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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힘'인가 -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347호 부전자전 고전]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읽기
[347호] 2019년 09월 24일 (화) 11:00:55 김기현 goscon@goscon.co.kr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1.
사랑하는 아들아,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한 너의 독해를 잘 읽었다. 안 그래도 이번 가을과 겨울은 《국가론》과 김용규 선생의 《신》을 집중적으로 읽으려던 참이었어. 네 글이 자극을 주었고, 공부의 실마리가 되겠다 싶다. 자기를 비워 종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나 자기 비움과 흡사하더구나. 예수의 자기 비움(케노시스)을 불교의 공(空) 사상과 비교하는 글이 많은데, 차라리 플라톤과 연결하면 얻을 것이 많겠어.

너는 아빠에게 정의(justice)에 대해 토론하자고 했지. 그 제안을 받고 우리의 대화를 복기해 보았단다. 도대체 ‘나’란 존재는 누구인가에서 내가 아닌 ‘너’, 곧 나로 환원되거나 축소되지 않는 고유한 개별적 존재로서의 ‘타자’에 대한 논의로, 나와 타자 사이의 폭력으로, 폭력의 독점권을 갖고 있는 국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지.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신적 위치를 대신하는 부당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그 강제력을 통해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중대한 주체이지.

그 연장선에서 아빠가 고른 책은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buhr)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문예출판사)란다. 그는 국가의 본질을 강제력으로 보는 점에서 대다수 정치철학자들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그 강제력에 한계를 부여하지. 강제력이 과하면 폭정과 독재가 되고, 강제력이 없으면 무정부적이 되기 때문이야. 이 점은 존 요더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독재와 무정부라는 양 극단 사이를 찾아내려고 무던 애를 쓰지. 하여간에, 국가가 강제력을 가지고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니버의 핵심 주장이란다.

이렇듯 니버는 양 극단을 지양하고, 긴장과 대립을 어느 한쪽으로 해소하지 않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한단다. 이것은 니버의 변증법이다. 대립하는 모순 사이에서 통일과 종합이 가능하다고 보는 점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과 일치하지. 다만, 헤겔은 종합에 방점을 찍는 긍정의 변증법이라면, 마르크스는 (이는 헐버트 마르쿠제의 해석인데) 모순에 강세를 주는 부정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지.

허나, 니버는 통일과 종합에 대해 끊임없는 회의를 보내지. 인간에게 절대적 통일이랄까 보편적 일치란 유한한 인간성에 비추어 볼 때 절대 불가능하거든. 어설픈 종합을 취하고, 그 종합이란 것도 기실 자기 이익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지극히 현실적인 방략이겠지. 절대적 정의에 비추어 상대적 정의를, 절대값이 아닌 근사치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허락된 정의에 이르는 길인 셈이지. 국가가 아니라 정의가 우리의 주제이니 이쯤하고, 니버의 생애를 정의의 관점으로 읽어볼까.

2.
신학에 익숙하지 않는 이들은 종종 헷갈려 한단다. 어거스틴과 아우구스티누스를 혼동하듯이 말이야. 또 다른 니버가 있거든. 리처드 니버. 그는 《그리스도와 문화》(IVP)의 저자이고 친동생이야. 예일대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제자 양성에 힘을 쏟은 그가 정통파라면, 유니온 신학교 교수이던 형 라인홀드는 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인 참여형 신학자 혹은 정치 철학자에 가깝지.

이 집안이 신학 쪽으로는 명문가야. 그들의 큰 누이인 훌다도 명문인 맥코믹 신학교 교수였고, 동생 리처드의 아들은 하버드에서 슐라이어마허를 가르친 일급 신학자이었지. 라인홀드의 아내인 우르술라도 버나드 대학교에서 가르친 신학자였어. 미국 신학교는 니버 집안이 다 해먹는다는 우스개가 있었을 정도로, 정말 대단한 신학 패밀리야.

사람들은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에서 결정적 요소를 흔히 디트로이트에서의 목회 경험이라고 말하곤 해. 그는 탁월한 신학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목회를 선택했어.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닌, 칼 바르트 식으로 말하면, 학교 강단에서만 가르치는 신학이 아니라 강대상에서 설교할 수 있는 신학을 원했어. 신학의 모태는 언제나 교회야. 제 아무리 학문적 성취가 빛나고, 우람한 성채를 쌓고, 천사의 말이나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에 능통한들, 교회가 없다면 음을 가늠할 수 없는 시끄러운 꽹과리에 지나지 않아.

니버는 자동차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도시, 그 유명한 헨리 포드의 자동차 회사가 있던 디트로이트에서 13년을 보냈어.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볼트를 죄던 채플린의 우스꽝스럽지만 울고 싶고 화가 치미는, 합리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던 그곳에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현대 산업 사회를 적나라하게 목격한다. 거기서 그는 인간의 죄성을 그 밑바닥까지 들여다 보게 돼. 인간의 죄악됨 그리고 하나님의 초월적 은총을 말한다는 점에서 칼 바르트와 함께 미국의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분류하곤 하지. 이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도 정치와 사회에 대한 신학적 접근이야.

3.
아빠는 독일계라는 그의 출신 배경과 아버지의 영향도 목회 경험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본다.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니버는 사회 참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성향과 예수의 신성과 기적을 확고히 믿는 복음주의적 성향을 고루 갖추고 있었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조화 속의 긴장, 긴장 속의 조화를 유지하는 니버의 신학이 아버지에게서 왔을 거야.

부친은 18세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였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교단 목회자였어. 니버도 영어가 서툴렀다고 해. 신학교에 입학해서 ‘미국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는구나(전재성, 《정치는 도덕적인가》, 한길사, 41쪽). 그때부터 독일어보다는 영어 구사능력을 갖추고,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미국 땅에 사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어. 이민자요 소수자인 그가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한 거지.

추정하건대,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마이너리티 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고 봐. 주류에 편입되려는 은근한 열망을 품고, 주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일평생 버리지 않고 견지하게 했지. 참여하면서도 자기 비판적인 거리를 늘 확보하고. 그런 이중적 스탠스를 버리지 않은 것은 신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이지만, 니버의 성장 배경도 한몫했을 거야.

그는 젊어서는 미국의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중도 좌파’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는 마르크스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는데, 점차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서지. 이때만 해도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었어(6장). 그래서 그런가? 민주당의 지미 카터가 애독했고, 버락 오바마도 영향을 받은 책이기도 해.

4.
그런데 니버는 한국의 기독교에도 강한 영향을 행사했단다. 언론학자이면서 인물 비평으로도 유명한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가 종교계를 다룰 때, 불교는 법정, 기독교 보수는 손봉호, 기독교 진보는 강원룡을 다루었단다. 여기서 놀랍게도 기독교 보수와 진보의 대표 인물을 잇는 한 인물과 한 책이 있었으니 바로 니버와 이 책이야(<인물과 사상> 16호〔2000년 10월〕, 73-75쪽). 손봉호는 성경 다음으로 재미있는 책이라고 했고, 강준만은 강원룡을 아예 한국의 라인홀드 니버로 부르자고 했을 정도니까(120-128쪽).

니버는 한국 정치학계에도 연구자가 여럿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니버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대학 강단에 선 이들도 좀 되고. 아빠가 이 책을 집중적으로 읽는다는 소식을 들은 모 방송국 PD는 그러더라. 정치학과 출신인 그는 니버가 신학자인 줄은 까마득히 몰랐다고, 나중에야 알았다더구나. 신학자이면서도 정치철학자인 그는 한국 기독교와 정치를 이어줄 수 있는 하나의 고리가 될 거야.

그런데 희림아, 아빠에게 니버는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아. 세 가지 이유 때문이야. 하나는, 80년대 말이거나 90년대 초에 당시 연세대 신학과 노정선 교수의 책에 인용된 니버의 다음 문장을 봤거든. “미국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이 반대하더라도 무력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어. 아연실색했지.

두 번째는 칼 바르트를 읽을 때인데, 헝가리와 체코 등 동유럽이 사회주의화되었을 때, 바르트는 예레미야 29장에 입각해서,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법을 배우라는 편지를 보내지. 그것이 언론에 공개되고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렸지. 그때 니버도 반박 글을 썼단다. 바르트는 사회주의자라고. 이에 바르트는 ‘바로 네가 미국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쏘아붙여. 자본주의 하에서도, 사회주의 하에서도 기독교는 기독교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둘 사이를 일치시키면 위험해.

세 번째는 존 요더 때문이야. 니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아마도 요더일거야. 정치철학보다는 기독교 윤리 측면에서 니버의 폭력·전쟁 옹호, 그리고 산상수훈의 약화에 대해 날카롭게 반박했지. 정치철학 쪽으로는 과문해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보건대, 아빠는 요더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 이것은 범위를 벗어난 것이니 이쯤하기로 하자.

이 책을 정독하면서 바르트와 바르트의 제자인 요더의 눈으로만 니버를 읽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어. 니버의 목소리를 날 것 그대로 들으면서 사상의 깊이와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더구나. 무릇 공부는 ‘1차 텍스트 읽기’이지. 르네상스 당시의 인문학 부흥의 모토는 너도 알다시피 1차 자료를 직접 읽자는 것이었잖니. 아랍을 경유하고 재탕으로 번역된 텍스트가 아니라 원천으로, 원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지. 니버는 니버로 읽어야 하니까 비평은 자제하고 그의 목소리를 정의라는 관점에서 요약해볼게.

5.
이 책의 내용은 제목만 이해하면 충분해. 논지는 간단한데, 논리는 심오하지. 개별적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도덕적이라도, 도덕적인 사람의 집단은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는 거야. 저것이 함의하는 바는,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 개인 윤리의 잣대로 정치 사회적 행동을 재단하지 말라는 거지. 사회는 개인과 전혀 다른 영역이고 다른 규칙에 의해 작동해.

그랬기에 니버는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그것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를 인식할 것을 요구하지. 공과 사는 엄연히 구분되지만, 분리되는 것도 아니지.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정치인이나 공직자를 개인 윤리라는 잣대만 들이대는 것은 둘 사이의 경계를 간과한 거지. 아빠가 더 걱정스러워하는 것은 자기 반대편을 공략할 때, 모두가 성직자가 되는 거야. 정치가 아니라 종교이고, 정치인들이 죄다 사제가 되더라.

그럼 왜 개개인을 만나면 그토록 선한데, 사회라는 시스템 안에 있으면 인간은 비도덕적인 존재가 되고 비도덕적 행위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걸까? 칼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개별 존재로서 그는 자상한 아빠, 상냥한 남편, 친절한 이웃, 독실한 신앙인인데 왜 유대인 학살이라는 그토록 끔찍한 기획과 실행을 하고도 일말의 가책도 없을까? 나치 체제하의 독일인과 천황제하의 일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니버의 대답은 그야말로 소름 돋더구나. 개인적 이타심이 사회적 이기심이 된다는 거야.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자기희생과 양보를 전제로 해야 하잖니. 자기희생적 이타심의 극대화는 뭘까? 흔히 타인〔大〕을 위해 자신〔小〕을 내던져 희생한다고 할 때, 이를 집단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집단 이기주의가 될 수 있는 거지.

그 집단 이기주의의 극치가 국가주의라는 거야. 국가를 위해 나 한 몸 던지는 것은 그야말로 이타심의 절정이 아니겠니. 예의 바른 한 개인이, 벌레 한 마리 잡지 못할 위인이 타인에게는 무섭도록 잔인할 수 있고, 살인을 하고서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국가라는 참되고 더 큰 ‘나’를 위해 한 일이어서 그래. 대의를 위한 헌신이고 국가에 대한 충성이기에 영웅 대접을 받는 거지.

다음 질문은 이거야. “항상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정글”(149쪽)인 사회를 어떻게 제어할까? 니버는 설득과 조정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단다. 인간은 얼마간은 이성적이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목회 경험을 통해 논리나 설득, 대화와 토론으로는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는 사업주와 노동자의 대화에서 누가 논리적으로 정당하고 도덕적으로 정의로운지가 아니라, 누가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협상이 결정된다고 해(47-48쪽).

최종 결론은 정치란다. 약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조직화하고 세력화하기 전에는 사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달았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도덕이 아닌 정치에 눈을 떠야 한다는 거지. “인간 사회의 정의를 획득하기 위한 싸움에는 정치가 꼭 필요”(43쪽)해. 정치를 도외시하는 근엄한 서당 훈장님 태도로는 이 세상을 바꾸지 못해.

오히려 그런 도덕적인 개인이 더 위험하지. 그들이 아무리 도덕적이라도 자기 문제가 되면, 달라지지. 아무리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도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면 더 이상 이성적이지 않다”(107쪽)는 힘의 논리가 횡행하고, 그 이성과 논리라는 것도 강자의 이익에 복무하는 애완견에 다름 아니야. 얼마든지 비열한 행동이라도 이성으로 멋드러지게 정당화할 수 있는 위인들이니까.

그 다음이 문제야. 그들은 지적 우월성을 갖고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는 탁월하거든. 그러면서도 위선적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지. 그들은 이성적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이성적으로 살지는 않아. 그러면서도 남에게 이성과 도덕을 설교하는 위선과 기만에 빠지지. 기시감이 들지 않니? 1930년대의 미국인 니버가 2019년의 한국의 정치 상황을 간파하고 있으니.

6.
니버가 힘의 조직화를 역설한 것은 우리 시대에도 적절하다고 봐. 소위 386세대가 다 해 처먹는다는 요즘, 지금의 20대에게 정의란 무엇일까? 대안은 또 어떤 걸까? 한국 사회 불평등의 주범으로 386세대를 지목한 책, 그들이 권력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을 통계와 수치, 도표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에서 이승철은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 그것들은 뭉뚱그려 말하면, 윗세대의 자발적인 자기희생을 요구하고, 국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다음 세대를 위한 맞춤형 청년 복지를 펼치자는 거야(7장).

니버의 주장으로 본다면, 조정과 설득을 통한 정치이지. 그렇기에 힘의 논리를 간과한 것은 아닐까 싶어. 어느 세대가, 어떤 인간이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주머니와 통장, 부동산에 깔아놓은 돈을 자발적으로 내놓겠니. 386에게 위임하고 대리했던 정치를 끝내고 스스로 목소리를 낼 것, 그래도 안 되면 표로 심판할 것, 이게 해결책이더라. “시민사회는 표로 응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334쪽)

글쎄다. 힘의 조직화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앞선 세대의 선의에 의해 쟁취한 것은 유리그릇이 아니고 뭘까. “제국주의 형태건 계급 지배 형태건 집단적 힘이 약자를 착취할 때, 그것에 대항할 세력이 형성되지 않는 한 그 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43쪽) 정치를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쉽사리 해결하기 어려울 거야. 그러니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거야.

386은 386이 당면한 시대적 과제가 있었고, 진지하기 짝이 없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산업화 세대를 치고 올라왔다면, 20대는 20대의 어젠다를 갖고 경쾌하고 발랄한 그들의 방식으로 민주화 세대를 치받고 밀어내야 할 거야. 그러자면 정치 세력화되지 않고서는 어렵지 않을까? 이것도 고전적이고 고답적인 접근이니, 아들?

7.
정의를 위한 종교의 역할은 뭘까? 니버는 종교의 자기초월적 능력을 사회에 제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자기초월 능력이란 인간이 “타인과 자신의 환경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85쪽) 보는 것이라고 해. 니버는 그의 대작인 《인간의 본성과 운명》(종문화사)에서 진정한 자기초월 능력은 절대자인 신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어. 그랬기에 이성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해. 게다가 이성은 욕망과 충동의 노예이거든.

그러면서 그는 적 안의 악이 내게도 있다는 것, 그 적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 ‘사랑의 충동은 종교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한 선물’(360쪽)이라고 해. 그러니까 종교는 자신에 대해서 교만하지 말 것, 타인을 악마화하지 말 것을 선포해야 한다. 박근혜와 문재인을 비판하지만, 내 안에 박근혜와 문재인이 있거든.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은 내 안의 그것과의 투쟁의 연장이자 확장이어야 해. 그것 없이는 인간은 교만해지고, 자신의 신념과 욕망을 우상화하는 우를 범하고 말아.

타인을 악마화하지 말라는 뜻이야. 그도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 내게는 악마처럼 보여도 그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 그것을 잊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되어서 타인을 심판하는 자가 되는 거지. 그것은 신의 주권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야.

그리고 니버는 정의의 종교적 기반을 역설해. 정의는 정의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거야. 인간의 상대적 정의는 초월적인 절대적 정의의 눈금이 있어야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고, 겸손해지고 타협이 가능하거든. 모두들 정의를 말하지만, 어떤 정의이고 누구의, 누구를 위한 정의인지 물어보면, 기실 그것은 자기의 정의거든. 그렇기에 신의 정의라는 절대적인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 절대적 기반은 뭘까? 니버는 사랑이라고 말을 해. 이 책에서 니버는 정의와 사랑을 서로 다른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종교는 사랑을, 사회는 정의를 말하는 곳이라는 거지(121쪽). 그러나 나중에는 사랑이 정의를 포섭하지. 이기적이고 타락한 인간 사회에서 정의는 최선의 윤리이자 목표이지만, 변질되기 쉬운 정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 오기 때문이야.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 곧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난 아가페적 사랑 말이야. 그 사랑의 실제적 구현체가 정의이고. 정의는 사랑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하고, 사랑은 정의로 발현되어야 하지. 그래서 말인데, 다음 주제는 ‘사랑’이 어떨까? 정의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더 근원적인 사랑 말이야.
아빠는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한단다. 꼴도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게 되는 저들이 로고스교회 교인이라면? 치 떨리는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과 연민을 품었겠지. 그를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을 거고. 이것이 종교인의 감상에 불과하다고 타박할 이도 있을 거야. 그러나 그게 종교이고 목사란다.

8.
그럼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의 모습은 무엇일까? 니버는 그것이 “완전한 평화와 정의로 충만된 이상적 사회의 건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의는 있되 그의 공동 작업이 전적으로 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강제력이 충분히 비폭력적인 그런 사회의 건설에 있다”(81쪽)고 말해. 그가 부정문으로 말한 앞부분을 보렴. 그는 우리가 인간인 이상, 이상사회란 결코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것을 지향할수록 우리는 더 위선적이 되거나, 폭력적이 되겠지. 무지에 의해서든, 욕망에 의해서든 그 자신이 결코 이상적이지 않은 우리 인간이 이상사회를 만들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자기기만이 아니고 무엇이겠니. 그 불가능한 꿈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순간, 그것은 타인들에게 지상 명령으로 요구하고 강제하겠지. 그럴수록 우리 사회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거야.

이상사회 모습이 각기 다르거든. 이상사회라는 단어는 같지만, 그 속에 우겨 넣은 각자의 로망이 표현될 때, 상충될 수밖에 없고, 절대적인 것이기에 어떠한 대화나 양보가 원천 차단되어 버려. 그러니 강제력에 의해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고, 강제력을 발동하는 순간, 각자의 이상은 자멸하고 말아.

그들이 각자 그려낸 아름다운 세상에 폭력을 새겨 넣은 이들은 아무도 없거든.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고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그런 세상을 위해 지금 당장은 먹어치워야 한다고 달려드는 순간, 일시적이라는 핑계를 둘러대지만, 자신의 대의를 스스로 짓밟은 거지. 그러기에 기대치를 바짝 낮추고 상대적인 정의를 실현하도록 해야 해. 

아들아, 니버에게서 정의를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원했다면 허탈해질 거야. 아빠 또한 그랬으니까. 차라리 존 롤즈나 로버트 노직의 글을 읽는 게 낫지. 니버는 신학자요 정치철학자답게 메타적 접근을 하면서 정의가 정의되기 위한 전제와 조건을 꼼꼼히 따지는 쪽이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이 필요하고, 그것의 한계를 설정하자는 니버의 주장에 대한 너의 생각이 궁금하구나. 그리고 네가 어떤 책으로 정의를 말할지도 무척 기대된다. 그리고 이제는 50대 중반이 되어버린 아빠에게 20대의 감수성과 언어와 사유로 펼쳐질 너의 정의론이 두렵기도 하고. 네 답장을 기대하마. 



김기현
로고스교회 담임목사이자 로고스서원 대표로, 코스타 강사, <매일성경> 집필자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기독교 세계관, 평화주의, 변증, 성경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 이선숙과 아들 희림, 딸 서은이 있다. 지은 책으로 《성경 독서법》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가룟 유다 딜레마》 《예배, 인생 최고의 가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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