년 괌에서 발표된 닉슨독트린의 영향을 받아 한반도에서 미군 철수가 검토되던 시절, 남북은 처음으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1971년 남북 적십자회담에 이어 1972년 고위급 회담이 열렸고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1973년에는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어 교류하기도 했지만 6월 23일 발표된 남측의 외교정책선언과 북측의 조국통일 5대 방침이 유엔 가입 방식을 두고 충돌하자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남북이 관계를 개선하며 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처음으로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기본으로 하여 상호 신뢰 회복을 위한 다양한 교류, 상호 중상 및 비방 금지,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한 핫라인 개설, 후속 협의체 발족 등을 내용으로 삼았다. 

7.4 남북공동성명은 북에서는 현재까지도 조국통일 3대 헌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남에서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1982)과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 등에서 민족대단결 원칙을 민주 원칙으로 수정하여 반영하고 있다. 1970년대 초 남북이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상호 방문도 이루어졌지만 아쉽게도 남과 북에서는 각각 잇따라 유신헌법과 사회주의헌법이 채택되어 독재의 발판이 마련되는 결과를 낳았다. 통일 담론이 전 민족 구성원들의 염원을 담기보다 정권 유지와 연장을 위한 안보 담론과 연계되는 현상도 이어졌다. 정부가 독점하다시피 한 통일 방안은 멸공 통일, 승공 통일을 전제로 하는 체제 통합 성격의 통일론에 머물렀다. 당연히 북에서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론은 내용을 떠나 논의 자체가 터부시됐고 통일 방안에 대한 상상력은 싹틀 수 없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남북 간에는 체제 대결 양상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1974), 아웅산 폭발 사건(1983), KAL기 폭발 사건(1987) 등 무력 도발이 이어져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합의가 무색해졌다. 1970년대 세계적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남북 간 대화가 시작되긴 했지만 전쟁의 상흔을 날려버리고 상호 체제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남북의 체제 대결 양상은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까지로 이어졌다. 팽팽히 맞서던 남북관계는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체제 전환기를 맞아 급속히 비대칭으로 기울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12월 몰타에서 미국과 소련 두 정상이 만나 탈냉전 선언을 했다. 이를 기화로 독일을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등 동구권 국가들이 일제히 체제 전환을 시도했다.

독일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국민 투표를 거쳐 1990년 동독이 서독의 헌법 체제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통일을 성사시켰다. 이 동서독 통일이 서독으로의 흡수통일이라고 알려지면서 남과 북도 동일한 경로를 따를 것이라 막연히 예측하기도 했다. 이는 북이 기존의 입장을 바꾸게 하는 동인(動因)이 됐는데, 1991년 9월 남과 북은 유엔에 동시가입하게 된다. 그해 12월에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다. 이 합의서 역시 국제 관계의 전변기를 맞아 전격적으로 체결됐다고 할 수 있다. 제1장 남북화해, 제2장 남북불가침, 제3장 남북교류·협력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 형성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전문에서는 남북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다. 국제 사회에서는 남북이 각각 독립적인 국가로서 활동하지만 남북 간은 민족 내부의 관계임을 전제한 것이다. 

   
▲ 보수와 진보를 초월하여 대북사업의 창구 역할을 할 '한국교회남북교류협력단'이 지난 2018년 8월 발족했다. (사진: CBS 뉴스 화면 갈무리)

1990년대 초~2000년대 중: 제네바 합의에서 9.19 공동성명까지
1992년 북의 김용순 국제담당 비서가 미국을 방문하여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면담했다. 당시부터 북한은 미군 철수를 조건으로 하지 않는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 수교를 요구해오고 있다. 한소 수교(1990)와 한중 수교(1992)에 대한 전략적 대응이었는데 아쉽게도 불발됐다. 미국의 반응은 머지 않아 붕괴할지도 모르는 정권과 수교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후 1993년 북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제1차 북핵 위기 국면이 시작됐고, 그 결과 19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는 빛을 잃게 된다. 북의 핵 개발은 체제 전복의 위기감이 팽배한 가운데 본격화했다고 할 수 있다. 핵 문제를 국제 이슈화하면서 북은 남북관계보다 북미관계를 통해 체제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이루어졌고, 1997년 8월 함경남도 신포 지구에서 한·미·일 3국이 설립한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진행하는 경수로 공사가 시작됐다. 그렇지만 1년 후인 1998년 금창리 핵개발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에 맞서 북이 미사일 실험을 강행하자 경수로 건설 공사는 중단됐다.

1999년 10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페리 프로세스가 추진되는 가운데 2000년 6월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남과 북이 다방면에 걸친 교류 협력을 통해 획기적으로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기로 약속했지만 현실화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6.15 공동선언’에서는 1991년 남북합의서에서 합의하지 않았던 통일 방안을 다루어 일보 전진을 꾀했다. 2항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한다고 명시했다. 연방제와 연합제는 통합 방식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시차에 따른 차이일 수도 있다. 두 방안의 절충점을 찾아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자는 기본적 합의였다.

그러나 2000년 말 미국 공화당이 집권한 후 2001년 9.11 테러 발발로 북미관계가 악화됐고 이는 우리 정부의 입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6.15 합의는 이산가족 상봉과 비전향 장기수 송환 등 인도적 문제에 국한해서만 이루어졌다. 더구나 국내 정치적으로는 북의 연방제 통일 방안을 수용했다는 반발심이 강해 차분하게 남북의 통일 방안을 검토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질 못했다.

제2차 북핵 위기는 2002년 10월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제임스 켈리의 방북 당시 북측이 고농축우라늄 핵 프로그램 존재를 시인하면서 촉발됐다. 이후 통역의 문제점이 지적됐지만 이는 제네바 협정 위반이 됐고 북으로의 중유 공급이 중단됐다. 북 역시 핵동결 조치를 해제하고 2003년에 다시금 NPT를 탈퇴하며 갈등이 빚어졌다.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제1차 북핵 위기 때와 달리 6자회담 협의체가 구성됐고 2005년 9월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북이 IAEA(국제원자력기구)와 NPT로 복귀하는 대신, 북미 간 신뢰를 구축하고 한반도 평화 협정 체결과 단계적 비핵화를 진행하는 가운데 북에 대한 핵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미국 재무부가 곧바로 BDA(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대북 송금을 금지하면서 9.19 합의는 파행됐다. 그러자 2006년 7월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 이후 10월 3일, 북은 1차 핵 실험을 강행했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상황이다. 

2000년대 중~2010년대 중: 10.4 남북정상선언에서 3차 북핵 위기까지
북의 1차 핵 실험 강행 이후 2007년 2월 13일 6자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9.19 공동성명을 실행하기 위한 실질적 합의가 도출됐다. 이를 토대로 BDA에 묶여 있던 2천5백만 달러의 대북 송금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채택·발표한 ‘10.4 남북정상선언’은 6.15 공동선언이 큰 틀에서 합의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통일 실현을 위한 구체적 내용이 담겼다. 특히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미국의 관심사가 컸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가졌던 두 차례의 한미 정상회담(ASEAN Regional Forum-ARF 등)에서 미국이 남북 간 평화 협정 문제를 다룰 것을 권했다고 전해진다.

10.4 남북정상선언 제4조는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미국의 적극적인 의사가 반영된 결과였다.

10.4 선언에서 남북이 핵 문제 해결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고 천명한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제1차 핵 위기 때와 달리 남북의 협력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미 양국의 정권이 각각 교체되면서 남북 공조의 실마리는 사라져 버렸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당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 정책 속에서 북은 제6차까지 핵 실험을 이어갔다. 13,000km 장거리 미사일까지 개발하면서 제3차 북핵 위기는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태가 됐다.

남북 관계는 국제 관계와 교차한다. 특히 핵 문제 해결에는 국제 사회의 합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견고하게 구축된 남북 관계는 국제 공조 실행에 있어서 촉매 역할을 하게 된다. 사정이 이와 같은데도 “퍼주었더니 핵으로 돌아 왔다”는 식의 정치 공세와 색깔론은 우리 정부가 대북 정책에 기량을 다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는 덫이 되어 왔다.   

2019년: 제2차 북미 정상회담
지난 2월 28일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문 없이 끝났다. 66시간 기차를 타고 회담에 나섰던 김정은 위원장은 빈손으로 귀국 길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당부했다. 북미가 판을 깨지 않으려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지만,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요구한 ‘영변 핵 시설+α’는 타결을 위한 의제라 볼 수 없다. 북은 계속해서 단계적 해법을 주장해왔고 행동 대 행동의 원칙으로서 ‘상응조치’를 요구해왔다.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이후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인 5월 24일, 풍계리 핵 실험장 폐쇄를 단행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미국은 한미합동군사훈련 유예만을 약속했다. 미국은 ‘북의 완전비핵화 이후 제재 해제’를 주장하고 있다. 

풍계리 핵 실험장 폐쇄는 2018년 4월 20일 노동당 제7기 중앙위원회 3차 전원회의에서 발표한 사회주의 경제건설 총력 집중노선으로 전환하는 데 따른 결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2013년 3월 전원회의 결정이었던 경제와 핵 개발 병진 노선을 성과적으로 달성하였으니 더 이상 핵 개발을 하지 않겠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2017년 11월 29일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함께 북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이후의 일이기도 하다. 2018년 전원회의에서 “핵 시험 중지를 투명성 있게 담보하기 위하여 공화국 북부 핵 실험장을 폐기할 것”이라고 발표한 후 그대로 이루어졌다. 4.27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5월 핵 실험장 폐쇄 계획을 밝히며 국제 사회에 투명하게 공개하기 위해 한미 양국의 전문가와 언론인들을 북한으로 초청하겠다고 알린 바 있다. 문제는, 풍계리 실험장 폐쇄가 북의 비핵화 진정성을 담보하는 조치로 여겨지지 못하는 데 있다.

미래의 핵을 포기하겠다는 북의 전략은 기존의 핵 능력을 담보로 군사 강국의 조건을 갖추었으니 이제 당당하게 경제 강국 건설에 임하겠다는 것이다. 2018년 4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핵무기는 “우리 국가에 대한 핵 위협이나 핵도발이 없는 한”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와 핵기술을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다짐대로라면 북이 핵을 체제 보장의 보검으로 붙들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북한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데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보편적 가치로 내세우는 서구의 시각에서 볼 때 북의 정치범 수용소와 3대 세습 권력은 불신과 편견을 갖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렇지만 되짚어보면 제1차 북핵 위기가 북미 수교 불발에서 비롯되었고, 제2차 북핵 위기 역시 북미 간의 원활하지 못한 소통에 기인했다. 6자회담의 성과를 무시한 미국 재무부의 BDA 송금 억제는 북의 1차 핵실험 강행을 추동했다. 

어찌됐든 여섯 번에 걸친 핵 실험은 물론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온 북은 이제 내려오는 길을 살피고 있다. 체제 수호를 위해 거머쥐었던 보검을 어떻게 경제 개발을 위한 불쏘시개로 삼을지 궁리하는 것이다. 북으로서는 아무리 다짐을 하고 실행에 옮겨도 믿어주질 않는 미국에 대해 야속한 심정도 가득할 것이다. 이번 하노이 정상회담 합의 불발로 “트럼프, 당신마저?”의 배신감이 컸을 것이다. 실제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이렇게 지난 시기 있어 보지 못한 영변 핵단지를 통째로 폐기할 데 대한 그런 제안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민수용 제재결의의 부분적 결의까지 해제하기 어렵다는 미국측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앞으로의 이런 조미거래에 대해서 좀 의욕을 잃지 않으시지 않았는가 하는 이런 느낌을 제가 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6.12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중재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부름을 받고 있다. 한 번 더 한반도 평화 구축의 촉진자로서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면 이제 한국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반공 이념의 보루로서 우리 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입장으로 알려진 한국교회는 안타깝게도 한반도 냉전질서 해체의 끝자락에서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채 떨고 있다. 새로운 가죽부대가 필요한 때에 누더기 자루를 움켜쥔 채 놓질 못하는 행태다.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를 흔들며 스텝이 꼬이는지도 모른 채 ‘광장 정치’에 뛰어들고 있다. 세상에 비치는 가장 상징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1970년대부터 인권 운동과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에 앞장 서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 온 교회에 대한 기억을 덮기에 충분하다.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새로운 길을 찾아 닦아야 한다. 다행히 민족 화합과 한반도 평화를 지향하며 통일 선교의 새로운 기반을 준비하는 움직임들이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다. 남북 교류가 활발했던 당시 대북 사업 경험이 있는 교회와 단체가 사업 재개를 모색하거나 남북관계 경색기에도 대북 지원을 이어 온 단체들을 매개로 다양한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대북제재 해제를 염두에 두고 교단별, 개 교회별, 혹은 연합단체나 대북 지원단체별로 전담 기관을 설립하는 등의 준비를 하고 있다.

특히 2018년 8월 발족한 한국교회남북교류협력단(협력단)은 북측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의 요청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한국교회의 대북사업 창구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협력단의 선교 전략은 북에서 조그련의 위상을 높이고 그 역량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다. 공식 교회 조직을 통한 사업 방식은 과거 사례로 볼 때 가짜 교회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렇지만 북이 다른 어떤 선교지 못지 않게 ‘창의적 접근 지역’임을 고려한다면 현지에 적합한 선교 전략을 세워 접근하는 것이 마땅하다.

북에 대한 접근 방식을 놓고 남남 갈등이 빚어지는 상황도 반드시 정리되어야 한다. 1980년대부터 남북 종교인 교류의 물꼬를 트고 민간 통일 운동의 남북 교류 지평을 열었던 한국교회의 역사는 자랑스럽다. 민간 부문 대북 지원의 상당량을 감당했던 경험 역시 소중하다. 이 모든 역사가 남북 화합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한국교회는 서로 돌아보며 격려하고 힘과 지혜를 합해야 한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새겨 놓은 공포심과 불신은 원수 사랑의 기독교 에토스(ethos)를 실천할 때 극복할 수 있다. 이는 용서와 화해의 덕목을 누르는 증오와 적개심을 직면하는 자기 성찰이 선행될 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교회 안에는 북한 선교 혹은 통일 선교를 꿈꾸는 많은 선교사들과 교회들이 있다. 떠나 온 고향에 대한 동경 때문이기도 하고 선교 열(熱)을 간직한 특심 때문이기도 하다. 재정적인 역량도 사회 어느 부문보다 크다. 인도적 지원에 앞장섰던 경험을 통해 북측 인사들과 상대하는 방법도 일정 부분 터득해 놓았다.

그러하기에 이제 북미 정상회담 재개와 북핵 문제 타결을 위한 정부 차원 노력과 발맞추어 한국교회가 민간 부문의 책임 있는 행위자로서 기지를 발휘할 때이다. 대북제재 하에서도 인도적 협력을 위한 교류는 계속 시도할 수 있다. 실제로 영유아 지원이나 양묘장 사업 등은 직간접 방식으로 지속되어 왔다. 지금 한국교회는 북을 신뢰할 수 없다는 여론에 편승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시험대에 올라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Do to others what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마 7:12).


윤은주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시민사회 거버넌스, 특히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이 많다. 이화여대에서 북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평통연대 사무총장과 뉴코리아 대표, 민족화해협력범민족협의회 회원사업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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