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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사랑을 품는다
[352호 부전자전 고전] 사도 요한의 문헌 읽기
[352호] 2020년 02월 19일 (수) 11:31:07 김기현 goscon@goscon.co.kr

 

1. 사랑은 진리로
묵자와 호빵맨을 연결한 글을 다시 읽으면서 많이 웃었다. 모두를 아우르는 사랑인 ‘겸애’(兼愛)의 사상가 묵자와, 자기 머리를 밥으로 내어주는 호빵맨을 연결하다니! 묵자의 사랑과 기독교의 아가페가 표층적으로 흡사해 보여도 심층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도 잘 짚어냈더구나. 겸애와 아가페의 다른 점을 놓치는 건 비교철학이나 종교다원주의의 대가들도 빠지기 쉬운 실수거든. 

그리고 사랑에 이어 진리를 토론하자는 너의 제안은 탁월했단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의 철학적 기반이 되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에서 사티아는 진리를, 그라하는 파악한다/붙잡는다는 뜻이야. 묵자가 끝없는 폭력과 살상으로 지옥문이 열린 세상에서 사랑에 기반한 평화의 세상을 꿈꾸었다면, 그 사랑은 간디에게서 보듯이 진리여야 해. 암, 진리 없는 사랑이라면 감상에 그치고 말거야. 
그래서였겠지, 네가 요한복음으로 진리를 풀어달라고 요청한 건. 그 어떤 신약성경보다도 ‘사랑’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는 경전이자 고전인 요한복음은 진리에 관한 책이기도 하지. 사랑에서 진리로 대화의 주제가 넘어가지만, 그 진리는 반드시 사랑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조금 이르긴 하지만, 다음 토론 주제를 ‘자유’로 하면 어떻겠니? 폭력적 세계 속에서 사랑에서 진리로 이어지는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자유로 나아가야지 싶어. 오늘 아빠가 다룰 요한복음에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진리라고 명토 박아 말하거든. 그러니까 진리는 자유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젖히고, 자유는 진리라는 실체/알맹이를 필요로 하지. 괜찮겠지?

2. 외면이었을까, 침묵이었을까
성경 전체를 ‘진리’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압도적인 본문이 요한복음이더구나. 사전과 저널을 검색했더니, ‘진리’의 명사형이 마태복음은 딱 한 번,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각각 3번 나오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무려 25번, 요한서신에는 20번이더구나. 진리의 형용사형은 마태, 마가, 누가가 모두 한 번씩인데 요한복음은 22번, 요한서신에는 7번 나와. ‘요한문헌’이라고 하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진리의 명사와 형용사는 통틀어 74번 나오는 거지.
 

   
▲ 1945년판 필사본 요한복음서 본문 일부. (이미지: CC-BY-4.0/Welcome Collection gallery)

그런데 그 복음서에 의문스러운 한 대목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어. 바로 그 유명한 빌라도의 질문 말이야. 그가 예수에게 물었어. 진리가 뭐냐고. 그가 왜 물었고, 어떤 답을 기대했는지도 궁금하지만, 세인들은 예수가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곤 하지. 어떤 이는 빌라도의 그 질문을 마치 예수가 외면했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글을 쓰기도 했지. 과연 그럴까? 그건 외면이었을까, 침묵이었을까?

아빠가 보기에 그건 당연히 ‘침묵’이야. 왜냐고? 우선, 질문자의 태도를 보면 빌라도는 답을 듣기 위해 물었던 것 같지 않아. 예수께서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쌩하고 나가버리거든. 키르케고르식으로 말하면, 이 진리를 알면 살고, 알지 못하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닌 허깨비처럼 살 것이기에 질문자는 답을 듣고자 하는 결연함을 가지게 되지. 그러니 빌라도는 그 질문을 절박하고도 절실하게 던진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식민지이자 약소국의 한 특이한 청년이 진리를 가르친다고 하고, 심지어 그 자신을 진리와 동일시하는 게 황당무계했겠지. 아마도 빌라도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네까짓 게 뭐라고 진리를 안다고 떠드는 거냐. 감히 네가 진리 그 자체라고? 진리가 뭔지 알기는 하고?” 

다음으로는 세계관적 차이가 현격했기 때문이야. 비트겐슈타인이 그랬지, 사자가 말을 하더라도 대화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서로 삶의 양식이 다르면 설사 외적으로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손 치더라도 의사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거든. 예수와 빌라도 모두 진리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히브리적 세계관에서의 역동적인 진리 개념과 로마적 세계관에서의 정태적 진리 이해는 동과 서처럼 서로 멀지. 

그러니 말해 무엇 하겠니. 딴 세상,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건데. 권력과 왕국에 관한 대화에서 조르지오 아감벤이 말한 대로,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거리감이 진리에 대한 논쟁에도 어김없이 나타났을 것이고. 그러니 아예 예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빌라도는 구태여 들을 마음이 없었던 거지. 

그밖에도 두 사람이 속한 삶의 자리의 차이도 있어.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탈상황적이고 탈맥락적인,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야. 그것은 항상 ‘장소’를 갖고 있어. 요한은 자주 진리를 ‘안에’라는 전치사와 결부시켜 말한단다. 대표적인 게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와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요일 3:19)라는 구절이야. 그러니까 ‘진리를 사는’ 자, 즉 ‘진리 안에 거하는’ 자가 진리 밖에서 건들거리고 거들먹거리며 진리가 대관절 뭐요 하고 시니컬하게 묻는 자에게 구태여 대답할 리 없지. 당최 알아먹지 못할 거거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않는 법이니까. 

이런 식으로 예수가 침묵한 이유를 갖다 대자면 끝도 없겠구나. 진리를 사는 자 vs. 진리를 묻는 자,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 vs. 진리로 죽일 수 있는 자, 온 존재를 걸고 온몸으로 살아내는 자 vs.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거나 듣더라도 그리 살 의지도 없는 자 사이의 대화가 어찌 이어질 수 있겠니. 그러니 예수께서 빌라도의 질문을 외면한 게 아니라, 빌라도가 예수를 외면한 것 아닐지. 

3. ‘무엇’인가, ‘누구’인가
여기서 아빠가 보태고 싶은 해석이 하나 있어. 그것은 빌라도의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모든 질문은 중요하고 용기가 필요하지만, 때로 잘못된 질문은 논점을 흐리거나 본질을 호도하거나 주제를 왜곡하기도 하지. 빌라도와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해. “누가 진리인가?”(Who is the truth?) ‘무엇이 진리인가’(What is the truth?)라고 물을 게 아니란 거지. 

희림아, 이렇듯 질문을 다르게 함으로써 진리를 진리로 깨닫자는 것은 진리와 그리스도가 하나이기 때문이야. 이 점에 대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기독교의 관점을 가장 탁월하게 주장했지 싶다. 그는 “그리스도와 진리가 일치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누군가 진리가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증명한다고 해도, 나는 그리스도 밖의 진리보다는 진리 없는 그리스도를 택하겠다”고 했어. 

언뜻 진리와 그리스도가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진리의 의미와, 왜 그가 ‘그리스도 밖의 진리보다 진리 없는 그리스도’를 택한다고 했는가를 따져봐야겠지. 위대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이 작가에게 진리란 유클리드적 진리, 곧 수학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야. 다시 말하면 내 영혼과 온 존재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그런 생명력이 충일한 진리가 아닌 게지. 

여기서 더 주목하려는 것은 왜 그리스도를 선택하느냐 하는 건데, 아빠가 생각하기에는 진리의 인격성 때문이라고 봐. 진리란 한 인격, 한 사람인 거야. 진리가 있고 사람이 없다면, 인격이 없다면, 그 진리는 사람을 죽이는 진리가 되고 말거야. 그러나 그리스도를 선택한다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믿는 신앙적 차원과 함께 무릇 진리란 사람을 위한 진리라는 거지. 사람이 진리를 위해 있지 않고 진리가 사람을 위해 있단다. 

이것은 지독한 그리스도 중심주의이지만, 역설적으로 도저한 인간 중심주의이기도 해. 그렇기에 너는 지난 편지에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 대화의 주제로 ‘진리’를 제안한 거겠지. 아빠 생각에는 그것이 어떠한 진리이든지 간에 사람을 사랑하는 진리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만이 진리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고, 그것은 곧 진리란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였으리라. 

4. 인격·얼굴이 없는 진리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가자꾸나. 앞에서 ‘진리의 장소’를 말한 바 있는데, 그 장소란 다름 아닌 예수 안에, 그분의 얼굴 속에 현존하고 현현하지. 예수에게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으니까.(1:14) 그러니 진리와 예수는 불가분이야. 만약 둘을 잘라내고 분리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건 애당초 진리가 아니야. 아니면 죽은 진리지. 예수와 동떨어진 진리는 집이 없는 진리요, 길을 잃은 진리야. 예수라는 한 존재, 한 인격, 한 타자의 얼굴 속에만 진리가 살아 있어.

인격이 없는 진리가 인격을 말살하고, 얼굴이 없는 진리가 얼굴 없는 약자를 간단히 소거하는 일이 생긴 것은 몇몇 철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근대적 현상만은 아니야. 근대 이전의 고대와 그 이전부터 늘상 있던 일이야. 얼굴을 지우고 균질화한 인간을 말한다면 그것은 필시 진리가 아닐 것이며, 그런데도 끝내 진리라고 우긴다면 그것은 인간을 죽이고 만다는 것을 성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 

진리와 인격을 단단히 붙들어 매는 유력한 구절을 하나 더 말해볼게.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선언(요 1:14)일 거야. 여기서 육신은 ‘사르크스’(sarx)인데, 인간의 신체에 대한 부정적 의미를 지니는 말이지. 살덩어리(flesh) 같은 단어 말이야. 요한은 어쩌면 의도적으로 저 단어를 골랐을 거야. 고상한 몸이나 신체가 아니고, 그보다는 조금 낮춘 의미인 육체도 아니고, 천박하고 천하기 이를 데 없는 ‘육욕’으로서의 살덩어리를 말하는 거니까. 하나님이 살덩어리가 되셨다니! 이로써 우리는, 진리는 몸으로 육화되어야 하고 삶으로 체화/구현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지.

5. 기적인가, 표적인가
희림아, 진리란 인격적이고 인간적임을 역설한 것이 대체 요한복음의 진리관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그것은 요한복음의 전반부와 직결되어 있어. 대개 연구자들은 요한복음 전반부를 ‘표적의 책’이라고 해. 후반부는 ‘영광의 책’이라고 하고. 공관복음서에서는 ‘기적’이라고 했는데, 왜 요한은 ‘표적’이라고 했을까? 초월적 하나님 나라가 자연 세계 한복판으로 치고 들어온다는 점에서 ‘기적’이면서, 이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표적’인 거야. 

그러니까 표적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야. 표적은 교통 표지판처럼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이지. 내비게이션처럼 길을 안내하는 기능을 가질 뿐 길을 걷게 하지는 못해. 그러나 표지판이나 내비게이션이 없다면, 제대로 길을 찾아가기 어렵겠지. 그렇듯이 표적 없이는 예수를 알 수도, 믿을 수도 없어. 그래서 요한은 이 표적을 기록한 이유를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20:31) 물론 표적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돼. 이정표나 표지판을 해독했다고, 최상의 내비게이션을 장착했다고 운전을 잘하는 것은 아니듯 말이야. 

요한이 표적을 선별한 기준은 생명과 자유라고 생각해. 7가지 표적 중 대표적으로 오병이어를 생각해보자. 기록된 분량이 독특한데, 사건 기술(6:1-15)은 전체 15절인데 의미에 대한 설명과 해석(6:16-71)은 무려 56절, 대략 4배 이상이야. 그러니까 5천 명을 먹인 사건 이상으로 의미가 중요해. 그것은 곧 예수가 육체의 일시적 생존을 위한 밥도 주시는 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생명 자체 곧 영혼을 영구적으로 살리는 생명의 밥이라는 거지. 표적은 그저 예수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기 위한 표지판이라는 얘기야.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에서는 ‘무엇’의 세계 너머, 혹은 그 너머에 있는 ‘누구’의 존재가 더 중요하단다. 도스토예프스키식으로 말하자면, 예수 없는 표적과 표적 없는 예수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요한은 표적의 한계 너머, 표적을 행한 예수에 집중하고 있으니 취사선택의 고민은 불필요하겠구나.

요한복음은 what의 영역에 속한 표적을 사실의 세계로 축소시키지 않고, who의 영역으로, 가치와 의미의 세계로 확장하고 있는 거야. 요한복음이 말하는 진리란 사람이 없는 차갑고 앙상한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사람 사는 따뜻하고 풍성한 생명의 세상인 게지. 진리란 앎이기도 하지만, 궁극에 있어서 삶이자 살림이어야 하거든. 하여, 요한복음에서 최고의 표적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 요한복음의 마지막 표적도 죽은 나사로가 되살아나는 사건이지. 

진리가 인격적이고 인간적일 때, 사람을 중심에 놓을 때, 그것이 비로소 진리인 거지. 아빠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따를 생각이야. 왜냐하면 예수에게만이 인간의 얼굴이 있는 진리가 있으니까. 예수 없는 진리는 곧 사람 없는 진리니까. 사람이 없으니 계산과 산수만 난무하고, 결국 사람을 숫자로 일괄 치환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거야. 이름 없이 그저 숫자로 기록되는 세계는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세계야. 기독교는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세상을 바라고 또 바라기 때문이지.

6. 팩트 vs. 내러티브
진리를 what보다는 who에 초점을 맞추는 기독교와 요한복음의 주장을 조금 더 밀고 나가 보자꾸나. 지금도 만연한 논쟁, 즉 진리를 사실(fact)로 환원하려는 끈질기고 완강한 입장을 요한일서의 “하나님은 사랑이다”(요일 4:8, 16)는 유명한 명제로 설명해볼게. ‘하나님=사랑’이라는 공식의 진리값은 뭘까? 그 근거는 무엇일까? 저 명제는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되는 걸까?

지난 세기 철학자들은 기독교의 진리 주장을 정당화하려면 그 진술의 진위 여부를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어. 20세기 초반은 논리실증주의, 2차 대전 이후로는 반증주의가 대세를 이루었지. 실증주의는 사실에 하나라도 부합하지 않는 주장은 과학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이고, 반증주의는 어느 한둘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런 반박의 여지와 가능성을 애초부터 품고 있는 것이 과학이라는 생각이야.

둘의 차이점이 보기에 따라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어. 둘의 일치점은 과학이 과학인 것은, 그리고 과학 아닌 것이 과학이 되려면, 외부의 사실과 일치하는가가 판정 기준이라는 거야. 그렇기에 실증주의자들의 검증 원리에 의하면 종교는 그야말로 난센스,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 거지. 반증주의를 따르면, 종교는 처음부터 실수나 오류, 반박의 틈이 절대 없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합리화한다는 점에서 맹목이고 미신일 뿐이라는 거고.

대표적인 경우가 앤소니 플루야.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오로지 진리란 사실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기독교 신앙을 하나하나 검토했는데, 그가 내린 결론은 무신론을 추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이었지. 그러다가 말년에 유신론자로 돌아선 것은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었어. 무신론자의 대부격인 그의 변신이 변심으로 받아들여진 거지. 유신론자들에게는 적대적이었던 철학자의 변신이 회심으로, 기독교 신앙의 승리로 받아들여졌고. 

무신론자 시절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말하면, 기독교는 어떤 반박 사례를 갖고 와도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거나 잘못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가 얘기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면 이래. 두 명의 탐험가가 밀림 한 가운데에서 정원이 잘 가꾸어진 집을 발견하지. 종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한 사람은 몇 가지 가설을 통해서 그 정원을 가꾼 정원지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해. 예컨대, 눈에 안 보이는 정원사, 전기가 흐르는 가시철조망과 맹견의 후각에도 포착되지 않는 정원사가 있다는 식으로 정원사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해. 그렇지만 어떤 것도 증명할 수는 없었어. 그런 정원사는 차라리 없다고 말하는 게 낫다는 거지. 그는 이런 말을 남겼지. “무슨 일이 일어나야 당신은 신의 사랑이나 존재가 반증되었다고 보겠는가?” 그러기에 플루는 무신론을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강력한 주장을 펼친 거야.

박사 과정 세미나에서 그의 글을 읽는데, 머리가 터질 것 같더라. 그의 논리적 엄밀성과 꼼꼼함을 반박하기가 어려웠지. 물론 신의 존재와 종교 체험이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물과 동일한 선상에 놓을 수 있느냐는 근본 문제를 따져봐야겠지. 그랬기에 비트겐슈타인은 명확하고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고 침묵을 지키라고 했던 거야. 

말할 수 없기에 엉터리가 아니라, 사실과의 일치 여부로 판정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것이기에 다른 방식으로 말하라는 것이지. 실제로 플루의 주장에 대한 반박은, 종교적 진리는 사실적 진리와 달라서 그런 방식으로 입증되거나 반박될 수 없다는 거였지. 

그런데 아빠는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진술은 참과 거짓을 입증할 기준을 그 언어의 외부, 곧 객관적 사실에 두느냐로 논박을 벌이는 것은 결국 ‘팩트 프레임’에 갇히는 것이라 생각해. 그 결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벌이는 꼴이 되고 말 테고. 검증주의자와 반증주의, 또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진리 주장을 하는 이들과 달리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좀 다른 방식으로 진리성을 말한다. 그건 바로 ‘이야기’(narrative)야. 

사랑의 사도가 말한 기독교 신앙의 저 고갱이는 가깝게는 요한일서라는 맥락 안에서, 멀게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맥락 안에서, 아주 멀게는 창세기로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맥락 안에 존재하고 자리하고 있어. 그렇다면, 저 진술이 진리인지 규명하는 기준은 맥락 안에 있는 거지. 

철학적으로 한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가리키는 단어 밖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사용되는 쓰임(usage)과 문맥(context)에 있지. 예수 그리스도가 찬양 받을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용되는 쓰임새에 따라 욕설이기도 하잖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말이 흠숭의 찬양이기도 하지만, 비아냥거림과 조롱으로도 사용되지. 

신학적으로 보자면, 저 고백의 진위는 외부의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는 이야기에 있단다.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했을 때, 저변에 흐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이야기 말이야.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이란 자기 자신을 몸소 희생해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는 자기 희생적 사랑임을 확신하게 되지. 그 이야기 없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명제는 성립이 쉽지 않을 뿐더러 언제나 논박되기 쉬운, 깨어지기 쉬운 허술한 주장일 수밖에 없지.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아.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고백은 예수의 십자가를 전제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살아내는 신자의 십자가로 표현되어야 해. 니그렌이 말했던 아가페가 나와 제자 공동체 안에서 실천되고 실현되는 바로 그것이 저 신앙 고백의 진위를 판별하는 가늠자인 거지. 그랬기에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진리(Truth)는 진실함(truthful) 또는 신실한 삶을 요구한다고 했던 거야. 따라서 기독교는, 진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말하고 살아내는 것이야. 

아빠에게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어. 하나는 진리는 사람(who)이기에 증인(witness)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진리는 인격적이기에 비강제적이고 비폭력적이라는 것. 진리가 다름 아닌 지상에서 짧고도 불꽃같은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면, 그분이 진리라면, 그를 따르는 제자 공동체와 제자들의 삶 이야기가 진리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인 게지. 여기서 증인이라 함은 가감하지 않고 본 대로 말하는 목격자일 뿐 저 스스로 강압적인 주장을 펼치지 않아. 그러기에 기독교의 진리 주장은 평화주의적일 수밖에. 이 둘은 다음에 다른 곳에서 말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넘어가기에는 아쉬워서 이렇게나마 던져놓고 넘어가려 해.

문득 너와 동생이 어렸을 적 겨울이 올 때마다 호떡을 구워주던 추억이 생각나는구나. 할 줄 아는 요리가 딱히 없는 아빠를, 호떡 장사하시는 분보다 더 잘 만든다고 추켜세워 줬잖니. 마침 방학이 되어 서은이도 내려왔으니, 아빠의 필살기를 선보일까 해. 우리 다 같이 추억의 호떡이나 묵자.  


 

 

김기현
로고스교회 담임목사이자 로고스서원 대표로, 코스타 강사, <매일성경> 집필자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기독교 세계관, 평화주의, 변증, 성경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 이선숙과 아들 희림, 딸 서은이 있다. 지은 책으로 《성경 독서법》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가룟 유다 딜레마》 《예배, 인생 최고의 가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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