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호 평화를 걷다]

   
▲ 캡션: 강원도 철원군 김화 생창리 DMZ 길을 걷고 있는 평화순례자들. (사진: 국경선평화학교 제공)

평화의 꿈과 비전은 현재진행형
남북관계가 정체되고 다시 예전의 적대관계로 되돌아간 것 아니냐 하는 염려가 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선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철원에 살면서 평화는 현재진행형이란 징표들을 많이 보기에 확신할 수 있다.

남북한 평화는 진보했으며, 되돌릴 수 없는 일임을 보여주는 징표들은 비무장지대 안에서 많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아래쪽에 붙어 있는 화살머리고지에는 남북한 관통 도로가 뚫렸다. 남북 양쪽 군인들은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 안에서 많은 지뢰를 파내고, 함께 협력하면서 한국전쟁 전사자들의 유골을 발굴했다. 북쪽 군인들은 북측 비무장지대를 열고 길을 닦았고, 남쪽 군인들은 남측 비무장지대를 열고 길을 만들어 군사분계선 철조망을 끊고 도로를 연결했다. 남북 군사 사령관들은 철조망을 끊은 자리에서 만나 악수했다. 이 평화의 장면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전 국민에게 보도되었다. 시민들의 가슴속에 새겨진 평화는 아무도 다시 지울 수 없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 후로 많은 이들이 화살머리고지 현장을 찾아왔다. 미국, 프랑스, 그리스 등 한국전쟁의 화살머리고지 전투에 참전했던 각국의 정치·군사·종교 지도자들도 찾아 왔다. 금년 판문점에서 깜짝 만남을 가진 문재인-김정은-트럼프의 3자 대면은 애초 화살머리고지에서 이뤄질 것이란 소문이 날 정도로 남북 평화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작년 12월말 화살머리고지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시민들에게 개방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금년 6월 1일 시민들은 비무장지대를 밟을 수 있게 되었다. 66년간 금단의 땅이었던 비무장지대를 시민들이 자유로이 발 디디게 된 것이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던 곳, 군 수색대조차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들어가는 초긴장 지역이 비무장지대였다. 한 장교는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갈 적마다 허리에 찬 권총을 만지면서도 긴장을 해야 했다”고 한다. 그곳을 이제 시민들이 들어가고 있다. 

한반도에서 평화는 비무장지대를 드나드는 시민들의 발걸음만큼 진보하고 있다. 그 일이 지금 철원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시민들이 비무장지대를 찾아와야 한다. 시민들의 발걸음으로 길을 내고, 북쪽 비무장지대 땅을 밟고 또 길을 내어, 마침내 북녁 땅 전역으로 자유로이 오가는 날은 오게 될 것이다. 한반도에 평화는 남녘 북녘 시민들이 자유로이 오가는 길에서 이뤄질 것이다. 

사라진 전쟁 시설들
비무장지대 남북 쌍방 간에 비난으로 시끄럽던 비방 방송도 사라졌다. 남북 비방 방송은 한동안 사라졌다가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다시 재개된 일이 있었는데,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더욱 주목할 일은 비무장지대 안에 있던 남북 양쪽의 군 초소를 제거한 일이다. 이 초소들은 남북 군인들 간의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던 위험한 시설이었다.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은 평화의 진보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천으로 옮기자고 결정하고, 비무장지대 안에 있던 전쟁 유발 위험 시설을 제거한 것이다. 비무장지대 안의 군 초소들을 폭파시키는 장면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전국의 시민들에게 보도되었다. 평화는 시민들이 눈으로 보는 현실이 되었다.

지금 철원의 비무장지대는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철새들이 남북녘 하늘을 한가로이 오가는 모습으로 고요하고 평화롭다. 최근에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비무장지대 안을 돌아다니는 멧돼지에서 발견되어 비상사태를 맞았지만, 남북한 군인들 간의 긴장감은 예전 같지 않다. 비무장지대의 평화는 동물 생태계의 질병 문제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중이다. 한미군사 훈련이 재개되고, 남한 정부가 스텔스 전투기를 수입하고,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하는 상황은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염려를 갖게 하지만, 이런 정치 군사적 움직임을 통해 시민평화운동이 평화의 각성 운동과 함께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야 할 것이다. 시민의 평화적 각성과 실천이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진보시키는 주요 동력이다. 이 진실을 철원 비무장지대 마을에서 온 몸으로 배우고 있다.

철원 비무장지대 마을에서 체감하는 남북한의 평화는 서울의 신문 방송이 전하는 것만큼 가볍고 날렵하지는 않으나 꾸준하고 묵직한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증언하고 싶다. 마치 약한 지진의 진동처럼 느릿하고 미세하지만 바위를 쪼개고 산을 가르듯, 평화운동은 66년 동안 굳어져 온 비무장지대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DMZ를 국제평화지대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 24일 UN총회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비무장지대를 국제평화지대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시대를 종식하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좋은 제안이다.

비무장지대 안에 남과 북에 각각 주재 중인 유엔기구와 함께 평화, 생태, 문화 관련 기구가 들어오면 평화연구, 평화유지(PKO), 군비통제, 신뢰구축 활동이 활발해질 것이다. 남북한 사이에 전쟁 위험은 사라질 것이며, 전 세계 분쟁지역에 평화 건설의 희망을 주는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무장지대는 어둡고 무섭고 가고 싶지 않던 곳에서 평화의 빛이 빛나고, 희망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가보고 싶은 곳으로 바뀔 것이다. 그래서 DMZ 접경 마을은 그야말로 한반도의 중심이 되고, 전 세계 사람들이 찾아오는 국제적 명소가 될 것이다.

DMZ 국제평화지대화 정책은 시민들의 발걸음에서부터 실현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국경선평화학교는 DMZ 평화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왔는데 그 주요 주체를 민(民)으로 세우고 있다. 피스메이커 교육운동과 DMZ 국제평화회의는 민의 평화운동을 증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실행되고 있다. 금년 4월 27일 전개된 ‘4.27 민+ 평화손잡기 운동’도 민이 주체가 된 평화운동이었다.

신앙적 고백으로 말하자면, 민의 평화운동은 하나님의 평화운동이다. 민이 나설 때 제국의 오만을 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특히 국경선평화학교가 철원에서 7년 동안 꾸준히 벌여 온 DMZ 평화운동은 ‘DMZ 평화순례’이다. 우리는 지난 7년 동안 동해에서 서해까지 DMZ 마을길을 걸었다. 금년에는 철원에서 화천까지의 산길을 택했다. 이것은 단순히 도보로 여행하는 국토순례가 아니며 극기훈련도 아니다. DMZ 평화순례는 남북 분단을 아픔으로 느끼며 어리석음을 회개하는 운동이요, 평화로운 나라 공동체의 회복을 기도하며 걷는 영적 평화운동이다. 평화순례 길을 걸으면 몸에 힘이 붙고,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며 평화운동가로서의 신념을 되새긴다. 그러므로 평화순례는 자연 생태계 체험, 그리고 몸으로 함께 배우는 평화교육이다. 이 평화순례를 통해 비무장지대는 우리 안에서 아름다운 회복의 땅으로 살아난다.

DMZ 평화순례운동
이 ‘DMZ 평화순례’는 한반도형 평화운동으로 발전할 것이다. 휴전과 분단 시대 66년 동안 DMZ 마을은 일반 시민들이 기피하던 곳이었다. 전쟁의 그늘이 짙게 배어 있는 곳, 지뢰가 묻혀 있는 두려움의 땅, 군대와 무기가 모여 있는 곳. 그래서 사람들이 찾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은 소명의 땅이다. 평화 소명이 일어나는 곳, 부활하신 예수가 다시 만나자고 제자들에게 지시한 땅 갈릴리는 한반도에서 이곳 비무장지대이다. 시민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통해 이곳을 평화와 생명 체험의 땅, 치유와 회복의 영성을 체험하는 땅, 하나님의 희망을 선포하는 소명의 땅으로 바꾸자는 운동이 ‘DMZ 평화순례’이다.

국경선평화학교는 DMZ 평화순례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DMZ 평화순례사’ 육성 과정을 시작했다. 평생교육기관으로서 이 과정을 마친 시민들에게 민간 DMZ 평화순례사 자격증을 수여할 계획이다. 실험교육 과정을 통해 커리큘럼과 강사진을 구성한 뒤, 2020년 새해부터는 좀 더 활발하게 진행할 예정이다. DMZ 평화순례사는 동-서 DMZ 마을길 500km를 걷는 시민 평화순례운동을 활성화하는 촉진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평화순례사는 성별이나 연령에 관계없이 건강하고 평화의 신념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최근 군병력 축소와 이동으로 마을 경제에 큰 타격을 받고 있는 DMZ 인근 시군, 특히 강원도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은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철원 마을 곳곳에는 ‘철원 주민의 생존권을 외면한 국방개혁 반대한다’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국방개혁은 병력 감축과 기계화 작업에 따른 사단병력 재배치를 말하는 것인데, 군인들의 소비경제에 의존해온 철원 상권이 타격을 받고, 직업군인 가족들의 이동에 따라 학교 학생수가 감소되는 현실에 마을 주민들이 위기를 느끼는 것이다.

한 예로 내가 다니는 이발소는 1차 병력 이동이후 월 수입이 50만 원 줄었다 한다. 군인 이발비가 5천 원임을 감안하면 월 100명의 고객이 줄어든 셈이다. 마을 전통 시장은 많은 점포가 문을 닫았고 철원을 떠났다. 분단 66년 세월을 지내오면서 국경마을은 군대와 더불어 공생해 왔다. 그런데 지금 병력 감축과 재배치 작업에 따라 공동체 존속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평화과정에서 DMZ 마을이 거쳐야 할 도전이요, 새로운 변화의 기회이다.

나는 철원에 이사와 살면서 한반도 분단 상황에서 평화 진지로서 DMZ 국경마을의 역할과 역설을 발견했다. 분단 상황에서도 국경마을은 전쟁과 군사적 충돌의 억제 역할을 하는 민의 평화 진지로 기여하면서도 사람들로부터는 기피 지역으로 소외당했다. 남북 평화 정착 과정에서 DMZ 국경마을은 남북 연결의 평화 교량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군병력 이동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과 마을 공동체 해체의 위기감을 느끼는 현실이다. 나는 국경마을의 해체는 남북 전체의 평화를 위해 큰 손실이라고 본다. 국경마을을 살려야 한다. 국경마을의 나아갈 길은 평화마을로 발전하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DMZ 평화정책과 국경선평화학교의 DMZ 평화운동은 DMZ 마을이 평화마을로 발전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DMZ 순례운동이 국경마을을 살리는 평화운동이 되길 기도한다.

정지석
휴전 상태인 한반도를 비롯, 전 세계 분쟁지역을 섬길 ‘평화 일꾼’(peacemaker)을 키워내는 국경선평화학교 설립 자이자 대표. 한신대 신대원에서 신학(M.Div.)을 공부했고, 아일랜드 평화에큐메니칼대학원에서 에큐메니칼 평 화학 석사(M.Phil in Trinity College), 영국 버밍험 우드브룩 퀘이커대학원에서 평화학 박사(Ph.D in Sunderland Univ.)를 마쳤다. 이후 한신대 신대원과 성공회 대학원에서 평화신학을 강의하고 새길교회 등에서 사역했다. 2010 년 새로운 소명의 삶을 찾고자 미국 퀘이커 영성평화학교 펜들힐(Pendle Hill)로 갔고, 기도 가운데 ‘철원으로 가서 남북한 평화를 일구라’는 소명을 받고 2011년 9월 무작정 철원으로 들어와 2013년 3월 1일 국경선평화학교를 열었 다. 본지 315호(2017년 2월호)에 인터뷰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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