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호 평화를 살다]

나는 빌었다. 새봄이 돌아온 날 늦은 저녁, 퇴직금으로 산 술을 앞에 놓고 나는 내가 가르친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빌었다. 그 옛날 학교 운동장에서 ‘빨갱이’를 증오하라고 웅변하던 아이들 앞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솔직히 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내가 가르친 모든 아이들을 불러내서 깊이 속죄하고 싶었다.
- 이치석, <전쟁과 학교> 서문 중

어느 초등 고학년의 전쟁 대피훈련
살아가면서 저마다 잊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듯, 나에게도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1994년 즈음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나는 뉴스에서 ‘서울 불바다’ 이야기를 들었고 어른들이 지나가듯 ‘이번엔 정말 전쟁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서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학교에서는 민방위 훈련 때 책상 밑으로 들어가는 연습을 했고, 나는 전쟁이 난다면, 그래서 어차피 죽는다면 학교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왕 죽으려면 목숨같이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랑 같이 죽어야지 내가 왜 이 학교에서 죽어야 하나.

그 날 이후, 나는 나와 세 살, 네 살 터울의 동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너희들 만에 하나 전쟁이 나면 선생님이 책상 밑에 들어가 꼼짝 말라고 할 거야. 하지만 너희들은 그 말을 들으면 안 돼. 전쟁이 났다고 책상 밑에 들어가라고 선생님이 말하면 너희들은 모든 짐을 그대로 두고 몸만 뛰어나와! 여기 조회대 바로 옆에서 언니를 만나는 거야! 알았지?”

하늘에서 포탄이 쏟아지는 것을 상상하며 어린 두 동생과 함께 안전하게 귀가할 동선을 짰다. 학교 운동장을 피해 가장자리 나무 아래를 지그재그로 뛰어 교문 옆 경비실 지붕아래 잠시 쉬었다가 교문 앞 문방구 옆 차고로 들어가서 동태를 살핀 다음, 반대방향으로 뛰면서 머리를 싸매고 여기저기 뛰어 들어가며 집까지 가려는 계획이었다. 동선이 다 결정된 후에는 동생들과 함께 실전훈련을 했다. 얼마 전 동생들에게 혹시 그 때 그 일들이 기억나느냐 물었더니 그 어렸던 동생들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정확하게 뭔지는 몰랐는데 언니가 무조건 조회대 앞으로 오라고 했고 죽어도 집에 가서 죽자고 했다는 것이다.

두어 번 정도 실전연습을 했는데 어두운 이웃집 차고에 웅크리고 앉은 나의 심정은 매우 비장하고 결연했다. 동생들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과 어떻게든 엄마아빠와 꼭 재회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까지 전쟁을 두려워했던 것인지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내 마음을 다 알 수는 없겠으나 다만 죽어도 가족들과 함께 죽겠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죽어도 가족 곁에서 죽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이 글을 쓰며 찬찬히 떠올려보았다. 그 떠올리는 과정 속에서 강력한 이미지 하나를 기억해냈다. 입가에 피를 흘린 채 죽어있던 어린 남자아이의 사진과 이승복 어린이 생가 사진, “나는 공산당이 싫다”고 외쳤다는 이유로 입을 양쪽으로 찢어 죽임을 당했다는 이승복 어린이의 사진이다.  그 사진 바로 옆에는 집의 앞마당 거적 위에 누워 있던 일가족의 사진이 생생히 기억난다. 엄마와 함께 죽어 누운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 사진은 학교에서 현장학습으로 다녀왔던 안보회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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