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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실패한다 : 로마서 다시 읽기 2
[352호 제국과 하나님 나라]
[352호] 2020년 02월 19일 (수) 11:30:01 한수현 goscon@goscon.co.kr

 

바울의 첫째 물음: 죄란 무엇인가?
바울 서신에 대해 대중강연을 한 날이었다. 청중석에 있던 한 노신사 분이 다가와서 물었다. 
“예수가 나의 죄를 지고 간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려운 질문이었다. 길게 설명하면 질문을 한 이도, 답변을 하는 나도 수렁에 빠질 수 있다. 간단히 대답했다. 
“예수가 선생님의 죄만 지고 가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의 모든 죄, 그리고 그 죄를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지고 갑니다.” 

그러자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모든 것이란 무엇입니까?”
“죄를 만들어내는 이 세계의 온갖 시스템을 뜻합니다.”
“그럼 그것과 내가 죄인인 것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선생님이 하나님의 정의를 만들어낼 수 없는 삶, 그 정의를 미워하는 세계 속에 살고 계셨기 때문에 죄인이 될 수밖에 없으셨던 겁니다.” 

내가 이해한 바울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답했다. 하지만 매우 찜찜했다. 입 안에서 맴도는 단어들이 익숙하지 않았고, 익숙하지 않으니 무언가를 더해 다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군가 내게 죄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아버지 앞에서 이성을 잃고 한 살 위인 형과 주먹다짐을 했던 일인데, 그 벌로 주먹 쥔 손을 위로 든 채 아주 오래도록 무릎을 꿇었다. 그때 나는 내가 벌을 받는 이유가 아버지를 노엽게 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형제가 싸우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내가 잘못했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아버지를 분노케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죄’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하나님이 분노하셨냐고 물으면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거역’이란 하나님이 하라고 한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하는 일을 뜻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요구를 보통 율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이 설명에는 큰 맹점이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용서해 주어야 할까? 예수는 하나님의 율법을 알면서도 어긴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를 졌을까? 율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죄인이 된 사람들은 심판이 억울하지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해대며 전도사님을 당혹스럽게 하는 고등학생처럼 율법과 죄에 대한 관계는 어렵기만 하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린다.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망할 것이요, 율법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롬 2:12, 이하 새번역)

바울은 간단하게 정리한다. 율법을 모르고 죄를 범한 사람도 죄인이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율법이 명하는 바”(롬 2:14)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결국 죄가 없는 사람은 율법이 있건 없건 간에 율법이 명하는 바를 이루는 사람이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든, 로마 사람으로 태어났든 율법이 명하는 바를 이루고 살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를 믿으면 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죄의 문제를 해결했으니까. 할렐루야! 

논리적으로 살펴보면 죄인이 되지 않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율법을 실천하는 것,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는 것이다. 율법을 모르면 어떻게 실천하나? 바울은 이 불만 섞인 질문에 불친절하게 답한다.  

왜 우리는 죄 아래 살고 있는가?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롬 1:20-21)

‘어떤 사람들’이 아니다. ‘사람들’이다. 곧 모든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도 그 뜻을 따라 살지 않는다. 율법을 실천하는 삶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그 악명 높은(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장 칼뱅이 말한 ‘전적 타락’이 나오고 루돌프 불트만의 ‘인간 실존의 불행’이 나온다. 여기까지 오면 우린 물어야 한다. 왜? 왜 모든 인간은 어둠으로 가득 찼을까? (안타깝지만 이 논리대로라면 이순신 장군도 심판을 피하기 어렵다.) 

바울은 자신의 논의를 명확하게 끝맺지 않는다. 윤리, 양식(良識), 도덕으로는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를, 그것이 단 1%의 가능성도 없는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보통의 로마서 읽기, 또는 바울 읽기는 여기서 멈춘다. 그리고 긴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넘어간다. 믿으면 된다니,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믿어서 구원받으면 된다니 그렇게 하자는 식으로. 그러나 바울 논의의 백미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를 알면서도, 자기들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롬 1:32)

비슷한 논의를 반복하면서 바울은 로마서 1장 22절과 31절에서 사람들의 죄 목록을 나열한다. 중상, 불손, 오만, 자랑, 악의 모략꾼, 부모 거역, 우매, 신의 없음, 무정, 무자비 등등. 그리고 이들이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롬 1:32)를 무시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이러한 죄를 범한 자들을 죽여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이 죄를 저지를 뿐 아니라 죄지은 자들마저 용서해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일까? 여기에 바울의 주장, 즉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의미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이 죄 목록은 당시 로마의 역사가들이 증언하는 로마 황제들의 범죄 기록과 매우 유사하다. 즉, 바울의 주된 타깃은 로마의 정치인들과 법이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정치인들이 저 모양이니 나라가 어떻게 멀쩡할 수 있냐고, 사람들이 무엇을 배우겠냐고. 바울이 볼 때, 로마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 더 정확히 말하면, 황제와 원로원이야말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왕족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를 전했지만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그 대상이 변했다. 로마 황제들이 율법을 모르는 자들이라 해도 결코 피해갈 수 없다.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τὸ δικαίωμα τοῦ θεοῦ, 토 디카이오마 투 떼우)는 개역개정판에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심’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단어는 성서에서 (정)의를 의미하는 단어, ‘디카이오스’와 연결되어 있다. 디카이오스(정의)는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미슈파트(공의)와 츠다카(정의)로 쓰였다. 미슈파트와 츠다카를 세우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것이 바로 율법이다. 구약성서로부터 의와 법은 하나의 쌍으로 묶여 있던 것이다. 

원래 공의와 정의는 정치적이고 법적인 용어였다. 구약시대 이후 이스라엘 국가가 망하고 길고 긴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의미인 공의와 정의는 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케로 번역되기보다 개인과 신의 관계를 좀 더 강조하는 디카이오스로 번역되었다. 여기에서 헬라의 정치, 헬레니즘 아래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예수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말했던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습관대로 하나님의 ‘정의’를 디케보다는 디카이오스로 썼다. 

그러나 바울은 구약의 방식대로 디카이오스를 국가적인 통치 개념으로 해석한다. 바울이 나열한 죄 목록은 모든 인간의 죄가 아니라 당시 로마제국 지배자들의 범죄이다. 그들의 범죄를 로마의 철학과 법제도가 심판하기는커녕 방종하고 악화시키고 있다고 본 것이다. 바울은 로마가 죄악으로 물들어가는 이유를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악한 존재라는 성악설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제국이 서 있는, 제국이란 시스템이 악하기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나아갈 수 없다고 지적한다. 예수가 짊어진 죄는 단순히 나의 죄만이 아니라 세상의 죄인 시스템과 그 결과까지 아우른 것이다.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롬 1:16)

정의와 법, 그리고 죄: 모순의 트라이앵글
흔히 바울이 유대교를 떠나 예수를 선택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가 율법의 한계를 깨닫고 유대교를 버린 것이라 판단한다. 그러나 바울의 그림은 이보다 훨씬 더 크다. 먼저 바울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율법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실천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한다. 유대교의 율법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로마인들의 양심, 그리고 인간의 법 자체가 지닌 문제를 통찰하기에 이른다. 유대와 로마의 기득권자들을 분노케 했고, 결국 바울을 죽음으로 몰고 갔을, 법에 대한 가장 파격적인 논의를 시작한다.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롬 7:21-23)

로마서 7장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는 매우 다양하여 일목요연한 해석이 없다. 나는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법이 유대인에게는 율법, 이방인에게는 양심, 그리고 그 양심을 기반으로 만든 각종 이방의 법률을 나타낸다고 본다. 바울의 법에 대한 논의가 오직 율법에 관한 것이라면 이방인들도 결국 율법 안에 있다는 그의 논의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든 인간이 어떤 형식이든 법 아래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법의 목적은 사람을 괴롭히고 벌주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바울은 일갈한다. 그 좋은 법, 선한 법이 결국 나를 죄에 묶인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통해 공평과 정의를 배운다.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상식과 양심이란 것이 있지만 인간은 교육, 일정한 규칙, 규율을 통해 공평과 정의를 학습하고 그 가치를 익혀간다. 법을 통해 결국 선하게 살고자 한다. 우리는 믿는다. 법은 그렇게 사는 우리들을 보호하고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특별히 유대인에겐 하나님이 직접 그러한 법을 주셨다. 바울 또한 유대인의 법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믿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더 열심히 법과 율법을 통해 공평과 정의로 살려고 해도 더욱 어려워지거나 힘들어질 뿐 나아지는 것이 없다. 

바울은 그 이유를 죄에서 찾는다. 법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하지 말라고 한 순간(예: “탐 내지 말아라”, 롬 7:7), 나는 탐하는 마음이 법을 어기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 순간 탐심이 내 안에서 생겨난다. 죄가 나에게 들어와 내 안에 끝없는 탐욕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법을 지키려고, 그래서 더욱 선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죄인이 되고 욕심 많은 인간이 된다. 미칠 노릇 아닌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세상은 악해진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악함으로 빠져든다. 

법: 폭력에 대한 권력의 독점 
왜 그 좋은 법은 나의 마음에 공의와 정의를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바울은 법과 정의의 고리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죄와 욕심을 더함으로 법과 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시작한다. 법은 정의를 위해 죄를 예방하지 않는다. 법은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죄를 만든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바울의 이러한 논의를 가장 날카롭게 근대의 언어로 바꾼 사람이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다. 근대 인문학 전체를 뒤흔든 짧은 글 <폭력의 비판에 관하여>라는 소논문에서, 벤야민은 비록 예수와 바울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글은 온통 바울의 통찰들로 가득 차 있다. 야콥 타우버스, 조르지오 아감벤, 그리고 다른 철학자들이 바울을 이해할 때 벤야민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 발터 벤야민.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벤야민에 따르면, 법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 법은 정의를 위해 폭력을 정당화한다. 일견 당연한 말이지만 이 당연한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때, 법은 폭력을 중심으로 인간 사회를 재편한다. 근대 이전엔 국가의 폭력을 비판하는 일이 가능했다. 폭군의 폭력, 제국의 폭력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폭력은 법의 뒤로 숨어 자신을 정당화해왔다. 법이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을 때, 법은 정의가 아닌 법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개인의 권리를 빼앗고 자신에게로 모든 권력을 집중시킨다. 곧 법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폭력을 활용한다. 정의를 위해 세운 선한 법이 죄와 욕심을 불러온 것이다. 

이렇게 벤야민은 바울의 법 이해를 더욱 명확히 보기 위해 폭력이란 개념을 경유한다. 폭력이란 렌즈로 법을 살펴보면 법의 두 얼굴이 보인다. 법은 정의와 공평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법은 정의와 공평을 위해 폭력이란 무기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무서운 재판관이자 경찰이다. 스스로 재판하고 스스로 처벌하는 전능한 존재인 셈이다. 폭력을 매개로 법을 보면, 법은 절대 자기 외에 다른 존재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 법은 노동자의 파업권을 인정할까? 법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법마저도 무너뜨리는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업권을 인정함으로써 폭력의 권한을 빼앗는다. 합법적으로 파업을 인정하는 대신 폭력을 박탈한다.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폭력을 소유한 존재가 법뿐이라면 언제나 권력은 폭력을 소유하기 위해 법을 자기 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유대의 율법을 예로 들어보자. 왜 율법이 중요한가? 원래 율법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준 명령과 금지의 형태를 가진 글이었다. 거기에 유대 민족은 해석을 붙여 더욱 확장시켰다. 그 율법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신의 분노와 심판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소위 ‘신화적 폭력’이다. 출애굽은 이집트에 살았던 노예의 탈출 사건일 뿐 아니라 새로운 법이 광야에 설립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히브리 민족에겐 구원이었지만 이집트에겐 피 흘리는 장자들의 죽음이었다. 이 거대한 폭력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법을 탄생시켰다. 그 안에서 의인과 죄인이 재편되고 깨끗함과 더러움의 의미가 새롭게 창조된다. 그러나 폭력은 거룩함이 회복된 다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법 안에 남아 끊임없는 폭력을 양산한다. 결국 율법이 정의를 불러오지 않을 때, 그 이면엔 폭력만이 넘실대는 폭풍의 바다가 도사리게 된다. 복음서의 예수가 비판한 것이 바로 이것이고 바울이 극복하려 한 것이 이것 아니었을까? 

바울은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려하는 순간 정의가 불가능해지는 현실을 고발한다. 그 목적은 선하지만 결국 정의를 이루지 못하는 율법 또는 법이 죄와 폭력이라고 지적한 바울. 과연 그의 말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율법이 틀렸다면 왜 바울은 구약성서를 버리지 않았을까? 율법, 또는 법 바깥에서 온 예수의 복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세상의 모든 죄를 해결한다는 예수의 계획은 어떤 것이었을까? 과연 율법만을 붙든 유대인들의 운명은 무엇일까?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로마서에 담겨 있다. 율법과 법체계 자체를 부정한 바울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다음 글에서 바울의 답을 살펴볼 것이다. 

 

 


한수현
감리교신학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Th.M.), 시카고 게렛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M.Div)한 뒤, 시카고신학교에서 바울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바울 서신, 복음서, 유대 묵시문학이며, 박사 논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죽은 자의 부활’과 세월호 참사를 연결 짓는 연구 작업의 결과물이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로 바울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와 사회를 바울 서신과 바울 신학에 비추어 살펴보는 여러 연구들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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