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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삶과 죽음의 지배를 완성하다
[342호 역사에 길을 묻다 : 공의회의 사회사 05] 제4차 라테란 공의회
[342호] 2019년 04월 29일 (월) 14:19:26 최종원 goscon@goscon.co.kr

이번 호에서 살펴볼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공의회입니다. 그 때문에 대공의회(Great Council)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은 오늘까지 이어지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의 틀을 놓았습니다. 그 결정은 루터의 종교개혁 뒤에 열린 1545년의 트렌트 공의회에서 재확인되었습니다.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교리적인 재고 대신 도덕적 개혁, 성직 개혁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가 오늘날에도 믿고 고백하는 그 교리들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서 결정되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 이노켄티우스3세 (사진: 위키미디어코먼스)

1. 인노켄티우스 3세, 유럽의 절대군주가 되다
이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이 인노켄티우스 3세(1160년경-1216년)입니다. 그는 중세에 탁월한 업적을 성취한 대표적인 교황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재위를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세속 군주들과의 투쟁을 통한 승리, 그를 통한 가톨릭 교회의 번영을 성취한 교황입니다. 인노켄티우스 3세의 시기(1198년-1216년 재위)부터 한 세기 동안 중세 교회는 종교적인 측면뿐 아니라, 세속 정치의 측면에서도 그 권위가 정점을 맞습니다. 이 세속 권위의 상승에 걸맞게 교황청의 조직과 제도도 정비되었습니다. 이때로부터 교황 군주제 혹은 교황 신정정치가 완성되어 전 유럽을 호령하는 시기로 접어듭니다.

이노켄티우스 3세의 이력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로타리오 데이콘티 디세니(Lothario dei Conti di Segni)라는 37세의 추기경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로 선출됩니다. 그는 파리와 볼로냐 대학에서 수학한 학자이자, 교황의 절대군주권을 추구한 탁월한 현실 정치가였으며, 교회의 도덕적 개혁과 내부 조직 개선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와 번영을 위해서는 교황이 최고 지배자요 최고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럽의 모든 것이 교황을 정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영적인 개혁, 도덕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교황이 그 개혁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권세, 즉 세속적인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성공적으로 쟁취했습니다. 그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을 기획한 인물이기도 한데요.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주창하고, 교회 개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공의회인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실제로 소집합니다.

그렇다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어떻게 유럽의 절대군주권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당시 유럽의 3대 세속권력이라 할 수 있는 독일, 프랑스, 잉글랜드의 세 군주와 세속의 문제를 놓고 대립해서 승리했는데, 이러한 세 차례의 분쟁을 통한 승리로 세속의 권한을 증대합니다.

인노켄티우스 3세 이전의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세력 갈등 속에 교황이 보유하고 있던 중부 이탈리아 교황령의 대부분을 잃어버립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했던 호엔슈타이펜 왕가는 독일, 북부 이탈리아,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시칠리, 시실리라는 지역도 통치를 하는 유럽의 거대한 권력이 됩니다. 인노켄티우스 3세 시기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합니다. 그에게 남겨진 자식은 겨우 네 살인 프리드리히였고, 이때 독일의 왕위 계승권에 관한 분쟁이 일어납니다. 독일 제후들 중 왕을 천거할 수 있는 선제후들이 천거를 하자, 교황이 ‘그 왕들을 심사해서 선출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교황은 처음에는 오토 4세를 황제로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황제가 된 그가 이전에 한 약속을 어기자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교황의 권위로 폐하고 어린 시칠리아의 왕 프리드리히를 황제로 옹립합니다. 그렇게 인노켄티우스의 지원을 받은 프리드리히가 독일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로써 13세기 초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옹위하고 폐위하는데 교황이 실질적인 역할을 합니다.

교황과 세속권력의 두 번째 분쟁은 프랑스 왕 필립의 이혼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인노켄티우스 3세 직전 교황 재임시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1193년에 프랑스 왕 필립이 덴마크 공주 잉게보르그와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하룻밤이 지난 후 왕비와 불화하여 느닷없이 혼인 무효를 선포합니다. 이에 잉게보르그와 덴마크 귀족과 인척들은 교황에게 항소를 했고, 교황은 필립의 혼인 무효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립이 이 결정을 무시하고 1196년에 재혼을 하자 새로운 교황이 된 인노켄티우스 3세가 1200년 1월에 성무(聖務) 금지령을 발효합니다. 그해 7월 재혼한 아내가 죽자 필립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교황에 굴복하고, 교황은 성무 정지를 해제합니다.

세 번째는 귀족들의 강요에 의해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 서명(1215년)한 것으로 잘 알려진, 잉글랜드 존 왕(1166년-1216년)과 교황의 다툼입니다. 1205년에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휴버트 윌터 사망 이후 후임자를 놓고 왕과 교황 간의 갈등이 생깁니다. 존 왕은 자신의 충복 존 드 그레이를 임명하고자 하지만 교황은 파리 대학의 교수로 있던 스티븐 랭튼을 추기경으로 임명합니다. 이에 반대한 존 왕에게 1208년 성무 금지가 내려졌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1209년 그를 파문하고, 프랑스 왕에게 잉글랜드 왕을 축출하도록 요청합니다.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존 왕은 결국 굴복하고 교황과 봉신선서를 합니다. 교황을 봉건제의 상위 군주, 주군으로 모시고 잉글랜드 존 왕은 봉신이 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세속 군주들과 여러 번 다툼이 있었지만, 앞서 설명한 대표적인 세 사건을 통해 교황이 유럽의 군주들을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2. 교황,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다

성사의 규정과 화체설 확립
유럽 군주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된 교황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교회사 또는 중세 유럽사를 통틀어 인노켄티우스 3세가 성취한 가장 위대하고 항구적인 업적이 바로 이 라테란 공의회입니다. 이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공의회는 중세 기간 소집되었던 공의회 중 최대 규모입니다. 400명 이상의 주교, 800명 이상의 대수도원장, 그리고 유럽 대다수 국가의 군주들이 참여하거나 대표단을 보냈습니다. 이 공의회의 두 가지 주목적은 ‘성지 회복’과 ‘교회 개혁’이었습니다. 목적만 놓고 보면 앞선 여타 공의회 소집 목적에 비하여 크게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공의회가 대공의회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21세기까지 존속되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확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리 중에 가장 첫 번째로 등장하는 내용이 가톨릭 신앙을 규정하고, 화체설 교리를 성찬 교리로 인정한 것입니다(캐논 1).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천국으로 가는 여정의 올바른 길잡이로서 성사(sacrament)를 고안해왔습니다. 이것이 1215년 라테란 공의회를 전후로 하여 ‘칠성사’라는, 지금도 가톨릭에서 유효한 교리로 확립됩니다. 세례, 견진, 신품, 고백, 성찬, 혼인, 종부성사 등이 그에 포함됩니다. 이 칠성사는 1215년에 라테란 공의회 이후 확립되어 16세기 중반 트렌트 공의회에서 재천명합니다(칠성사에 왕의 대관식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당시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칠성사의 기능을 살펴보자면, 서유럽에서 태어난 개인을 가톨릭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용하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독려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개인 구원 여정이 교회라는 매개를 통해 이루어짐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문에는 칠성사라는 표현 대신 가톨릭 신앙에 대해 설명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칠성사는 이 시기 전후로 점진적으로 확정된 교리인 것입니다. 이 칠성사 제정으로, 속인의 삶과 신앙을 교회가 확고하게 통제하는 시기로 접어듭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명확하게 규정한 고해성사에 대한 부분입니다.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속인들은 1년에 최소 한 차례 이상 자신을 잘 아는 교구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해야 했습니다(캐논 21). 또 최소 1년에 한 번 부활절 기간에는 성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로부터 추방되고, 기독교식 장례를 치를 수 없게 됩니다. 이 말은 당시에는 곧 천국에 들어갈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교회가 개인의 삶과 죽음까지도 속속들이 간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양면적인 것입니다. 예컨대 혼인을 성사로 정한 것은, 결혼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교회가,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인 가정까지 규정하고 통제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은 한편으로는 속인들의 종교적 열망인 거룩한 삶과, 천국에 좀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것이지만, 그 열망을 채워주는 주체인 성직자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비대화시켰습니다. 이제 가톨릭 교회에서 성직자와 속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신분의 강이 생긴 것입니다.

미사에서 성체, 빵과 포도주의 축성 행위, 이 성체성사를 행하는 것이 예배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성직자와 속인 사이의 신분적 차이가 확정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 중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를 꼽으라면 가톨릭의 공식 성찬 교리로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 수용된 것입니다. 화체설은 사제가 성찬대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순간, 외양은 변함이 없지만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가톨릭 교회 내에서 논란의 여지 없이 수용되었던 유일한 해석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1050년대 미사에서는 축성 시 빵과 포도주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베렝가르와 랑프랑 사이의 논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렝가르는 축성 시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임재한다는 것을 배격하고 상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에 반해 랑프랑은 그리스도의 실체가 임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대립되는 주장에서 가톨릭 교회는 랑프랑의 입장을 취했고, 그 주장이 점차 지배적인 해석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확정된 첫 번째 교리가 화체설입니다. 이 교리는 이후 트렌트 공의회에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차별의 확립
앞선 내용들이 가톨릭 공동체 내부에 대한 조항이었다면, 그 외의 다름에 대한 점진적인 배제의 조치들도 정밀하게 규정됩니다. 대표적인 타자화 대상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유대인과 무슬림은 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되는 복장을 입도록 강제당했습니다(캐논 68, 69). 이후로 유럽 사회에서 그리스도인과 이교도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실생활에서 실현됩니다.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나 사진에서 흔히 보는 ‘다윗의 별’, 그 치욕의 별을 부착하게 된 것은 바로 이 공의회의 결정 때문입니다. 성매매 여성은 식별할 수 있는 매듭을 묶게 했으며, 문둥병자들은 방울을 달게 하여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그들을 인식하고 대처하도록 하는 등의 차별을 고안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은 좀 더 세부적이었습니다. 관직을 보유했던 사람들의 관직을 금했고, 이들이 수입원으로 삼던 금융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합니다. 부활절 주간에는 야간 통행 금지 등을 시행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 보호라는 측면이었는데, 이것이 보호가 아닌 또 하나의 차별의 기제로 작동했습니다. 그다음 세기인 14세기부터는 서유럽 각국에서 유대인들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추방되도록 유대인 추방 정책이 펼쳐집니다. 게토라 불리는 유대인 집단 거주 지역도 한편으론 보호 차원에서 시행된 것이라지만, 그 장기적인 영향을 보면 유대인을 차별화하고 집단 따돌림과 학살의 희생자가 되도록 만드는 기제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조항은 당시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리 중 단 두 개의 조항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엔 그것이 오늘 생각하는 것만큼의 긴 역사적 파급이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차별의 결과는 당대엔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범위로 오늘까지 영향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차별의 제도화, 이것이 바로 1215년 공의회의 결정되었습니다.

교황 정치체의 완성
장기 12세기 동안 유럽은 절대군주의 권세를 지닌 교황 중앙집권제가 발전하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에 명시된 것처럼, 신명재판(神明裁判)이 종교재판으로 대체된 것 역시 공동체 내의 문제를 이제 교황이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줍니다(캐논 19). 이전의 교회 권력이 상징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세속 군주와 속인의 삶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삶의 전 영역에 종교 규율이 작동했습니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탈 혹은 무질서에 대한 체계적인 대응도 등장합니다.

교황의 권세가 강력해지면서 제도로서 교황제가 정비됩니다. 세속법과 교회법의 판단에 불만이 생길 때에는 최종 법원인 교황청(papal curia)에 항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황은 어떻게 유럽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행정적으로 간여할 수 있었을까요? 유럽 대륙에서 교황청이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는 지리적으로 전 유럽을 통제하기에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교황이 알프스를 넘어 독일, 잉글랜드나 아일랜드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교황청 대사(papal legate)를 임명한 것입니다. 예컨대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교황청 대사를 겸하기도 하고, 로마에서 파송받은 대사가 상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로마 교황청과 국가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교황은 효과적으로 전 유럽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이 전 유럽에 걸쳐 종교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베드로 성금(Peter’s pence)이라 불리는 세금을 도입하여 로마 교황청에 바치는 것이 정착되었습니다. 이는 잉글랜드에서 시작된 관행으로, 재산세나 기부금의 한 형태로 로마에 매년 납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교황이 봉건 사회의 상위 군주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봉신 국가인 포르투갈이나 카스티야, 아라공, 시칠리아, 잉글랜드 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보다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거둘 수 있는 수입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성직자들로부터 직접 얻는 수입이었습니다. 성직자로 임명되는 이들의 최초 소득을 교황에게 납부하는 형식의 세금을 징수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제들로부터 교황청이 징수하는 세금은 세속 군주와 갈등을 야기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이 세금은 결국 14세기 교황권이 약화되고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생겨나면서, 교황청과 세속 군주 간 갈등의 핵심 요소가 됩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전후로 이 같은 방식으로 교황제도는 정비됩니다. 그리고 중세 유럽 내내, 적어도 종교개혁 이전까지 유지됩니다.

3. 공의회, 가톨릭 신앙을 규정하다
가톨릭에서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성취로 사목 개혁을 꼽습니다. 고해성사를 비롯하여 칠성사가 완성되고, 화체설 교리가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좀 더 고민스럽게 보아야 할 것은 성사가 확립되고 화체설이 수용되면서 나타난 성직자와 비성직자 사이의 차별입니다. 성직보다 열등한 신분으로서의 속인(laity)이 규정되고, 그들은 교회에서 주체가 되기보다는 ‘아버지’인 성직자의 돌봄과 지도를 받아야 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가부장제의 성격을 지닌 교회가 그 구성원들의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올바르게 영적 자녀들을 지도할 의무감이 증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표현이 이 땅의 고난받는 이들을 천국으로 안전하게 이끌기 위한 성사 제도의 완성입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 《인간 본질의 비참함에 대하여》(de miseria condicionis humane)라는 책을 썼습니다. 본래 《인간 존재의 고귀함에 대하여》와 2부작으로 계획했지만 결국 하권은 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중세에 가장 많이 필사된 책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중세인들의 심성을 지배하던 죄의식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유한하고 비참한 죄악된 존재로서의 끊임 없는 일깨움을 주고, 그 결과로 이 땅에서의 삶의 비참함을 감내하고 내세의 지복을 지향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1215년에 제도화된 고해성사를 통해 비약적으로 퍼져 나갑니다.

따라서 중세 교회는 사람들에게 현세보다 내세 중심의 삶, 내세에 천국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안위와 복락을 누리는 삶을 많이 강조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이 슬프고 괴롭지만, 교회가 부과하는 요구들을 잘 감당하면 천국에 들어가고 영원한 낙원에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톨릭 교회는 구원에 이르는 여러 장치들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죄악된 본성을 지닌 인간이 고단한 구원의 여정을 가는 길에 교회는 그저 통제의 기제로서가 아니라, 선한 의도 아래서 감당해야 될 역할이 커진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뜻을 대리하는 대리자로서 제도 교회의 권위와, 그리스도로부터 그 권위를 대리하여 수행하는 사제들 권능에 대한 고양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접어든 것이지요.

이제 사제는 성찬대의 축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만들어내는 신적 권한을 지닌 자가 되었습니다. 속인들의 고해를 듣고 적절한 벌을 부과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죄를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화체설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은 그저 여러 논쟁 중인 성찬 이론에서 한 이론이 수용된 차원을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미사에서 이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몸과 피(Corpus Christi)를 만드는 의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은 죄책의 고백과 사제의 사면을 통해 정화받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제도화가 도덕성과 종교성을 고양하는 도구임에는 분명하지만, 이것이 낳은 결과는 다릅니다. 성찬대에서 축성하고, 고해소에서 고해를 듣고 사면하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바로 성직자입니다. 성직자와 속인은 그 신분상 결코 같아질 수 없습니다. 교회와 성직자가 인간의 삶과 죽음의 여정을 지배합니다. 그 지배의 속성은 사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결과 이 땅에 살면서 삶의 모범을 보여준 이들을 성인으로 숭배하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칠성사로도 안심 못하는 이들을 위해 죽음 이후의 처벌까지 미리 면제하는 면벌부가 등장하고 확산된 것입니다.

성직자와 속인의 분리는 기능적 분리를 넘어 사제의 신성성을 낳습니다. 가톨릭 지배체제의 완성이라는 이면은 가부장제의 완성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체제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속인들은 그 지배체제 속에 비정상적으로 등장한 면벌부 매매나 성인 숭배 등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신적 권능을 지닌 성직자 지배체제는 중세 말 루터의 종교개혁 때까지 이루어진 갈등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확립된 성사의 교리와 화체설 아래서 인간은 헤어날 수 없이 비참한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이 체제란 자유의 완성이 아닌 성직 지배를 통한 억압체제의 완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응하여 이후 반성직주의(anticlericalism)가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종교개혁기의 여러 논쟁 중에 성찬 논쟁이 뜨거운 쟁점이었다는 사실에는 이런 역사적 연원이 있습니다. 교황권의 전성기가 화체설의 완성으로 이루어졌고, 그 교황권을 무너뜨린 프로테스탄트 전통에서는 화체설을 부정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연결됩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가톨릭체제의 완성이지만, 그 안에서 주체적 개인은 공식적으로 상실되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과 같은 가부장제 구조에의 순응을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도리와 등치시킬 때, 그 구조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면벌부 매매나 성인 숭배와 같은 부산물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이를 극복하자는 것이 16세기 종교개혁의 쟁점이지 않습니까?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잘 짜인 교회 구조와 탁월한 목회자와 정교한 교리가 우리를 정녕 자유하게 할까요? 혹, 그 안에서 우리 삶의 자유는 질식당하고 주체가 상실될 위험은 없을까요?

■ 연재 순서
1. 왜 지금 ‘공의회’인가? : 사회사 관점으로 교회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2.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위로부터 이뤄지는 교회 개혁의 전형 :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4. 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교회, 그 빛과 그림자 : 제3차 라테란 공의회
5. 제4차 라테란 공의회
6. 제 1차 리용 공의회, 제 2차 리용 공의회
7. 비엔나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
9. 바젤, 페라라, 피렌체 공의회
10.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1. 트렌트 공의회
1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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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지금 ‘공의회’인가?·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위로부터 이뤄지는 교회 개혁의 전형· 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교회, 그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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