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호 부전자전 고전] 사랑, 그 놈 참!

   
니그렌의 《아가페와 에로스》


1.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글 잘 읽었다. 아빠도 학부 부전공으로 철학을, 석박사 과정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지만, 네가 고르는 텍스트와 너의 독해를 통해서 배우는 바가 크다. 매번 네 글을 받을 때마다 세미나 수업을 하는 기분이랄까. 우리의 고전 읽기 대화가 끝나면 네가 골랐던 텍스트를 하나하나 읽어봐야겠구나.

라인홀드 니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비교한 것은 네 글의 백미였다. 너는 이렇게 비교했지. 한 개인이 도덕적이더라도 사회 정치적 집단의 영역에서는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니버의 생각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에서 정의롭지 못한 자는 개인적 수준에서도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본다고.

그러면서 너는 화두를 던졌지. “인간은 인간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는 걸까요?”라고. 이 질문은 한 달 내내 아빠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뇌리를 떠나지 않았어. 왜냐하면 다른 무엇보다 사랑은 사랑을 말하는 자의 내면과 실존을 벗어나서 말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사랑에 관해서 말할라치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는 ‘너는 사랑하니’라는 물음 앞에 괜히 위축되곤 하더라.

그러나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겠지. 네 물음과도 연결되지만, 성서에서 하나님에 관한 가장 아름답고도 최고의 진술은 이거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신에 취한 사람이었던 스피노자처럼 신을 사랑하여 신학자가 되고 신을 사랑하는 길로서 신학을 선택한 아빠에게, 신의 사랑은 드높이 찬미해야 할 노래이면서도 골머리를 앓게 하는 문젯거리거든. 모름지기 신학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사랑을 말하지 않고서, 사랑하지 않고서 신학다운 신학을 할 수 없는 거지.

해서,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한 사도 요한의 말 바로 앞에는 이런 문장이 박혀 있단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사랑 그 놈 앞에서 아빠는 사랑의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기에 고개를 떨구지만,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서 고개를 다시 치켜든다. 이제 네가 던진 화두를 품고 본격적인 대화를 나눠보기로 하자.

2.
희림아, 아빠가 이번에 고른 책은 전문가들이 아니라면 생소할거야. 안데르스 니그렌(1890-1978)의 걸작(magnum opus)인 《아가페와 에로스》(크리스챤다이제스트)는 무려 800쪽에 달하는 대작이지. 1부는 1930년, 2부는 1936년, 2차에 걸쳐 스웨덴어로 출간되었어. 그래, 니그렌은 스웨덴 사람이야. 지은이와 이 책을 파악하기 위해 개략적이나마 알아야 할 게 세 가지가 있어. 하나는 그가 신학자요 목회자라는 것, 다른 하나는 스웨덴의 국교인 루터교인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주의 신학과 나치 독일과의 투쟁이야.

니그렌은 룬트대학(Lund University)에서 종교철학과 윤리학을 강의한 학자이면서도 나중에 루터교회의 주교(Bishop)가 되는 인물이었어. 학문성과 교회됨을 동시에 추구했다는 뜻이야. 그런데 저 대학 이름을 주목해야 해. 니그렌은 룬트학파(Lundensian Theology)의 대표자거든. 쌍벽을 이루는 또 한 사람이 구스타프 아울렌(Gustaf Aulen)인데, 두 사람 다 같은 대학에서 활동했고 같은 해에 죽었지.

두 번째는 루터 신학의 짙은 영향력이야. 그는 에로스라는 비기독교적 사랑이 기독교로 침투해서 종합되는 과정에서 아가페적 사랑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종합의 완성자인 아우구스티누스를 철저하게 저격하지. 동시에 그 불행한 종합의 급소를 가격해서 제자리로 돌려놓은 루터야말로 기독교 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737쪽)을 일으켰다고 보더군. ‘아우구스티누스를 능가하는 루터’라니? 이처럼 과격하고도 급진적인 루터주의가 룬트학파의 특징이기도 하단다.

그에게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발현되기 마련이지만, 그 이웃에 ‘자기’ 혹은 ‘자기 사랑’은 없어. 오히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766쪽). 자기 사랑은 본성상 아가페적 사랑의 ‘악마적 왜곡’(802쪽)이라는 거야. 좀 극단적으로 보이지? 여기에는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단다.

그게 다음 세 번째, 바로 자유주의 신학과 반나치 투쟁이야. 종교로서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종합을, 정치로서 나치는 아리안족 인간의 피와 흙의 우월성에 기반을 둔 것인데, 둘은 이어져 있어. 이 책에서 니그렌은 인간의 사랑에서 신의 사랑으로 상승하려는 ‘천상의 사닥다리’를 무참히 파괴해버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이 극단적이고 편향적인 듯하지만, 시대적 정황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지 않겠니.

3.
아들아, 지난 글에서도 얘기했고 너도 이미 책을 출간한 저자여서 잘 알거야. 책 제목은 모든 걸 담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삐져나가는’ 것들이 있잖니. 이 책도 그래. 아가페와 에로스에 관한 책이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지. 간결하니까. 허나, 제목은 ‘아가페와 에로스 그리고 노모스’라고 해야 했을 거야. 사랑을 유대교는 노모스, 그리스는 에로스, 기독교는 아가페라고 정의하고, 그 삽겹줄로 이 책을 엮어가니까. 물론, 노모스를 뺀 두 개념이 더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니그렌은 역사적인 접근을 한단다. 서구 기독교 사상사에서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두 사랑이 갈등하면서 통합되었고 그것이 종교개혁에 이르러서야 다시 제자리를 잡았다는 거지. 좀 더 풀어보자면, 신약 성서의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이었는데 이 사랑은 두 개의 적대적 전선에서 전투를 벌이지. 그리스의 에로스와 유대교의 노모스야.

대립하면서도 서로 모방하는 건 역사가 말해주는 인간 모습이잖니. 교회사를 일별해 보면, 영지주의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에로스 유형, 2세기 변증가들과 터툴리안은 노모스 유형으로 기울고, 마르시온과 이레나이우스는 아가페 유형으로 분류한단다. 갈등을 빚으면서도 타협하던 이 삼겹줄이 마침내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종합을 이루지.

이 불행한 종합은 두 가지 이유에 의해 파괴되는데, 르네상스가 에로스를, 종교개혁이 아가페를 갱신하면서지. 중세에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뒤섞였는데 인간의 자기 사랑은 르네상스에 의해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했어. 종교개혁은 정반대 노선을 취하는데 어설프게 종합된 사랑에서 인간적인 것을 일소함으로써 아가페적 사랑을 회복했다는 게 니그렌의 주장이야.

4.
그럼 아가페란 어떤 사랑일까? 니그렌은 아가페가 기독교의 유일한 동기는 아니지만,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해(43쪽). 아가페 환원주의는 아닌 거지. 바울이 말한 바,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까 기독교는 정녕 사랑의 종교야. 이것이 서구 사상사에서 기독교의 공헌 중 하나지. 그리스 사상에 아가페라는 사랑은 없었거든. “아가페가 없으면 기독교적인 어떤 것도 결코 기독교적일 수 없다. 아가페는 기독교의 고유한 독창적인 기초개념”(49쪽)이야.

이 사랑의 신학자는 아가페를 크게 네 가지로 풀이해(78-83쪽). 첫째, 아가페는 자발적이고 무엇보다도 ‘비동기적’이야. 자발적이라 함은 자기 밖 외부의 요구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기 스스로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는 뜻이야. 비동기적이라는 것은 사랑에 어떤 이유도 없다는 거지. 적절한 예가 생각나는구나. 욥이 아무 까닭이나 조건 없이 믿는지 여부를 두고 사탄이 하나님께 내기를 걸지(욥 1:9-12). 신앙이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는 게 있으니까 믿는 걸까, 아니면 아무런 바람도 없이 믿는 것일까? 욥은 비동기적 신앙과 사랑이 있다는 산 증거란다.

둘째, 아가페는 어떤 가치에 치우치지 않으며 대상에 좌우되지 않는 사랑이야. 그 사람이 사랑 받을 만한 대상이거나 조건을 갖고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야. 마쓰미 토요토미의 작고 예쁜 책 《참 사랑은 그 어디에》(IVP)는 사랑을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해. 전제 조건이 달려 있는 ‘만약에 사랑’(if love), 조건이 따라붙는 ‘때문에 사랑’(because love), 아무 조건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in spite of love). 우리가 사랑 받을 만한 가치나 조건, 행위나 공로가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지. 오히려 하나님에게 반역을 일삼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지.

셋째, 아가페는 창조적 사랑이야.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을 가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뜻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만이 그에게 가치를 제공할 뿐”(81쪽)이거든. 이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죄 용서란다. 그 사랑은 죄의 노예로 살던 자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 또한 용서 받은 자는 용서하는 자로 살게 되지. 이전에 상상조차 못하던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는 아가페야.

마지막으로 아가페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불러일으킨단다.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도무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열어주셨지. 바로 아가페적 사랑으로 말이야. 때문에, 아가페는 하나님과의 참되고도 깊은 사귐을 열어주지. 하나님에게로 올라가려고 아무리 몸부림치고 아등바등해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미력한 것, 아니 무력한 것이 에로스적 사랑이라면, 아가페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내려오시는 ‘내리 사랑’의 길을 개척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성취할 수 있었지.

그러면 희림아, 너도 읽은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니그렌의 에로스 해석(169-82쪽)을 간략히 소개할게. 에로스란 천상의 선(善)과 미(美)를 갈망하는 사랑이야. 바로 그렇기에 그 사랑은 첫째, 욕망하는 사랑 혹은 획득적 사랑이지. 자기 결핍을 채우려는 필요에 의한 사랑이기에 대상을 소유하려고 들어. 그리고 결코 소유하지 못하기에 언제나 욕망하지. 둘째, 에로스는 인간이 신적인 것으로 가는 길이야.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갖고서 사멸하는 세계를 벗어나서 신에게로 나아가려는 모든 것이 에로스적 충동의 산물이지. 셋째, 결국 그런 사랑은 ‘자기중심적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니그렌의 결론이야. 불멸과 선, 그리고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사랑이지만, 갈망한다는 점에서 인간 내부에 있는 것이어서 에로스라는 동기는 자기중심적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

방금 말한 세 가지는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에 대한 니그렌의 기독교적 해석인셈이다. 에로스를 이렇게 이해했기에 니그렌은 아가페와 에로스는 ‘통약불가능’(공통분모가 없음)하다고 주장해. 사실, 이 점에서는 C. S. 루이스도 동의하는데 그는 사랑을 선물과 필요라는 단어로 구분한단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물의 사랑’이라면, 인간의 사랑은 ‘필요의 사랑’이야(《네 가지 사랑》, 홍성사, 13-14쪽). 그런데 인간이 제 아무리 하나님을 숭고하게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랑은 “본질적으로 필요의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거지.

5.
니그렌의 유형론은 반박할 여지가 많단다. 이건 복합적인 상황과 연관된 사상을 탈맥락화해서 구조화·도식화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란다. 자신이 설정한 도식에 그 복잡다단한 사상을 우겨넣는 꼴이 되고 말지. 본말전도, 애초에 설명을 위한 도구가 목적이 되고 만 격이지. 이제 노모스로서의 유대교, 이기적 사랑으로서의 에로스론, 아가페로서 신약성서의 사랑에 대한 반론을 살펴봄으로써 니그렌의 텍스트가 지닌 한계를 짚어볼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잠시 질문을 하나 해볼까. 유대교 또는 구약성서가 ‘노모스’로 간단하게 규격화될까? 1세기 유대교에 대한 혁명적 시선을 제시한 E. P. 샌더스나 바울에 대한 새관점 학파가 들으면, 펄쩍 뛸 얘기야. 왜냐하면 유대교는 그냥 율법주의가 아니라 샌더스가 명명한 대로 언약적 율법주의거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에 의해 하나님 백성이 되었고, 그들과의 언약으로 율법을 체결한 다음 하나님은 그들을 지키시겠다는 약속을 주셨고 이스라엘은 순종하겠다고 다짐했거든. 그러니까 구약과 유대교는 노모스가 아니라 은총에 의한 언약 체계라는 거지. 그러니 노모스로 일괄 치환하는 데 강하게 반대할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가장 대표적으로, 출애굽기는 법률이 아니라 사랑이야. 하나님께서 노예살이 하는 하층민을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니그렌이 말한 것처럼 아가페적 사랑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지. 이스라엘의 거듭되는 타락과 범죄에 내려진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이면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눈물이 흐르고 있어.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는 역사도 언약에 기반한 사랑 때문이었고. 사랑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출애굽기나 민수기 부분에서 끝났을 거야. 하나님의 사랑이 구약 이야기를 아예 창조한 거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의 에로스론을 이기적인 자기 사랑으로 등식화할 수 있을까? 아마 이 부분은 네가 더 잘 알거야. 플라톤의 《향연》에서 에로스는 신과 선, 그리고 미를 향한 상승이잖니. 좋고도 아름다운 것, 시간 속에서 사멸하거나 사그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을 향한 갈망에 의해 근원적 출처인 신에게로 무한한 상승의 불을 지피지. 그렇기에 에로스적 사랑을 그저 이기적 사랑으로 치부하는 건 너무 기독교 편향적인 해석이면서, 마냥 세속적인 것으로 퉁친다는 생각이 들어.

기독교 내부에서도 니그렌의 아가페 이해에 대해 흔쾌히 동의하는 이들이 많지는 않아. 기독교 또는 신약성서의 아가페가 자기 사랑도, 정의도 배제한 이타적 사랑이기만 한 걸까?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기 사랑은 상호 배척하는 걸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이고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의 일부로 자기 사랑을 자리매김할 수는 없는 걸까? 너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사람이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신학하는 아빠에게 물었는데, 네가 그 둘이 서로 밀쳐내는 것으로 상정하지는 않았을 성싶구나. 그 둘은 하나이거나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을 듯한데, 그렇지?

적어도 니그렌의 생각이 지당한 부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이라는 점에서야. 그 사랑은 십자가 사랑으로 확증되었지. 아빠에게 누군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십자가를 보라’고 대답할 거야.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 또한 ‘십자가에 있다’고 힘주어 말할 거야. 니그렌은 이렇게 표현했지.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바울의 사랑 개념을 가장 잘 묘사하는 형식적 명칭일 것이다.”(119쪽) 그 사랑이 원수 사랑이 되고, 기독교 평화주의의 기초를 형성하지.

그렇다면 어떤 계산도, 대상도 고려하지 않는 절대 순수 무구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서로 사랑과 자기 사랑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아가페는 인간의 모든 사랑을 사랑 되게 하는 척도로서의 사랑으로 자리하고 말이야. 물론 에로스적 사랑도 긍정적인 면이 많아.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욕구가 바로 에로스적인 것이잖니. 그것이 있기에 너와 내가 이토록 읽고 글을 쓰고 배우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노모스 안에도 신적인 사랑이 머물고, 에로스적 사랑에도 신의 사랑의 흔적이 깃들어 있지. 아울러 아가페적 사랑 안에는 노모스적 정의도, 에로틱한 사랑도 거주하고 있어. 한국 기독교가, 그리고 내가 회복해야 할 사랑도, 노모스적 사랑, 에로스적 사랑, 아가페적 사랑 모두가 온전히 통합된 것이지 않을까, 라고 아빠는 말하고 싶다.

아들아, 여기서 우리가 이미 토론했던 ‘정의’를 다시 떠올린다. 왜냐하면 니그렌의 사랑론은 정의를 약화하거나 아니면 사랑과 정의를 대립시키기 때문이야.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렴. “동기 있는 공의는 여기서 동기 있는 사랑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90쪽) 니그렌은 그 근거를 소위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와 포도원 일꾼에게 품삯을 주는 주인의 비유에서 찾는다. 맏아들 과 포도원 일꾼들은 정의라는 잣대를 들이대지만, 아버지와 주인은 사랑의 관점으로 행동한다는 거지. 해석의 타당성은 차치하더라도, 저렇게 사랑과 정의의 이분법이 과연 성서적이고 기독교다운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기더구나.

이러한 니그렌의 입장에 강력한 반기를 든 사람이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야. 그는 니그렌이 정의를 배제한 사랑을 주장한다는 부분을 집중 타격하지. 그는 자서전적인 책, 《하나님의 정의》(복있는사람)에서 자신의 전 생애를 정의라는 키워드로 일관한단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와 남미의 사회 정의 운동에 깊숙이 참여한 월터스토프의 눈으로 보건대, 정의 없는 사랑은 신약적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정의에 대한 요구이며 불의에 대한 민감성을 전제한다. 하나님이 죄악된 인간을 사랑한다고, 용서한다고 할 때, 그것은 정의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사랑할 수 없고, 사랑 받을 수 없는 죄인을 사랑한다는 말 자체가,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 판단과 도덕적 기준, 신적 심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지.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의 실현이야. 진정한 사랑은 정의의 실천이지.

6.
희림아, 아빠는 ‘정의의 실현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월터스토프의 말이 옳다고 본다. 그러나 사랑 없는 정의는 냉혹하지. 그런 점에서 사랑은 정의의 초석이고, 정의의 초과라고 생각해. ‘정의의 실현으로서의 사랑’과 ‘정의의 초과로서의 사랑’이라는 두 측면 사이에 어떤 긴장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둘은 언제나 함께하지.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면 금세 드러나.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이란다. 어느 곳에서는 배타적인 사랑으로, 다른 곳에서는 보편적 사랑으로 나타나지. 나는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은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고 봐. 하나님의 사랑은 배타적인 동시에 보편적이라는 거지. 배타적 사랑이 약자를 위한 편애라면, 보편적 사랑은 만인을 위한 사랑이지. 앞의 것이 정의를 위한 기초를 형성한다면, 뒤의 것은 평화를 위한 기초가 된다. 한 사회나 공동체가 얼마나 정의로운지 재는 척도는 그 사회의 약자가 어떤 상태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구약성서 시대 상황에서 가장 약자이자 소수였던 고아와 과부, 나그네 또는 난민에 대한 사랑은 그들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자를 향한 정당한 분노로 표출되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으로 이어지지.

언젠가 로마서를 읽다가 특이한 구절을 보았단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다.”(2:11) 대략 230번 정도 읽어서 닳고 닳도록 읽은 성경이건만, 어느 날 계시처럼 큼직하게 다가오더라. 이 구절이 의외로 로마서에서 중요한 구절이겠다, 그런 감(촉) 말이야.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법정 판결의 최종 목적은,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위한 교두보란다.

그가 설사 무지막지하게 나쁜 짓만 일삼는 악인이더라도, 아니면 법 없이도 잘 사는 도덕적 인간이라도, 설혹 그가 종교적인 유대인들의 헌신과 열심을 능가한다고 해도 모두가 죄인이며,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게 로마서와 바울 사도의 핵심이지. 그랬기에 차별 없는 사랑을 반대하는 일체의 시도에 대해 갈라디아서에서 ‘저주’를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어. 할례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에 제약을 가하려는 것들을 완강하게 반대했고.

만약 하나님의 백성 됨의 표징으로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할례 이전의 존재됨, 특히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 생득적인 것들, 즉 성·계층·민족·인종 등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되겠지. 남자여야 하고, 유대인이어야 하니까 말이야. 또한 약자를 억압하는 강자, 소수자를 배제하는 다수, 빈자를 착취하는 부자들도 한편으론 그들의 행위에 따른 정당한 비판과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은 변치 않아. 어쩌면 그 진실이 모든 것의 토대가 되지.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실 때, 그 사랑에서 누구도 제외되길 원하지 않으셨어. 그가 죄인이고 악인이더라도 말이야.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너의 물음에 니그렌의 사상에 기대어 이렇게 답하련다.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을 받은 우리는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한다고. 그 사랑은 차별하는 배타적 사랑이면서 차별 없는 보편적 사랑이기도 하다고. 사랑, 그 놈 참 어렵다. 사랑 그놈이, 참이다. 답이다.
누구나 사랑하지만 배타적으로 너를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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