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호 제국과 하나님 나라] 고린도후서 읽기 2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사도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문제 삼은 것을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출세 스펙에 그가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장대한 바울의 계획이 고린도에서 난관에 부딪쳤다. 고린도 공동체의 본질적 문제는 간단히 말하면 경제적 자본(돈)을 가진 자와 사회적 자본(명예)을 가진 자, 둘 다를 가진 자, 그리고 둘 다 가지지 못한 대신 종교적 자본에 기대는 사람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었다. 이런 갈등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타락은 단순히 돈과 명예를 좇는 풍토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돈과 명예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박탈감과 영적 자본에 기댄 사람들 간의 갈등과 충돌도 있고, 탈출구를 찾지 못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스펙사회가 된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돈과 명예를 중시하는 한국의 기득권 사회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좀 더 높은 교육 환경과 명문대 간판을 제공하기 위해 강남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교육 엘리트 집단을 형성해왔다. 정치와 교육계는 이에 발맞추어 오랫동안 이들이 더욱 높은 교육의 혜택을 얻으면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기형적으로 대입 전형을 변화시켜 왔다. 그에 따른 결과로 부유층 자녀들이 절대적으로 많이 명문대에 입학하는 현상이 계속되어 왔다. 현재 논란이 심화되고 있는 조국 법무부 장관은 한국 정치에 중요 과제로 여겨져 왔던 검찰 개혁에 적임자로, 그에 알맞은 연구업적과 자격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이 글은 조국 전 장관 사퇴 전 탈고한 것이다. - 편집자) 그러나 그는 강남지역 출신으로 자녀들에게 그에 걸맞은 교육환경을 공급해왔다. 그의 딸이 전형적인 부유층 자녀들의 방법으로 대학에 입학했고, 거기에 어느 정도 편법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조국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삽시간에 돌변했다. 돈과 명예 둘 중 하나를 가진 사람들은 그를 위선자라 불렀고, 둘 다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비판에 편승했다. 정치적으로 개혁적 마인드를 가진 중산층 이하 사람들은 그의 도덕성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영적 또는 도덕적 가치를 대안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의 정의롭지 못함에 등을 돌렸다. 이것이 보여주는 한 측면은, 어쩌면 오늘의 사람들에겐 한국 정치의 개혁이 그리 큰 관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변화에 대한 열망은 그저 허울 좋은 겉치레에 불과할 뿐, 그들의 욕망은 돈이나 명예, 또는 그것을 약속해주는 스펙에 치우쳐져 있다. 그 욕망은 성공할 수만 있다면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걷고픈 사람들의 감춰진 욕망일지도 모른다.

욕망이 소용돌이 치는 시대
만인이 따라야 할 무조건적인 ‘정의’를 더 이상 만들려고 하지 않는 시대. 흔히 포스트모던이라고 또는 후기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무조건적인 정의를 만들려고 했던 시도는 언제나 독재나 파쇼 정치를 낳았고, 자본주의는 좀 더 다양한 인간의 욕망들이 자유로운 상상의 날개를 펴길 원했다. 결국 천편일률적으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시대를 벗어나, 다양성을 추구하며 개인의 자유로운 소비 욕망을 인정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마치 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듯이 유튜브나 1인 미디어를 통해 철학이나 담론 또한 자유롭게 골라 학습하고 그것을 따른다. 그러한 욕망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정의’와 ‘도덕’에 대한 판단은 너무도 쉽게 개인의 잣대 안에 묶인다. 하나의 목표를 만든다고 해도, 개인과 집단의 욕망은 매우 다양해서 그들의 요구를 하나로 묶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시대의 정치는 여러 욕망들을 존중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시대적 요구를 발견하여 변화로 나아가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들 말한다. ‘정의’나 ‘진리’를 단번에 이루기는 불가능하기에, 최선보다 ‘차선’을, 차선이 없다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하는 ‘차선’이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에 좀 더 가깝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포기하고 다수결에 맡길 것인가? 때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믿고, 파도치는 여러 욕망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길 것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자유로이 넘나드는 개인의 욕망을 묶어내어 진리에 이르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길은 아예 불가능한 것인가? 바울의 대안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궤적을 천천히 따라가 보자.

‘신이 정한 한계 안에서 일하라’
먼저,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그들이 ‘겉만 보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고후 10:7, 새번역) 겉만 보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을 중심으로 놓고 세상을 바라본다.(10:12) 지금의 우리는 이를 개인주의라 여길 수 있지만, 당시 그리스-로마의 세계관을 고려하면 사회의 지배적인 관습과 고정관념을 가진 태도에 가깝다. 도덕과 정의가 세워져 있는 곳에서는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그것을 자신을 척도로 삼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정의가 사라지고 경쟁과 갈등으로 가득 찬 곳에서는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관계가 인간 사이의 중심을 형성한다. 물론 지배-피지배 관계가 단순하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가 권력관계가 될 수 있지만, 사회에서 대다수 목회자들이 중산층 이하의 생활수준으로 살며 어느 회사의 노동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복잡한 지배관계가 축이 되는 사회가 로마제국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충고한다. ‘오직 신(하나님)이 정한 한계 안에서 일하라.’(10:13)

‘신이 정한 한계’란 무엇일까? 바로 이것이 바울이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나의 삶에 분명한 한계를 정하는 것. 그리고 이를 신의 영역에 놓는 일.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대안의 서론이다. 이 ‘한계’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 예수와의 결혼에 대한 비유를 말한다. 바울은 자신이 어리석게 이야기하는 것을 용납해 달라고 말하면서,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약혼했다고 말한다. 다음에 이어질 음행에 대한 바울의 논의는 이스라엘과 약혼하는 하나님과 그 이전에 바알을 섬기는 음행을 저지르는 호세아의 그것(호 2:19)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그리스도와의 결혼과 음행을 경고하는 바울의 비유(11:3)는 호세아서에 담긴 정의와 공평, 사랑과 긍휼 메시지에 맞닿아 있다.

‘그리스도와의 결혼’이라는 바울의 상징은 당시 그리스-로마의 문화에서는 상당히 불쾌한 것이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약혼자라고 선포하는 것은 그들의 사회문화적 명예와 배경을 무시하는 것으로, 특히 성에 대한 불평등이 극심했을 시대에는 더욱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당시 여성은 결혼을 통해 남성의 소유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소유물로 살아갔다.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이 비유를 매우 불편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음행은 대표적으로 구약에서부터 이방 종교를 받아들이는 경향을 나타내며 우상숭배라 여겨졌다. 바울은 로마의 관습과 문화, 정치에 결혼제도와 성 고정관념까지 덧붙여 모두 겉만을 보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음행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럼 그 문화를 벗어나서 어디로 가라는 것일까? 신이 말하는 한계 안에서 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바울 자신이 겉, 즉 세상의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한 한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밝힐 것인가?

누가 더 약한 자리에 설 수 있는가
바울은 자신이 세상의 법칙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고린도로부터 아무런 돈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신 고린도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다른 마케도냐 등의 공동체로부터 헌금을 얻었다. 그는 고린도 공동체와 무엇을 주고받거나 지식이나 은사를 사고팔지도 않았다.(당시 그리스-로마의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와의 관계는 주고받는 관계였고, 이를 확립하여 진리를 팔 수 있는 지식자본으로 새롭게 생산한 이들이 소피스트들이라고 이전의 글에서 밝혔다.) 바울은 고린도 공동체에 어떤 금전도 받지 않음으로 이 구조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문화에 익숙한 이들은 이를 자신들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바울로부터 복음이란 선물을 받았으므로 대가를 지불했을 뿐인데 거절당한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고린도 공동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말한다.(11:11) 아무도 바울의 방법을 따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의 구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상상하거나 따라 할 수도 없는 방법을 감행하기 위한 일이었다. 여기에 바울의 특이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헌금을 받지 않는 것이 ‘정의’이고 올바른 교회를 세우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바로 바울의 고린도 선교를 하나의 ‘전략’이나 ‘방편’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에 자유한 교회, 헌금을 받지 않는 교회가 바울이 말하는 선교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듯 이는 고정불변(진리)의 방법이 될 수는 없다. 바울의 방법이란 당시 지배문화를 내면화한 사람들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었다. 지배문화와 관습을 따르는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돌파하는 일. 이것이 바울 스스로가 세상 속에 휩쓸리지 않을 방법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세상 속에서 살면서 어떻게 그 문화와 질서 바깥에서 생각하고,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재미있게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에서 그 길을 찾는다. 바울에게 약함이란 무엇일까? 바울은 먼저 자신이 메시아 공동체를 속이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한다.(11:21) 바울의 약함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바울은 자신을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물론, 바울에게 정당한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던 사람들도 자신들을 가리켜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의 그것과 매우 다른 의미이다.

바울에게 히브리인은 야곱의 자손으로 이집트 제국의 노예였고 광야를 떠돌던 나그네였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얻은 이름으로 그 자신과 가족이 바로 가나안을 떠돌던 난민들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이전에 가나안이란 땅을 얻기 위해 먼 여행을 다녔지만 결국 막벨라 굴에서 쓸쓸히 죽어간 사람이었다. 그들은 결국 노예요, 난민이요, 나그네들이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쓸모없고 약한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얻는 자들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할 수 있는 아무런 사회문화적 자원이 그들에겐 없다. 그것이 신의 일꾼들, 사도의 자격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누가 얼마나 노예, 난민, 나그네의 삶을 품을 수 있는지, 누가 더 약한 자의 자리에 설 수 있는지가 신의 사도가 될 ‘스펙’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더욱 많은 수고와 고생과 죽음과 약함을 경험했으므로(11:23-29) 자신이야말로 메시아의 사도라고 말한다. 지젝식으로 말하면, 영광이라는 코드 뒤에 숨어있는 자기 비움과 약함의 코드가 메시아의 핵심임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비움과 약함의 삶 속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상상력이 태어난다. 죄인 메시아, 죽은 메시아의 약함 속에 나타난 부활처럼, 세상의 썩어질 것들이 새로운 삶의 형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새로운 메시아적 삶에 종교적 형식이나 체험은 중요하지 않다. 바울 또한 신비체험과 세계와 그 이면의 경이로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이며(12:7-10)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는 광기의 세계(고전 14:23)이다. 바울은 종교체험이 메시아의 말씀과 예언으로 바뀌어야 한다(고전 14:24-25)고 말한다. 외부인에게는 광기의 세계로 비칠 신비적 종교는 공동체를 교만하게 만들어서 세상의 가치를 얻고 스스로 높아지려 한다. 이와 반대로 약함은 가시처럼 바울 안에 머물러 메시아의 삶을 실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12:7-10)

메시아는 약한 자의 나라를 다스린다
바울은 이 약함이 최고조에 이르면 곧 하나님의 능력이자 강함이 된다고 외친다.(12:10) 진정 강한 자는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얻는 것은 강하게 되는 것이다. 받지 않아야만, 써야만 약해진다. 결국 줄 것이 없어서 몸까지 희생하는 것. 그것이 약함의 사랑, 메시아의 사랑이다.(12:14) 이런 메시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사도로서의 바울의 삶이었으며 메시아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프로그램이었다. 바울은 선교 대상들에게 헌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히 자비량 선교라는 방법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는 메시아적 약함을 보여주는 방편이었다. 메시아적 약함과 사랑으로 공동체의 내용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바울에겐 선교요 목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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