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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르나멘토, 인간의 존엄과 사회의 공동선
[352호 역사에 길을 묻다]
[352호] 2020년 02월 19일 (수) 11:29:05 최종원 goscon@goscon.co.kr

 

1. 근대성의 종말 위에 선 가톨릭 교회
1, 2차 세계대전은 무한한 진보를 꿈꾸던 근대 세계의 느닷없는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성찰을 상실한 유럽의 제국주의 확장과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맹신은 결국 인류 역사에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근대 유럽이 축적한 과학기술은 단기간에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조력했고, 전쟁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맞보고 나서야 멎었습니다. 포탄으로 잿더미가 된 현실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은 돌이키기 어려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앞다투어 근대를 성찰적으로 반성하는 흐름들이 생겨났는데, 성찰적 근대성(reflexive modernity)이라는 명제로 제기되기도 하고, 탈근대 혹은 후기근대(postmodernity)라는 관념으로 표출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던진 질문은 냉정했습니다. 이 참상 가운데서 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신의 뜻을 이 땅에서 구현한다는 종교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질문이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독일 루터교회는 히틀러의 아리안 인종주의에 동조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으며, 2차 대전 당시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던 피우스 12세(재위 1939-1958)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침묵했습니다. 물론 가톨릭 교회에서는 피우스 2세가 단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철저히 중립적 입장을 취했으며, 당시 유대인, 전쟁포로, 난민 등을 돌보는 인도주의를 실천했다고 주장합니다. 

피우스 12세에 대한 시선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교황청을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 파시즘에는 침묵해놓고, 2차 대전 이후 공산주의에는 신랄하게 공격을 퍼부은 것은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나치에 동조했다는 의혹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전후 도전 받는 가톨릭 교회를 지켜내고 확장해나간 인물로 칭송받기도 합니다. 

피우스 12세의 재임 기간은 가톨릭 교회가 사회적으로 입은 손실이 어느 때보다 컸던 동시에 외연이 확장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일관된 것은 피우스 12세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교회를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황직을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그가 볼셰비즘이나 공산주의를 배척했던 이유는 무신론이 유럽 기독교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습니다. 피우스 12세는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도전받는 교회를 대내적으로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이탈리아인 일색이던 추기경단에 다양한 인종과 민족 출신을 지명한 것은 보편 교회의 확장에 기여했습니다. 

1943년 반포한 회칙(mystici corporis)의 제목에서 보듯 그는 신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지향했습니다. 피우스 12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충실한 계승자였습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1950년 성모승천설을 교리로 확정한 데서 그 단면이 보입니다. 그의 인식 세계에서 교회는 종교적인 신비를 추구하고 전통을 지키는 곳입니다. 이런 철학에 얼마나 충실했던지 교황은 종교적 사무에 전념하고, 정치적인 역할은 교황의 비서였던 파스칼리나 레네르트(1894-1983)라는 수녀에게 맡기는 상황이 되었습니다(그래서 이 수녀는 ‘여교황’ 파스칼리나로 불렸습니다). 다소 기형적이라고 볼 여지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끝에서 종교의 전통적 역할을 회복하는 데 충실했던 교황은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신경쇠약을 앓았지만 강인한 의지로 강론과 전례 등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갔습니다. 그에게 투영된 이미지는 전 세계를 정신적으로 통치하는 전제군주였습니다. 

역사는 그를 구시대의 막차를 탄 인물로 그립니다. 왜일까요? 근대 이후의 교회, 폭넓게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에서 그의 삶과 행보는 전통적이었습니다. 인류의 공공선을 무너뜨리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현재의 악 앞에 무력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이 도전받고, 압제받는 구조 속에 처한 수많은 이들에게 교회가 줄 수 있는 답이 천상의 복을 제시하는 종교적 위안이라면 그 한계는 뚜렷합니다. 사람들이 종교에 던진 근본적인 질문은 그 종교가 ‘지금, 여기, 내 삶’에 무슨 답을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는 가톨릭 교회가 증오해 마지않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가해지는 물리적 박해뿐 아니라 가톨릭이 다수를 이루는 중남미 국가들에서 자행되는 국가 폭력과 인권 유린,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커져가는 국가 내의 빈부격차와 제3세계의 절대빈곤 문제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숙제들이 존재했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같이 천상의 신비를 지향하는 것만이 교회의 유일한 선택지였을까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가 사람들에게 여전히 유의미한 지대로 유지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후 다수 가톨릭 신학자들의 통찰 속에서 제기되었습니다. 프랑스 신학자이자 도미니크회 신부였던 이브 콩가르(1904-1995)는 계급과 같은 성직주의의 틀 속에 갇힌 교회에 이른바 ‘평신도 사도직’이라는 개념을 제기했습니다. 중세 말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이 20세기 가톨릭 신학자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독일 예수회 신부 칼 라너(1904-1984)는 초월적인 신의 신비는 바로 이 땅의 모든 사람들 속에 구현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가톨릭 교회라는 제도의 바깥 사람들에게도 신의 은총은 보편적으로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이 땅에서 유일한 구원의 담지체로서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상대화한 것입니다. 콩가르나 라너의 사상은 사람들로부터 큰 공감과 찬사를 받았지만, 이와 동시에 가톨릭 교회로부터는 전통과 정체성을 위협하는 사상으로 치부되어 비판받았습니다. 

2. 아조르나멘토: 교회, 세상 속으로  
세계대전과 그후 격동의 시기 20년을 교황으로 재위했던 피우스 12세가 195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회 대내외적으로 위기가 직감되었습니다. 추기경단에서는 76세의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을 후임으로 선출했습니다. 이전의 교황들처럼 이탈리아 출신의 이 추기경은 귀족적이었던 전임 교황과는 달리 서민적이고 소박했습니다. 동유럽 교황 사절로 활동하면서 동방교회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는 것과 전쟁포로와 노동자, 고아들을 위한 사목 활동에 헌신했다는 점이 특징이었습니다. 11차례의 투표 끝에 추기경단이 고령의 교황을 선택했다는 것은 가톨릭 교회가 마주한 전환기에 임시적인 목자의 역할만을 기대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 23세라 불린 그의 재위 기간은 채 5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재위한 교황 요한 23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향후 가톨릭 교회의 방향을 바꾸는 일을 벌입니다. 교황직에 오른 지 3개월만에 전격적으로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며, 그 필요성도 진지하게 제기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어쩌면 그의 도발적인 시도는 교황 이름을 ‘요한’으로 정했을 때 예견되었는지 모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붙은 교황은 20명 이상 있었지만, 마지막 요한 23세(재위 1410-1415)는 3인의 교황이 난립한 교회대분열 시기에 불명예스럽게 교황직에서 폐위되어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인물입니다. 그후 500년 이상 어느 누구도 ‘요한’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76세의 신임 교황은 역사에서 오명으로 기억되는 ‘요한 23세’라는 명칭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소신이 뚜렷했습니다. 

교회는 변화하는 ‘오늘 여기’의 현장에 적응하고 그 속에서 살아내는 이 땅의 신비를 지향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그는, 교황직에 오른 직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합니다. 교회의 지향에 대한 요한 23세의 철학은 공의회 모토인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에 들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현대화(modernization) 또는 ‘현시대에 대한 적응’이라는 의미의 이 이탈리아어는 교회가 사회에 어떻게 적응하고 유의미한 상호작용을 할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이 땅에 거하지만 속하지는 않은 천상의 신비체라는 입장을 포기하고, 이 땅에 터 내리고 있는 공동체로서 이 세상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땅의 공동체로서 세상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교회의 사회 참여라는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모습. (사진: CC BY-SA 3.0/Lothar Wolleh)

이는 한 세기 전 열렸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비교할 때 혁명적인 전환입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는 근대가 낳은 자연주의, 이성주의, 사회주의, 혁명 등 모든 사조에 대해 장벽을 쌓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는 천상의 신비 뒤로 숨어버렸습니다. 교황무류설 교리 선포는 그 핵심이었습니다. 여전히 세상 속에서 교회는 중심이어야 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식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었습니다. 

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는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근대성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과 적응은 아니었습니다. 제도 교회는 변화하는 근대를 읽지 못했고, 근대가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할 때 제어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류에게 아무런 답을 제시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조르나멘토’는 먼저, 근대사회를 읽어가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리고 종교가 그 근대성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학자 울리히 벡과 앤서니 기든스가 제시한 ‘성찰적 근대화’ 담론과 닿아 있습니다. 근대가 생성한 여러 제도와 기제들은 시대의 철학이 낳은 산물입니다. 각각은 고유한 쓰임새와 역할이 있습니다. 동시에 그 역할에 대해 반성적으로 돌아보지 않을 때 모든 제도는 억압적으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스템이 정교해질수록 그 시스템을 다루는 개인이나 집단은 더욱 깊은 성찰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찰적으로 근대를 조망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근대를 형성한 인간과 사회 집단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합니다. 

양차대전으로 드러난 사실은, 세계가, 아니 더 꼬집어서는 유럽의 근대가 성찰 지점을 놓쳐버리고 무한한 확장과 진보의 환상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과정에서 주체가 되어야 할 인간은 객체가 되었으며,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속에서 인간의 존엄이 극단의 압제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사회 구조를 읽고, 그 모순을 지적하고, 전환을 촉구하는 일에 개인과 집단의 역할도 부정할 수는 없으나, 무엇보다 인간 본연의 존엄과 가치에 천착하는 종교의 역할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근대성의 파국 이후 불확실성과 혼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종교는 더 사회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사회 구조의 성찰점들을 짚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회 참여는 전근대적 전제주의 체제이건, 독재 체제이건, 시장만능을 외치는 신자유주의 체제이건 모든 체제에 해당합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자 ‘아조르나멘토’를 내세운 요한 23세의 선택은 불가피하게 전통과 교리 중심의 가톨릭 교회에서 벗어나는 탈전통화라는 위험을 무릅써야 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긍정적으로 적응한다는 것은 교회의 구조와 세계관의 변화 및 진화를 전제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변화들을 담아냈습니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물
1962년 10월 11일 요한 23세는 바티칸 궁에서 2,540명의 투표권을 가진 이들이 참여한 가운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회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낙관하지 못했던 공의회 소집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 공의회는 4회기 동안 계속되었고, 약 2,800여 명이 참가한 역대 가장 큰 규모였으며, 교황의 의지에 따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 신학자들도 초청하였습니다. 

1962년 10월 11일부터 12월 8일까지 열린 제1회기에서는 전례에 관한 의안들을 논의했는데, 첫 회기부터 혁신적 논의들이 제안되었습니다. 미사 때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 사용 허용, 사제 외에는 아무런 역할이 없었던 참가자들의 능동적 역할 등 전례 개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첫 회기가 끝난 후 1963년 6월 3일, 요한 23세의 사망으로 공의회는 중단됩니다. 그후 교황으로 선출된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는 선임 교황의 유지를 따라 공의회를 재개합니다. 두 번째 회기에서는 첫 번째 회기에서 작성된 전례 개혁 수정안이 절대 다수(2,158 대 19)의 찬성으로 통과되고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를 승인합니다. 공의회 폐회 이후 바오로 6세의 명에 따라 <로마 미사 경본>이 작성되었고 1970년에 공포되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사제가 회중을 바라보고 자국어로 드리는 공동체 중심의 미사가 제도화된 역사는 매우 짧습니다. 

두 번째 회기에서 가장 주목할 사건은 교황이 예루살렘을 방문해 동방교회 총대주교를 만나겠다고 선언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갈라진 형제와 일치를 이루려는 가톨릭 교회의 의지의 표현이었고, 실제 1964년 1월 바오로 6세는 동방교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와 만나 1054년 파문하여 결별했던 동방교회와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열교’(裂敎, 가톨릭에서 찢어져 나간 교회라는 의미)라고 지칭하던 개신교를 ‘분리된 형제’로 수정하였습니다. 1964년과 1965년의 세 번째, 네 번째 회기에서는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논의, 사제의 독신제 등을 포함한 교회의 사목 활동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공식 마감되고, 16개의 교령과 헌장을 공표했습니다. 

앞서 열린 모든 공의회는 이단과 교리 문제 해결 등이 핵심 사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2,000년 역사에서 스무 차례 이상 열린 공의회 중 이단 지정이나 새로운 교리 결정이 없는 유일한 공의회였습니다. 이 사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 개혁과 내부 자정을 넘어서 진지하게 세상 가운데에 적응하고자 했음을 보여줍니다. 그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뿌리 깊은 신스콜라주의(Neo-scholasticism)를 극복한 공의회로 인정받습니다. 명실상부하게 교회가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를 지향하게 된 것이지요.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제1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제26장 ‘공동선의 증진’에서는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인 공동선(common good)을 증진할 권리가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아울러 인간은 의식주, 교육과 노동, 양심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을 누릴 존엄한 존재임을 선포합니다. 

사목 헌장 제78장에서는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로만 충분하지 않으며 ‘정의’가 구현되는 상태라고 규정하면서, 개인의 행복이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타자의 존엄을 존중하려는 확고한 의지와 형제애의 실천이  이루어질 때 성취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인종이나 정치적 입장, 경제적 능력 등에 따라 무시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1,700년 동안 제도 교회는 기득권을 형성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시기 동안 제도 교회는 권력과 가까웠으며, 힘없고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거나 온정주의적 시혜를 베푸는 데 만족했습니다. 가부장적 군주의 권위를 주장했을지언정, 형제애를 부르짖지는 않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는 정치 종교에서 시민 종교로 전환하는 가능성을 시험하는 시험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진지하게 사회 속으로, 대중 속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요?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 ‘아조르나멘토’는 이 근대 세계를 성찰하며 대중들과 함께 공동선을 추구해 나가겠다는 의지입니다. 그 정신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 참여와 인권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라틴 아메리카에 정착한 진보적 신학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신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구체적인 결과물입니다. 해방신학은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착취당하는 중남미 국가의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는 교회를 추구했습니다. 전통적인 종교 차원의 구원을 넘어 사회적·개인적 차원의 해방과 구원을 추구한 것입니다. 물론 교황청이 해방신학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마치 16세기 종교개혁기 루터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등장한 민중 운동이나, 농민 저항 운동을 루터가 탄압한 전례처럼 말입니다. 실제로도 가톨릭 교회는 사회적·정치적인 차원에 강조점을 둔 해방신학을 탐탁치 않게 여겨 억압했습니다. 하지만 그 남미 가톨릭의 토대 위에서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나왔다는 것 역시 공의회의 결실입니다.

해방신학으로 인해 논쟁적인 라틴 아메리카와 달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 가장 적극적으로 소개되고 적용된 모범 사례로는 한국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된 김수환은 1964년 가톨릭 기관지 <가톨릭 시보>의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 및 진행 과정을 한국에 상세히 소개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45세의 젊은 주교 김수환을 1968년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서임하고, 이듬해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확산을 지원합니다. 또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네 번째 회기에 참여하여 심의와 의결 과정을 직접 체험한 지학순 주교는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한국 사회 속에서 상징적으로 구현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한국 민주화 운동 시기 명동성당이 한국 시민사회 운동을 견인한 상징성을 지니게 된 일, 유신 시절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지학순 주교의 구속,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한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의 공동선’이라는 명제가 한국 가톨릭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적어도 한국 사회라는 콘텍스트는,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지 못한 산업화와 근대화 시기, 성찰하는 근대를 만들어 가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 ‘아조르나멘토’가 구현된 유의미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외적인 구현과 아울러, 교황청은 군주제의 틀을 벗고 시민사회 속에 들어가기 위한 어떤 상징적인 변화를 꾀했을까요? 큰 변화 중의 하나는 교황 선출 시 삼층으로 장식된 화려한 교황관(triregnum)을 씌우는 교황의 대관식이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회기 중에 선출된 바오로 6세가 대관식을 한 마지막 교황입니다. 스스로 로마의 황제라는 자의식을 상징했던 교황관은 역사의 유물로 박물관에 남겨졌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삼중관이나 화려한 의복에서 나오지 않음을 가톨릭 교회는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다는 상징은 1978년 폴란드인 교황 요한바오로 2세 선출입니다. 그후 독일인 베네딕트 16세, 최초로 비유럽인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 등이 연거푸 세워진 것은 역사의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1415년 이래 단 두 명(에스파냐, 네덜란드)을 제외하고 550년 이상 이탈리아인들이 교황직을 독점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시적인 결정문이나 헌장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성취를 거둔 것입니다. 

재임 중 자신의 교황직을 내려놓는 선택을 한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사임의 변에서 마지막 순례를 시작하는 평범한 순례자로서 교회의 선익과 공동선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공동선이라는 단어에 주목한 것은 그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후임으로 선출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한 내력을 이야기했습니다. 콘클라베에서 3분의 2 득표해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옆에 앉았던 상파울로 추기경이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개표가 종료될 때까지 교황은 줄곧 전쟁이 떠올랐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평화의 성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은 ‘평화란 정의가 구현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현 교황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충실한 계승자인 셈입니다. 

적어도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사회의 공동선과 정의가 구현되는 평화의 교회를 꿈꾸는 듯 보입니다. 너무 당연해 보이는 종교적 지향이 전 세계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마음을 훔치는 것은 그동안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한국 개신교가 처한 상황이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그 실행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개신교는 인간의 존엄과 사회의 공동선을 교회가 지향할 중요한 가치로 붙들고 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와 호흡하고, 상호작용하며, 현대가 추구하는 가치에 무분별하게 휩쓸리지 않고, 종교만이 제시할 수 있는 성찰점을 던져주고 있을까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위기를 헤쳐나간 지혜를 보여줍니다. 가톨릭 교회는 교리로 타자를 배제하고 이단시 하거나 천상의 신비 뒤로 도피하기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 속에 더 겸손히, 긍정적으로 적응하고자 하는 ‘아조르나멘토’ 정신을 붙들었습니다. 공의회 역사에 길을 물어보자면, 위기 속 한국 개신교의 변화의 길은 교리와 성서 해석으로 사회를 재단하고 규정하려는 스콜라주의적 천착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회 변화에 귀를 기울이며 묻고 배우는 겸손을 회복하는 데 있음이 점차 뚜렷해집니다. 교인 숫자나 넉넉한 재정과 사회적 성취가 교회의 자랑이 아니라,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돌아보고 사회 속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교회다움의 척도가 된다면, 신자유주의의 자본의 지배 아래서도 교회는 사람들이 숨 쉴 해방과 자유의 공간이 될 것입니다. 

 

 

■ 연재 순서
1. 왜 지금 ‘공의회’인가? : 사회사 관점으로 교회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2. 동서교회 분열의 서막인가, 확장인가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위로부터 이뤄지는 교회 개혁의 전형 :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
4. 권력의 정점을 향하는 교회, 그 빛과 그림자 : 제3차 라테란 공의회
5. 가톨릭 교회, 삶과 죽음의 지배를 완성하다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6.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제 1, 2차 리용 공의회
7. 교회여, 낮은 청빈의 자리에 설 수 있는가? : 비엔나 공의회 
8. 교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 콘스탄츠 공의회
9. 실패로 끝난 교회의 근대 체제 실험 :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
10. 교회가 사람을 못 바꾸면, 사람이 교회를 바꿔야 한다 :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1. ‘새로운 종교’를 만들다 : 트렌트 공의회
12. 근대세계의 고통 앞에서 천상의 신비를 논하다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3. 아조르나멘토, 인간의 존엄과 사회의 공동선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역사에 길을 묻다: 공의회의 사회사’는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집필 노동으로 수고해주신 필자와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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