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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폭력적이다 -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344호 부전자전 고전: 아들의 편지]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읽기
[344호] 2019년 07월 01일 (월) 18:01:19 김희림 goscon@goscon.co.kr

1.
어느덧 세 번째 편지를 쓰네요, 아빠. 우리가 인간사를 관통하는 가장 오랜 주제를 두고 토론하는 와중에 시간이 금세 흘러서 계절이 바뀌었어요.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때에는 수세기를 버텨오며 지성이 농축된 고전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은 얼마나 짧은지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 있지요. 제 삶 이전부터 존재해온 이 낡은 책이 덧없는 것일까요, 그 앞에 놓인 제 삶이 덧없는 것일까요?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고민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그래도 아빠와 고전을 논하는 지금은 그런 덧없음을 상상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열정적인 시간이에요. 함께 사는 가족과의 실제적인 대화인 동시에 살아 숨 쉬는 고전을 즐길 수 있으니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빠도 그렇죠?

아빠가 하박국의 고통을 다룬 책을 쓰면서 많이 연구했다는 거야 잘 알고 있었지만, 폭력에 대한 고전으로 하박국서를 뽑았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수였어요. “제 힘이 곧 하나님이라고” 여기게끔 하는 폭력의 신적 충동,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결코 폭력을 용납하지 않으며, 설령 하나님의 폭력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종말론적 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신학적 해석은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교적 덜 읽히는 이 하박국서에 이런 보물 같은 논의가 숨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사실 폭력에 대한 논의를 제안하면서부터 다루고 싶은 몇몇 학자들이 있었는데, 아빠랑 같이 하박국서를 읽으면서 이 사람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앞선 두 차례의 편지에서 베르그송과 레비나스를 같이 읽으면서 현대 프랑스 철학의 조류를 살짝 맛보았는데 이번에는 시간과 장소를 조금 옮겨보려 해요. 폭력에 대한 비상한 통찰이 담겨있는, 17세기 영국의 토머스 홉스가 쓴 《리바이어던》(나남)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정치·사회사상사에서 도저히 빼놓을 수 없는 고전이면서도 제 나름의 인간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친 소중한 책이에요. 뭐가 그렇게 대단하기에 그리도 유명한 책인지, 하박국서와의 연결고리를 더듬어 찾아볼까 해요.

   
▲ 홉스의 《리바이어던》 표지(1651)

2.
《리바이어던》을 읽을 때는 책의 제목과 표지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리바이어던’은 구약의 욥기에 등장하는 괴물입니다. 성경에서는 리바이어던이 거대하고 악한 괴물로 묘사되지만, 홉스는 이를 상징적으로 끌어들여와 정치적 주권의 별칭으로 사용합니다. 리바이어던을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악마가 아닌,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국가로 해석하는 게지요. “… 이리하여 바로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탄생한다. 아니, 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영원불멸의 하느님’(immortal God)의 가호 아래, 인간에게 평화와 방위를 보장하는 ‘지상의 신’(mortal god)이 탄생하는 것이다.”(232쪽)

그렇다면 이 리바이어던은 그 막강한 힘으로 무엇을 한다는 걸까요? 하나의 산맥과 마을을 통째로 뒤덮는 기세의 거인이 왕관을 쓰고 전사의 검과 성직자의 지팡이를 든 모습이 리바이어던의 힘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거인은 빼곡하게 서서 거인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네요. 표지의 아래쪽에 왕과 교황의 권한을 상징하는 그림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까지 보면 의미를 대략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세속과 교회를 아우르는 무소불위의 권력, 이것이 홉스가 그리는 리바이어던입니다.

아빠도 아시다시피 홉스는 단순한 권력을 넘어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강대한 힘을 구축할 것을 주장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폭력의 문제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자연 상태에 그대로 두었을 때 일어나는 끝없는 폭력의 연쇄를 끊기 위해 그 무엇보다 강한 리바이어던이 폭력을 통제하는 것이지요. 홉스는 지극히 현실적인 안목으로 인간성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원칙들을 찾아내고 그를 통해 안정적인 조직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하는 해설자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그렇다면 아빠, 이제 홉스의 도움을 받아서 폭력은 무엇이며 그 기원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막아낼지 살펴볼까요?

3.
한글 번역본을 기준으로 1,000쪽에 육박하는 《리바이어던》의 내용을 이 편지에서 충분히 다 녹여내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겠죠. 저의 이런 사정을 예측하셨는지, 예전에 철학과에서 ‘리바이어던 강독’ 수업을 들을 때 정치철학 교수님은 ‘《리바이어던》은 13장만 읽으면 다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고작 7쪽뿐인 짧은 장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과연 책의 핵심적인 전제와 결론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니까 아빠, 13장을 통해 《리바이어던》을 조망하면서, 이 책을 탐험해보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자연상태, 그 복됨과 비참함에 대하여”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13장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자연은 인간이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측면에서 평등하도록 창조했다는 것이지요(168쪽). 불평등과 차별이 시대적 주제인 지금 보면 기가 막히는 말로 들립니다. 며칠 전에 우리가 같이 본 영화 <기생충>도 떠오르고요.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평등의 의미는 ‘신체적 평등’입니다. 힘이 센 사람도 약한 이들이 연합하면 죽일 수 있고, 간혹 특출한 정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긴 하지만 서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건 다 비슷하니까요.

이렇게 평등한 능력에서는 희망도 평등하게 생깁니다. 원하는 것이 같아지고, 같은 것을 놓고 두 사람이 싸우는 일이 생기지요. 본능적으로 자기 보존을 추구하는 인간은 이제 서로를 향한 불신을 키우게 되고, 무럭무럭 자라난 불신은 전쟁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지요. 언제 누군가 내가 가진 것을 취하기 위해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정글 같은 삶은 그렇게 시작되지요. 홉스는 전쟁의 끔찍함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놀란 어머니가 그를 조산했기에 홉스는 “나는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슬픈 농담도 자주 했고, 세계대전 이전 유럽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으로 손꼽히는 ‘30년전쟁’이 그의 생애 중에 벌어졌으며 잉글랜드 내전 때문에 피난을 다니기도 했으니까요.

그러한 삶의 맥락 때문인지, 홉스는 그 무엇보다 강한 권력이 떡 버티고 있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그들 모두를 위압하는 공통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전쟁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다”(171쪽)라는 유명한 구절에 그의 정치철학과 지난했던 삶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빠, 여기까지 보면 홉스는 인간을 서로 공격하지 못해 안달 난 잔혹한 악마로 묘사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전쟁이 끔찍한 것이야 알겠는데 그게 그렇게 보편적인가 하는 의심이 들잖아요. 이럴 줄 알고 홉스는 맞아떨어지는 예시를 들려주어요.

“우선 나의 추론에 대해 의심을 품는 그 사람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여행갈 때는 무장하고, 여러 사람과 같이 가려고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문단속을 한다. 집에 있을 때에도 금고 문을 단단히 잠가 둔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도 한 나라 백성인데 그들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기에 무장하고서야 말 등에 오르는 것일까? 이웃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문단속을 그처럼 철저히 하는 것일까? 집안 아이들과 하인들을 어떻게 여기기에 금고 문을 잠가 두는 것일까? 내가 말로써 인류를 비난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행동으로써 인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172쪽)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를 보존하고 그러기 위해 타인을 의심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홉스는 이것이 결코 인간의 본성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법, 곧 두려워할 만한 공통의 권력(173쪽)이 없다면 인간은 누구나 전쟁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모두가 ‘무기를 들고 서로 노려보는 검투사와 같은 자세’로 서로를 견제할 때 백성들은 생업을 보장 받고 개개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반면 만인이 만인에 대한 전쟁을 벌일 때는 정(正)과 사(邪), 법과 불법, 그리고 내 것과 네 것의 경계가 사라져 인간성의 가혹한 지점이 부각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홉스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4.
인간의 본성을 정념(passion)으로 이해하는 홉스지만, 자연상태의 가혹함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174쪽). 인간을 평화로 향하게 하는 정념이 있다는 것이지요. 아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게 있더라고요. 자연상태를 탈출해 법과 질서가 있는 공동체를 조직할 때 거기서 ‘조화’는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생각한 리바이어던의 모습을 책의 맨 첫 부분을 통해 살펴볼 수 있어요.

“… 리바이어던이 창조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공 인간(artificial man)이다. 자연인을 보호하고 방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연인보다 몸집이 더 크고 힘이 더 세다. 이 인공 인간에게 있는 ‘주권’은 인공 ‘혼’으로서 전신에 생명과 운동을 부여한다. ‘각부 장관들’과 사법 및 행정 ‘관리들’은 인공 ‘관절’이다. ‘상벌’은 모든 관절과 사지를 주권자와 연결시켜 그 의무의 수행을 위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므로 자연인의 신체에서 ‘신경’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한다. 구성원 개개인 모두의 ‘부’와 ‘재산’은 그의 ‘체력’이다. ‘인민의 복지’(salus populi)와 ‘인민의 안전’은 그의 ‘업무’이다. ‘조언자들’은 그가 알고 있어야 할 내용들을 제안하기 때문에 그의 ‘기억’이다. ‘공평’과 ‘법’은 인공 ‘이성’이며 ‘의지’이다. ‘화합’은 ‘건강’이다. ‘소요’는 ‘병’이다. 그리고 ‘내란’은 ‘죽음’이다. 끝으로 이 정치공동체의 각 부분을 처음 제작하고 모으고 결합하게 만든 ‘약정’(約定, pacts)과 ‘신의계약’(信義契約, covennants)은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제 사람을 만들자’고 선언하신 ‘명령’(fiat)과 같다고 할 수 있다.”(22쪽)

국가를 신체로 비유하는 가장 고전적인 방식은 역할에 따른 조화입니다. 플라톤이 국가를 구성하는 세 가지 계층인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를 각각 머리, 가슴, 배로 비유한 점이나 인간의 정치적 특성을 중심으로 조화로운 공동체적 삶 속에서 목적과 행복을 찾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대표적이지요. 그러나 홉스가 설계한 이 인공 인간은 하나의 완전한 기계입니다. 자연적인 조화나 독단적 결정도 아닌, 국가 그 자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완전체. 이것이 바로 서로가 서로를 학살하는 끔찍한 자연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홉스가 내놓은 괴물이에요.

이 괴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 로고스와 같은 신의계약이 필요합니다. 신의계약은 그 유명한 ‘상호간의 권리포기’라는 사회계약을 맺고, 이것을 반드시 지키는 것이에요. 모두가 권리를 양도해서 평화를 유치해내야 합니다. 이 신의계약이 성립되기 전에는 어떤 행위도 불의가 될 수 없어요(194쪽). 그런데 이 신의계약에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폭력이지요. 신의계약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홉스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 요컨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자연법 그 자체는 어떤 힘에 대한 공포 없이는 지켜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연적 정념은 그 반대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칼 없는 신의계약은 빈 말에 불과하며, 인간을 보호할 힘이 없다. 자연법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 어떤 권력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혹은 확립되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기에 족할 정도로 강력하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품게 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힘과 기량에 의지하려 들 것이다.”(228쪽)

아빠, 칼 없는 신의계약은 없다는 홉스의 말이 참 날카롭지 않나요?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제아무리 타당한 규칙이어도 지켜지지 않았을 때 제재가 없다면 유지하기 들겠지요. 홉스는 인간이 스스로를 신의계약으로 이끌어갈 것이라며 신뢰하지만, 칼 없이도 신의계약을 지킬 것이라고까지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때 사람들로 하여금 계약을 따르게 하는 합법적인 폭력, 즉 ‘주권’이 절실합니다. 이 인공적일뿐 아니라 신체에 비유될 정도로 유기적인 주권이 바로 리바이어던이고, 이 통찰을 담은 책이 바로 《리바이어던》이지요.

5.
아주 간단하게 《리바이어던》을 읽어보았는데, 생각보다 ‘폭력’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지 않지요? 지난번 아빠의 편지에서 독일어 단어 ‘Gewalt’에 대한 간단한 분석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보시면 좋겠어요. “폭력과 권력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 독일어 ‘Gewalt’(거발트)가 힘, 강압, 폭력, 권력을 뜻하니까 말이야. 반면, 영어에는 power와 violence 두 단어가 있지.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철저히 구분해”(본지 343호, 135쪽)라고 쓰셨잖아요. 그러면서 하박국서에 드러난 폭력에 대한 통찰, 폭력은 스스로 신이 되어 타자에게 고통을 가한다고 덧붙이셨고요. 그러나 홉스에게서 폭력은 권력으로 변모하고, 권력은 폭력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홉스의 글을 읽고 나면 그 둘의 유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바이어던》의 부제는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입니다. 원어인 영어로는 “The Matter, Form,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이지요. 그런데 더 깊은 독해를 위해 독일어 번역본으로도 《리바이어던》을 한창 읽다가 문득 표지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독일어로 부제는 “von Materie, Form und Gewalt des kirchlichen und brgerlichen Staates”라고 번역되어 있더라고요. 무의식적으로 저는 영어 부제의 power가 일반적으로 권력을 의미하는 ‘Macht’(마흐트)나(니체의 저서 《권력에의 의지》의 원제도 Wille zur Macht지요), 인공 괴물인 리바이어던의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힘을 강조하기 위해 Kraft(크라프트)가 사용되었으리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이 예시와 함께 아빠의 편지를 재차 읽으며 여기서는 power가 Gewalt로 번역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납득했습니다. 방금 말했듯이 홉스의 정치철학에서 권력(power)은 폭력(violence)과 강제력(force)에서 출발하고 또한 권력은 폭력과 강제력으로 향하니까요. 아빠 말처럼 한나 아렌트는 power와 violence를 철저히 구분했지만, 홉스에게 두 단어는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을 거예요. Power는 violence를 막기 위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 또한 violence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이것은 아빠가 신학적으로 분석하신 하박국서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논증이 될 것 같아요. 아빠는 지난 번 편지에서 “그들은 ‘제 힘이 곧 하나님이라고’(1:11) 생각한다. 이를 공식화한다면, ‘힘=신’ 혹은 ‘폭력=종교’인 게지. 무릇 종교가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면, 폭력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신념은 세속적 구원론이지. 그 구원관에 따라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1:7)한다. 정의를 위한 폭력은 정당하고, 폭력으로라도 정의를 기필코 이루겠다는 열정은 종교에 못지않은 광기이지”(본지 343호, 136쪽)라고 쓰셨지요. 이는, 《리바이어던》이 하박국서보다 먼저 쓰였나 싶을 정도로 《리바이어던》에 대한 적절한 비판입니다. 실제로 홉스는 하나님의 권한에 비견할 만한 주권이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리고 그 주권에 도전하는 이들을 폭력으로 다스리며 오직 그 주권만이 정의롭다고 명백하게 이야기하니까요.

아빠의 편지에서 《리바이어던》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점을 찾자면, 후반부에 나오는 “제국이 제 아무리 강고해 보여도 무너지고 말아. 그건 역사가 증명하지”(본지 343호, 139쪽)라는 말이에요. 《리바이어던》의 표지 맨 위에는 욥기에 등장한 리바이어던에 대한 묘사가 라틴어로 적혀 있어요. ‘Non est potestas Super Terram quae Comparetur ei’(욥 41:33). 땅 위에 그에 비할 만큼 강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빠 말이 맞지요. 무엇도 그에 비할 것이 없을 정도로 강대한 제국들도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칼 없는 신의계약은 없다고 홉스는 못 박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을 담담히 전합니다.

6.
그 무엇보다 강한 주권을 가진 국가라는 환상은 국제관계를 다루는 외교적 능력이 정치의 핵심인 21세기에는 유치하게 들리기도 하고, 사회계약론을 통해 단일한 주권을 이루어낸다는 야심찬 계획은 그 계약 또한 참정 권한이 있는 일등 시민들을 중심으로 성립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지요. 인간이 다들 비슷한 것을 욕망하기에 전쟁상태가 펼쳐진다는 것 또한 무한한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현대적인 인간상과 어긋나고요. 물론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 법이라는 폭력을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홉스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인식과 사회체계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고, 국가라는 개념이 탄생한 근대에 대단히 중요한 철학이지만요.

그래서 다음 논의할 주제로 저는 ‘국가’를 제안하고 싶어요. 국가에 대한 담론은 역사뿐 아니라 신학과 철학에서 모두 중요한 주제죠. 홉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국가는 폭력을 관리하는 주체라는 논의는 그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테니까요. 아빠가 어떤 신학의 고전을 뽑아서 국가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절개할지 기대가 됩니다. 저는 이미 책을 골라두었어요. 다름 아닌 플라톤의 《국가》입니다.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라고 과장 없이 말할 수 있는 고전 중의 고전이지요. 이런 고전을 글로 다루어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철학도로서 영광인데, 아빠와 토론까지 함께할 수 있다니 정말 기대가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박국서와 《리바이어던》을 함께 놓고 이야기하는 이번 시도도 즐겁게 마무리가 된 것 같네요. 한 달 한 달 아빠의 편지를 읽고, 아빠에게 편지를 쓰는 재미로 살고 있어요! 그러면 이만 줄이면서 아빠의 내공이 담긴 다음 편지를 기대할게요.


김희림
경희대 철학과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전공뿐 아니라 정치, 예술, 과학 등 다양한 학문에도 관심이 많은‘공부 덕후’라 할 만하다. 고등학생 시절, 신학자인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종교와 학문에 관한 대화글을 엮어 《그런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을 출간했다. 본지에 2년반 동안 ‘스무 살의 인문학’을 연재했으며, 페이스북 페이지 <철학 개그>에 올린 글들을 모아 교양철학서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2018)를 펴냈다.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만큼 베이스 기타를 시끄럽게 두들기는 취미를 즐긴다. ‘로고스서원’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청소년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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