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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방식과 다른 삶: 예수 그리고 바울
[341호 제국과 하나님 나라] 고린도전서 다시 읽기 2
[341호] 2019년 03월 29일 (금) 15:09:13 한수현 goscon@goscon.co.kr
   
▲ 발랭탱 드 블로냐의 <서한을 쓰는 바울>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마블 시리즈 중 ‘어벤저스’가 인기다. 2019년 상반기 개봉 예정인 〈어벤저스: 엔드게임〉은 이미 흥행이 보장되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열광하며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 ‘어벤저스’ 시리즈 초기에 속하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2016년 개봉했는데, 줄거리가 이전과는 달랐다. ‘어벤저스’란 단체에 속한 슈퍼 영웅들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악을 대변하는 적들과 싸우는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의 믿음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두 편으로 갈라져서 갈등을 일으키다 결국 죽일 듯이 맞붙어 싸우는 내용이었다. 어제까지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친구이자 동지들이 이제 적이 되어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서로를 잘 알고 또한 이해하면서도 총구를 들이대야만 하는 것, 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시빌 워(Civil War), ‘내전’(內戰)이다.

내전의 처참함은 우리에게 멀리 있지 않다. 우리는 한 세대 전에 뼈아픈 내전을 겪었다.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몰아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던 한국전쟁이 바로 대표적인 내전이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서로 총을 맞댄 남과 북의 군인들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전투를 배웠던 광복군이 많았다. 서로의 등을 맞대고 목숨을 나누었던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어 총으로 서로의 가슴을 쏴야 했던 시대였다. 모든 전쟁이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병들게 하지만, 같은 민족이 서로를 살해하는 전쟁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아픔을 남긴다.

로마제국의 ‘시빌 워’
기원전 91년 로마는 평화로운 시대를 향유하고 있었다. 부강한 나라의 밑바탕이 될 정책들이 입안되었고 기득권은 조금씩 해체되면서 개혁적인 인물들이 등용되기 시작했다. 이방인들의 침입도 사그라들었고, 로마 지배하의 지역들도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평화의 밑바닥에는 로마의 미래를 결정지을 문제가 떠오르고 있었다. 바로 로마 연합, 도시국가 로마를 중심으로 모인 이리아 지역의 다른 도시국가들의 연합, 그 속에 존재하는 차별과 불평등 문제가 그것이었다.

당시 로마의 시민들은 로마 시민권(투표할 권리 보장)을 가지고 있었고, 이탈리아 도시들의 시민들은 라틴 시민권(투표할 권리 없음)을 가지고 있었다. 투표권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인정받을 권리가 없음을 뜻한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최소한의 권리도 없음을 뜻한다. 결국 정치적 삶을 살 수 없는 자는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는 자가 된다.

당시 호민관 드루수스(Marcus Livius Drusus)는 이탈리아의 모든 주민에게 당장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한다. 드루수스는 로마의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자로 발견된 인물이었고, 그에게 시민권 정책은 로마의 미래를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로마의 다른 기득권자들 생각은 달랐다. 전쟁의 시대에는 힘을 빌리기 위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했지만 평화의 시기가 되자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입속에 있는 것들을 나누길 원하지 않았다. 전쟁 시에는 피와 복종을 요구하면서, 그 결과로 얻어진 것들은 로마인들이 독식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로마의 떠오르는 미래인 드루수스는 그 미래를 평화와 번영으로 열기 위해 로마라는 좁은 공간을 넘어 여러 라틴 도시들의 지도자들과 만나며 새로운 로마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대낮에 로마의 거리에서 이름 모를 누군가의 칼을 맞고 절명한다. 몇 명의 천재가 미래를 그린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자들은 내일의 희망보다는 현실의 이익에 집착한다.

전쟁이 멈춰진 시대를 ‘평화’라고 부른다면, 그런 평화의 시대는 언제나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집단들의 처절한 투쟁이 시작된다. 그런 평화는 줄곧 보수적이다 못해 극우적인 정치인들이 출현하고, 그런 이들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은 조금 남은 자신의 권리나마 지키고자 하는 하층 시민들이다. 드루수스에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보수적인 정치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외려 처음에 드루수스에게 열광했던 가난한 로마 시민에게도 드루수스의 혁신적인 정책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드루수스는 자신의 몸을 바쳐 헌신했던 ‘보통 사람’들의 손에 희생되었다. 그 순간 로마의 지붕 아래에서 하나의 미래를 꿈꾸던 다른 민족과 도시들이 등을 돌렸다.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전쟁으로 휩싸이는 데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어제의 전우가 오늘의 적이 된 것이다. 로마에 일제히 봉기한 이탈리아 부족들은 대부분 허울뿐인 라틴 시민권을 가진 가난한 지역 사람들이었다. 의무만 있고 권리는 잃어버린 사람들이 더 이상 나아질 것 없는 가난 앞에서 칼을 들었다. 로마 연합은 갈가리 찢겨 내전으로 접어들었다. 이를 역사는 ‘동맹시 전쟁’(Social War, BC 91-BC 88)이라고 기록한다.

기원전 90년 로마는 서둘러 로마의 시민권을 연합 아래의 모든 시민들에게 약속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그러나 전쟁으로 시작된 분노와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왜 싸우는지도 모르는 전쟁이, 자신들이 원하던 권리를 얻었음에도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로마의 혼란을 본 이웃 나라들은 서둘러 로마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자라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에서 평화의 시대가 끝나고, 내전에 이어 미트라테스 6세가 왕위에 오른 이웃 나라 폰투스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로마는 내전으로 시작해서 내전으로 끝나는 역사로 들어간다. 카이사르로부터 시작한 내전이 아우구스투스로 이어졌다는 것은 지난 글에서도 강조했었다.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내전들로 로마의 역사는 얼룩진다.

흔히 역사가들은 로마의 내전인 동맹시 전쟁을 로마가 대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한다. 로마 연합의 모든 시민들이 로마 시민권을 얻게 됨으로써 ‘로마 시민’이란 의미가 혈연이나 지연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로마의 날개 아래 거하는 다른 민족,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의미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단일한 시민임을 강조하는 세계국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에 빛이 있다면 어두움도 있기 마련이다. 로마의 역사는 동맹시 전쟁 이후로 갈등과 전쟁이 횡행하는 나라가 된다. 억울하면 칼부터 드는 패도의 시대가 계속된다. 평화적 악수 보다는 힘과 칼을 보여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모두가 믿게 된 것이다. 오늘 나의 손을 잡은 친구의 손이 내일 나의 목을 치는 시대가 익숙해졌다.

전쟁의 방식을 거부한 예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
내전의 상처는 2천 년 전의 그리스-로마 사람들 마음만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마음에도 깊게 새겨져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죽음은 형이 동생을 죽임으로 나타났다. ‘가족 내전’의 결과로 살인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성경은 모든 인류의 조상은 아담과 하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살인은 가족 살인이고 내전의 결과이다. 창세기는 이를 하나님과 동거했던 에덴을 잃어버린 인간이 치르게 된 대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만일 그것을 우리를 휘감고 있는 문제이자 죄악이라고 표현한다면 우리는 이 죄악을 위해 오신 분이라고 고백된 예수라는 인물을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는 내전과 살인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런 예수를 메시아로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럼 고린도교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오늘은 예수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를 읽을 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예수는 뭘 하려고 했을까?” 2천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우린 그의 죽음의 의미를 죄의 용서나 영혼 구원으로 이해하고, 믿고, 살고 있다. 하지만 당시 예수는 정말 무엇을 하고자 했을까? 이 질문은 보통의 사람뿐 아니라 신약을 공부하는 학자들도 자주 그리고 때론 심각하게 던지는 질문이다. 예를 들면 1990년대에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결론 중 하나는 예수가 당시 그리스-로마 지역에 있었던 견유 철학자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삶의 지혜와 영적 성숙의 방법을 말하는 유랑하는 철학자와 같았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씌워진 기독교라는 종교적 색체를 벗기면 인간 중심, 마음 중심, 사랑 중심의 가르침을 말하는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는 사실은 현대인들에게 예수의 모습을 신선하게 그려주었다.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가 종교 조직이 되어가는 것에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위와 같은 예수의 모습이 자신들이 생각한 예수에 더 가깝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예수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면 이런 평화로운 예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 당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을까? 예수의 죽음이란 사건이 몇몇 오해와 사건이 겹쳐져서 벌어진 매우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면, 그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혹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가 세상을 떠도는 철학자이자 선생이었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히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를 당시에 정치적 혁명을 꿈꾸었던 사람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예수의 메시지는 너무도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워 보인다. 도대체 예수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복음서와 바울서신을 1세기 팔레스타인과 그리스-로마의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보는 학자인 리처드 호슬리는 예수의 메시지를 당시의 민중이 처한 상황에서 해석한다. 로마제국이 가진 중요한 정책 중 하나는 ‘Divide and Rule’(분리해서 지배하라!)였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도 그런 로마의 정책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로마는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여러 특권과 혜택을 주고 보통의 민중과 분리했다. 로마의 공무원격인 세리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중들을 착취해도 대부분 모른 체했고, 될 수 있는 한 여러 계급과 계층으로 분리했다. 그 결과 하층민들은 로마가 아니라 당시의 세리들을 더욱 업신여기고 미워했다. 로마와 결탁한 종교인들은 성노동자들이나, 의탁할 곳 없는 과부들과 고아들을 율법이란 굴레를 씌워 천시했다.

예수는 서로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분리되어 투쟁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바리새인보다 세리의 식탁에 초대받기를 원했고,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사랑했으며, 거룩한 종교인들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을 이웃이라 가르쳤다. 그리고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버리고 가장 나중 된 자가 되라 하였다. 권력이 있어도, 평화가 있어도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로마의 정치는 그런 예수 운동의 위험성을 꿰뚫어 볼 정도로 영민했다. 이후 1천 년을 더 유지했으니 말이다.

‘내전 위기’의 고린도교회에 보낸 ‘엄격한 편지’
고린도교회가 큰 위기에 처한 듯하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사뭇 진지하고도 무겁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고전 1:11, 이하 새번역)는 바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진지하다. 살다보면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의견이 다르면 서로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편이 되어 다른 편과 논쟁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지나치게 엄격하다. “모두 같은 말을 하며 …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고전 1:10)라는 그의 말을 보면 지나치게 개성을 무시하고 통일을 고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짜장으로 통일!’을 외치는 꼰대 직장 상사처럼 말이다.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까지 이야기하니, 마치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처럼 “어디 감히!” 또는 “나만 옳아!”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과연 바울은 꼰대 목사였을까?

학자들마다 다르지만, 모든 학자들이 고린도교회에 분파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져 분쟁이 일어났다. 당시 신앙 공동체란 20명을 쉽게 넘을 수 없었으므로, 아마 바울을 따라 신앙을 가지게 된 고린도 곳곳의 공동체간에 갈등과 분파가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공동체 지도자는 바울을 강조했고, 또 어떤 공동체는 아볼로를 주장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의견은 보통의 공동체 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과는 매우 다르다. 흔히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나면 설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설득하고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격리하여 치리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를 위해서는 매우 강력하고도 설득력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카리스마적 1인 리더십이 가장 선호된다. 지난 글에도 지적했듯이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비판하는 로마의 정치와 황제에 대한 글들은 오랫동안 읽히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바울이 예수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가 고린도전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과되어 왔다. 분열과 분파, 즉 내전의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을 반대하거나 다른 지도자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거나 윽박지르지 않는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당신들이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이 말의 뜻을 새기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말하는 세례식의 의미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말하는 세례의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고전 10:2)

바울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라고 표현한다. 바로 애굽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사건이 세례라는 얘기다. 세례에 대한 더욱 명확한 의미는 로마서에 나온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롬 6:3)

세례를 받은 순간 누구나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는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 된다(롬 6:11). 그런데 왜 바울이 갑자기 세례를 말하는지 상상해보자. 바울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세상 권세를 가진 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들을 압살하고 말살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였다. 그러나 그런 예수와 함께 (세례를 통해) 죽은 자들은 예수가 부활했듯이 잘못된 지혜와 삶(죄의 삶)에서 해방된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내세우며 분파를 만들어 스스로를 높이는 상황이 고린도교회 안에 일어난 것이다. 그에 대해 바울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말한다. “난 당신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_고전 1:13) 바울을 따라 복음을 지키고 바울이 세운 교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바울의 이름을 내세운 사람들에게 바울은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이다. “당신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_고전 1:17).

악에 조종당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는 바울서신을 통해, 바울은 복음서와 같이 예수의 어록집이나 기적, 행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말을 실천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와 뜻을 이루는 방법을 가르치고 눈으로 보여주었다면, 바울은 실제 그것을 이루기 위해 로마의 도시로 들어가 그리스도 자체를 드러내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그런 공동체를 이룸에 있어 그 안에서 일어나는 ‘내전’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그것은 누구 한 사람(황제)이나 소수의 엘리트 집단(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구조가 아니라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실천하는 사람들만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새로운 구조에서만이 가능해진다.

제국과 같은 사회에서 내전은 언제나 마땅한 대의명분과 그에 상응하는 이익 때문에 일어나고, 결국 하나를 얻기 위해 희생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전의 시기에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에 자신의 이익 너머에서 죽음을 조장하는 죄와 악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예수와 바울은 폭력으로 악과 맞서기보다, 악에 조종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으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태어난 사람들, 스스로를 죽이고 예수로 다시 살아난 자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불렀던 것이다.

바울의 서신을 그리스도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노력으로 받아들일 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인간의 죄와 욕심은 더 이상 내면에 존재하는 원죄가 아니다. 인간 사회와 진정한 평화를 좀 먹는 걸림돌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은 외부의 힘이나 강력한 권력에 있지 않다. 스스로를 십자가에 내어 놓고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는 변화의 주체들을 키워내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라 믿었고, 그 모임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이제는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리라 믿었다.


한수현
감리교신학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Th.M.), 시카고 게렛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M.Div)한 뒤, 시카고신학교에서 바울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바울 서신, 복음서, 유대 묵시문학이며, 박사 논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죽은 자의 부활’과 세월호 참사를 연결 짓는 연구 작업의 결과물이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로 바울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와 사회를 바울 서신과 바울 신학에 비추어 살펴보는 여러 연구들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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