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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신적인가? - 칼뱅의 《기독교 강요》
[345호 부전자전 고전] 칼뱅의 《기독교 강요》 읽기
[345호] 2019년 07월 31일 (수) 11:57:24 김기현 goscon@goscon.co.kr

폭력에서 국가로
사랑하는 아들아,
네 편지 잘 받았다. “아빠 편지를 읽고, 아빠에게 편지를 쓰는 재미로” 산다는 말이 아빠를 행복하게 했고, 그건 너를 향한 아빠의 마음이기도 하단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만 집중하지 않고, 아빠가 쓴 ‘하박국서에 나타난 폭력 이해’를 상호 대조했더구나. 《독서의 기술》에서 모티머 애들러는 한 권을 분석적으로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두 권을 함께 읽으면서 자신만의 관점을 정립하는 것이 최고의 독서라고 했지. 그런 점에서 깊게 파면서 단단한 내공을, 넓게 파면서 유연한 내공을 연마하고 있구나.

다음 책을 이미 정하고 공부하고 있다니. 플라톤의 《국가》 1장만 읽은 나로서는 네게서 한 수 배우겠네. 이전에 우리의 대화를 묶은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에서 너의 질문이 아빠로 하여금 공부하게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너의 고전 읽기와 생각 자체가 아빠의 신학함을 풍부하게 하는구나. 앞으로도 너의 글을 기대하마.

인간은 폭력적이기에 모든 인간이 두려워할 만한 가공할 권력이 없다면 사회는 전쟁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홉스의 생각은, 그 권력의 주체인 국가를 성립하게 하지. 그렇기에 우리의 대화는 ‘국가’일 수밖에 없어. 국가에 대한 고전이 플라톤의 《국가》라면, 신학 영역에서 필적할 만한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어야겠지. 하지만 이미 그는 《고백록》으로 한 번 다루었으니, 홉스보다 수십 년 전에 살았던 거의 동시대적 인물이자, 오늘날 개신교의 신학은 그의 주석이요 해석이라고 할 만한 장 칼뱅(Jean Calvin)의 《기독교 강요》가 좋겠다 싶은데, 괜찮지?
 

   
 

두 얼굴의 사나이, 국가
국가에 대한 아빠의 문제의식은 우리가 앞서 다루었던 ‘폭력’과 관련 있어. 우리 근현대사는 슬프게도 ‘국가 폭력’으로 점철되었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서 조선 후기의 가혹한 민중 수탈, 갑오농민전쟁, 일제 식민지배, 해방에 이은 한국전쟁,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용산참사와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벌어진 숱한 폭력의 주범이자 주체는 어처구니없게도 국가였어. 인간 내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본성적 폭력성도 검토해야겠지만, 동시에 국가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지.

네가 쓴 글을 보니, 홉스는 “사람들을 자연 상태에 그대로 두었을 때 일어나는 끝없는 폭력의 연쇄를 끊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강한 리바이어던이 폭력을 통제”(본지 344호, 144쪽)한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역사는 폭력의 담지자와 집행자로 국가를 지목하지.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의 주체도 국가였고.

그러나 로마서 13장에서도 보듯이, 개인과 시민의 안녕, 복지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질서는 불가피하고 필연적이지. 그런 질서 혹은 구조가 없었다면, 인간은 그야말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말미암아 야수가 되어 서로를 물어뜯어버렸을 거야. 국가가 세금을 거두고, 교육과 복지, 문화, 기간 시설을 확충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국가란 두 얼굴의 사나이야. 폭력을 독점하기에 폭력의 주범이고, 그 물리력으로 개별 인간의 폭력과 의지를 제한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지. 그래서 국가를 변증법적으로 사유해야만 해. 국가 안의 모순적 두 본성의 긴장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면서도 특정한 시공간에서 어떤 측면이 더 발호하는지를 끊임없이 관찰해야 하지. 지금 이 시점에서 국가는 폭력의 주범일까 아니면 홉스가 말한 대로 폭력을 제어하는 주체일까?

왜 썼을까?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은 국가를 어떻게 이해할까? 장 칼뱅의 《기독교 강요》 맨 마지막 챕터인 “국가의 통치”(4권 20장)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꾸나. 어떤 점에서는 칼뱅은 이 부분을 위해 그 긴 글을 쓰지 않았나 싶어. 이 책을 헌정한 프랑수아 1세에게 개신교도에 대한 박해를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기독교 강요》를 썼거든.

그는 자신의 고국 프랑스에서 자행되는 박해가 개신교 신앙에 대한 오해라는 것, 우리는 아나뱁티스트는 결코 아니고 가톨릭 신앙과는 다르지만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며 국가에 위험스러운 신앙이 아님을 역설했어. 그곳은 칼뱅의 말년에 위그노 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탄압이 심했지. 칼뱅은 우리 개신교인들은 이단이 아니며 국가와 군주에게 충성한다고 변호했어.

칼뱅이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지. 그는 갖은 질병으로 인해 신체적으로는 나약했고 정서적으로는 섬세하고 깊은 내면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강인한 진리의 투사였어. 개신교 신앙이 성서적일 뿐 아니라 교부들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고, 오히려 가톨릭 신앙이 진리보다는 관습에 기대고 있음을 통렬히 논박하지. 아나뱁티스트가 이상적인 꿈만 꾸는 것을 타협 없이 비판했고.

프랑수아 1세에게는 은근슬쩍 찌르기도 해. “한 번도 들어보지 않고 이 교리에 대하여 피비린내 나는 선고를 내리는 것은 순전한 폭력인 것입니다.” 경건에 관한 초보적인 이 책을 “폐하께서 소유하신 분별력을 발휘해서 우리의 고백을 읽어보시면 그것이 얼마나 악의에 찬 무고이며 파렴치한 말들인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그는 프랑수아 1세의 폭력성과 지적 수준을 은근히 건드리지.

헌사의 맨 마지막 문장은 압권이란다. “왕 중 왕이신 주께서 폐하의 보좌를 의(義)가운데(잠 25:5 참조), 폐하의 통치를 공평 가운데 견고하게 하시기를 기원하나이다.” 공의와 공평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핵심 가치이므로, 그 가치를 반영하는 정치를 하라고 왕에게 권면하는 거지. 왕에 대한 청원이지만, 매서운 비판과 날카로운 비수를 감추고 있어.

놀라운 점은 칼뱅의 나이야. 그가 초판을 쓸 때가 26세(1635), 출판된 해(1536)는 27세였어. 많은 학자들이 칼뱅을 천재가 아니라 조직화하는 능력이 뛰어난 학자라고 하지만, 글쎄, 천재적 학자라는 것은 기본 전제로 깔고 말하는 걸 거야. 그 나이에 기독교 신앙을 집대성하는 불후의 명작을 쓸 수 있다니! 그렇지만 무려 30년 동안 이 작품을 되풀이해서 고쳤어. 그러고 보면 성실한 천재인 셈이지.

   
 

제목에 대하여
너도 알다시피, 부분은 전체를 포함하고 전체는 부분보다 크지. 전체를 잘 보여주는 것은 책의 구조와 제목인데, 칼뱅의 이 책도 마찬가지야. 제목 속에 전부가 담겨 있어.

제목에 관해 웃지 못할 현실부터 짚고 가자. 칼뱅의 국가 이해를 신학 동네가 아니라 정치학 쪽에서는 어떻게 읽어 내는지를 간학문적으로 보려고 저명한 정치사상 책을 보다가 아이코 맙소사, 너무 황당하더구나. 설마 했는데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라틴어로는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을 《기독교 신앙의 기구》라고 번역해 놓았더구나. 신학자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굳이 ‘리워야단’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Il Principe, The Prince)을 ‘왕자에 대하여’ 혹은 ‘그 왕자’로 번역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니.

아빠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신학과 교회 내부의 언어와 문법을 여과 없이 사회에 말하는 것을 보면서 인문·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자연과학에 대한 기초적인 소양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곤 하지. 그렇지만 철학이나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자들이 일부인 근본주의적 기독교를 전체로 확장해서 기독교를 두들겨 패려는 것도 못마땅해. 그들은 기독교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도 모르더라. 아무튼 대화가 필요하고, 그래서 신학자인 아빠와 철학도인 아들이 대화를 하는 거고 말이야. 우리 잘 하고 있는 거지?

처음엔 나도 ‘강요가 뭘까, 강제로 요구한다는 의미는 아닐 텐데’ 그랬거든. 이 제목은 일본어 역본에서 온 것 같아. 마사키 나카야마가 1934년도에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강요(綱要)라고 했는데, 우리말 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어. “일의 으뜸 줄기가 될 만한 요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른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요점을 교육하는 책이란 거지. 실제로 라틴어로 ‘인스티튜티오’는 교육하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외부의 오해에 대해서는 변호하고, 내부로는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저술된 거야.

다음은 ‘religion’을 보자. 요즘은 이 단어를 획일적으로 ‘종교’라고 번역해. 그렇게 되면 ‘기독교’가 되는 건데, ‘종교’의 변천사를 주목한 하버드대 종교학자인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에 의하면, 이 단어는 고래로 ‘경건’ 혹은 ‘신앙’이라는 의미였어(《종교의 의미와 목적》). 원래 ‘religion’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요 깨달음이었는데, 근대에 들어서면서 제도와 형식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지. 그래서 스미스는 종교라는 개념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고, 칼 바르트는 ‘종교=불신앙’으로 단죄했어.

종교가 경건이라는 것은 이 책의 초판 제목을 보면 되는데, 제목이 무지하게 길어. “경건의 전반적인 개요와 구원론을 알기 위한 필수적인 것은 무엇이나 망라한 기독교 강요”란다. 부제는 “경건에 대한 열심을 가진 모든 사람이 읽을 만한 가장 가치 있는 책”이야. 그러니까 이 책은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의도와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일차적으로 경건을 함양하려는 차원에서 집필되었어.

그 점은 이 책의 헌사에도 분명하게 볼 수 있어. 그는 당시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면서 저술 목적을 이렇게 기술했어. “나의 목적은 단지 어떤 기초적인 사실들을 전달함으로 그것에 의해 종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기본을 잘 다져서 경건에 이르게 하는 것, 정성을 기울여 읽기만 한다면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지식에 다다를 수 있다는 거지. 아빠는 칼뱅의 의도가 잘 성취되었다고 봐. 기독교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없거든.

맥락과 구조
이번에는 국가에 대한 부분이 이 책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맥락을 보려고 해. 칼뱅은 두 군데서 ‘국가’를 다뤄.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3권 19장), 다른 하나는 “교회론”(4권 20장)이야. 그리스도인은 종교적 율법과 사회의 법에 대해서 자유로워. 전자는 가톨릭의 전통과 법률, 후자는 국가의 법률이야. 신자의 양심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법이요 말씀인 성경에 사로잡혀 있기에 율법과 사회법에 구속받지 않아.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양심은 인간의 내면적인 것이기에, 교회이든 국가이든 간에 규율할 수 없는 자유가 있어. 양심은 오로지 자신의 주인이자 창조자인 하나님에게만 속박되기에 하나님 아닌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해. 국가와 법률이라도 말이야. 법률은 그저 인간의 외적 행동만 규제할 뿐이야. 일단 칼뱅은 국가가 어쩌지 못하는 저 신성의 영역에 신앙을 포진시켜 그 본연의 모습을 수호하고, 개신교를 탄압하는 국가와 가톨릭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지.

본격적인 논의는 《기독교 강요》의 맨 마지막 파트란다. 1권은 창조주를, 2권은 구속주를, 3권은 성령론을 다루는데, 국가는 교회론을 다루는 4권에 속해 있어. 국가를 교회론의 일부로 보았던 거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 한가운데서 살지. 세상 질서의 핵심인 국가와의 관계에 따라 우리 신앙의 결이 드러나는 거고.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는 양자의 관계를 다섯 가지로 유형화했는데, 교회의 교회됨은 세상과의 관계 맺음의 방식에 따라 결정되고, 반대로 교회됨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지. 그래서 교회론 안에 국가론이 들어 있어.

4권 20장 “국가의 통치” 구조는 이렇단다. 먼저 이중 통치가 구별되지만 분리나 대립이 아님을 천명(1-2절)한 다음, 정부와 통치자들도 하나님이 세웠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신적 기능(3-7절)이 있다고 말해. 과세나 강제력 행사는 신앙과 양립하고, 전쟁을 결정하고 수행할 권리도 있어(8-13절). 국가는 너도 알다시피 법에 의한 통치를 하잖니. 공정한 법체제 하에서 그리스도인들도 법정과 소송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해(14-21절).

마지막으로 국가와 통치자에 대한 신민의 복종을 요구해(22-29절). 그가 설사 악한 왕일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으니 복종하라는 것이지. 때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시민을 심판하시기도 한다면서 말이야. 현존 질서가 어떤 것이든, 기성 체제를 종교적으로 지지한다는 칼뱅의 생각은 놀랍구나. 한국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입장과 맞지 않으면 저항과 폭력을 선동하니까 말이야. 저항은 개인에게 허용하지 않고, 공적 책임을 지고 있는 인물에게는 허용하지. 시민 개인에게도 저항권을 허락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저항이 생길 공산이 크기에 그런 것 같지만, 촛불시위에서 보듯이 시민의 집단적 저항은 허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면 누구라도 국가와 정부에 불복종할 수 있어. 저항권을 인정함으로써 혁명의 가능성도 열어놓은 것이지.

두 개의 질서
희림아, 앞에서 아빠가 국가의 이중 얼굴을 말했지. 이것은 실은 칼뱅의 주장을 달리 표현한 거란다. 그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이중적인 정부’가 있어(3권 19장 15절). 인간의 내면과 영적인 것을 관할하는 정부와, 외면과 정치를 통제하는 정부로 구별해. 각각 다른 통치자와 법률에 의해 다스려지지. 몸과 영혼, 현세와 내세가 다르듯이 저 둘 또한 전혀 다른 거야. 저 둘을 섞어서는 안 돼.

이중 정부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칼뱅의 의도가 아니란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듯이, 하나님의 뜻이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곳이 영적 왕국이고, 세속 정부는 하나님의 뜻과 통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단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어. 둘 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야.

그렇다면 왜 칼뱅은 두 개로 나누었을까? 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통치할까? 왜 국가에게 강제력을 주시고, 교회에는 영적 권위와 말씀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하셨을까? 그건 각각의 고유 영역을 허락하고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지 않게 하려던 거지. 국가가 종교화해서도, 교회가 국가화해서도 안 돼. 국가가 종교화하면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는 것이고, 교회가 국가화 또는 정치화하면 독재 정부를 지원하는 지배 이데올로그가 되지.

‘구별’이라는 말이 곧 ‘분리’는 절대 아니야. 국가를 신앙과 무관한 별개의 영역으로 떠나보내지 않고, 교회가 정치와 동떨어진 곳에 위치하지도 않아. 국가가 정의로운 신의 통치에서 벗어나면 그야말로 야수, 곧 리바이어던이 되는 거지. 인간이 정치를 부정하는 것은 무정부적 카오스로 떨어지는 일이고. 한 분 하나님의 전적 주권 하에 둘 다 존재하고, 현실적으로 둘은 포개어지기 때문에 구별했어.

두 개의 의문
그런데 희림아, 아빠가 보기에 겹쳐지는 지점에 대한 칼뱅의 논의는 논란의 여지가 많아. 먼저, 국가의 기능과 목적에 관한 그의 말을 직접 읽어보자꾸나.

국가의 통치가 사람들의 생활을 위하여 조건을 구비시켜 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호흡하고 먹고 마시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등, 자연이 하는 모든 기능들을 다 포괄하여 행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기능뿐 아니라, 우상숭배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행위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모독 등, 신앙을 대적하는 기타 공적인 범죄들이 사람들 가운데 일어나거나 펴지지 않도록 막아 주며, (중략) 간단히 말해서 국가의 통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신앙을 공적으로 드러내도록 해 주며, 또한 사람들 가운데 인간성이 유지되도록 해 주는 것이다.(4권 20장 3절)

국가 통치는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외형적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경건의 건전한 도리와 교회의 지위를 변호하고, 사람들의 사회에 우리의 삶을 적응시키고, 시민의 의에 맞도록 우리의 사회적 행실을 형성하고, 우리를 서로 화목케 하고, 또한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는 등 그 나름대로 지정된 목표가 있는 것이다.(4권 20장 2절)

아빠가 길게 인용한 저 문장을 유심히 보렴. 시민을 보호하고 사회의 안녕을 추구하는 기능에 관한 20장 3절의 앞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없단다. 칼뱅의 격렬한 논적이었던 아나뱁티스트들도 십분 동의하는 부분이니까. 그들도 국가는 무력 사용의 권한이 있다고 인정해. 그것을 통해서 사회의 안정과 안녕을 확보하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라는 거지. 법이 강제력을 띠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렴. 그 순간 사회는, 존 로크처럼 자발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다면, 홉스가 말한 대로 전쟁 상태로 돌입하게 되겠지.
 

여기서 아빠는 딱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 국가의 기능과 목적에 관한 칼뱅의 진술 중 후반의 것이 아빠가 주목하는 부분이야. 그는 국가가 시민의 신앙에 개입할 수 있다고 했어. 국가가 신자의 내면을 규제하는 일을 허용해도, 종교적인 사안에 관여하도록 허락해도 될까? 그는 참된 종교가 노골적이고 공적으로 모독당했을 때에 한하여 국가의 개입을 허용했어. 그렇다면 가톨릭 입장에서는 어떨까? 그들도 참된 종교가 모욕당한다고 느껴서 개신교를 박해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것은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국가를 신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칼뱅 읽기야. 당대는 칼뱅의 관점이 주류였고 대세였지만,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워. 지금 우리 시대를 ‘포스트’(post)라고 하잖니. 기독교 이후 시대 혹은 탈기독교 시대이지. 기독교가 한 사회의 유일한 지배 종교이고 기성 체제의 일원이던 때는 지나갔어. 현대는 다종교 사회야.

칼뱅 시대야 종교는 곧 기독교였으니까 저런 논리가 성립한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어림없는 소리지. 그러니 칼뱅의 논의를 재고하고 지금 우리 시대에 맞는 국가 이해를 모색해야 해. 이 또한 아빠의 숙제이기도 하고. 너의 편지를 통해 플라톤의 《국가》를 제대로 읽고, 아빠의 신학을 숙성시키는 계기가 될 것 같구나.

희림아, 우리의 대화를 ‘나는 누구인가’에서 시작했지. 나를 묻는다는 것은 곧 나와 다른 타자로서의 ‘너’에 대한 물음과 연동되지. 그 타자와의 만남은 서로 다름, 어긋남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유발하고, 그 폭력은 국가를 캐묻게 했지. 너의 대답도 궁금하지만 우리의 대화가 어떻게, 어디로 흘러갈지 자못 궁금하고 기대가 되는구나. 열심히 책 읽는 네 뒷모습을 흘낏 쳐다보고 있단다. 너의 답장을 기다린다, 사랑하는 아들아. 


 

김기현
로고스교회 담임목사이자 로고스서원 대표로, 코스타 강사, <매일성경> 집필자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기독교 세계관, 평화주의, 변증, 성경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 이선숙과 아들 희림, 딸 서은이 있다. 지은 책으로 《성경 독서법》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가룟 유다 딜레마》 《예배, 인생 최고의 가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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