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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내려가기' - 플라톤의 《국가》
[346호 부전자전 고전] 플라톤의 《국가》 읽기
[346호] 2019년 08월 28일 (수) 12:00:34 김희림 goscon@goscon.co.kr

1.
편지를 쓰면서 예상치 못한 고전이 자주 등장했지만, 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그야말로 흠칫 놀랐네요. 아빠의 사고가 칼뱅의 신학과 결을 상당히 달리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칼뱅의 국가관을 충실히 옮겨냈다는 점에서 저번 편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방대한 양의  《기독교 강요》 중에서도 국가에 초점을 맞추어 하늘과 땅의 이중 정부가 존재하며 서로 다른 두 정부는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칼뱅의 국가론. 아빠가 스쳐 지나가듯이 말한 것처럼 확실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도 접점이 있네요.

   
▲ 《국가》한국어판 표지

저번 편지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국가를 주제로 하는 대화에서 저는 플라톤의  《국가》(서광사)를 다뤄보려고 해요. 플라톤의 사상과 그의 책 《국가》가 너무도 유명하기에 그만큼 오해도 많은데, 한 국가의 목적과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면서 《국가》를 읽어볼 생각입니다. 물론 아빠의 편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이중 정부’ 개념을 활용해서 연결 고리를 지어볼 거고요. 아빠라면 눈치채셨겠지만, 칼뱅이 이야기한 정부와 국가의 개념은 방금 말했듯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밀접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신학적으로 계승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굉장히 먼 시공간을 두고 있지만 칼뱅은 플라톤의 학문적 아들뻘이네요.

그런데 사실, 칼뱅뿐 아니라 서양의 사상이란 게 모두 플라톤의 영향력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이쯤에서 항상 인용되는, ‘모든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말만 보아도 그렇지요. 플라톤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하려는 전통과 그를 거부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대안들이 한데 뒤엉켜 용솟음치며 발전해온 것이 서양 철학사라고 보는 데 이견이 있는 철학사가는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의미에서 ‘부전자전 고전’에서 플라톤을 다루지 않을 수는 없고 개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국가》를 골랐어요. 철학도로서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책이지요.

2.
저번 편지(2019년 7월호)에서 저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다루면서 자연 상태에서 폭력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막강한 절대 권력을 중심으로 체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홉스의 주장을 옮겨 보았었죠. 그런데 그렇게 안정적인 국가를 건설한 이후에도 그러한 폭력에 기반을 둔 권력이 지속 가능한 정치 체제일까요? 어쩌면 어수선한 상황을 다 정리하고 국가가 안정된 시대에 1인 권력자가 계속 철권을 휘두르는 것은 도리어 체제의 안정성을 해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통치자라고 하더라도 집단을 통솔하는 데에는 그만큼 뛰어난 책략가들과 행정가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각자가 각자의 일을 하는 관료제가 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국가가 지향하는 지점은 흥미롭게도 전문화(specialization)입니다. 질서와 조화를 이룬 국가에서 크게 셋으로 나뉜 이들이 각자의 일을 합니다. 통치자는 지배하고, 수호자는 군경의 역할을 하며 생산자는 배당 받은 일을 수행하는 것이에요. 다음의 구절이 잘 요약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이 세 계급,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계급과 생산 계급과 수호자 계급, 이들 계급 각각이 공동체에서 저들 계급에 합당한 기능을 수행하고, 저들이 맡은 바 일을 다할 때, 그럴 때 그것이 도덕이고 그 공동체가 도덕적인 공동체가 된다는 것인가요? … 세 계급 가운데 어느 한 계급이라도 다른 두 계급에 진입하거나 그들 사이에 역할이 서로 바뀌는 것만큼 공동체에 크나큰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 없을 것이오. ‘범죄 행위’라는 말이 이보다 더 적합한 경우가 어디에 있겠소?”(434b)

플라톤의 생각에는 각자가 각자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곧 ‘도덕’입니다. 듣자마자 곧바로 반발심이 생기기 쉬운 이야기입니다. 언뜻 보기에도 계급 제도를 지지하는 것이고, 그뿐 아니라 계급 간의 이동마저 제한하는 폐쇄적인 사회를 그리는 것이니까요. 어디 그뿐인가요? 통치를 담당하는 계급이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제대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잘 알려졌다시피 이 통치 계급은 사실 철학자입니다. 참된 것을 아는 철학자가 통치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진리 따위를 안다고 주장하는 엘리트들이 지배 계급의 위치를 공고하게 다지는 것이 플라톤이 말한 조화로운 국가일까요?

우선 두 겹의 색안경만큼은 벗어던져야 합니다. 첫째는 마르크스적 계급이고, 둘째는 푸코적 관리입니다. 두 현대적인 사고 모두 억압하는 주체와 억압 받는 객체를 상정합니다. 그러나 플라톤이 구성한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의 분류는 권력의 배분이 아닌 역할의 차이를 상징합니다. 통치자라고 해서 특권을 누리면서 다른 이들을 감시할 권한까지 얻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통치 계급’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권력자를 상상하면 결코 안 될 일이에요. 오히려 플라톤의 국가에서 통치자는 불행하게 교육 받습니다. 수십 년 동안 공교육을 받으면서 가족을 꾸릴 수 없음은 물론,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만 보고 자라야 하며 단일 식단(!)만 먹습니다.

3.
통치는 특권이 아니라 역할이기에, 이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플라톤은 통치자를 어떻게 교육시킬지 방대한 고찰을 서술합니다. 실제로 ‘철학교육론’이라는 수업에서도 《국가》를 주요 교재로 교육철학을 공부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번 편지에서 저는 교육학적인 문제보다도 정치철학적인 문제를 고민해보려고 해요. 진리를 아는 이가 무엇을 어떻게 통치할 수 있단 말일까요? 저는 철학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비유,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국가》의 7권 514a-517c에 걸쳐서 플라톤은 아주 이상한 동굴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동굴 안에서는 모든 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결박당해 목이 고정된 채 벽만 보고 있습니다. 벽에는 사람과 동물 형상의 그림자만이 비춰지고 있고, 모두들 그게 실제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누군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보고, 결박으로부터 탈출한 것이지요. 그는 험난한 여정 끝에 동굴 밖을 나와 그림자가 아닌 실제 세상과 하늘을 봅니다. 처음에는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이내 그는 동굴 안에서 보았던 것이 가짜임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마침내 그는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며, 보이는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그가 지금껏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인 태양’(516c)을 바라봅니다.

그는 이제 갈림길에 섰습니다. 밝고 신선한 세상을 계속 누리면서 행복하게 지낼 수도 있고, 다시 동굴로 돌아갈 수도 있지요. 아빠가 만일 이 사람이라면 이제 어떻게 행동하시겠어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최고의 것을 가질 수 있었을 때 그것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그것을 설명해 주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고 싶은 이는 정말 드물 테니까요. 그러나 플라톤은 그가 돌아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돌아가서 그가 보았던 세상을 동굴 안의 이들에게 전하지요. 그러나 그는 예상대로 많은 비웃음을 사고, 헛된 것을 보고 왔다고 무시당하다가 심지어 죽임을 당합니다.

우연히 (이 우연은 사실 중요합니다. 고된 길을 감당하기로 마음먹은 자는 누구라도 동굴로부터 탈출해 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태어난 이는 없다는 뜻이지요) 고개를 돌려 본 죄수는 예비 통치자입니다. 빛을 보았으나 어둠을 살아야 하는, 빛을 누리며 살 수 있으나 어둠 속에서 죽어야 하는 슬픈 운명을 가진 이지요. 플라톤은 빛을 본 이가 동굴로 돌아가 결국 죽었다는 극단적인 결말을 통해 스승 소크라테스를 향한 애도를 잠깐 비치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 또한 진리를 설하고 다니다가 사형으로 생을 마감했지요.

4.
아빠, 이제 왜 제가 앞에서 플라톤의 통치자라는 개념을 현대적으로 읽으면 곤란한지 자세히 설명한 이유를 아시겠죠? 플라톤의 생각에 이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서, 빛을 향한 고된 여정을 겪은 이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요. 그는 빛을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독을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동굴로 내려올 실존적인 결단을 행했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빛을 증언합니다. 많은 경우에 플라톤의 사상은 공중에 붕 뜬 이데아(Idea)로 대표되는 이상적인(ideal) 이념(idea)으로 여겨집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유명한 그림, 고대의 위대한 학자들이 대거 모인  <아테네 학당>이 대표적이지요. 그림 속에서 플라톤은 손가락을 하늘로 들고 있고, 그 옆에서는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있습니다.

   
▲ Raphael's "School of Athens" (1511)

그렇지만 플라톤은 단호히 말합니다. 올라가서 진리를 본 이라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고요.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지식을 얻는 과정으로서 올라가는 것보다 현실로 내려와서 국가를 정의롭게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한 주제지요. 《국가》의 첫 문장을 펼쳐볼까요? 소크라테스가 말합니다.

“어저께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피레우스로 내려갔었네.”(327a)

어느 글이나 그렇지만 첫 문장은 늘 의미심장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동사가 문장의 맨 뒤에 위치하는 한국어로 읽으면 이 의미심장함을 눈치 챌 수 없지요.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단어는 품사에 상관없이 앞에 배치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어로 읽는다면 숨겨진 의미가 확 살아납니다. κατέβην χθὲς εἰς Πειραιᾶ μετὰ Γλαύκωνος τοῦ Ἀρίστωνος. (kataben chtes eis Peiraia meta Glaukonos tou Aristonos.) ‘내려가다’(καταβαίνειν, kataben)라는 말이 《국가》의 첫 단어입니다. 국가의 첫 쪽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시 아테네로 ‘올라가고’ 싶어하지만 사람들의 만류를 이기지 못하고 정의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는 것도 중요한 복선입니다. 플라톤은 동굴을 한참이나 기어올라야 마주할 수 있는 눈부신 태양빛을 추구하는 철학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철학은 올라갔으면(ἀναβαίνειν) 반드시 내려가야 함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지요.

5.
각자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는 조화로운 국가를 지향한 플라톤의 국가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조금은 정치철학적인 부분에 집중해보았어요. 그런데 아빠, 이제는 플라톤의 국가론과 이전의 편지에서 아빠가 이야기한 칼뱅의 이중 정부론 사이에 뚜렷한 접점이 보이지 않으세요? 맞아요. 바로 두 세계를 잇는 다리지요. 칼뱅이 분리되나 구별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와 현실의 정부를 말하지만, 원리원칙이 되어야 할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보면 되겠어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면 누구라도 국가와 정부에 불복종할 수 있어”라고 아빠가 썼듯이 말입니다.

플라톤의 국가 또한 동굴 안과 밖을 잇는 통치자를 통한 세계를 그립니다. 그것의 원형이자 가장 이상적이고 표준적인 모델인 이데아들의 세계를 본 영혼이 그 조화로움을 현실 세계에 실천하는 공간으로서의 국가, 이러한 국가와 정부의 모습이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칼뱅으로까지 이어진 기독교적인 정치신학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인 플라톤’은 그만큼 오해되기도 쉬웠습니다. 현세와는 구별된, 선택받은 이들이 초월을 통해 추상적이고 고결한 세계로 ‘올라가기만’ 한다는 천국론이나, 땅에서 받은 육체를 버리고 신성한 영혼의 존재에 집중하는 것 또한 플라톤을 종교적으로 해석해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다리를 놓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오래된 기독교의 교리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가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해서 하늘의, 동굴 밖의 국가로 상정하고 그 참됨을 잘 번역해서 통치해야 한다는 설명을 얻기 위해서 플라톤의 《국가》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철학사의 최대 고전을 다룬다는 흥분은 컸는데 햇병아리 철학도로서 역량이 부족하기도 하고, 그 어마어마한 고전을 아빠와 저의 논의에 접목시켜서 이야기하다보니 정작 《국가》의 핵심적인 사상인 정의(justice)에 대한 담론을 다루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아빠, 다음 편지에서는 정의를 주제로 대화해보면 어떨까요? 플라톤의 정의론을 충실하게 쓰지 못한 아쉬움을 저는 그의 가장 비판적이고 충실한 계승자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메워보려고 해요. 기독교 윤리학을 오래 연구하고 가르쳐온 아빠니까 정의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빠, 정치는 언제나 더러운 것으로 여겨지곤 해요. 정치인 또한 결코 신뢰 받지 못하고, 설령 믿음직한 정치인이 등장한다고 해도 언젠가 그가 우리를 배신할 것이라는 느낌을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통치자 이야기는 이러한 우리의 정치관에 좋은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들은 나랏님도 아니고 머슴도 아닌, 안정적인 체계를 위해 행정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며, 그들이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부단히 많은 공부를 해야 하고, 그럼에도 현실로 돌아와 치밀하게 현장감을 느끼며 일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어느덧 국가에 대한 토론도 훌쩍 지나갔네요. 이제 그만큼 거대한 주제인 정의를 두고 토론할 생각에 벌써 기대가 되네요. 날씨가 무진장 더운데 아주 어려운 주제로 읽고 쓰느라 쉽지 않으실 거예요, 하하. 그럼 다음 편지와 조금은 선선한 가을 날씨를 기대하면서 이만 줄일게요!  



김희림
경희대 철학과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전공뿐 아니라 정치, 예술, 과학 등 다양한 학문에도 관심이 많은‘공부 덕후’라 할 만하다. 고등학생 시절, 신학자인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종교와 학문에 관한 대화글을 엮어 《그런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을 출간했다. 본지에 2년반 동안 ‘스무 살의 인문학’을 연재했으며, 페이스북 페이지 <철학 개그>에 올린 글들을 모아 교양철학서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2018)를 펴냈다.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만큼 베이스 기타를 시끄럽게 두들기는 취미를 즐긴다. ‘로고스서원’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청소년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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