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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폭력적인가?
[343호 부전자전 고전 : 아버지의 편지] 구약성경 <하박국서> 읽기
[343호] 2019년 05월 28일 (화) 11:42:35 김기현 goscon@goscon.co.kr
   
▲ 사진: CC BY-SA 2.0 (www.flickr.com)

성경은 인문학 텍스트?

사랑하는 아들아,
폭력에 관한 여러 후보 목록을 두고 의논할 때, 너는 성경 한 권을 고르는 것이 어떠냐고 했지. 신선한 제안이었다. 경전이 삶의 기준이요 잣대이자 척도이고, 고전이 오래된 미래라고 정의한다면, 경전이란 신성한 고전이고, 고전은 세속적 경전일 게야. 종교개혁자들이 하나 같이 인문주의자이면서도 독실한 신자였던 것은, 경전과 고전이 하나는 아니더라도 결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야. 그러니 우리의 대화 목록에 성경 한 권이 포함되는 것은 마땅하겠지. 

1980년대와 1990년대까지 철학을 공부한 아빠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서 멈췄지. 사회철학은 알튀세르와 그람시를 읽다가 그만두었고. 그러다 보니 당시 서서히 떠오르던 스타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어. 그런 아빠에게 너의 베르그송과 레비나스 읽기는 눈을 밝게 해주는구나. 지난 편지에서 네가 썼다고 얘기한 소논문 <이빨, 피, 상처의 현상학>도 읽고 싶다.

우리 대화가 폭력이라는 주제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지. 타자가 누구인가는 곧 폭력에 관한 물음과 다르지 않으니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임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 사랑하는 임과 갈등과 다툼을 통해서 성장하는 법이잖니. 평화주의 신학을 연구해온 아빠가 이번에 고른 텍스트는 바로 구약의 하박국서야. 
 
하박국서가 폭력 텍스트?
하박국 하니까, 예전에 모 신문사 기자랑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는데, “목사님, 그런데 하박국은 어디에 있는 나라예요?”라고 물어서 한참 웃었던 일화가 생각나는구나. 그럴 정도로 하박국서는 잘 읽히지 않고, 스윽 보고 넘어가기 딱 좋은 작은 책이지. 아빠가 피를 찍어 썼다고 얘기한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복있는사람)는 ‘고통’이라는 키워드로 하박국서를 읽어낸 책이야. 

이 하박국서는 구약의 어느 경전 못지않게 폭력에 관한 텍스트란다. ‘단어’와 ‘구조’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단다. ‘폭력’을 뜻하는 히브리어 ‘하마스’가 총 6회(1:2, 3, 9, 2:8, 2:17은 2회) 사용되었는데, 본문 분량에 비해 단어의 사용 빈도가 상당히 높아. 구약학자들은 하나같이 ‘하마스’(폭력)를 하박국서의 핵심 단어로 꼽는다. 하박국의 주제가 2장 4절(“…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의 ‘믿음’임에 틀림없지만, 그 믿음은 폭력과의 관계 속에서 읽어야 해. 

안타까운 것은 개역한글과 개역개정 역본이 폭력을 ‘강포’라고 번역했다는 점이야. 르네 지라르는 모든 신화는 폭력에서 시작했고, 그 폭력을 감추고 성스러운 것으로 제의화한다고 했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강포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그 본래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아. 강포라면 그저 우악스럽게 다그치는 인상을 줄 뿐, 폭력의 뉘앙스에는 미치지 못하지. 

대표적인 예가 노아 홍수와 폭력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창세기 6:11과 6:13인데, 여기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는 궁극 원인은 폭력이지. 그런데 우리말 번역이 아쉬운 게, ‘폭력’을 ‘무법천지’(새번역·공동번역) ‘포악함’(개정)이라고 했거든. 이와 달리 가톨릭 성경은 제대로 번역했더구나.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11절) 

그러니까 기독교가 인간을 죄인이라고 할 때의 죄인, 죄를 지었다고 말할 때의 죄란 다름 아닌 폭력인 거야. 내가 지은 죄는 타인에게 폭력을 행하고, 고통을 주었다는 뜻이지. 그리고 세상이 타락했다는 말은 내가 받은 폭력을 폭력으로 보복함으로써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으로 사회 자체가 파멸에 이를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고.

물론 너도 알다시피 단어를 통한 연구는 빈 구석이 많지.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의미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단어가 아니라 문장 혹은 문맥이거든. 과연 하박국서가 폭력에 관한 텍스트인지를 가늠하는 데는 전체 흐름과 구조가 중요한데, 그걸 보자꾸나. 

1:2-4절은 한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폭력임을 폭로해. 그러자 하나님은 1:5-11절에서 바벨론의 폭력으로 유다를 심판한다고 하고, 놀란 예언자는 폭력으로 폭력을 심판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합당한가를 따져 묻지(1:12-17). 하나님의 대답은 ‘폭력은 폭력에 의해 망한다’는 다섯 가지 저주 선언이야(2장). 마지막 3장은 하나님이 몸소 전사(warrior)가 되어 심판하신다는 것으로 본문은 끝이 나지.

이렇듯 하박국이 일관되게 폭력을 다루는 텍스트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어. 그래서 아빠는 크게 세 가지로 논점을 추려보았단다. 하박국서가 말하는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으로 폭력을 해결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건가? 하나님께서 폭력의 당사자, 집행자가 된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폭력이란?
그런데 희림아, 평화주의를 공부하면 할수록 폭력을 정의하기가 너무 어렵더구나. 슬림하게 정의하면, 주체의 의지와 의사를 타자에게 물리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폭력이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힘’이야. 힘과 관련된 용어는 크게 권력(Power), 폭력(Violence), 강제력(Force) 세 가지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강제력인데, 주체가 타자에게 어떤 힘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하게 하는 거지. 그것이 물리력을 수반하면 폭력이 되고, 합법화된 사람이나 시스템이 사용하는 힘을 권력이라고 하지. 

폭력과 권력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글,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보면 폭력과 권력이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 그건 그의 모국어 때문일 거야. 독일어 ‘Gewalt’(거발트)가 힘, 강압, 폭력, 권력을 뜻하니까 말이야. 반면, 영어에는 power와 violence 두 단어가 있지.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철저히 구분해. 권력은 무엇보다도 말에 의한 공론 영역이니까. (다음에 권력 또는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싶다.) 

하박국서는 물론이고 성서 자체는 폭력에 대해 엄밀하게 개념 정의를 내리지 않아. ‘겁탈과 강포’(1:3, 개역개정) 혹은 ‘약탈과 폭력’(새번역)인데,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 포악하게 대하는 것, 폭행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심플하지.

그런데 폭력은 고통과 연관된단다. 아빠가 하박국서에서 폭력에 주목했던 것은 폭력과 고통이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기 때문이야. 기실, 고통의 대부분은 폭력에서 생겨나지. 고통을 말할 때, 대개 자연현상에 의한 것은 빼고 사회적인 측면을 다룬단다. 그래서 아빠는 “모든 고난이 폭력과 연결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시대의 고난이건 간에 폭력과 결부되어 있다. 그 증거가 하박국의 예언서다”(《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39쪽)라고 썼지.

폭력에 관한 하박국의 놀라운 통찰 중 하나는, 폭력은 폭력을 신으로 여긴다는 거야. 그들은 “제 힘이 곧 하나님이라고”(1:11) 생각한다. 이를 공식화한다면, ‘힘=신’ 혹은 ‘폭력=종교’인 게지. 무릇 종교가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면, 폭력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신념은 세속적 구원론이지. 그 구원관에 따라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1:7)한다. 정의를 위한 폭력은 정당하고, 폭력으로라도 정의를 기필코 이루겠다는 열정은 종교에 못지않은 광기이지. 

자기 생각이 정의라고 믿는 것이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한다면, 폭력을 행할 때 그 자신이 신이라고 느끼지. 내 주먹과 돈으로 상대방을 맘대로 휘두르고 주무를 때, 내가 타인의 머리 위에 군림한다는 것을 확인할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 남을 내 뜻대로 조종하고 통제할 때, 자신은 그에게 신이 된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지. 바로 그 맛 때문에 갑질을 하고, 약한 이들에게 난폭해지는 거고. 그러니 폭력이란 약자에게는 고통이고, 강자에게는 종교 같은 것이야.
 
폭력은 폭력으로!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무난한 반면, 이제부터는 난코스가 시작된단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딱 맞을 거야. 자기 조국 유다의 폭력에도 화가 나는데 바벨론을 통해 자기 백성 유다를 심판(1:5-11)하다니.
1:5-11절은 바벨론의 폭력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바벨론을 표상하는 단어들이 ‘표범’ ‘늑대’ ‘독수리’야. 짐승인 게지. 정글의 포식자가 되어 힘 약한 이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잡아먹는 맹수 말이다. 일반 역사가들은 제국을 칭송하는 경향이 있지만, 성서는 특이하게도 제국을 짐승으로 깔본단다. 요한계시록에서 로마를 짐승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니. 그 위대한 제국 로마를 네 발 짐승이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 로마를 건국했다는 레무스와 로물루스가 늑대 젖으로 자랐다니까.

그런데 바벨론에 의한 유다 심판은 세 가지 난점이 있어. 악한 제국이 그나마 덜 악한 약소국을 짓밟는다는 점, 더 큰 폭력으로 더 작은 폭력을 잠재운다는 점, 마지막으로 저 플랜이 결코 선하신 하나님답지 않다는 점이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방치하는 듯한 하나님의 무력함과 무능함도 참기 어려운데,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이 불의한 자의 악한 폭력을 사용하시다니, 용납하기 어렵지 않겠니.

라이문트 슈바거는 《희생양은 필요한가?》(가톨릭대학교출판부)에서 하나님의 폭력에 관한 본문을 네 그룹으로 구분한다.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분노, 인간의 범죄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복수, 하나님이 폭력을 실행하는 직접적 보복, 마지막으로 자기가 행한 폭력에 자기가 희생당하게 하는 간접적 복수. 문제가 되는 것이 세 번째와 네 번째 그룹인데, 하박국서에는 둘 다 있단다. 1:5-11은 세 번째, 1:11과 2:5-20은 네 번째 그룹의 대표 본문이야.

세 번째 그룹의 본문도 하나님의 직접 복수가 아니라 인간을 통한 심판이다. 폭력은 인간의 것인데, 이를 신적인 복수로 해석하는 거지. 이것은 유일신앙의 필연적 딜레마란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발생한다면, 바벨론의 폭력으로 유다의 폭력을 심판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거든. 그리하여, 각자의 폭력으로 서로를 파괴하고, 결국 자기 폭력으로 자기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거지. 해서, 주님도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신 거고(마 26:52).

그런데 희림아, 성경을 차례대로 읽는다면, 하박국서를 읽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할 예언서가 있단다. 낯선 이름의 나훔서야. 나훔서는 니느웨, 그러니까 앗시리아 제국의 심판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는 요나서와 대조된다. 반면, 폭력적 제국에 대한 심판을 먼저 읽은 다음 그 제국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하박국서가 등장하지.

폭력적 제국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요나서와 심판을 외치는 나훔서. 제국을 심판하는 나훔서와 사용하는 하박국서! 이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하박국서와 이 본문에만 코를 박고 본다면, 코끼리 다리 만지기가 아니고 뭐겠니. 폭력적 제국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럼에도 그들의 악과 폭력으로 그들 스스로 멸망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진노! 폭력을 심판하는 하나님, 폭력을 이용하는 하나님이라는 성서 안의 다양성과 긴장을 잃어버린 기독교 평화주의는 나이브할 뿐이야. 둘 다를 말하면서도 결국 평화로 수렴해야 해. 
 
폭력적 하나님?
이제 피할 수 없는 물음, ‘과연 하나님은 폭력적인가’에 다다랐구나. 3:3부터 15절까지는 소위 신적 전사(Divine Warrior)에 관한 고전적 본문이란다. 하나님이 전사로 완전 무장하시고, 당신의 적들을 초토화하는 장면이지. 앞에서 폭력을 허용하거나 사용하여 폭력에 대처한다는 참으로 난처한 신의 경륜을 보았는데, 이제는 폭력자라니.

이번에 읽게 된 논문 제목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 <비폭력적 예언자와 폭력적 하나님>(non-violence prophet and violent God). 예언자는 일관되게 폭력을 고발하고 반대하고 저항하고 몸서리치는 반면, 하나님은 폭력을 묵인하고 허용하고 조장하고 집행하니까 저런 제목이 가능한 거지. 전쟁의 신으로 등장하는 이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첫째, 전사로서의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보편적 신 이해였어. 구약성경도 다르지 않아. 그러니 우리 눈에 놀랄 뿐이지 특이하달 것도 없어. 당시 문헌들과의 차이는 윤리야. 당시의 신들은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도 없고, 그저 신들의 기분과 감정에 좌우되었다면, 성서의 하나님은 그 사회의 부정의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관이었어. 하박국 3장의 신적 전사도 정의를 수행하고 있고. 폭력을 묵인하고 허용하는 하나님에 대해 반발했던 예언자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지.

정의로울 뿐 아니라 소망이기도 해. 부정적으로 말하면 소망적 사고(wishful thought)일 테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현재에 대한 비관과 미래에 대한 낙관이야. 악인은 반드시 궤멸될 것이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고 만다는 절박하면서도 담대한 확신이 아닐까? 

아빠는 이 대목에서 최남선과 이광수의 변절을 생각했단다. 그들이 3.1운동을 주도할 때까지의 신념이 사라지고 친일로 전향한 것은 일제가 쉽사리 멸망하지 않을 거라고 보았기 때문이야. 저 막강한 제국은 자신의 예상과 달리 너무 강고하고 오래 지속될 듯 보인 반면, 자신의 조국과 인민은 너무 허약하고 무력했던 거지. 희망이 없으니 즉각 현실에 순응하는 거야. 희망의 힘은 실로 강하단다. 

제국이 제 아무리 강고해 보여도 무너지고 말아. 그건 역사가 증명하지. 다만, 우리 기대와 달리 그리 가깝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고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반드시 망할 거야. 망해야 하고말고. 그러기에 하박국의 저 희망찬 노래는 눈물 나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저항의 노래를 부르는 거지. 

그런데 또 하나의 반전이 준비되어 있단다. 그것은 하나님의 적이 누구냐 하는 거야. 그야 당연히 바벨론이겠지, 하고 지레 짐작하면 안 된다. 유다의 폭력을 바벨론을 통해 응징한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원수는 바로 당신의 백성이었어. 이스라엘의(of)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for)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에 반하는(against) 하나님이기도 하셔.

완전무장한 하나님의 공격에 하박국은 사시나무 떨 듯이 떨어(3:16). 왜? 그건 전사이신 하나님의 현현에 압도당한, 누미노제 현상일 거야. 또한 바벨론에 의한 이스라엘의 침략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미치겠는 거지. 하나님의 최강 군대가 당신의 백성을 타격하고 계신다는 것, 그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힐 밖에.

헌데, 기독교 진영 내에서 ‘하나님의 전쟁’ 운운하는 일이 있더라. 자신이 하는 일만 마치 하나님의 일인 양, 그리고 반대쪽을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하더라고.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말이다.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철석같이 확신하지만, 거꾸로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되지. 

전사이신 하나님의 적은 정의를 거역하고 폭력을 일삼는 이들, 폭력으로 약자와 빈자, 소수자가 피 흘리게 하는 자들이야. 기독교의 정신과 가치를 수호하고 실현한다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로 전락하고 만다. 이 점을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유념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단다.

마지막으로, 전사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무력과 폭력이 원천적으로 배제한단다. 대표적인 경우가 홍해 사건인데, 하나님이 모세와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출 14:13)뿐이었지. 할 게 없어. 있다면 기도와 찬양이고. 그래서 하박국도 기도하고 찬양하는 거고. 무장한 예언자만이 성공한다고 마키아벨리가 말했지만, 무장한 하나님은 우리의 무장을 해제시켜.

구약에서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폭력으로 보이는 본문들을 보면, 하나님이 직접 폭력을 행한 적은 잘라 말하건대 없어. 자연 아니면 인간에 의한 폭력을 신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거지. 인간의 폭력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발터 벤야민의 신적 폭력과 맞닿아 있기는 하지.

하여간 폭력이 인간적 현상이라면, 하나님은 일체의 인간적 폭력을 중단시키신단다. 그래서 톰 요더 뉴펠트는 신적 전사가 신약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미덕 혹은 성품으로 변주된다고 주장하지(Put on the Armour of God, 88). 음, 이건 논의를 꽤 벗어난 것이니 여기까지만 얘기하마.
 
이제는 기다릴 뿐
사랑하는 아들 희림아,
너와의 서신 교환이 글 쓰는 부담도 주지만, 내 밀린 숙제를 풀어주었단다. 아빠가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를 쓰면서 피한 주제가 두 가지였거든. 하나는 다섯 가지 저주 선언의 사회적 측면인데,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했어. 다른 하나는 계속 묻어두었지. 그게 바로 3장에 나오는 ‘신적 전사’였는데, 네 덕에 덮어두었던 숙제를 마침내 풀게 되었으니 묵은 체증이 풀리는 느낌이다. 고맙다.

하박국은 망루 위에 올라가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나는 나의 서재에 틀어박혀 너의 답신을 기다리마. 경전인지라 폭력을 신과 연결 짓는 것이 당연했다만, 신과 종교라는 덮개를 걷어내고, 폭력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기대할게. 설사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다할지라도 너의 서신이 내게 큰 기쁨이고 내 발을 겅중겅중 뛰게 한다는 것, 잘 알지? 


김기현
로고스교회 담임목사이자 로고스서원 대표로, 코스타 강사, <매일성경> 집필자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기독교 세계관, 평화주의, 변증, 성경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 이선숙과 아들 희림, 딸 서은이 있다. 지은 책으로 《성경 독서법》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가룟 유다 딜레마》 《예배, 인생 최고의 가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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