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호 내 인생의 한 구절]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원고를 쓰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해마다 오늘이 되면 어김없이 들리던 그 노래가 다시 들려온다. 아, 오늘이 시월의 마지막 밤이구나. 해마다 이 날이면 시그널 음악처럼 들려오던 노래와 함께 조금은 바쁘고 분주했던 어느 시월의 마지막 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날이 바쁘지 않다.

병실에서 쓸쓸히 맞이한 종교개혁 500주년
과거에는 교회개혁 모임을 비롯해 시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일을 기념하느라 좀 분주했었다. 그러나 올해 종교개혁 502주년은 그냥 저냥 넘어 간다. 이미 그 날은 내게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려서 나를 울리기만 할 뿐, 교회를 개혁하겠다던 다짐들은 그야말로 야무진 꿈이 된 지 오래다. 기대가 남아 있을 때 개혁이라는 말이라도 할 수 있었지, 이제 개혁은 고사하고 혁명이 일어나도 한국교회가 변화될 거라는 기대는 진작 접었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이젠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돌아오는 이 계절에 나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꿈을 버렸기 때문에. 

2017년 시월의 마지막 밤은 참 쓸쓸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그 때, 모처럼 언론들도 떠들썩했고, 책들도 많이 쏟아졌으며, 행사들도 참 많았다. 그러나 나는 병실에 쓸쓸히 누워서 항암주사를 맞으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 해의 3월 10일, 박근혜가 탄핵을 당했던 그 날, 내 몸이 탄핵(?)을 당했기 때문이다. 대장암 4기. 임파선으로 전이가 되어 당장은 수술도 할 수가 없었다. 의사로부터 대장암 선고를 받았을 때, 사실 의외로 담담했다. 대장암이라는데 어쩌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차피 아무것도 없었다. 나이 50이 되어서 생전 처음 대장 내시경을 했는데, 암이라니! 그것도 4기. 영화 같은 현실 앞에 오히려 담담하고 멍할 수밖에 없었다. 주섬주섬 입원을 준비하고 본격적인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네 차례 항암치료를 하고 경과가 좋아서 일단은 수술이 가능해졌다. 수술 후 항암치료를 여덟 차례 더해서, 총 열두 번의 항암치료와 수술을 했고 다시 방사선 치료를 두 달 더해서 일단은 대장암 치료가 끝이 났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에스겔서 16장 6절 말씀이다.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향해 하시는 이 말씀이 내겐 가슴에 새겨진, 피 맺힌 한 구절이다. 문맥을 살피고 본래의 의미를 따지고 할 것 없이, 그냥 내 생의 말씀이 되었다.
그랬다. 나는 살아 있어야 했다.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예루살렘을 향한 그 말씀이 나에게 와서 박힌 것은 삶의 어느 때였나. 이 얘기를 하려면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가 처음 시작한 교회를, 이젠 더 이상 계속 할 수가 없어서 접어야 했던 때로….

5년 만에 끝난 교회 개척의 꿈
2012년 12월을 끝으로 나는 개척한 교회를 접었다. 2008년에 시작했으니 만 5년 만에, 그 이름도 거창한 ‘진리로자유케하는교회’를 접었다. 나의 꿈은 교회 개척이었다. 총신대학교에 입학을 해서 10년 만에 학부를 어렵사리 마치고, 다시 총신대학원 입학 그리고 영국 유학…. 이 모든 여정 가운데 총신대 입학 때부터 나의 목표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었다. 총신대 시절, 나라의 현실과 교단 정치의 모습을 보며 휴학을 밥 먹듯이 반복하면서 기어이 졸업은 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늘 나를 긴장케 하는 그 무엇이었다. 역사적 현실과 학교, 교단의 실태에 나는 절망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살아 있어야 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선 내가 태어나고 자란 모교회인 부산 부전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했다. 3,000여 명 모이는 교회에서 대학부와 청년부를 담당했으며, 담임목사가 교체되는 1년 여의 공백기에는 수석 부목사로서 교회 행정을 총괄하고 예배를 인도하며 나름 역할을 잘 감당했다. 그러나 나는 교회를 개척해야만 했다. 교회에 대한 꿈이 달랐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랑의 대상이면서 고민거리라고 했던가. 중·대형급 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이 들어오기도 했고 그래서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역시 답이 훤히 보이는 그 길을 갈 수는 없었다. 내가 꾸었던 교회에 대한 꿈은 우선은 ‘건물에 매이지 않는 교회’였다. 더 이상은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매도하거나, 건물에 사람이 구속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돈에서 자유로운 교회’를 소망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체의 헌금을 통일하여 무기명 연보만을 받는 교회가 된다면, 성도들과 교회가 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교회 직분에 관하여는, 한국 정서상 아예 없애기는 힘들 것 같아서 호칭만 남겨서 모든 직분을 명예직으로 하고 교회 운영은 운영위원회가 이끄는 구조를 생각했다. 나는 이미 기존 교회 구조로는 답이 없음을 알았고, 대안을 보여 주는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침, 대규모 건축 문제와 담임목사의 독선적 운영 때문에 교회를 나올 수밖에 없는 분들을 만났다. 장로님 두 분과 성도들 10여 명. 그렇게 그분들과 의기투합해서 나는 교회를 시작했다. 대규모 교회 건축에 반대하던 그분들은, 학교 강당을 마련해 놓고 소위 말하는 ‘강당 교회’를 함께할 목사를 찾고 있다가 우연히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진리로자유케하는교회가 시작되었으며, 3무(無)를 추구하는 교회가 되었다. 건물과 기명 헌금과 직분이 없는 교회. 그래서 부산의 성지고등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렸고, 무기명 연보를 위한 헌금봉투를 만들었으며, 운영위원회를 조직하여 교회 정관을 만들어 교회를 시작했다.

교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비록 부산이었지만 교회개혁에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있었고, 그런 분들이 중심이 되어 사실상 부산에선 처음으로 출발하는 대안교회 형태의 교회였기에 주위의 기대 또한 컸다. 그래서 의사, 변호사, 교사, 사회 활동가 등이 모여 들었고 교회는 2년 정도 큰 문제없이 순항했다.

그러나 3년차에 접어들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은 정치적 성향이 문제였다. 나는 당시 이명박 정권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았고, 특히 한국교회가 장로 대통령을 만든다는 논리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환경을 파괴하는 대운하 정책과 전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며 억압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비성경적 행태를 지적했지만, 여기는 부산이었다. 세대 차이가 확연하게 나뉘었다. 젊은 사람들은 당연한 듯 받아들였지만, 기성세대들은 내 설교를 불편해했다.

다음으로는 교회에 대한 지나친 이상주의가 문제였다.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본회퍼는 “신도들의 사귐은 꿈같은 우리의 희망적 생각에서가 아니라 아주 실망한 그 자리에서부터”라고 말한 바 있다. “꿈이 다 깨어진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신도들의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도 그랬다. 그 후로 남은 시간들은 그 꿈이 깨어지는 시간들이었다. 이상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사실 그 이상이라는 것이 끝이 없었고, 또 저마다 가지고 온 꿈이 너무나 컸다. 교회 정관을 만들고 교회를 운영하면서 저마다의 꿈들을 조율하고 꿈의 한계를 정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다.

결국 그 꿈들을 다 맞추려면 장로교 목사로서 내 정체성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들에 직면했고, 나는 아직 거기까진 준비되지 못했다. 내가 교회를 시작했을 당시 나이는 겨우 서른아홉 살, 아직은 성도들의 다양한 삶들을 다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또 대부분 나보다 나이도 많아서 나의 미숙함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진리로자유케하는교회의 꿈은 내가 사임함으로 끝을 보았고, 남은 분들의 꿈은 평신도 공동체교회를 따로 세워 이뤄드리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 부산 구서동의 작은 공동체 '그소망교회'식구들. 뒷줄 가운데 안경 쓴 이가 필자.(사진: 우주현 제공)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었던 나날들
교회는 그렇게 정리되었지만, 나 자신의 문제가 남았다. 내가 살아가야 하는 내 삶의 문제가 남았는데 사실 녹록치 않았다. 목사를 청빙하는 교회에 원서를 내면 결국 최종단계에서 탈락하곤 했다. 다름 아닌 진리로자유케하는교회를 목회한 전력 때문이었다. 좁은 부산 바닥에서 ‘이단 비스무리한’ 교회를 목회한 전력은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살아야 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어야 했다. 1년 반 정도 사역지를 찾는 기간 동안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6개월 정도 대리운전을 했고, 8개월 정도는 부두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 부산 연산동의 어느 교회에 지원하여 청빙을 받았는데, 사실 아무 교회나 지원해야만 한다는 절박함으로 지원한 것이었다. 그 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하여 딱 3년 목회하고 그만두었다. 아니 쫓겨났다. 그 교회는 설립자 장로님이 계시고 그분의 두 아들이 대를 이어 장로를 하는 교회였는데, 짐작할 수 있듯 좀 심하게 말하면 교회가 아니라 패밀리 비즈니스를 하는 곳이었다. 제대로 설교를 할 수도, 사실상 목회를 할 수도 없었다. 그 교회를 사임하면서 사실상 목회를 포기했다. 두 차례 담임목회의 기억. 전혀 다른 성격의 두 교회를 목회하면서 어설프게 내린 결론은 ‘답이 없다’였다. 그렇게 목회를 포기했다. 그러나 나는 또 살아야만 했다.

다행히 아버님이 하시는 사업체가 있어서 거기서 일을 하면서 삶을 정리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아내를 자유롭게 했다. 비록 늦었지만, 목사의 아내라는 굴레를 벗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라고 북돋아주었다. 지금 아내는 다문화교육쪽으로 박사과정을 마쳐가고 있으며, 청소년과 아동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님의 사업체를 계속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업을 장기적으로 이어가려면 본사가 있는 베트남으로 옮겨야만 했는데, 그러기엔 엄두가 나질 않아서 사업을 그만 접었다. 나는 다시 살아야만 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그리고 내 나이 만 50이 되어 전 국민 건강검진에서 대장 내시경을 해보니 대장암이 나왔다. 그것도 임파선으로 전이된 4기. 한 달만 늦었어도 말기로 진행이 될 뻔했단다. 이젠 정말 살아야 했다.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나는 살아야 했다.

약함의 자리, 약함의 능력을 믿으며
지금 나는 부산 구서동에서 그소망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이제 3년차에 접어들었다. 아이들 포함 30명도 안 되는 작은 공동체다. 그러나 나는 이 작은 공동체를 참 사랑한다. 내가 암 환자인 줄 알고도 함께 교회를 시작해준 공동체이며, 치료 기간을 묵묵히 같이 겪은 공동체다. 또한 지금은 가벼운 뇌경색까지 와서(뇌경색은 1년이 되어간다) 사실 말도 좀 어눌해졌음에도 여전히 날 지지하고 격려하고 있다.

내가 다시 교회를 시작하게 된 것은 한 학생과의 상담이 계기였다. 나는 부산의 한 신학교에서 10년째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그 학생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좀 이상하다며 상담을 해왔다. 그 교회는 담임목사가 전형적인 신사도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 상담을 계기로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세 가정이 나와 성경 공부를 함께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교회로까지 연결되었다.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은 건, 함께 교회를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첫 예배를 앞둔 2주 전이었다. 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길을 가야 하는데, 치료를 장담하기 어려운데, 만약 교회를 시작했다가 내가 덜컥 죽기라도 한다면 이분들이 받을 상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또 한 번 살아보기로 나는 결정했다. 설사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다시 한 번 더.   

원고청탁을 받고 과연 ‘내 인생의 한 구절’로 내세울 성경 말씀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떠올린 말씀이 에스겔서의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였다. 돌이켜보면 총신대에 입학하여 신학이라는 길로 들어선 그 순간부터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다. 이미 언급한 대로 매일 매일 살아내는 일들로 너무 버겁고 무거웠다. 학교 생활도, 교회도, 생계를 유지하는 일도 모두 엄중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암에, 뇌경색까지….

그렇게 기어이 하루하루를 살아오면서 이제사 깨닫는 바가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복음이야말로 ‘실패자들을 위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언제나 약함의 자리를 준비해두시는 분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나는 이제 이 말씀을 믿는다. 약함의 능력을 이제는 믿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살아 있으라’ 말씀하신 이유도,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서 바로 약함의 능력을 깨달으라고 하심인 줄 나는 이제 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다시 살아간다. 비록 환도뼈가 부러져 절뚝거리면서도 나는 그 얼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절뚝거리며 나는 그 길로 오늘도 간다.


우주현
총신대와 총신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부산 구서동의 작은 공동체인 그소망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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