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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끝난 교회의 근대 체제 실험
[347호 역사에 길을 묻다: 공의회의 사회사 09]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1431-1445)
[347호] 2019년 09월 24일 (화) 10:58:45 최종원 goscon@goscon.co.kr
   
▲ Council-Florence (그림: 위키미디어 코먼스)


1. 공의회주의 운동 

유럽의 정치 지형 변화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교황이 공의회를 개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대립 교황들이 생겨난 ‘교회 대분열’의 상황에서는 교황이 더 이상 개혁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 나라를 대표하는 고위 성직자들이 참여한 공의회가 대안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3인의 대립 교황으로 인한 교회 대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개최한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는 대립 교황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 교황을 선출하여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10년 주기로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명문화함으로써 일상의 교회 관련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교황에게서 공의회로 가져오고자 했습니다.

좀 넓게 보자면 교회의 아비뇽 유수(1309)부터 교회 대분열이 마무리된 시점(1418)까지 100년은 유럽의 정치적 지형이 변모하는 시기였습니다.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는 교황이 유럽 내에서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지위를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더불어 프랑스와 같은 강력한 국가권력의 영향력으로 인해 교황을 선출할 추기경단이 프랑스인으로 채워지고 자연히 프랑스 출신의 교황들만 선출되자, 보편 교회가 전 유럽 교회의 민의를 대표하지 못하고 특정 국가를 왜곡하여 지지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황선출권을 추기경단이 아닌 각 국가별로 부여한 이유도 민의의 왜곡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근대적인 형태의 국민국가가 서서히 발전하는 정치 지형 변화는 전 유럽을 아우르던 가톨릭교회 체제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강력한 한 국가의 영향력에 의해 공교회가 좌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도적으로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공의회에 최상위의 권위를 부여하는 ‘공의회 우위설’이 생겨났습니다. 대립 교황이라는 비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 조치였을 듯한 공의회 주도의 교회개혁은, 실은 유럽의 정치 지형 변화 속에서 생겨난 ‘공의회주의 운동’이라는 흐름의 결과였습니다. 이는 교황과 추기경단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이끌어 온 전통에 대해 치밀한 반기를 든 움직임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 대분열 전후로 이른바 교황주의자들과 공의회주의자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전개됩니다.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정기적으로 공의회를 열게 한 결정에 따라 소집된 것입니다.

공의회주의 이론의 탄생
공의회주의란 교회의 최종적이고 최고의 권위를 교황이 아닌 신자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공의회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공의회주의의 등장은 다양한 층위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형성기의 공의회는 교황이 주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황은 교회를 대표하는 다섯 대주교구 중 하나인 로마 교회의 주교였기에, 그가 교리와 교회 제도에 대한 의사결정을 주도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여덟 차례의 공의회를 소집한 주체가 교황이 아닌 로마 황제였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로 넘어오면서 교황 수위권(papal supremacy) 교리가 정밀하게 다듬어지고 교회 문제에 대한 최고의 권한을 교황이 갖게 됩니다.

중세 말 공의회주의자들은 이 교회법상의 전통에 비추어 교회라는 유기체에서 수장과 그 구성원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고민했습니다. 본래 교회의 권위는 교황이라는 한 사람의 수장에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교회의 구성원에 분산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추기경 프란체스코 자바렐라(Francesco Zabarella), 추기경 피에르 다이(Pierre d’Ailly), 신학자이자 파리대학 총장 장 제르송(Jean Gerson) 등은 ‘신자 공동체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공의회가 신자들을 대표하여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콘스탄츠 공의회의 소집과 교회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중세 말에 초대교회 공의회의 성격을 고민한 데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 아래 하나로 유지되던 유럽에 세속 군주 세력이 강화되는 정치 다원화 상황의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 교회법을 제정하거나 실행할 때, 특히 교회가 성직자 과세를 하거나 세금을 인상하는 것은 국가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동의가 전제되지 않고는 실행되기 어려운 문화로 바뀌었습니다. 교황의 유일한 권한을 주장하는 교황주의자들은 로마제국의 군주제 모델을 지향했지만, 공의회주의자들은 근대 세속 국가들이 채택하는 공화제나 의회제의 유비를 지향했습니다. 이러한 공의회주의 사고 형성에는 중세 말 변화하는 정치 문화가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컨대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는 Defender of the Peace(평화의 수호자, 1324)에서 시민 공동체(universitas civium)가 정치 영역에서 최고의 주권을 가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교회에 적용하자면, 신자의 공동체(universitas fidelium)가 종교 문제에 있어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윌리엄 오컴 역시 공의회는 다양한 계층의 신자들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대표하는 집합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 운동이 탄력을 받고 강화된 데는, 당대의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관계 변화도 한 축을 차지합니다. 이는 교황 한 사람에게 집중된 권력을 성직자 대표인 공의회로 분산해야 한다는 내부적인 동인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공의회 운동은 당시 세속 국가들이 교회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교황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결정권을 취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교회 대분열은 프랑스 왕이나 신성로마제국 내의 군주들이 교회 문제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공의회에는 성직자들뿐 아니라 세속 군주들도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교황제의 파행으로 인한 교회개혁의 긴급하고도 강력한 요구는 공의회주의 운동에 강력한 추동력이 되었습니다.

공의회주의자들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정기적인 공의회 개최를 제도화했습니다. 후속적인 교회개혁의 요구는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라는 다소 긴 이름의 공의회 개최로 이어집니다. 1431년 바젤에서 소집된 공의회는 1438년 페라라로 옮겨 열렸고, 그후 흑사병으로 인해 피렌체로 장소를 옮긴 후 1445년 마무리됩니다. 장소는 바뀌었으나 연속된 의제를 다룬 것이었기에 하나의 공의회로 간주됩니다.

2. 바젤 공의회(1431-1438)

1431년 2월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교령 <Frequens>에 의거하여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공의회 장소는 신성로마제국 영토 내의 안전한 자유도시 바젤로 정해집니다. 그러나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이 2월말 사망하고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가 뒤를 잇습니다. 전임 교황과는 달리 에우게니우스는 교황권에 대한 집착이 극도로 강했습니다. 7월 공의회가 개회되었지만, 교황은 공의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공의회에 참여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왕,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제후들의 압력에 못 이겨 교황은 결국 1433년 12월에 공의회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바젤 공의회는 참가 구성원에 대한 새로운 규칙을 정하고 내부 의사결정 절차를 개정하고 사법 및 행정 기구들을 정비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개별 국민단(nation)에게 의사결정권을 일괄적으로 부여한 반면, 바젤 공의회에서는 하부 위원회를 만들어 그 위원회에 의사결정권을 분산시켰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비공식적으로는 국가별로 의사결정을 하는 시스템이 유지되었습니다.

공의회주의자들이 주도하여 소집한 공의회인 만큼, 초기에는 파리대학 출신의 급진적인 공의회주의자들이 주도했습니다. 공의회주의자들은 교황의 묵인 하에 공의회의 관할권을 실행하고자 했고, 나아가 교황을 교회의 통치자 자리에서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는 이탈리아인 교황과 이탈리아인들이 다수인 교황청에 대한, 공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프랑스 공의회주의자들의 민족 감정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새로 선출된 교황 사절들과 이탈리아 추기경단의 강력한 반발을 샀습니다. 그들은 비상 상황이 아닌 한,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재하고, 해산하고, 소집 장소를 변경할 권한이 교황에게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1435-1438년 사이 공의회에서 제기된 개혁 프로그램에는 초입세를 없애고, 교황의 교회 성직록 지명 권한을 폐지하여 성당 참사회의 선거로 성직록을 수여하도록 하고, 교황청 재판소에 항소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조치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교황 중심의 체제를 제한하고 재정을 통제하는 조치였습니다. 바젤의 공의회주의자들은 개별 국가의 교회에 자율적인 교회 통제권을 분산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지역 교구회의를 소집하는 내용도 포함시켰습니다.

공의회주의자들은 피렌체에 있던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공의회의 결정을 재가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급진적인 공의회주의자들의 시도를 교황이 반길 리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속 군주들 역시 바젤 공의회가 진행되는 상황에 실망했습니다. 공의회주의자들의 시도는 지역 교회를 교황청에서 독립시켜 완전한 행정적·사법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세속 권력이 그 영토 내의 교회에 관할권을 행사할 여지가 없어집니다. 급진적 공의회주의자들은 면벌부를 발급하는 권한도 대폭 확대하여 필요한 비용을 자체적으로 충당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세속 군주들과 온건한 공의회주의자들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바젤 공의회에서 제기한 개혁 법안들은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한편, 공의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바젤 공의회를 지켜보며 교황은 바젤 공의회의 내부 분열을 도모하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방교회와의 일치를 모색하는 것이었습니다. 1054년 필리오케 논쟁 등 일련의 차이로 인해 분열된 후에도 화해 시도는 꾸준히 있었습니다. 동·서방교회 일치 문제는 교황주의자들과 공의회주의자들의 대립구도나 교회개혁 이슈들을 한 순간에 집어삼킬 파괴력을 가진 이슈였습니다. 교황이 동방교회와 공식적으로 교회 일치를 협의하겠다는 이슈를 제기했을 때, 바젤 공의회는 급진파와 온건파의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결국 교황의 의도대로 새로운 안건(동·서방교회 일치)이 기존의 논의를 무력화해버렸습니다. 교회 일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동방교회 사절단은 동부 이탈리아를 넘어서까지 여행하기에는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공의회 장소 변경을 요청했습니다. 다수가 프랑스인인 공의회주의자들은 아비뇽에서 개최할 것을 주장했지만, 나머지 참가자들이 동방교회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결국 공의회는 이탈리아 페라라로 장소를 옮겨 열리게 됩니다.

급진적인 공의회주의자들만 바젤에 남고, 유력한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은 바젤을 떠나 페라라 공의회에 합류했습니다. 이로써 공의회 우위설을 내세우는 공의회주의자들과 교황 우위설을 내세우는 교황주의자들이 각각 다른 장소에서 별도의 공의회를 진행하며 대립을 이어갑니다. 바젤 공의회는 수적으로는 다수였지만 영향력이 크지 않았습니다. 반면, 페라라 공의회에는 소수가 모였지만 교황이 주재하는 동·서방교회 일치라는 압도적인 안건이 다루어졌습니다.

3. 페라라-피렌체 공의회

1438년 1월 페라라에서 동·서방교회 일치와 교회개혁 등을 놓고 공의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첫 번째 회기에서는 바젤에서 다루었던 모든 안건을 폐기합니다. 동방교회 대표단이 도착할 즈음에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도 직접 공의회 장소에 참석합니다. 두 번째 회기에서는 여전히 바젤에 머물러 별도의 공의회를 진행하고 있는 참가자들을 파문합니다. 그후 동방교회 사절단이 도착하자 교황이 직접 페라라 성당에서 동서방교회 대표가 함께 참여하는 회의의 사회를 맡습니다.

동·서방교회 일치와 관련하여 제기된 안건은 필리오케 논쟁, 연옥 교리, 성찬 시 누룩 있는 빵의 사용 여부와 교회 수위권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동로마(동방교회) 대표단은 매우 우호적으로 논의에 참여합니다. 그리하여 1438년 10월 동서방교회는 지난날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었던 필리오케 논쟁에 대해 합의를 이룹니다. 동방교회에서 사도신경에 필리오케를 삽입하는 데 동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페라라에서 진행되던 이 공의회는 그 지역에 흑사병이 발생하자 교황의 제안으로 이듬해 1월 피렌체로 장소를 옮겨 계속됩니다.

실상 차이에 대한 논의였지만 모든 결정은 로마가톨릭쪽에 우호적으로 내려졌습니다. 필리오케 관련 논의뿐 아니라, 성찬식 때 쓰는 빵에 누룩을 넣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서방은 서방의 전통을 지키고, 동방은 서방의 전통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합의했습니다. 교황의 수위권 문제에서는 초대교회에 형성된 5개의 총대주교구에서 로마 주교가 수위를 차지한다는 데 어렵사리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논란이 되는 사안은 ‘연옥 교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연옥 교리는 서방교회의 전통 안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논쟁 끝에 이 역시 동방교회가 수용함으로 정리됩니다.

동·서방교회의 분열 과정에 교리적인 측면 못지않게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듯이, 논쟁적인 교리에 대한 합의 과정에도 정치적인 고려가 있었습니다. 당시 동로마, 다시 말해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침략으로 큰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생존을 위해서는 서유럽의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풍전등화 같은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서방의 지원이 절실했던 동로마제국 황제는 합의라기보다는 거의 일방적인 양보를 했던 것입니다.

1439년 동·서방교회는 마침내 400년 만에 교회 일치에 도달하는 듯 보였습니다. 교황은 동로마제국 황제의 요청에 따라 동로마에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동방교회 대표단으로서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고려에 따라 이루어진 합의가 못내 부담스러웠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교회 일치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했지만, 동방교회 대표단은 그 선언이 자신들의 의견일 뿐이며 동로마로 돌아가 교회 회의에서 추인을 받아야 확정된다며 유보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럼에도 교회 일치를 선포한 공의회는 뒤이어 과거 교리 문제로 분열되었던 여러 다른 동방교회 분파들과 일치를 위한 논의를 진행합니다. 그리하여 1439년 아르메니아 교회, 1442년 시리아 정교회, 1445년에는 네스토리우스파와 마론교와도 일치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동·서방교회 일치는 실질적으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동방교회 대표단이 돌아가서 발표한 합의문은 합의를 종용한 황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동방교회 성직자와 수도사, 그리고 대중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칩니다. 황제는 이 합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서방의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오스만투르크의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합의를 수용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1453년, 이 일치 선언이 동방교회에서 실현되지 못한 채 천 년의 비잔틴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합의를 실행할 당사자가 없어진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5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마침내 공식적인 동·서방교회 일치를 선언합니다. 물론 천 년간 이어진 불화를 딛고 화해했다는 상징적인 선언에 불과했지만 말입니다.

1445년 페라라-피렌체 공의회는 여러 성과를 얻고 마무리됩니다. 앞서 바젤에서 진행되던 공의회는 그것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더욱 과격한 안건과 급진적인 결과를 도출한 채 말입니다. 1439년에는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를 파문하고 펠릭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또 다시 대립교황이 등장하는 교회 분열 상황을 야기합니다. 이 대립은 10년간 이어집니다. 144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교황 편에 서자 결국 펠릭스 5세가 스스로 교황직에서 물러남으로써 또 다른 교회 분열은 종식됩니다.

4. 공의회 운동, 그 실패의 교훈

바젤 공의회 진영의 패배는 교황주의자들과 공의회주의자들의 대립에서 교황주의자들이 승리했음을 의미합니다. 공의회주의자들이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10년마다 공의회 개최를 결정한 규정을 교황은 더 이상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후속 공의회인 제5차 라테란 공의회가 개최되기까지는 72년이 걸립니다. 이 공의회는 흥미롭게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해인 1517년까지 열립니다. 상징적으로 보자면 공의회 운동의 실패로 개혁의 동력을 상실한 교회는 종교개혁으로 전환점을 맞기까지 또다시 70여 년의 바벨론 유수와 같은 상황을 맞이합니다.

역사적인 평가로 보자면, 콘스탄츠 공의회를 거쳐 바젤 공의회까지 이어진 공의회 운동은 실패했습니다. 공의회를 통한 교회개혁은 실행되지 못했고, 공의회를 기대하던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중세 말 공의회 운동은 대립교황으로 상징되는 교황권 타락을 견제하고 교회를 정화할 충분히 설득력 있는 대안이었습니다. 교황과 소수의 추기경단이 아닌, 전 유럽의 교회를 대표하는 국민단이 정기적으로 소집되어 중요한 의제를 논의하고 결정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시도였습니다. 1인 또는 소수에 집중됨으로써 고인 물이 되어 타락하기 쉬운 권력을 골고루 분산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했던 것입니다. 국민단을 중심으로 교회 의제를 결정하려 했던 공의회주의자들의 이 실험은 당시 점진적으로 모양을 갖추어 간 근대 국민국가를 모델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의회 운동이 지속적인 호응을 얻지 못하고 끝내 무산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이상과 현실의 간격이 컸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공의회주의가 내세운 ‘권력 분산을 통한 교회개혁’이라는 이상은, 현실 세계에서는 교황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이 국가라는 영토 내의 교회로 전환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권력 분산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로 교회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의회주의 운동을 지지하던 한 축인 왕들이나 제후들이 주저했습니다. 그리하여 세속 권력이 공의회 우위설을 내세운 이들에 대한 지지를 끊었습니다. 둘째, 공의회주의자들이 패배한 주요 원인 중 가장 실질적인 것으로는, 그들이 내세운 개혁 과제들이 세속 통치자들에게 어떠한 유인책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황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여 지역 교회에 자치권을 주는 것이 공의회 운동의 목표였다면, 세속 군주들의 관심은 한 발 더 나아가 통치 지역 내의 교회를 일정 정도 국가의 영향력 아래 두어 그들 자신이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황권 견제라는 대의는 같았지만, 공의회주의자들과 세속 군주들은 서로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습니다. 급진적인 공의회주의자들이 바젤 공의회에서 면벌부 판매권 확대 결정을 통해 독자적인 재정 조달을 추진한 것은 교황권과 세속권 양쪽으로부터 독자적인 교회를 유지하려는 의도로 읽힐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서 이러한 의도가 드러나자, 공의회주의 운동은 쉽게 동력을 상실했습니다. 중세의 교회개혁이 성공했을 때는 비움과 버림의 사도적 청빈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교회개혁이란 대의가 권력 분점으로 비치자 지지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대의명분, 자기 부인, 자기 포기, 도덕성.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놓칠 때 대중은 쉽게 등을 돌려버립니다. 그래서 체제 내에서 변혁하려는 시도는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습니다. 

개신교라는 자의식에서 벗어나 담백하고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면, 종교개혁은 개혁을 주장했던 교회가 과도하게 세속 군주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 사건이기도 합니다. 공의회주의자들이 내세웠던 ‘교황 중심제를 벗어난 교회 자치와 권력 분산’의 이상은, 세속 군주들이 자기 영토 내의 교회를 통제하게 되는 기대하지 않은 방식, 곧 국가주의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불편한 얘기이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교황의 통제에서 벗어났지만 종교개혁은 세속 군주의 지지 없이는 지속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관점을 확대하면, 종교개혁의 결과 교회와 국가(세속) 권력의 긴장이 사라져 둘의 경계가 희미해진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5. 나가며

역사는 이상적으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사라고 하여 예외는 아닙니다. 변곡점을 만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은 여러 현실적인 조건이 부합해야 합니다. 공의회주의자들은 중세 말 체제 내의 개혁가들입니다. 체제 내의 권력 분산을 통해 더 나은 교회 구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번의 승리로 급진적이 되어 과도한 존재의식을 드러냈을 때 체제 내 개혁은 좌초되었습니다. 공의회주의자들의 처절한 실패는 두고 두고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교회개혁은 ‘버리고 놓을 수 있는 용기’를 전제해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교회의 존재는 권력과 사회에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국가를 포함한 사회에 줄 수 있는 최대치의 긴장은 도덕적 윤리적 긴장일 것입니다. 이 긴장이 사라지고 교회마저 권력 다툼이나 영향력 행사에 치우칠 때 개혁의 동력은 곧 사라졌습니다.

바젤에서 페라라, 그리고 다시 피렌체로 이어지면서 15년 가까이 진행된 공의회 동안 그 공간적인 우여곡절만큼이나 여러 외생적 변수가 등장했습니다. 동·서방교회 일치 논의, 흑사병, 오스만투르크의 서진, 비잔틴 제국의 쇠락, 또다른 교회분열 등이 뒤얽혀 있습니다. 마치 중세 말의 혼란한 사회상을 당대 교회가 고스란히 안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중세 천 년 동안 개혁의 주체였던 가톨릭 교회는 이 혼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종교개혁은 그 혼란의 필연적인 파생물입니다. 

■ 연재 순서
1. 왜 지금 ‘공의회’인가? : 사회사 관점으로 교회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2.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위로부터 이뤄지는 교회 개혁의 전형 :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4. 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교회, 그 빛과 그림자 : 제3차 라테란 공의회
5. 가톨릭 교회, 삶과 죽음의 지배를 완성하다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6.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제 1, 2차 리용 공의회
7. 교회여, 낮은 청빈의 자리에 설 수 있는가? : 비엔나 공의회
8. 교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 콘스탄츠 공의회
9. 실패로 끝난 교회의 근대 체제 실험 :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
10.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1. 트렌트 공의회
1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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