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P. 모어랜드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지성 활용법》(죠이북스, 2019)

   
 《그리스도인을 위한 지성 활용법》(죠이북스, 2019)

1. 저자의 관심: 기독교 지성 운동의 대부
J. P. 모어랜드는 미국 기독교 지성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그는 40년 넘게 복음 전도에 매진하고, 복음전도자들을 훈련하고, 전도를 강의해왔다. 특별히 그는 무신론의 도전에 맞서 지적으로 복음을 변증하고 합리적으로 신앙을 옹호하는 사역을 해왔다. 그가 쓴 모든 책에는 캠퍼스 전도자로 사역하면서 겪은 에피소드와 함께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열정을 읽어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기독교 지성에 금자탑을 이룬 《Philosophical Foundations for a Christian Worldview》는 기독교 학문 운동의 교과서로 손꼽히는 책이다.

모어랜드가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우리의 감정과 영성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힘써 사용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의 원제처럼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Love Your God with All Your Mind). 기독교가 진리라면, 전심으로 이 진리를 알기 위해 노력하되 지성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저자의 사상을 평가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모어랜드로 대표되는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지적하는 글로 올해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2. 편집자의 선택: 20년 동안 얼마나 발전했나?
이 책의 초판은 1997년, 재판은 2012년에 나왔다. 그리고 한국어 번역판은 2019년에 나왔다. 초판 이후 20여 년이 지났다. 오래전 마크 놀이 말한 미국의 ‘복음주의 스캔들’은 그동안 얼마나 극복됐을까? 복음주의는 학문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까? 분야별로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그 성과를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철학과 과학 영역을 간단하게 살펴보려 한다.

먼저, 철학으로 기독교 신학을 변호하려는 시도는 얼마나 진전이 있었을까? 분석철학이 영미 철학계를 휩쓸기 시작한 이후, 존 매키(J. L. Mackie)라든가 앤터니 플루(Antony Flew)와 같은 무신론 철학자들은 유신론을 매몰차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응전으로 리처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이나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와 같은 분석적 유신론자들이 철학의 최전선에서 열심히 고군분투하며 철학적 변증 작업을 이어왔다.

모어랜드 역시 카이 넬센(Kai Nielsen)과 논쟁을 벌이며 철학적 유신론 논증에 열심을 냈다. 80년대 이후 ‘신이 있느냐 없느냐’로 열렬히 논쟁하던 형이상학적 토론은 한풀 꺾이고, 이제는 심리철학으로 그 관심이 넘어가고 있다. 과학적 자연주의가 철학계에도 강한 영향을 끼치면서 기존에 견고하게 자리를 잡던 이원론적 세계관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주의 패러다임은 전통적으로 실체 이원론을 주장하던 신학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제는 인간의 몸과 마음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철학적 이슈로 떠올랐다. 모어랜드 역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자기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지속해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모어랜드의 대안은 데카르트식의 실체 이원론은 비판하면서도 환원적 물리주의를 피해 가는 방식인데, 이는 비환원적 물리주의 혹은 속성 이원론이라는 입장이다. 이는 현재로서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견지하면서 현대 심리철학의 논증을 충분히 수용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모어랜드의 공헌은 충분히 인정해줄 수 있다.

과학 영역은 어떨까? 모어랜드는 이 책에서 신 존재 증명을 소개하면서 전통적인 설계 논증을 중요하게 다루고, 그 연장선에서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라든가 미세조정우주론(fine‐tuned universe)을 소개한다. 이런 논증은 미국에서 여전히 인기 있는 변증의 한 형식이고 계속해서 관련 논의들이 소개되고 있다. 최근에 모어랜드는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생명의말씀사, 2019)를 출간했는데, 과학과 관련된 신학적 주제를 연구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그는 과학주의의 오만한 월권 행위를 비판하면서 과학이 신학, 철학, 윤리학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신진화론 비판》(부흥과개혁사, 2019)에서는 현대 과학의 성과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신학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최근 모어랜드가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기독교 변증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심리철학 영역에서 그가 작업한 내용은 몇몇 기독교 철학자들에게도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강한 물리주의적 입장을 지지하는 기독교 철학자들도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복음주의자들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논의를 전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그의 변증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 과학과 진화론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기독교 신학을 변증하려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점점 늘어가는 상황에서 그의 수세적 태도는 다소 아쉽다. 과학주의의 위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느라 과학 자체에 대한 불신과 적대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언제까지 진화론을 거부하면서 기독교 학문을 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지만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

3. 비평가의 시선: 잘못된 전략
책을 읽으며 양가감정이 들었다. 저자가 말하는 기독교 지성의 필요성을 내가 다니는 교회 성도들에게 잘 전해주고 싶었다.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 제자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지성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묻고 따져봐야 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다른 한편, 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저자가 말하는 방식으로 일반 학문을 평가한다면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독교가 현대 학문의 영역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사조와 사상을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고 자꾸만 뒤로 후퇴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깊이 공감한다. 그동안 기독교가 학문에 대해 가진 태도는 그야말로 ‘그거 알아서 뭐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돼?’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반지성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복음 전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을 닮아가려는 기독교 신앙과도 배치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지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 학문과 사상을 반박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오늘날 학문을 지배하는 세속적인 사상은 ‘과학적 자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데, 이 두 사상은 기독교 신학을 무너뜨리는 적으로 묘사된다. 세속적 세계관은 학문의 영역에서 기독교를 점차 코너로 몰아갔고, 신앙은 단지 사적인 영역에 불과하다며 공적인 영역에서 방을 빼 버렸다(21쪽). 모어랜드는 이 위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내가 보기에 모어랜드는 전략을 잘못 짰다. 계속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현대 사상과 과학의 발전을 복음의 방해꾼이나 훼방꾼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적극 활용해 복음 전도의 도구로 이용하면 안 되는 걸까? 현대 학문을 적이 아닌 친구로 만들면 안 되는 걸까? 왜 전통을 고수하는 데만 기독교 지성을 사용하는 걸까? 모어랜드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할 때마다 계속해서 지적으로 방어하고 공격하는 것이 기독교적 지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일반 과학과 다양한 사상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태도는 기독교적 지성의 역할이 아니란 말인가?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하나 더 지적하자면, 만약 세속 학문의 도전에 어떻게든 저항하려는 모어랜드의 주장이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다면, 오늘날 신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급진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와 비슷한 태도를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급진 정통주의는 세속화의 허구와 폭력성을 폭로함으로 근대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급진 정통주의와 모어랜드의 차이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급진 정통주의자들은 세속화를 비판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을 적극 수용한다. 하지만 모어랜드는 자연주의도 거부하고, 포스트모더니즘도 거부한다. 오히려 과학주의 세계관을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포스트모더니즘을 활용해도 좋을 텐데, 모어랜드에겐 모두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다.

4. 독자의 취향: 묻고 따져보자
모어랜드는 지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더 깊이 파고들 때, 반드시 좋은 멘토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그를 가르쳤던 교수 중 한 분은 극단적 회의주의자였는데, 알고 보니 젊은 시절 신실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앙에 회의가 찾아와 교회 어른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믿으면 된다’는 핀잔이었다. 이 청년의 결말이 어떠했을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경험으로 교회를 떠난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은 정반대였다. 젊은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 신자였는데, 유난히 궁금한 것이 많아 당시 마니교 주교였던 파우스투스에게 질문을 많이 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그의 대답은 깊이와 논리가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마니교를 떠났다. 몇 년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와 폰티티아누스라는 기독교 지도자를 만나 자신이 가진 믿음에 관해 토론을 했는데,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적으로 이끌어주기 충분한 선생이었다(51‐52쪽).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훌륭한 지적 멘토가 된 것이다.

신실한 교회 언니(오빠)라면 한 번쯤 신앙에 회의가 찾아온다. 특별히 대학교에 들어가면 친구들과 토론을 하면서 그동안 믿어왔던 신앙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에도 옆 테이블에 앉은 대학생 두 명이 열렬히 기독교 신앙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믿음은 신앙의 결단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믿음은 반드시 이유를 필요로 한다. 그때 우리는 지성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변증은 복음 전도의 방법이 아니라 신앙의 이유를 설명하는 제자훈련의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올 때, 기독교 변증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변증이 현대 학문에 방어적인 태도로만 일관된다면, 오히려 역습을 당할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일반은총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의 지혜를 겸손하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해서, 네오마르크시즘이라고 해서, 무조건 걸러내고 비판만 한다면 오히려 나중에는 기독교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될 것이다. 어설픈 변증은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기독교를 공격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메롤드 웨스트팔은 니체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통해서 성서 예언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기독교에 가장 적대적으로 보이는 사상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길바닥의 돌들을 통해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다.

덧붙여서 한국의 기독교 학문 운동도 평가하면 좋겠지만 그야말로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이다. 다만 왜 젊은 연구자들이 더는 기독교적 학문 연구에 매진하지 않는지 깊이 성찰했으면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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