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최종편집 : 2019.7.17 수 14:22
기사검색
   
> 뉴스 > 책과 문화 | 부전자전 고전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342호 부전자전 고전 : 아들의 편지] 에마누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342호] 2019년 04월 29일 (월) 14:23:32 김희림 goscon@goscon.co.kr
   
 

1.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랜 질문을 다루다가 그만큼이나 깊은 주제인 내가 아닌 것, 곧 타자에 대한 토론까지 왔네요, 아빠. 칼 바르트의 《로마서》로 타자론을 끌어내는 두 번째 편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타자를 중요하게 다룬 많은 학자 중에서 바르트를 골라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아쉽게도 아직 《로마서》는 읽지 못했지만, 저도 바르트에게 받은 영향이 없지는 않답니다. 몇 년 전에 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말년의 바르트의 강의를 모은 《개신교신학 입문》(복있는사람)을 꼼꼼히 읽었으니까 말이에요. 그 책이 너무 좋아서 친구들을 몇 모아서 독일어로 강독하기도 했었답니다. 그 덕에 신학 공부의 기초와 독일어 실력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지요.

인간과는 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하나님을, 인간화하지 않고 전적인 타자(das ganz Andere)로 두는 것. 그리고 그런 하나님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전적인 타자로 놓으면서 구성되는 공동체를 주장하는 바르트의 주장을 아빠에게 들으면서 줄곧 생각나는 철학자가 있었어요. 바로 우리 부자 모두 영향을 참 많이 받은 ‘타자의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1906~1995)입니다. 레비나스의 중요한 작품 중에서도 오늘 저는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를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보려고 해요. 레비나스의 초기 저작인 이 책은 네 번의 강의를 정리한 책인데, 레비나스라는 사람이 어떤 철학적인 논증을 펼치면서 타자를 위한 사상을 개진했는지 살펴보기에는 좋은 책입니다.

2.
레비나스의 철학을 엿보려면 우선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재는 무엇이고 존재자는 무얼까요? 레비나스에게 존재는 명사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자체가 동사인 존재 작업 자체(41쪽)예요. 존재를 동사로 파악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존재라는 말을 할 때 영어의 ‘exist’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동사원형 ‘exister’를 쓴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존재는 주어 없이, 존재한다는 동사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지요. 시작도 끝도 없는 마치 영원과도 같은 무언가가 바로 존재입니다.

여기서 바로 ‘존재자’가 등장합니다. 무채색의 도화지 같은 존재에 색이 더해지는 순간이 오는 거예요. 의식이 등장합니다. 존재의 그 영원한 흐름을 끊고 등장한 존재자는 의식을 갖고 홀로서기(hypostase)합니다. 유유히 흐르던 강물을 거슬러 번쩍 튀어 오르는 한 마리 연어처럼 존재자는 존재를 찢고 나와 홀로서기합니다. 이 찰나의 순간을 레비나스는 ‘현재’라고 부르지요. 현재에 홀로 서 있는 존재자가 겪는 것은 고독함입니다. 이 고독을 일컬어 레비나스는 시간의 부재(55쪽)라고 해요. 여기서 말하는 이 시간이 바로 《시간과 타자》의 그 시간인데, 시간이 무엇인지는 조금 뒤에 살펴보고 존재에서 튀어나온 존재자의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볼까요?

고독한 존재자가 마주하는 세계를, 레비나스는 재미있게도 먹거리들의 집합(64쪽)이라고 해요. 홀로서기한 이후로 고독했던 존재자는 수많은 대상들을 이것저것 먹고 ‘향유’(jouissance)하면서 고독함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는 느낌을 맛봅니다. 스스로와는 다른 것을 만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렇지만 레비나스는 세계를 향유한다고 해서 고독함으로부터 탈출할 수는 없다고 하네요. 향유란 모름지기 외부의 대상을 내면화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즐기는 것도 ‘내가’ 즐기는 것이니 말이에요. 레비나스는 나아가 인간의 이성과 의식 자체를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의식의 지향성은, ‘나’의 의식이 무언가를 파악하고 ‘나’의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지점에서 유아론에 불과하다는 것(68쪽)이지요. ‘나’로 회귀하지 못하는 것이 비로소 존재자의 고독을 해결해주겠지요. 그게 뭘까요?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이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예고할 때 주체는 수동성을 경험(77쪽)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아빠, 죽음이라는 게 얼마나 끔찍하게 찾아오나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나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정말 처절할 정도로 무력해집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스스로를 내비치는 고통과 공포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요. 죽음은 주체가 그 주인이 될 수 없는 사건, 그것과 관련해서 더는 주체가 아닌 그런 사건을 알려줍니다.(77쪽)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만큼 분명한 게 없지요. 이러한 죽음의 접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다른 것(absolument autre)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85쪽)입니다. 다가오는 미래의 외재성은,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86쪽)이에요.

3.
레비나스는 죽음이라는 전적인 타자가 도사리고 있는 미래와의 관계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87쪽)라고 말합니다. 홀로서기한 존재자, 오직 현재에서 의식의 지향성으로 모든 대상을 유아론적으로만 파악하던 고독한 주체는 죽음을 통해 미래라는 불가항력적인 것을 만나는데, 타자란 미래와도 같은 그런 이들입니다. 레비나스의 잘 알려진 ‘얼굴’(visage) 개념은 여기서 등장합니다. 미래와의 관계, 즉 현재 속에서의 미래의 현존은 타자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93쪽)이라면서요.

여기서 얼굴은 고독한 존재자가 지향성으로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는 사물과는 전혀 달라요. 사물은 부분으로, 기능으로 의미가 있지만 얼굴은 다르지요. 코와 입, 눈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판자와 서랍, 책상 다리가 모여 책상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책상은 바라보지도 호소하지도 스스로 표현하지도 않지만, 얼굴은 바라보고 호소하며 스스로 표현합니다.(135쪽) 레비나스는 우리가 과부와 고아와 같은 타인의 얼굴을 마주쳤을 때 우리는 그와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적이고 대칭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해요. 도리어 나는 더 낮은 곳에 서서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이고 나의 재산과 기득권을 버림으로써 타자와 동등한 사람이 될 수 있지요. 흔히 윤리적 관계는 동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지만, 레비나스는 매우 급진적으로, 내가 나 자신을 벗어나 그를 모실 때 비로소 그와 동등할 수 있다(140쪽)고 해요.

이렇게 존재를 찢고 나왔으나 여전히 자기에게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고독한 존재가 죽음과 미래를 통해 시간이라는 타자를 만나고, 죽음과도 같은 타자들과 얼굴을 마주해서(face to face) 그보다 낮은 자리에 서는 윤리가 도출됩니다. 그런데 미래를 만난 현재, 죽음을 만난 삶, 타자를 만난 자아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대로 있을 수는 없고, 파괴될 수도 없고. 미래는 현재와, 죽음은 삶과, 타자는 자아와 접점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살아있으면서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죽음이란 사건의 타자성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격적이어야 할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98쪽)이잖아요.

4.
여기서 잠깐, 아빠의 편지 후반부에서 아빠가 저를 타자로 대하지 못한 지점들이 있어서 미안하다고 하셨죠? 제가 자라면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아빠의 기준으로 꺾었던 점들이 있다면서요. 우리가 서로 기억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아빠와 저는 참 비슷하면서 많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권력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해요. 아빠의 사과에 대해 저는 역시 레비나스로 답하고 싶어요. 레비나스는 죽음을 만난 삶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자아로 남을 수 있는 상황, 곧 죽음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은 ‘아버지가 되는 길’(112쪽) 외에는 없다고 답하거든요.

레비나스는 아들의 타자성은 다른 자아(alter ego)의 타자성이 아니라고(113쪽) 분명히 못 박습니다. 아들이 아무리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해도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사는 제2의 자아가 아닌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바로 이 지점, 아버지의 삶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아버지에게 결코 동화되지 않는 이 아들의 모습이 주체가 죽음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레비나스는 이야기합니다. 존재로부터 해방된 존재자가 고독함을 겪을 때 만나는 죽음과도 같은 타자에게 휘말리지 않고 주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아들의 타자성, 곧 나의 일부이지만 내가 아닌 아들을 통해 비로소 ‘나’로 환원시키지 못하면서도 ‘나’를 파멸로 이끌지도 않는 존재가 등장하며 유아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해요.

《시간과 타자》의 결론까지 오면서 생각해보면 어떤가요, 아빠? 저는 아빠와 저의 관계가 오히려 레비나스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아빠는 저를 타자로 대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고등학생 때 신앙과 학문에 대해 넘치는 질문을 아빠에게 편지로 질문하면서 토론한 글을 모아낸 책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SFC, 2013)를 요즘 다시 살펴보면, 그것은 아빠의 신앙과 신학과는 다른 저만의 사고방식을 갖고 싶어서 아빠와 지적인 분리를 해내려는 일종의 사춘기였던 것이 보여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 이 연재 속에서 아빠가 읽지 않은 책을 통해 아빠의 생각에 답변하고 또 질문하는 저의 모습을 보세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이 모습은 대단히 레비나스적인 모습이지 않을까요?

5.
아주 개략적으로 《시간과 타자》를 소개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복잡한 철학 이야기를 많이 했네요. 이쯤에서 머리도 식힐 겸 잘 알려진 시를 한 편 소개하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참 잘 드러내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이정하의 〈낮은 곳으로〉라는 시입니다.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 그 어디라도 좋다. /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 한 방울도 헛되이 /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 그래 내가 /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 너를 위해 나를 /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 잠겨 죽어도 좋으니 / 너는 /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물처럼 밀려오는 너를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가 너를 맞을 준비하는 화자의 이 모습 또한 참 레비나스적이지 않나요? 마치 죽음처럼 다가오는 타자, 그렇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의 새로운 모습을 나로 환원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레비나스의 이야기는 시의 절정이자 마지막 부분,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는 담담한 고백이자 선언에 압축되어있는 것만 같아요. 《시간과 타자》는 길지 않은 강의록이지만 철학적인 배경과 관념적인 논증을 요구하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은 책이지요. 그런 독해를 마쳤으니 이제 이렇게 짧고 아름다운 시로 《시간과 타자》 읽기를 마무리해요.

이렇게 시까지 읽으면서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살펴보니 처음에 제가 왜 바르트의 타자론과 엮이는 지점이 있다고 말했는지 느껴지시죠? 바르트가 인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하나님을 부르짖은 것처럼, 레비나스도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를 말하잖아요. 그래서 바르트도 레비나스도 공통적으로 전적 타자(das ganz Andere, absolument autre)를 말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두 사람은 타자론에도 접점이 있지만, 또 하나 공유하는 점이 있답니다. 20세기 유럽을 뒤흔든 히틀러주의…. 편지에서 바르트가 제국주의 전쟁에 지식인들이 동참하는 것에 실망하고, 전쟁을 지지하는 신학은 신학의 실패라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했죠? 레비나스 또한 일가족 전체가 나치에 의해 희생당하는 큰 아픔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끔찍한 전쟁의 폭력이 서양의 오랜 전통에서 타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모든 것을 ‘나’로 환원시키는 그 유아론적인 모습 속에서 서양철학은 자기를 중심으로 타자를 자기화하거나 배제해왔다고 하지요. 무엇이든지 하나로 환원시키는 이 동일적이고 통일적인 사고 체계에 타자의 철학으로 도전하는 레비나스의 급진적인 주장에는 그가 피할 수 없었던 시대의 고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빠,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정통했던 레비나스가 하이데거가 나치를 지지하는 모습도 보고는 현상학적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던 모습은 바르트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다가 스승 하르낙과 같은 이들이 전쟁을 지지하는 모습에 실망하고 그들을 비판하던 것과 매우 닮았네요.

6.
이런 레비나스의 생각에 저는 분명히 동의해요. 저는 공부를 할 때 항상 여러 텍스트를 동시에 읽는데, 지금 꽂혀서 읽고 있는 텍스트를 그와 전혀 다른 전제와 맥락을 갖고 있는 텍스트들로 상대화할 때 오히려 새로운 것이 보이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람들을 만날 때도 내가 모르는 세계를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요. 저의 세계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마주하는 순간이 두렵고 싫을 때도 있지만 이내 그 얼굴을 마주하고 낮은 곳에서 대한다면 분명 의미 있는 성장을 거둘 수 있으리라 믿어요.

그런데 제게 큰 영향을 준 사상가 레비나스, 그중에서도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어서 프랑스어와 영어로도 꼼꼼히 읽었던 이 《시간과 타자》에도 의문이 남는 지점이 있어요. 레비나스는 존재로부터 삐져나온 존재자의 고독성을 향유와 지향성으로 채우지 못하고 시간과 타자를 마주치게 된다고 주장하지요. 그런데 만약 고독한 존재자가 애초에 성립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조금 이상한 말로 들리지만, 더 괴상한 실제 사례를 들어서 레비나스의 철학에 한번 딴죽을 걸어볼까 합니다.

1989년의 일본에서는 전국을 뒤흔든 끔찍한 미성년자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범인은 미야자키 쓰토무(宮崎勤). 유괴, 납치, 강간, 살인으로 이어지는 그의 잔혹한 범죄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식인’입니다. 쓰토무는 살해한 여성의 사체를 먹은 혐의로 조사되기도 했었고, 개중에 밝혀진 충격적인 것은 할아버지의 유골도 먹었다는 점입니다. 이 사람은 왜 타자를 먹었을까요?

먹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에요. 쓰토무는 손목에 선천적인 장애가 있었고 부모도 그에게 무관심했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 유년 시절 자신과 놀아주는 대상은 할아버지와 비디오 게임, 만화뿐이었지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사망 이후 그의 억눌린 것들이 폭발하면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사망은 그가 세상과 연결되는 마지막 지점이 끊겼다는 것이었고, 쓰토무는 그의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할아버지의 유골을 먹었고 심지어 살해한 시체까지 먹었습니다. 타자와 소통하는 방법을 거의 몰랐던 그가 타자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은 비디오 게임과 만화처럼 철저히 화면을 대상화하는 것, 또는 타자의 신체성을 철저하게 나로 환원시키는 식인의 방법이 유일했던 거죠.

레비나스의 철학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1980년대 일본의 강력 범죄를 언급하는 이유는, 쓰토무의 고독은 레비나스적인 의미에서의 존재자의 고독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역설하기 위함입니다. 레비나스는 존재자가 타자를 만나면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쓰토무는 타자를 만나서 그의 얼굴을 보고는 죽여서 먹었습니다. 레비나스가 가장 경계했던 유아론적 식인이지요. 레비나스는 자기만 있어서 느끼는 고독함을 전제하지만, 쓰토무의 사례는 자기도 없는 고독함을 보여줍니다. 쓰토무는 이정하 시인의 〈낮은 곳으로〉를 낭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레비나스가 지나치게 튼튼한 존재감을 전제로 향유하는 존재자를 설정했다고 비판하고 싶어요. 서양의 유아론적 주체성을 비판한 레비나스지만, 오히려 현대 사회의 개인들, 특히 동양적 맥락에서는 고독함을 느낄 존재자조차 너무 미약해서 문제이지 않나요? 개인의 주체성이 경시되는 우리 사회의 맥락에서 과연 레비나스적인 타자론이 성립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이 지점은 일본 현대사를 같이 공부하는 스터디에서도 심도 있게 토론했고, 교양 수업에서 ‘이빨, 피, 상처의 현상학’이라는 제목으로 소논문으로 써보기도 했어요. 레비나스를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만큼 시비도 제대로 걸어보고 싶었거든요.

7.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나름 치밀하게 분석하고, 또 그 비판도 시도하면서 어느덧 편지도 끝나가네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으로 답했고, 다시 바르트의 《로마서》에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로 답해보았어요. 아빠, 그다음 주제는 벌써 예상이 되죠? 다음으로는 전적인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해서 다뤄보면 어떨까요? 방금 제가 소개한 미야자키 쓰토무의 사례처럼, 타자와의 만남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사건이 다름 아닌 폭력이잖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폭력이란 뭘까요? 그 기원은 무엇이고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는 과연 폭력과 거리를 둘 수 있을까요? 아빠가 평화주의 신학의 전문가인 만큼 폭력에 대한 아빠의 생각도 굉장히 궁금하네요. 그럼 저에게 언제나 좋은 타자인 아빠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아빠의 다음 편지를 기다릴게요!

 

김희림
경희대 철학과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전공뿐 아니라 정치, 예술, 과학 등 다양한 학문에도 관심이 많은‘공부 덕후’라 할 만하다. 고등학생 시절, 신학자인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종교와 학문에 관한 대화글을 엮어 《그런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을 출간했다. 본지에 2년반 동안 ‘스무 살의 인문학’을 연재했으며, 페이스북 페이지 <철학 개그>에 올린 글들을 모아 교양철학서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2018)를 펴냈다.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만큼 베이스 기타를 시끄럽게 두들기는 취미를 즐긴다. ‘로고스서원’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청소년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관련기사
· 내가 된다는 것· 힘껏 ‘기억’하기
· ‘타자’로 오시는 하나님
김희림의 다른기사 보기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복음과상황 기사제보 광고문의 제휴안내 오시는길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03785)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 3길 15 산성빌딩 104호 | 전화 : 02-744-3010 | 팩스 : 02-744-3013
발행인 : 김병년 | 이사장 : 황병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병년
Copyright 2008 복음과상황.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con@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