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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전순결’이 하나님 뜻?
[342호 믿는 '페미'들의 직설]
[342호] 2019년 04월 29일 (월) 11:37:01 Dora희년 goscon@goscon.co.kr

“순결캔디 받아가세요!”

초등학교 5-6학년 때의 일이다. 몇몇 어른들이 학교 근처에서 순결캔디를 나눠주고 있었다. 순결캔디가 어떤 맛인지, 왜 사탕 이름이 순결인지 나는 궁금했다. 내 궁금한 눈빛을 알아차린 한 어른은 ‘순결캔디’를 주면서 이렇게 설명해줬다. “네 몸은 소중하잖니. 이 소중한 몸을 아끼고 아껴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을 때 ‘선물’로 주는 거야. 이 캔디는 그런 약속을 하겠다는 ‘다짐’을 담아내고 있어!” 여느 사탕처럼 달달했던 하얀색의 순결캔디를 먹는 순간, 내 몸까지 덩달아 순결해지는 거 같아서 묘하게 기분이 상쾌했다. 그런데 곧바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순결캔디의 재료가 남자의 정액을 응고시켜 만든 것이라는! 충격적인 그 소문을 듣고 입에 있던 순결캔디를 바로 뱉었다. 화장실로 가서 헛구역질을 해댄 후에 수돗물로 입을 여러 번 헹궜다. 가지고 있던 순결캔디는 모조리 발로 밟아 깨부수었다. 퉤. 내가 순결이라는 단어와 조우하게 된 첫 에피소드는 그렇게 끝이 났다.

   
 

‘혼전순결’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커플이 처음 성관계를 맺는 때는 언제가 바람직한가요?” “혼전순결을 지켜야 하는 성서적 신앙적 이유가 궁금해요. 성욕이 끓어오를 때, 애인이 하자고 꼬시면 너무 힘들어요.” “성기 결합만 아니면 혼전순결 지킨 거죠?” “저는 비혼주의자예요. 교회에서는 혼전순결 안 지키면 죄라고 하던데, 저는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하지 못하나요?” “성폭력을 당했는데, 저는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한 건가요?”

위 내용은 ‘믿는페미’ 계정으로 들어오거나,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에 주로 나오는 신앙인들의 ‘혼전순결’ 관련 질문이다. 교회는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으면 죄”라는 담론이 형성되는 핵심 장소이고, 여기에 교인들이 “아멘”으로 화답하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혼전순결에 대해 지극히 교조적이고 평면적으로 다루는 교회에서 섹스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생각과 가치관 등을 공유하기란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혼전순결이란 단어를 두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혼전’이 문제일까, 아니면 ‘섹스’가 문제일까? 왜 섹스 행위를 순결과 관련시키는 걸까? 혼전섹스를 하면 신앙적으로 순결하지 않은 걸까? 왜 혼전순결에 비해 ‘혼후순결’은 덜 가시화되는 걸까? 혼전순결에 대한 부담과 압박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혼전순결을 정당화하는 성서적, 신학적인 근거는 무엇일까? 내 머릿속에 연쇄적으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교회에서 판도라의 상자처럼 취급되는 혼전순결에 대해 다양한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믿는페미 팟캐스트 멤버들과 논의를 거쳐 작년 1월 달에 ‘혼전순결과 섹스’를 주제로 다양한 사연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혼전순결이 어떻게 이데올로기로써 작동하고, 어떤 방식으로 유통되어 각 사람들에게 내면화되는지를 파헤쳐보고 싶었다. 결국, 그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혼전순결에 대한 ‘성경적 근거’?
먼저 혼전순결과 섹스에 관한 신학적 근거가 있는지 알아봤다. 그랬더니 혼전순결에 대해 기독교인이 서술한 책의 대부분(예를 들면 허버트 L.마일스의 《그리스도인의 성교육》, 로렌 위너의 《순결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루이스 스메디스의 《크리스천의 성》, 민디 마이어의 《데이트, 그렇게 궁금하니?》, 스탠리 그렌즈의 《성 윤리학》, 케이 아더의 《성, 그 끝없는 유혹》 등)은 혼전순결에 ‘찬성’하는 입장(이하 ‘찬성론자’)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기본적 토대는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원론적인 사고이다. 육체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 타락할 위험이 큰 요소이기에, 육체적 쾌락 추구는 영성훈련과 신학적 작업에 걸림돌로 여겨졌다. 실제로 금욕주의 창시자이며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제논(Zenon)은 아이 낳는 일 외에 이루어지는 성관계에 반대했고, 독신과 금욕생활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암브로시우스·그레고리우스·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라틴 4대 교부로 칭해진 히에로니무스는 여성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결혼하지 않는 순결한 처녀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새로운 처녀들이 태어난다는 점에서만 결혼을 찬양한다”며 노골적으로 신앙의 척도를 성적 순결과 연결지어 생각했다. 이렇게 성과 속, 육체와 영, 선과 악을 이분화해 가치를 다르게 부여하는 사고는 순결 이데올로기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찬성론자들은 혼전순결이 신앙적으로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 성서적 근거를 들기도 했는데, 그중 강력하게 인용하는 성서 구절은 창세기 2장 24절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들에 따르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 섹스이고, 그 파트너는 (애인도 동거인도 아닌) 아내의 위치에 있는 여성이다. 로렌 위너는 더 나아가 하나님은 결혼을 위해 섹스를 창조했으며, 섹스가 있을 자리는 바로 결혼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남편과 아내의 섹스는 허용되고, 이 관계에서만 성적 쾌락을 누리는 게 옳다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의문이 생긴다. 성경 시대의 결혼을 현재의 ‘결혼’ 형태로 곧장 대입하는 것은 가능한가? 당대 결혼제도가 오늘날의 결혼 형태를 반영할 수 있는가?

찬성론자들은 섹스에 관해서는 또한, 잠언 5장 15-19절을 인용하며 결혼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섹스가 여자와 남자의 성적 요구를 둘 다 만족시키는 ‘정상적인’ 방법인 것처럼 소개한다. “너는 네 우물의 물만 마시고, 네 샘에서 솟아하는 물을 마셔라. 너의 샘물을 바깥으로 흘려보내지 말아라. 그 우물은 너 혼자만의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말아라.” 여기서 “너”는 남편이고, “우물”은 아내를 상징한다. 중동 지역에서 우물과 샘물은 개인의 값비싼 소유물이었다. 당시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과 재산으로 취급된,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따라서 여성의 성도 남성에게 속한 값비싼,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재산’이기에 잘 지켜야 한다는 맥락이 이 성경 구절에 나타나 있다. 민디 마이어는 이 구절이 남성‘과’ 여성이 둘 다 만족하는 성 욕구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그가 정말로 주장하고픈 것은 사실 남성‘을 위해’ 여성의 성이 객체화되는 것의 당연함이다. 실상 결혼제도가 안전한 섹스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법적 부부 간에 일어나는 성폭력이 그것을 방증한다. 특히 남편에 의한 아내 성폭력, 구타, 살인은 심각한 문제이다. 결국 안전하거나 서로 만족하는 섹스는 결혼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혐오 자체인 교회의 혼전순결 담론
“혼전순결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신학관, 성서 구절의 해석은 오히려 교회 내 혼전순결 담론이 지니고 있는 모순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혼전순결 담론은 위와 같은 성서 해석과, 혼전섹스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결합하면서 더욱 강력해진다. 찬성론자들은 오히려 섹스에 대해 엄청난 환타지를 심어주면서, 성은 위험하고 도발적이기 때문에 한 번 봉인이 풀리면 걷잡을 수 없다는 식으로 쉽게 환원한다. K신학대의 한 교수는  ‘성과 사랑’이라는 교양수업에서 혼전섹스를 지키지 않을 때 겪게 되는 불이익과 부정함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고, 혼전순결을 지킨 후에 얻게 되는 유익과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해 찬양했다. 그러면서 “순결이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 인간의 성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 포장되어 교환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와 교회다. 이러한 ‘선물 교환식’에서, 이분법적인 혼전순결 이데올로기에 쉽게 타깃이 되는 성별은 너무나 명확히 여성이다. 《성, 그 끝없는 유혹》이란 책의 저자가 아래와 같이 노출하는 인식의 수준은 오늘날 교회의 왜곡된 혼전순결 담론을 그대로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성관계라는 아름다운 행위를 통해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질을 만드셨다. 질에는 월경을 내보낼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을 남겨두고 질의 입구를 부분적으로 막고 있는 처녀막이라고 불리는 점액질의 막이 있다. 결혼한 남녀가 한 몸으로 결합하게 되는 신성한 날 밤에 남편이 풀어볼 수 있도록 아내가 남편에게 주는 포장된 선물과 같은 것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여성의 질을 봉해 놓으셨다 … 그것은 그녀가 남편을 위해 간직해 둔 선물, 곧 그녀의 순결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 선물을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것이었다.
- 케이 아더, 《성, 그 끝없는 유혹》(프리셉트, 2004), 43쪽.

여성 성기에 대한 몰상식적인 이해와 편견, 잘못된 통념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설명하는 여성은 남성적 관점에서 그려지는 허구적인 여성이다. 배우기를 중단한 인식론적 오만과 여성혐오적 해석만 가득할 뿐이다. 그런데도 이런 허구가 현실에서 진실로 둔갑하여 여성의 성을 이분법으로 그리며 억압하고 감시한다. ‘순결’한가 ‘불결’한가? ‘창녀’인가 ‘성녀’인가? ‘동정녀 마리아’인가 ‘막달라 마리아’인가? 성별화된 사회 속에서 교회 문화는 더 굳건하고 끊임없이 여성의 성을 분단하고 이원화한다. 그 안에서 혼전순결은 여성의 ‘정조’를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에,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생식’과 ‘쾌락’으로 분리시키고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한다. 전자를 위해 후자를 희생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에노 지즈코는 이를 두고 “여성을 성(性) 혹은 성(聖)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며, 허울 좋은 ‘타자화’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남성 중에서도 혼전순결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믿는페미로 들어온 제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 여성도 있었다. 한 여성은 교제한 남자 전도사와 결혼 전에 성기 결합을 뺀 모든 애무는 다했다. 그런데 애무 중에 남성은 여성의 성기를 봤지만 여성에게 자신의 성기는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본인의) 혼전순결을 지켜야 한다면서. (이 남성의 혼전순결 기준은 ‘남성 성기의 노출’ 혹은 ‘남성 성기를 통한 분비물 배출’ 여부였다고 한다.) 이 커플은 결혼 후 비로소 성기 결합 섹스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남자의 애무 행위가 과연 여성의 쾌락을 존중한 것이었을까? 이 남성이 소중히 한 것은 단지 성적 쾌락을 절제하려는 자기 믿음이 아니었을까?

교회에서는 이렇게 혼전순결이 신앙의 순결과 불결을 가르는 요소로 뿌리 깊게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이러한 허구적인, 성별화된 혼전순결을 말하면 말할수록, 혼전섹스를 한 신앙인들은 죄책감과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들은 결국 이중적 삶을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교회가 성과 관련된 경험에 대해 열린 장(場)이 되지 않고 폐쇄적인 한, 교회가 주장하는 섹스 담론은 도그마가 될 뿐이다.

사문화된 성 담론이 아니라, 개개인의 성적 경험을 반영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순결한 상태’가 아니라고 신앙을 져버린 것도, 인생을 말아먹은 것도 아니다. 누구는 혼전섹스를 하고 싶지 않을 수 있고, 누구는 하고 싶거나 이미 했을 수도 있다. 복잡하게 얽힌 여러 성적 경험에 대해 단순히 ‘Yes or No’로 정답을 내릴 수 없고, 내려서도 안 된다. 우리가 관심해야 할 것은 결혼 전이든 후이든지 간에 과연 안전한 섹스였는지,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상호 교감이 이루어졌는지가 아닐까? 안전하지 않은 섹스라면, 혼전순결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

 

도라희년(필명)
도라(Dora)는 ‘신의 선물’이라는 뜻의 영어이름이다. ‘희년’은 여성의 삶에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길 바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Dora희년은 “여성들의 삶에 찾아오는 희년은 신의 선물이자 은총”이라는 뜻이다. 페미니스트에게 복이 있다는 복음을 영접하고서 페미니즘을 몰랐던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페미니스트라는 새 사람이 되었다. 페미니즘에 입문한 뒤 모든 것이 흔들려 버렸지만 이제는 그 흔들림을 즐긴다. 감리교신학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교육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젠더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상담 및 운동을 하고 있다. 신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페미니즘(Feminism)의 가치관을 실현하는 목회자(Minister)인 페미니스터(Feminister)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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